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5. 진정한 사랑
<네가 준 사념으로 발휘할 수 있는 권능은 이 정도란다.>
미모 후작의 손길이 리치에게 어린다. 그와 동시에 리치의 태도 또한 변했다.
무기질하고 차가운 리치가 감정 가득하고 따듯하게 변한다.
<그 눈빛. 마음에 드는구나.>
리치의 눈빛을 보며 미모 후작이 생글거렸다.
“그대도 언제나처럼 아름답다.”
리치의 느끼한 멘트에 악마는 웃음을 터트렸다.
<리치에게 이런 칭찬을 듣다니. 정말 재미나는구나.>
“그대가 웃으니 나도 좋다.”
<말도 참 이쁘게 하는구나.>
악마가 배시시 웃는다. 그 미소가 참으로 수줍어 보였다.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최근 들어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
<무엇이지?>
“이곳에 태양이 없는 게 아쉽다.”
<호오. 감정이 좀 살아났다고 이젠 태양이 그리워 진 게냐?>
그녀의 표정에 옅은 질투가 느껴졌다. 그런 질투가 오히려 그녀를 더 싱그럽게 만들었다.
“그대를 태양 아래에서 보고 싶다. 그대는 환한 빛 아래에서도 아름답겠지.”
<……흥. 말주변이 제법 좋구나.>
악마는 애써 괜찮은 척했지만, 그 볼이 붉어져 있었다.
원래라면 그녀는 이런 칭찬에 반응하지 않아야 한다. 그녀의 권능이 바로 ‘매혹’이다. 그녀는 이보다 더한 칭찬도 숱하게 들어 봤다.
한데,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사랑을 속삭이는 자가 ‘리치’이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호기심이었다.
‘리치는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의 해답이 궁금해 시작한 일이었다. 한데, 시간이 지날수록 재미난 사실을 알게 됐다.
‘리치의 감정은 오롯이 나만을 향한다.’
원래 감정이 없던 ‘리치’이기에 벌어진 일이다. 그의 감정은 오직 자신에게만 향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이들과는 다르다.’
인간, 엘프, 드워프, 노움 등 수많은 종족을 만나 봤다. 그중엔 고결한 이들도 있었고, 욕망에 솔직한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같았어.’
그들은 자신을 소유하고 싶어 사랑을 속삭였지만, 그 외에 다른 욕망이 뒤섞여 있었다.
‘사랑’이란 순수한 감정이 아닌, ‘지배’와 ‘독점욕’ 같은 다른 감정이 꼭 끼어 있었다.
그녀는 악마다.
매혹이란 힘으로 원하는 사랑을 받을 수 있지만, 그들이 전해 주는 사랑은 그녀가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사랑을 원했지만, 자신은 그걸 갖지 못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자는 달라.’
리치는 달랐다.
그에겐 다른 감정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권능으로 만들어진 사랑만을 담고 있었다.
덕분에, 어처구니없게도 리치의 사랑은 그 어떤 사랑보다 순수했다.
‘내가 바라던 것.’
평생을 손에 넣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눈앞에 있었다.
게다가 가장 좋은 점은 따로 있었다.
“끝났군.”
사랑을 속삭이던 리치가 권능이 끝나면, 원래대로 돌아갔다.
따듯하고 애정이 어린 눈에서 시리도록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볼 때면.
<조금 전까지 사랑을 속삭이고 그런 눈으로 날 바라보는 게냐?>
“사념이 부족하다.”
그녀는 그게 썩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사랑과 무관심에서 오는 그 차이가 묘하게도 그녀를 설레게 했다.
‘어쩌면 내가 바라던 이상형이…….’
이 리치일지도 몰랐다.
그녀는 힐끔힐끔 리치를 훔쳐 봤다. 그 눈빛엔 애정이 어려 있는 것만 같았다.
* * *
미모 후작의 생각이 요동치는 만큼, 리치 또한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사랑을 속삭이고, 그녀에게 빠질 때마다 리치의 가슴속엔 불길이 일어났다.
사랑이라는 감정의 불길이.
그 불길은 그가 여태까지 잊고 있던 많은 것들을 떠올리게 해 주었다.
‘아들아. 여기서 절대 나오면 안 된다!’
아버지의 당부를 어기고 지하에서 나와 인간들에게 붙잡혔던 일.
‘울지마! 우리는 다 살 수 있어!’
울보인 그를 달래 주던 친우들.
‘여기가 이제부터 너희들의 집이다. 일해라. 일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처음 지하에 도착했을 때의 일.
‘인간이 우리를 노예로 부린다고 정말 노예가 될 순 없어. 우린 이곳에 규칙과 법칙을 만드는 거야.’
지하에 규칙을 만들던 일.
‘또 굶어 죽었어. 대체 인간들은 우리에게 왜 이러는 거야!?’
