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4. 이게 무슨 일이야?
“벌써 오신 겁니까?”
마그마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진에게 물었다.
“그래.”
당연한 일이었다.
진이 제사장으로 만나러 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돌아왔으니까.
“대화는 다음에 하시겠다고 하십니까?”
마그마의 의문은 타당했다.
오가는 시간을 제외하면, 사실상 대화를 나눌 만한 시간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대화를 나누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필요한 대화는 모두 나눴다.”
“……이리 빠르게 말씀이십니까?”
진은 담담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건 진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하. 이게 대화야?’
솔직히 말하면 대화도 아니었다.
‘아니지. 반대로 생각하면 훌륭한 위장이긴 하지.’
리치는 다 죽어가는 노인네 행세를 하고 있었다. 때문에, 진은 리치의 목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그저 곁에 있던 어린 노움이 그의 말을 전달할 뿐.
‘그렇다고 수확은 없는 게 아니지.’
만남이 어쨌든, 리치와의 만남으로 진이 필요한 건 모두 손에 넣었다.
‘한동안은 제사장님이 외곽을 비호해 준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외곽을 잘 이끌어 주길 바란다고 하십니다.’
외곽의 보호를 약속받았고.
‘보호의 대가로 공물을 원한다고 하십니다. 세인트의 영역에서 사용하는 빨간 구슬. 그걸 가져오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번 계획의 핵심인 물건까지 리치 곁으로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내 집무실에 가면 빨간 구슬이 담긴 나무 상자가 있을 것이다. 그걸 중앙으로 보내. 그 구슬을 보내면 제사장님께서 우릴 비호해 줄 것이다.”
“과연! 예. 제가 직접 가서 전달하겠습니다!”
마그마는 후다닥 진의 집무실로 달려갔다.
‘하여간 눈치는 빨라.’
도시 중심부에 있는 거대 세력을 쥐어짜는 지금, 세인트 조직은 마치 칼날 위를 걷듯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그 상황에서 제사장의 비호를 받게 됐으니, 안전이 확보된 셈이었다.
마그마가 신나서 달려간 건, 현재 상황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야.’
이제 리치를 위해 준비한 물건이 결과를 가져올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 * *
빨간 구슬이 빼곡히 든 나무상자. 리치는 그 구슬을 빤히 바라보며 무언가를 적어나갔다.
<마기, 다량의 피, 생명력…….>
‘마기를 촉매로 삼은 것인가?’
문제는 마기의 출처였다.
마기는 악마들이 사용하는 힘.
흑마법사들도 악마와 계약한 이들만 사용할 수 있는 힘이었다.
그는 세인트란 자를 떠올렸다.
‘그자에게선 마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풍부한 생명력만 느껴졌을 뿐이다.
‘그럼, 이걸 만든 건?’
그는 잠시 고민했지만, 냉철한 리치의 이성이 그 고민을 그만하게 만들었다.
호기심도 인간이나 가지는 일.
자신은 원리만 알아내서 사용하면 그만이다. 그렇게 구슬을 분석하고 있을 때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촤르르르르-.
구슬이 움직이며 어떤 모양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구슬에서 연기가 피어났다.
‘마기?’
짙은 검은색 마기. 흑마력과 비슷하면서도 더 진한 힘. 그 힘이 뿜어져 나오더니, 이내 무언가 형상을 이루기 시작했다.
리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사람이었다면 당황하거나 놀랐겠지만, 리치인 그는 오히려 냉철하게 상황을 파악할 뿐이었다.
‘과연.’
오히려 지금 일로 인해 아까 잠시 떠올렸던 의문이 해소됐다.
‘악마의 힘을 빌린 거였군.’
그런 그의 생각처럼 피어나온 마기는 악마의 형태를 이뤘다.
‘……아름답다?’
그 악마의 모습을 본 리치는 충격에 빠졌다. 단순히 사실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그 아름다움에 감탄이 나왔다.
리치가 가질 수 없는 ‘감정’.
그 감정이 느껴졌다.
‘이건…….’
그는 그 악마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름다워서 바라본 걸까?
전혀 아니었다.
감정을 느꼈다곤 하지만, 그는 리치였다. 냉철한 이성이 끊임없이 경고를 보는데 넋을 잃고 볼 리 없었다.
<오랜만에 보는 리치구나.>
악마의 목소리는 감미로웠다.
목소리와 아름다운 얼굴이 합쳐지자 시너지가 일어났다.
리치의 감정이 조금씩 깨어났다.
<너무 빤히 바라보는구나.>
“……필요하다.”
<필요하다? 날 바라보는 게 필요하다는 말이냐?>
리치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거 재미난 리치구나. 왜? 내가 그리 아름다운 게냐?>
“미모 후작. 그대의 능력과 권능을 안다. 이것이 거짓이란 것 또한 알고 있다.”
