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작가의 정령 천재-67화 (67/210)

067. 일거양득

“따뜻하고 포근합니다.”

리치가 신성력을 뿜어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건 말 이 안 되는 일이었다.

“따뜻하다고?”

진이 떨떠름하게 되묻자.

“예. 마치 사랑 같습니다.”

리치는 이런 개소리로 화답했다.

라이프 베슬이 깨지지 않는 한 죽지 않는 괴물, ‘리치’.

그 리치를 잡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신성력이다. 이 상성이 존재하니까 그나마 처리가 가능한 괴물이었는데.

그 ‘상성’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절 생각하는 마음이 그 신성력밖에 안 된다고요?>

“그런 뜻이 아니다. 내 사랑은 신성력이란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든단 뜻이다.”

<어머나. 그런 뜻이었어요?>

미모 후작이 리치를 덥석 끌어안았다. 작은 크기의 드워프 리치는 그녀의 품 안에 쏙 들어갔다.

‘아 커플들 다 죽었으면.’

진은 저 눈꼴 시린 광경을 애써 무시하며 로메른에게 말을 걸었다.

‘로메른. 어때?’

[내 인생 최고의 역작이야! 리치가 신성력을 사용한다니?! 이건 악령이 성령이 된 것과는 급이 전혀 다르다니까! 그러니까 이건…….]

로메른이 잔뜩 흥분한 채 설명을 이어 가려고 할 때 진이 그 말을 끊었다.

‘그러니까 대단한 일이란 거지?’

진은 원리가 궁금한 게 아니었다.

[아. 이건 그렇게 간단히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라니까. 정말 엄청난 일이야! 이건 혁신이라고!]

[이건 정말 놀라운 일이에요. 리치가 신성의 영역에 들어오다니…….]

로메른에 이어 루나까지 이런 말을 했다.

진이 아무리 흑마법을 모른다고 해도 리치가 신성력을 사용하는 게 얼마나 대단한지 잘 알고 있었다.

흑마법은 물론이고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고, 신성력이란 ‘상성’을 극복한 리치.

그야말로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좋아. 대단한 건 알겠는데, 그래서 우리가 얻은 건? 없으면 남 좋은 일만 해 준 거 알지?’

그런 대단한 것보다 우리가 무얼 얻었느냐. 그게 제일 중요했다.

[와. 칼 같네! 칼 같아. 넌 진짜 어딜 가도 굶어 죽을 일은 없을 거야. 저 리치를 보고도 뭘 얻었는지 생각한다고?]

로메른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했지만.

[아주 믿음직스러워. 내가 정령사 하나는 기똥차게 골랐다니까. 그렇지. 남 좋은 일만 해 줄 순 없지.]

만족스럽다는 듯 입을 열었다.

로메른의 반응을 보니, 얻은 게 있는 모양이었다.

‘뭐야?’

[일단 이거부터 받아.]

로메른은 진에게 구슬 하나를 건넸다.

‘오.’

구슬은 굉장히 신기했다.

새하얀빛의 힘과 칠흑같이 어두운 어둠의 힘이 반반씩 나뉘어 담겨 있었다.

‘라이프 베슬이야?’

[어. 리치가 변화하는 동안 베슬이랑 마도서를 분리했어. 원래라면 한참 걸릴 일이었는데, 리치 덕분에 한 방에 끝났어.]

‘마도서는?’

여러 악마의 권능이 담긴 마도서. 이걸 이용해 ‘성서’를 만들 계획이었다.

[계획대로 성서로 변환이 됐어. 부족한 점이 있긴 한데, 이건 교단의 도움을 받으면 충분해.]

‘오. 마도서까지 같이 작업한 거야?’

[솔직히 말하면 반쯤은 우연이야. 그래서 불완전하게 변환이 된 거고.]

그거야 아까 말했든 교단에서 마무리 작업하면 될 일이었다.

진은 리치의 라이프 베슬을 내밀었다.

“받아.”

진이 말하기도 전에, 리치의 시선은 구슬에 꽂혀 있었다. 이게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당연하지. 리치의 생명이나 마찬가지인데 모르는 게 이상한 일이야.]

로메른의 말대로였다.

“분리에 성공하신 겁니까?!”

리치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어. 약속한 대로 마도서에서 라이프 베슬을 분리했어. 대신 마도서는 내가 가져갈 거야.”

“감사합니다.”

리치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가져가.”

다시 한번 말하니, 리치가 아닌 미모 후작이 움직였다.

<이건 제가 보관할게요.>

“당연한 일. 말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너무 만지진 말아라.”

<왜요? 불안해요?>

“가슴이 떨려 배슬이 깨질지도 모른다.”

<어머나. 품속에 넣어 놓고 보관하려고 했는데…….>

“천국이군.”

아. 진짜 커플 죽어!

진은 점점 찌푸려지는 표정을 억지로 풀었다.

“자. 사랑은 따로 나누시고, 일단 대화에 집중해.”