‘아니. 우리가 생각을 잘못한 거야. 우린 노예야. 밥이 필요하면 우리의 가치를 입증해야 해.’
‘유능한 노예가 되자는 소리야?’
‘적어도 굶어 죽는 이들을 없게 만들잔 소리야. 그러니까 더 좋은 물건을 만들어야 해.’
붙잡혀 온 이들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일.
‘……봐봐 도시가 이렇게나 커졌어! 성공이야! 올해는 굶어 죽은 이들도 없었다고!’
처음으로 성공을 경험했던 일.
‘우리가 너무 유능해진 걸까? 도무지 도망칠 길이 안 보여. 인간은 절대로 우릴 놔줄 생각이 없는 거야.’
‘우린 평생을 여기서 살아갈 거야.’
‘우리까진 괜찮아. 하지만, 앞으로 태어날 이들은? 그들마저 영원히 이곳에서 갇혀 살아야 한다고?’
‘방법을 찾아야 해.’
안정과 함께 벽을 마주했던 일.
‘없어. 우리가 도망칠 길은 전혀 없다고!’
‘진정해! 포기 하지 마! 우린 예전처럼 극복해 낼 수 있을 거야!’
‘포기하고 안주하는 이들이 생기기 시작했어. 어떻게! 어떻게! 이곳에서 안주할 생각을 하는 거지!?’
좌절과 절망이 가득했던 일.
‘이거 받아. 마도서란 물건을 제작할 수 있는 책과 리치가 되는 법이 담겨 있는 책이야.’
‘너밖에 없어. 우리 중에 오직 너만 할 수 있는 일이야.’
절망 끝에 희망을 발견했던 일.
그 모든 기억을 떠올리고 나서야, 그는 그가 원하던 ‘기억’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인간들에게 복수해 줘. 우리를 이용해 세력을 불리고, 호의호식하는 인간에게 철퇴를 내려 줘!’
‘절대로 용서하지 마. 후손들은 몰랐다는 개소리를 절대 들어 주지 마. 우리가 겪었던 모든 고통을 받아야 돼.’
복수.
인간을 향한 증오!
마지막까지 그와 함께한 친우들은 복수를 원했다.
생각대로였다.
복수였다.
그가 리치가 되어 평생을 준비한 것이 바로 그 복수였으니까.
‘끝이다.’
한데, 아직 기억이 더 남아 있었다.
이 기억이 끝이 아니었다.
‘물론. 복수도 중요하지.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저 아이들을 해방하는 것이야.’
‘리치가 되면 기억이 사라진다고 하니. 절대로 잊지 말게.’
‘우리가 이런 일을 하는 건, 모두 저 아이들을 위해서라네.’
‘복수와 해방 중에 고른다면 해방을 고르게.’
‘물론, 둘 다 할 수 있으면 최고겠지.’
‘이리 무거운 책임을 그대에게 주어 미안하네.’
복수 다음에 하나가 더 있었다.
‘해방.’
이 지하에 갇힌 이들을 해방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목표였다.
어째서 이 중요한 사실을 잊었을까?
이 기억은 너무나 낯선 기분이 들었다.
그때, 마도서가 빛을 낸다.
그는 마도서에서 흘러나온 힘을 차단했다.
‘……우리가 저 마도서를 어떻게 만들 수 있던 거지?’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투성이였다. 애초에 이 지하에 흑마법사가 있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내가 언제부터 흑마법사였지?’
기억 속 자신은 언제나 망치를 들고 있었다.
‘어째서?’
기억에 괴리가 있다.
무언가 비어 있는 것처럼.
‘대체…….’
어째서 리치인 자신이 감정과 기억에 이리도 집착했는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내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리치의 냉철한 이성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리치가 그걸 인식하고 깨달은 순간, 마도서에서 더 강한 빛을 뿜어지기 시작했다.
‘이건 통제할 수 없다.’
의문이 천천히 지워지기 시작한다. 감정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한다. 기껏 깨달은 모든 게 다시 무(無)로 되돌아간다.
‘저게 문제였구나.’
저 마도서가 문제였다.
그가 해방을 잊고 복수를 탐하게 된 이유는 바로 저 마도서 때문이었다.
‘잊기 싫다.’
기껏 떠올린 이 기억을 빼앗기기 싫었다. 하지만, 저항할 수 없었다. 마치, 천적을 만난 것처럼 마도서의 힘을 막을 수 없었다.
‘어떻게야 하지?’
혼자선 이것을 막을 수 없다.
마치 자신은 이 마도서에 종속된 존재인 것만 같았다.
‘방법을 찾아야 한다.’
감정이 없기에 그는 당황하지 않았고, 냉철하게 해결책을 찾을 수 있었다.
그의 시선이 미모 후작에게 닿았다.