미모 후작의 힘 중 하나인 매혹의 권능. 리치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말에 미모 후작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거 정말 재미난 리치구나. 내 권능과 힘을 아는데, 날 그리 빤히 바라본다는 말이냐? 어째서?>
“감정이…… 필요하다.”
그 말에 악마는 다시 한번 웃음을 터트렸다.
<스스로 원해서 감정을 거세해 놓고, 감정이 필요하다?>
“난 감정을 거세한 게 아니다. 목적을 위해 리치가 되었을 뿐.”
<그 목적은 무엇이냐.>
“마도서를 완성해 인간을 죽이는 것.”
<더 듣지 않아도 무슨 일이지 알겠구나. 복수를 위해서냐?>
“그렇다.”
그 말에 악마가 씨익 웃었다.
<감정도 없는 리치가 대체 무슨 복수를 하겠다고?>
“…….”
리치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저 ‘복수’는 자신을 움직이는 목적일 뿐 이유는 떠오르지 않았다.
반드시 해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만, 어째서 이 일을 해야 하는지는 알 수 없는 기묘한 상황.
“그 이유를 찾을 방법이 있다.”
감정이 살아나자, 흐릿했던 기억이 돌아오는 것만 같았다.
냉철한 이성은 미모 후작의 모습을 계속 보는 건 위험하다고 속삭인다. 한데, 자신은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잡힐 것만 같았다.
<호오. 어떻게?>
“감정이 열쇠다.”
감정을 쫓는 리치라니.
그 어처구니없는 모습이 미모 후작의 흥미를 자극했다.
<재미있는 리치구나. 너에게 그 기억이, 감정이 가치가 있는 일이냐?>
“……모른다.”
<참으로 비이성적이고, 마법사 답지 않은 사고방식이구나. 하지만, 그렇기에 네가 특별해 보이는구나.>
미모 후작은 리치에게 기회를 주었다.
<시험해 보자꾸나.>
미모 후작의 손이 리치의 해골에 닿았다.
그저 한 번의 손길일 뿐이지만, 리치는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몸을 떨었다.
<후후. 내가 이 구슬로 낼 수 있는 힘은 이것뿐이구나. 맛있는 냄새가 나서 찾아왔더니, 재미난 놈이 기다리고 있었어.>
리치는 미모 후작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그녀의 손길을 받고, 그녀의 권능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감정’을 느꼈다.
그것도 ‘사랑’이란 감정을.
‘길이 열렸다.’
이것은 가짜 사랑이며 감정인 걸 리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빠르게 생각해야 했다.
그는 기억을 떠올렸다.
가슴 속에 피어난 사랑을 의지해 사랑하는 것을 떠올렸다.
‘이 드워프들은 대체…….’
자신과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드워프들.
그들과 함께 마신 맥주의 기억.
시답잖은 대화.
시시콜콜한 연애 이야기.
그들과 많은 추억.
그리고…….
“널 믿어.”
“우리 중엔 너밖에 없어.”
“우리가 전부 죽으면, 아이들은 영원히 노예로 살아갈 수밖에 없어. 부탁할게.”
그들이 자신에게 맡겼던 ‘책임’.
감정 속에서 그 기억들이 떠오른다. 떠오른 기억은 다시 한번 감정을 만들려고 하지만.
<리치가 맞긴 하구나. 결국 다시 한번 감정을 지워 낸 것을 보니.>
어느새 모두 사라졌다.
감정은 지우개로 지운 듯 사라졌다. 그나마 기억이 남았지만. 감정이 없어지니 의미가 없었다.
한데, 어깨 위로 그들이 맡긴 책임이 느껴졌다.
‘난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그 목적이 뭔지 어렴풋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악마가 입을 열었다.
<하하. 리치가 감정을 통해 이유를 찾는 것이냐? 우습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구나. 대체 그게 네게 무슨 의미가 있어서?>
“모른다.”
<모르는데도 찾는다?>
리치는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은 왜 이것에 집착하는 것일까. 어째서 감정을 느끼고 환희를 느낀 것일까.
‘불필요한 일이다.’
리치의 냉철한 이성이 속삭인다.
하지만 아까 느꼈던 감정과 기억이 포기할 수 없게 만들었다.
‘조금만 더 실험해 본다면?’
마도서를 만들 때 찌꺼기처럼 떨어지는 사념. 그 사념을 이용한다면 손해 볼 것도 없었다.
“미모 후작. 나와 거래를 하자.”
<거래?>
“사념을 줄 테니, 그 사념만큼 그대의 권능을 맛보고 싶다.”
그 말에 미모 후작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말이냐? 그러니까 지금 나보고…….>
미모 후작이 차마 하지 못한 말이 리치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미모 후작에게서 감정을 얻으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날 유혹해라.”
<……리치를?>
“날 사랑에 빠지게 만들어라.”
