068. 여, 영감님!?
왕국 비밀 회의실.
추기경과 국왕은 회의실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추기경,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런 자리를 요청한 겁니까?”
“성자님 때문입니다, 폐하.”
왕은 더 이야기해 보라는 듯 추기경을 바라봤다.
“성자님께서는 지식의 해방을 계속 추적하고 계십니다. 이번에 그 성과가 있으셨는데, 그 대상이 문제입니다.”
그 말에 왕의 표정이 진지하게 변했다.
“혹, 귀족이 얽혀 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것도 ‘후작급’ 귀족이 얽혀 있습니다.”
“흐음.”
왕은 나지막이 침음성을 흘렸다.
지식의 해방과 후작급 귀족이 연관되어 있다면, 이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확실한 겁니까?”
“성자님께서 행하신 일이니 전 확실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질적인 증거가 있냐 물으신다면 아직입니다.”
심증은 확실하나, 증거는 없다.
다른 이들이 이런 소리를 했다면,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겠지만.
‘교단이 움직일 정도의 확신이라면…….’
교단은 경솔하게 움직이지 않는다. 그들이 움직였다면 그만큼 확실한 이유가 있단 뜻이었다.
‘게다가, 추기경이 비밀 회의실에서 보자고 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왕은 우선 이야기를 들어 보기로 결정을 내렸다.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예. 폐하. 성자님과 영지를 마주하고 있는 ‘메사니 후작가’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메사니 후작가란 말에 왕의 눈이 반짝였다.
‘귀족파의 메사니 후작가라.’
대장장이 기술로 유명한 후작가는 귀족파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하며 남작부터 후작까지 올라온 입지적인 가문이었다.
‘국왕파 일원이었다면 문제가 됐겠지만, 귀족파의 일이라면…… 잘됐군.’
왕의 시선이 추기경에게 꽂혔다.
‘괜히 비밀 회의실을 요청한 게 아니었어.’
추기경은 왕국에 모든 곳을 다니며, 역병 치료에 힘썼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왕국의 세력 구도를 몰랐을 리 없었다.
“성자님께선 어딘가에서 끔찍한 비명이 들려서 조사를 시작…….”
추기경은 지하에 이종족을 가둬 몇 세대에 걸쳐 노예로 다룬 일을 설명했다.
“허어. 도시 규모의 노예 시설이라….”
국왕은 그제야 모든 게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대장장이 기술로 유명한 게 아니었다. 그저 드워프 노예를 부렸을 뿐이다.
문제는 가장 기본적인 의문이 떠오른다는 점이었다.
“그런 시설이 용케도 유지가 됐군요.”
“예. 그게 정말 신기한 점입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그 누구도 모르게 운용했다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습니다.”
“…….”
“그렇기에 저희는 다른 외부 세력이 얽혀 있다고 추론했습니다.”
추기경의 말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게다가, 불법 실험까지 확인이 됐습니다. 너무 위험하기에 공개조차 불가능한 정보지만, 저희가 확인했습니다.”
“……교단에서 정보를 폐기할 정도의 실험이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사실 이 정보를 공개했다면 증거로 사용할 수 있었겠지만, 말씀드렸듯 이건 공개가 불가능한 정보였습니다.”
영감님은 리치를 말한 것이었지만, 국왕의 머릿속에선 전혀 다른 게 떠올랐다.
‘이종족을 이용해 괴물을 만든 것인가? 교단 쪽에서 폐기할 정도라면…….’
자세한 정보를 말해 주지 않았기에, 오히려 더욱 심각한 상황을 떠올렸다.
왕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추기경 그대는 도움이 필요해 내게 찾아왔을 터, 어떤 도움을 원하는 겁니까?”
“후작가의 일을 처리할 때, 귀족들의 반발을 잠재워 주셨으면 합니다.”
“그건 어렵지 않습니다.”
이건 국왕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귀족파의 자금원을 끊어 낼 수 있는 절호의 찬스.
왕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갔다.
“게다가 엄밀히 따지면 그들은 왕국에 신고가 안 된 노예들입니다. 이런 경우엔 배상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배상 말씀이십니까?”
“끔찍한 실험까지 이뤄졌다면, 이 정도 배상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진 세인트가 그들을 구했으니. 이제 그들은 왕국민이나 다름없습니다.”
왕은 그들을 달래기 위해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게 아니었다.
귀족파의 자금원을 아예 깨부술 생각으로 배상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폐하. 괜찮습니다.”
한데, 추기경은 왕의 말을 거부했다.
“저번에 말씀드렸듯이 성자께서는 욕심이 없으십니다. 골드 같은 것에 마음이 움직일 분이 아니십니다.”
왕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오랜 시간 동안 정상 임금으로 환산하면 정말이지 "억!" 소리 나는 금액이 나올 터, 그 골드를 단칼에 거절한 것이다.