‘기억을 지키고, 마도서에서 벗어날 방법.’
그 방법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계약하자.”
지금, 이 순간에도 기억은 사라지고 있었다. 다음에 자신이 이 기억을 떠올릴 수 있을까?
확신할 수 없다.
지금 계약해야 한다.
잃어버리기 전에 이 기억을 붙잡아야 했다.
<오호. 계약? 드디어 그런 생각까지 든 게냐?>
그녀는 계약에 관심을 보이는 것도 잠시.
<한데, 저 마도서는 너의 라이프배슬일 텐데 어찌하여 너를 좀 먹고 있는 것이냐!?>
악마가 계약보다 더 관심 가지는 게 있다니!?
다른 이들이 봤으면 놀랄만한 모습이었다.
리치 또한 그것을 알고 있었다.
“대가는 저 마도서에 담긴 사념.”
그제야 미모 후작은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리치의 라이프 배슬이나 다름없는 마도서가 통제가 안 되고 있었다.
<그래. 서두르자꾸나. 어떤 계약을 하겠느냐?>
“그댈 영원히 사랑하고 싶다.”
리치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마도서는 그의 라이프배슬이다. 생명이나 마찬가지였다. 저 마도서를 파괴해 달라고 할 순 없었다.
마도서를 보존하며, 개입하지 못하게 할 만한 계약은 이것뿐이었다.
<……뭐?>
“놀랄 때가 아니다. 계약하자.”
<바, 박력…….>
미모 후작이 당황한 것과는 달리, 리치의 머리는 냉철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기억을 보존하고, 마도서에서 벗어난다.’
마도서가 아무리 대단해도 악마는 그보다 상위 존재다. 그녀와 계약한 ‘사랑’이란 감정엔 마도서가 절대 개입할 수 없게 된다.
‘기억과 감정을 전부 그녀를 향한 사랑에 담는다.’
그렇게 모든 게 사랑에 담긴 상태로 계약을 한다면, 그 기억과 감정들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그, 그래. 너의 사랑을 받아주마.>
“계약 성립인가?”
그녀는 자신의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수줍게 입을 열었다.
<입을 맞추거라. 그리하면 계약이 될 터이니.>
“좋다.”
<으음! 부끄러운 소리 자꾸 하지 말고 얼른 입을 맞추거라.>
그녀는 리치에게 손을 내밀었다.
리치는 그녀의 손을 잡고, ‘기억’과 ‘감정’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기억과 감정을 객관적으로 분리한다는 건 인간이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오직 ‘리치’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의 기억이 그녀를 향한 사랑에 흡수되기 시작했다.
리치가 찾은 방법은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었지만, 그렇다고 완벽한 방법은 아니었다.
‘아들아. 이곳에서…….’
‘울지마! 우리는 다 살 수 있어!
‘너밖에 없어. 우리 중에 오직 너만 할 수 있는 일이야.’
‘인간들에게 복수해 줘.’
‘저 아이들을 해방해 줘.’
부모, 친우, 추억, 인생의 목표.
그 모든 것에 그녀의 모습과 함께 사랑이 추가되었다.
리치는 그녀의 손에 입을 맞췄다. 계약대로 마도서에 있던 사념은 악마에게 흡수되었고, 리치의 사랑은 악마의 계약으로 보호받을 수 있었다.
그 덕에 이런 결과가 나타났다.
“그대는 나의 모든 것이다.”
그에게 그녀는 가족이었으며, 친우이고, 인생이며, 추억이고, 목표였다.
그런 그의 사랑은 순수했다.
그녀가 그토록 바라던 이상향.
‘완벽한 사랑’.
<아…….>
그녀는 그 모습을 보며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토록 손에 쥐고 싶던 것이 눈앞에 있었다.
그것도 그녀와 계약이 된 채로.
* * *
‘이게 대체 뭔 상황일까.’
진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기분이었다. 진의 눈앞에는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일이 펼쳐져 있었다.
“최대한 빨리 몸을 교체해야겠다. 그대가 내 품 안에 있을 수 있도록.”
<난 지금도 좋아요.>
둘은 진 앞에서 꽁냥꽁냥거리고 있었다. 달콤하니 줄줄 흐르다 못해 잇몸이 다 아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꽁냥거리고 있는 게 악마와 리치라는 점이었다.
진이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 미모 후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진님께 감사 인사부터 드릴게요.>
감사 인사?
리치와 악마가 연애하는 것도 어처구니없는데, 악마가 감사 인사를 한다?
<우릴 이어 주셔서 감사해요. ‘성자’라는 그 이름이 어떤 의미인지 확실히 깨달았어요.>
“감사를 표합니다. 성자님 덕에 전 미몽의 지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어. 음.
그러니까…….
‘이게 뭔 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