<미친 리치였구나.>
“자신이 없나? 없으면 말해라.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니.”
<감히! 나에게 자신이 없냐고 물은 것이냐? 오냐! 유혹해 주마. 이 미모 후작의 힘을 보여 주마!>
악마가 리치의 로멘스.
사상 초유의 사건이 지하 도시에서 시작됐다.
* * *
진은 미모 후작에게 보고를 받고, 이런 생각을 떠올렸다.
‘아. 내가 잘못 들었구나.’
미모 후작을 보낸 이유는 정말 간단했다. 리치가 꾸역꾸역 모은 사념을 가로채기 위해서였다.
한데,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었다.
‘사랑?! 사아랑? 대체 어디서부터 문제였던 거지?’
계약상 미모 후작을 소환할 수밖에 없었고, 마그마를 다루며 깨달은 것을 적용해 사념을 가져올 방법은 온전히 그녀의 판단에 맡겼다. 그랬더니 이딴 결과가 나왔다.
“그러니까….”
<네. 리치를 꼬시고 있어요.>
와. 악마가 리치를 꼬신대!
신기하고 아름다운 사랑이야!
이딴 반응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 일하라고 보냈더니 사랑?! 이건 따끔하게 한마디 해야 한다.
진이 막 입을 열려고 할 때.
<리치에게서 사념을 강탈하는 데 절 어째서 보내셨나 했는데, 절 보낸 이유가 있으셨군요. 전 정말로 감탄했어요.>
뭔가 이상한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계약서 때문에 선택권이 없었는데?’
이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감정을 그리워하는 리치에게 감정의 권능을 다루는 절 보내시다니. 정말 어디까지 내다보고 계시는 건가요?>
음. 안 내다봤다.
악마가 리치에게 쉽게 당할 리 없으니까 보냈을 뿐이다.
‘사념 강탈을 실패할 때와 성공할 때로 나눠서 계획을 세워 뒀는데…….’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일이 진행된 덕분에, 그 계획들은 필요 없어졌다.
<어머나. 제가 핵심을 찔렀나 보네요? 정말 중요한 이야기를 할 때는 한마디도 안 해 주시네요.>
아니요. 그냥 얼떨떨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건데요.
“……현재 진행 상황은?”
<역시, 이렇게 될 줄 아신 모양이네요.>
그녀의 오해가 깊어진 거 같았지만, 지금은 이 오해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열심히 리치를 꼬시고 있어요.>
“자세히.”
<남의 연애사가 궁금하신 거예요?>
진짜 이 악마와 대화하는 데 ‘연애사’라는 단어가 나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계약대로 행동해.”
<그렇게 궁금해하시니 알려드릴 게요. 리치는 감정을 떠올리고, 사라지는 것을 반복하고 있어요.>
“반복한다고?”
<정말이지 놀라운 경험이에요. 리치가 절 애틋하게 바라보다가, 어느새 감정이 사라져 차갑게 바라보는 그 느낌은 짜릿해요.>
대체 어떤 점이 짜릿한지 굳이 묻지 않았다.
개인의 취향은 존중한다.
게다가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효과는?”
악마와 리치의 러브 스토리.
이게 효과만 있다면 얼마든지 기다려 줄 수 있다.
‘결국, 사랑이 세상을 구하는 법이니까.’
[그 말은 그렇게 쓰는 게 아닐세! 대체 저게 어떻게 사랑이란 말인가!]
검성은 반발했지만, 진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아. 가장 중요한 걸 말씀드리지 않았네요. 처음엔 저도 그걸 걱정했어요. 제 권능으로 감정을 만든다고 이게 효과가 있을까 싶었거든요.>
<한데, 진 님이 어째서 감정을 이용하셨는지 시간이 지날수록 알 수 있었어요.>
“…….”
계획에 없었지만, 좋은 게 좋은 법.
이제부터 이 러브스토리는 진의 계획 아래 이뤄진 일이다.
<효과가 있어요. 감정의 잔류 시간이 늘어나고, 사랑이 강해지고 있어요.>
“사랑이 강해진다?”
<예. 전 눈빛만 봐도 그 사람이 절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어요. 리치의 사랑이 점점 커지고 있어요.>
사랑이 커지고 있다.
이 정보는 정말 중요했다.
만약 여기서 리치가 미모 후작과 사랑에 빠져 사랑의 포로가 된다면?
‘정말 어처구니없지만, 이 지하도시의 일이 한 방에 해결되는 거지.’
미모 후작은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할 수 있어요. 저도 그 리치가 진짜로 갖고 싶어졌거든요.>
잠깐만.
진은 그녀의 말에서 약간의 위화감을 느꼈다.
‘저, 저거…….’
능력을 이용한 리치 꼬시기라고만 생각했는데.
‘리치, 좋아하는 거 같은데?’
이건 양방향 사랑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