“물론, 배상금을 받아서 국왕 폐하께서 어떻게 사용하시는지 저희는 개입하지 않겠습니다.”
이건 거래였다.
“대신 저희에게 다른 걸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국왕은 말해 보라는 듯 추기경을 바라봤다.
“성자님의 영지에 있는 이종족들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법을 제정해주셨으면 합니다.”
“법이라…….”
막대한 배상금을 대가로 법을 만들어 달라고 한 것이다.
‘이종족의 해방을 원한 것도 아니다.’
추기경은 납득할 수 있는 조건을 달았다. ‘진 세인트의 영지’에서만 힘을 발휘하는 법이란 조건을.
‘어차피 후작가는 배상금을 낼 수 없다. 영지를 국가에 반납할 수밖에 없을 터.’
귀족파가 있는 지역에 직할령이 생기니, 국왕파는 귀족파를 견제할 거점이 생기게 된다.
‘과연 추기경이군.’
추기경은 그저 막무가내로 부탁하지 않았다. 왕국의 상황을 꿰뚫어 보고 이런 제안을 한 것이다.
‘성자가 동의했으니 내게 이런 제안을 했겠지.’
성자가 욕심이 없다는 건 확실한 거 같았다.
물론 이건 오해였다.
추기경과 진은 이런 이야기까지 나누지 않았다. 그저 추기경이 알아서 움직였을 뿐이다.
애초에 진에게 물었다면, 저 배상금을 거부할 리 없었다. 너무 유능한 추기경이 진을 생각해서 알아서 움직였을 뿐.
“진 세인트의 영지를 ‘이종족 특별 영지’로 만들겠습니다. 이 영지에 사는 이종족은 왕국민과 같은 권리를 갖게 될 겁니다.”
“감사합니다. 폐하.”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배상금도 받지 않는데, 이걸로 부족할 겁니다. 3년간 세인트 영지의 세금을 면제해 주겠습니다. 세금 걱정 없이 영지에 잘 정착해 살았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폐하. 이건 사양치 않겠습니다.”
그렇게 추기경과 왕의 은밀한 거래가 비밀 회의실에서 이뤄졌다.
* * *
“후작을 잡았습니다.”
“…….”
리치의 보고에도 진은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과연 후작가라고 할 만했습니다. 흡혈귀들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실패했을 겁니다.”
“…….”
“게다가, 왕국에서 개입하지 않기로 결정까지 내려서 이제부터 본격적인…….”
리치가 계속 말을 이어 가려고 할 때, 진이 끼어들었다.
지금 후작을 잡은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너, 그거 뭐야?”
진은 리치의 머리 쪽을 가리켰다. 그곳엔 상상도 못한 것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 후작도 나름의 대비를 해 놨었습니다. 저를 죽이고자 준비했던 것이었는데, 저한텐 소용없었습니다.”
“뭘 준비했길래 그런 게 생겨!?”
진의 물음에도 리치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하급 성물을 이용해 저를 공격했습니다. 그 막대한 신성력은 정말이지 놀라웠습니다.”
“그래서 그게 생겼다는 거야?”
“아마도 그런 게 아닐까 추측됩니다.”
진의 시선은 리치의 머리 쪽에 꽂혀 있었다. 그곳엔 리치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게 떠올라 있었다.
“그거 후광이잖아!”
성서에 간혹 기록된 후광.
그 후광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괴물의 머리에 떠 있었다.
“예. 후광입니다.”
와. 리치가 감정이 없다는 걸 이제야 실감할 수 있었다.
이걸 안 놀란다고?
“리치한테 후광이라니.”
진이 나지막이 중얼거리자, 미모 후작이 천연덕스럽게 끼어들었다.
<우리 그이는 원래 얼굴에서 빛이 났어요. 그게 드러났을 뿐이에요.>
“아 쫌!”
후광에 여자친구까지!?
아주 다 가졌네. 다 가졌어!
‘로메른!’
[어. 확인하고 있어. 잠깐만 기다려봐.]
로메른은 이미 밖으로 나와서, 리치의 머리 뒤에 있는 후광을 확인하는 중이었다.
잠시 후 로메른이 입을 열었다.
[이거 진짜 후광 아니야.]
‘그럼?’
[이 녀석은 흑마력과 빛의 힘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데, 성물 때문에 다량의 신성력이 몸 안으로 들어오니까. 이런 걸 만든 거 같은데? 이거 라이프 베슬이랑 비슷하네.]
‘라이프 베슬이랑?’
[아. 생명이란 뜻이 아니야. 만들어지는 과정이 비슷하단 뜻이야. 아무튼 진짜 후광은 아니야. 그러니까 일종의 예비 신성력 같은 거야.]
‘구조가 복잡해?’
[아니. 그리 복잡하진 않은데?]
진 고개를 끄덕이며 리치에게 사실을 말해 주었다.