<실례했어요. 너무 뜨거워서요.>

아주 3년만 지나고 보자.

웬수가 되어 있을 테니까!

“그래서 앞으론 어떻게 할 거야?”

진의 물음에 리치가 대답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반응 보아하니…….”

리치가 진에게 쉽사리 말하지 못할 만한 일은 하나뿐이었다.

“복수할 생각이지?”

“그렇습니다. 성자님께 구원을 받고 이런 결정을 내려 죄송합니다. 전 말리셔도 복수를…….”

말리긴 누가 말려?

진은 오해가 더 깊어지기 전에 그의 말을 잘랐다.

“복수해.”

“예?”

“복수해도 된다고.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야. 잘못했으면 그 대가를 치러야지. 만약 용서한다고 해도 그건 피해를 본 이들이 하는 거야. 내가 끼어드는 건 웃긴 일이지.”

진의 말에 미모 후작이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이번 대 성자님은 특이하다니까요. 복수해도 된다고 하실 줄이야.>

리치의 반응도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정말 말리지 않으십니까?”

“어. 안 말려. 오히려 도와줄 생각인데?”

“절 도와주신단 말씀이십니까? 제가 리치인데 상관없으십니까?”

원래라면 대놓고 도와주지 못했겠지만,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

“신성력을 뿜는 리치인데?”

“…….”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진을 빤히 바라보더니 곧이어 입을 열었다.

“설마 여기까지 내다보시고 저를 도와주신 겁니까?”

전혀 아니었다.

애초에 리치가 신성력을 쓸 줄 진이 어떻게 알았을까.

한데, 상황이 묘하게 돌아갔다.

<그럴 거예요. 이 성자님은 무서운 분이니까요. 어쩌면 우리가 사랑에 빠진 것도 이 성자님의 큰 그림이었을 수도 있어요.>

어. 음.

제가요?

진은 당황했지만, 이젠 이런 상황이 익숙했다. 진의 표정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저 담담한 표정 보이죠? 하여간 신기한 분이라니까요. 일반적인 성자와는 거리가 먼 분이에요. 웃기게도 그러니 더 성자 같은 분이시죠.>

“그렇군.”

둘은 북 치고 장구 치고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저런 결론이 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게 좋은 거였다.

“아무튼 도와주면 내 도움 받아 볼래?”

“저를 도와주시는 게 성자님께 의미가 있습니까?”

리치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왔다.

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우리가 같은 적을 상대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

“같은 적 말입니까?”

“어. 마도서가 그 지하에 들어왔는데, 후작이 몰랐을까?”

“그건…….”

“후작만 적일까? 진짜 이 일을 사주한 진짜 적은 따로 있지 않을까?”

리치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지만, 진의 말이 허무맹랑한 게 아님은 그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또 도움을 받아도 되겠습니까?”

당연히 된다.

오히려 받아 줬으면 좋겠다.

‘귀찮은 걸 짬 때려야 하니까.’

게다가 그를 도와 후작만 치우고 나면, 지식의 해방을 찌를 숨겨진 비수가 되어 줄 것이다.

“나 성자잖아. 남 돕는 거 좋아해.”

다른 자가 저런 말을 했으면 개소리나 다름없었는데, 성자가 하면 그 의미가 달라진다.

“부탁드립니다.”

물론, 그를 도와주는 데 필요한 게 있었다.

“너 거짓말 할 수 있지?”

“예?”

아니. 필요해서.

* * *

며칠 뒤.

진의 영지로 한 노인이 방문했다.

‘허어. 아무것도 없는 숲을 영지로 받으셨을 터인데…….’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연신 감탄을 터트렸다.

‘이런 거대한 성벽이라니…….’

곳곳에는 아직도 성벽을 쌓고 있었지만, 입구를 비롯해 중요한 부분은 이미 완성된 상태였다.

숲에 덩그러니 집이 하나 있을 줄 알았는데, 이건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게다가 이들은 대체…….’

이곳은 인간들의 도시가 아니었다. 드워프들과 노움이 가득한 도시. 이런 도시가 있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허허. 어째서 이 땅을 원하셨나 했더니. 이런 큰 뜻이 있었구나.’

대륙에서 가장 고통받는 이들은 바로 ‘이종족’들이었다.

‘성자님은 가장 고통받는 이들을 구하고 계시는구나.’

성자님께선 인간을 넘어 이종족까지 구하고 계셨다.

그 증거가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웃으며 일하는 드워프와 노움들을 보고 있으면, 자신 또한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게다가 놀라운 건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저들은!?’

세상에서 가장 폐쇄적인 이들.

인간과는 절대 함께 살아갈 수 없는 엘프들이 도시 곳곳을 누비고 있었다.

‘신이시여. 성자님을 보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자신이 세상을 돌아다니며 역병과 싸우듯, 성자님께선 고통받는 이들을 구원하고 계신 게 확실했다.

그렇게 도시 안쪽으로 들어가서, 그는 다시 한번 놀랐다.