“……그렇게 된 거야. 진짜 후광은 아닌 거지. 이해했어?”
“예. 정확히 이해했습니다.”
그때 로메른이 끼어들었다.
[이거 이렇게 다닐 수 없으니까. 이렇게 해 보라고 해.]
로메른의 말을 리치에게 전달했다. 그러자, 리치 뒤에 있던 후광이 점점 투명해지더니 이내 보이지 않았다.
“그거 웬만하면 쓰지 마. 그거 나중에 써먹을 수 있을 거 같으니까. 그게 네 생명줄이 되어 줄 거야.”
후광을 두른 리치.
인간들에게 오해를 받을 때, 이건 녀석의 생명줄이 되어 줄 것이다. 리치는 진의 말을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후작은 끝났다 이거지?”
“예. 흡혈귀들이 조사 중입니다. 제가 저주까지 사용해서 벌써 꽤 많은 정보가 쌓였습니다.”
“그래? 쓸 만한 정보는 있어? 지식의 해방과 실질적으로 엮였다는 정보가 필요한데.”
“일정 금액을 계속 보냈던 기록이 있긴 합니다. 한데, 흡혈귀들 말로는 중간에 흔적이 사라져서 추적이 쉽지 않다고 합니다.”
확증은 그리 쉽게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알겠어. 잘 부탁할게.”
“예.”
<다음에 봐요. 진 님!>
그렇게 리치와 미모 후작이 사라지고, 진은 곧장 로메른을 불렀다.
“아까 봤던 후광, 그리 어렵진 않다고 했지?”
[어. 그리 어렵진 않은……. 너 설마!?]
“명색이 성자인데, 후광 하나쯤은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만들 수 있지?”
[오오. 나쁘지 않아. 게다가 우리 쪽엔 진짜 후광을 썼던 사람도 있거든. 야, 루나. 너 진짜 후광 사용했었지?]
[예. 몇 번 사용하긴 했었습니다.]
[최대한 진짜 같이 만들어 볼 생각인데 어때?]
[인공 후광이라니. 재밌겠네요.]
여기에 진짜 후광을 사용했던 루나까지 추가됐다.
“자. 다들 만들어 보자고.”
그때 검성이 끼어들었다.
[흠! 로메른과 루나가 후광을 만들어 주는데, 그대는 일을 하지 않는 겐가?]
“뭐?”
[아니. 그대들의 계약대로라면 이쪽이 뭔가를 해 주면 그대도 일을 해주는 게 아니었나 해서 물은 걸세.]
그 말에 진은 피식 웃었다.
“그 말은 검 씨도 이제부터는 우리 규칙을 따른다는 거지?”
[흠흠.]
그는 헛기침하더니.
[여태 땅 많이 팠는데, 이것도 부탁에 적용이 되는지 궁금하긴 하군.]
그 말에 진은 웃음을 터트렸다.
“특별히 인정해 줄게. 솔직히 모두를 위한 일이니 이건 빼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데, 검성이 이렇게 협력적으로 나오니까 거절하지 않을게. 필요한 일 있으면 말해.”
진이 자비로워서 이런 결정을 내린 건 아니었다.
꼰대 검성이 먼저 고개를 숙이고 손을 내밀었으니, 그 손을 잡아 줬을 뿐이다.
[흠흠. 알겠네.]
검성의 대답에 로메른과 루나마저 웃음을 터트렸다. 겉돌고 있던 검성이 정식으로 합류했다.
* * *
며칠 뒤.
진의 영지 서쪽에 있는 백작의 영지에 진이 방문했다. 진은 영지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교구를 찾아갔다.
“예비 성자님을 뵙습니다!”
교구장이 버선발로 뛰어나와 진을 맞이했다.
“세이라 수녀를 찾아왔습니다.”
진의 말에 교구장은 깜짝 놀랐다. 세이라 수녀는 성자가 찾을 만한 고위급 사제가 아니었다.
“세이라를 알고 계셨습니까?”
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만나 본 적 없습니다. 그 이름마저 오늘 처음 들어봤습니다.”
“예?”
그때 진의 머리 위로 무언가 나타났다.
진의 머리를 감싼 빛 ‘후광’.
신성함이 뿜어지고, 경외감마저 드는 신비로운 빛.
그 모습에 사제들은 하나둘 무릎을 꿇었다.
“신께서 저를 인도하셨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당장 세이라 수녀를 불러오세요! 신의 부름이다!”
교구장이 세이라 수녀를 불렀다.
[우와. 효과 확실하네.]
[솔직히 제가 사용했던 진짜 후광보다 이게 더 신성해 보인다니까요.]
루나와 로메른이 조용히 수군거렸다.
그렇게 루나와 로메른의 수다를 듣는 사이, 저 멀리서 수녀 하나가 사제에게 이끌려 달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