‘성자님께선 모두의 사랑을 받고 계시는구나.’

진이 머무는 저택은 정말이지 너무나 아름다웠다.

드워프들이 얼마나 신경을 써서 이 저택을 만들었는지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벽에 새겨진 조각 하나하나에 정성이 담겨 있다. 이건 억지로 시킨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드워프들에게 존경을 받아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과연 성자님이시다.’

그는 연신 감탄을 터트리며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성자님! 이 노구가 부르심을 받고 왔습니다!”

“오셨습니까? 추기경님.”

진이 추기경을 맞이했다.

“잘 오셨습니다. 다만, 도시가 아직 공사 중이라 조금 번잡스러우셨을 겁니다.”

“아닙니다. 모두가 희망에 차 있었고, 성자님을 존경하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즐겁게 구경했습니다.”

“좋게 봐주셨다니 다행입니다.”

진의 말에 영감님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제 도움이 필요하시다고 하셔서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르실 겁니다.”

“바쁜데 모신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허허. 아닙니다. 성자님을 돕는 일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다른 일이 아니라 이건 추기경님의 도움이 꼭 필요합니다.”

진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어떤 도움이 필요하신 겁니까?”

“라그나, 나오세요.”

진의 말에 허공에서 흑마력이 뿜어지더니, 그곳에서 리치가 걸어 나왔다.

“리치?!”

영감님은 당황한 표정으로 진을 바라봤다.

“그리 놀라실 필요 없습니다. 이 리치를 만난 건 신의 뜻이었습니다.”

진의 말에 영감님의 언제 당황했냐는 듯 순식간에 표정이 진지하게 변했다.

“어떤 뜻이셨습니까?”

“라그나. 그 힘을 보여 주세요.”

진의 말에 라그나의 손에 빛의 힘이 어리기 시작했다.

리치가 신성한 힘을 사용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

영감님은 당황하지 않았다.

“성자께서 행하는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나니…….”

그렇게 말하며 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노구가 무엇을 도우면 되겠습니까. 성자시여.”

영감님은 그 무엇도 묻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물을 뿐이었다.

“라그나가 교단의 인정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있겠습니까…… 가 아닙니다. 성자님.”

“예?”

“그저 하라고 말씀하시면 됩니다. 그를 어떻게 쓰실지 알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 이렇게 든든할 수가.

영감님은 빛이야!

“지식의 해방을 찌를 비수로 사용할 생각입니다.”

“그럼, 비공식적인 인정이 더 괜찮을 거 같은데 어떠십니까?”

비공식적인 인정?

그게 뭔가 했는데.

[예비 성자와 비슷한 거예요. 교단 내부에서만 인정하는 거죠.]

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합니다.”

“더 부탁하실 건 없으십니까?”

하나가 더 있었다.

진은 책 하나를 꺼냈다.

“라그나를 만나며, 제가 얻은 물건입니다.”

“허어. 홀로 성서를 만드신 겁니까?”

영감님은 감탄한 표정으로 마도서를 바라봤다.

“제가 만든 게 아닙니다. 그저 라그나를 돕다 보니 우연히 얻게 된 물건입니다.”

“……신께서 인도하신 거군요.”

“교단에서 성서를 제작하는 특수한 방법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마무리 작업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성자님의 성서를 저희가 제작할 수 있다니. 영광입니다.”

영감님은 조심스럽게 그 책을 받았다.

“이렇게 두 가지 일만 부탁드리겠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최대한 빠르게 처리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성자님께서 절 찾아주시니 정말 기쁩니다. 이 노구가 아직 살아 있음을 느낍니다.”

그 이후로도 한참을 대화한 뒤, 밤이 되고 나서야 영감님은 돌아갔다.

밤이 되자 또 다른 손님이 방문했다.

“오랜만이군.”

밤의 귀족 흡혈귀.

그들이 진의 저택에 방문했다.

“두 번째 사냥감이 정해졌습니다.”

진의 말에 흡혈귀의 눈이 빛났다.

“누구지?”

“제 영지와 마주하고 있는 후작가입니다.”

“후작가의 누구를 사냥하면 되지?”

“우선은 후작. 그자부터 시작하시면 됩니다. 후작을 잡으면, 누가 더 연관되어 있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그 확인 작업은 진이 아니라 흡혈귀들이 해 줄 것이다.

“……후작?”

생각보다 너무 큰 사냥감에 그는 조금 놀란 것 같았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사냥감이 큰 만큼 이쪽도 지원군을 준비했습니다.”

“지원군?”

“라그나.”

허공에 흑마력이 퍼지고, 그곳에서 라그나가 걸어 나왔다. 그는 한번 해 봤다고, 곧장 움직였다.

“무슨!?”

리치의 왼손과 오른손에는 신성력과 흑마력이 피어올랐다.

“제가 말한 지원군입니다.”

흡혈귀는 여전히 혼란한 얼굴로 리치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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