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 꼰대? 검성?
검성.
4대 원소 중 대지의 정령.
뭔가 화려해 보였지만, 기대와는 전혀 달랐다.
‘꼰대가 나타났다!’
이 말에 딱 맞는 사람이었다.
[어허! 어찌 세상을 구하는데 거래를 한단 말인가. 자네들 미친 겐가!]
[그렇다고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해? 얘는 뭔 죄를 지었어!?]
[그게 어찌하여 희생이란 말인가! 세상을 평안하게 하다 보면 자연스레 명성이 쌓일 터, 남자가 웅심을 품었다면 자연스레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을 터인데. 어찌 이런 무도한 규칙을 세웠단 말인가!]
[뭔 놈의 웅심이야?! 이 미친 영감탱이야! 정령사가 다 때려치운다고 하면 어쩔 건데!?]
[그렇다면, 옳은 방향으로 인도하는 것도 어른의 몫. 내 직접 움직일 것이네.]
[뭐? 폭력이라도 사용하게?]
[그게 어찌 폭력이란 말인가. 지도일세! 나 때는 그렇게 지도를 했단 말일세.]
로메른과 검성이 치열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제정신 아닌 거 같은데?’
[뭐, 그렇긴 하죠. 회귀자 중에서 제일 완고한 분이니까요.]
루나와 진은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진 세인트 남작. 그대는 어찌하여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빠져 있는 겐가.]
검성 영감은 진에게 말을 걸었지만, 진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저걸 어떻게 하지.’
[저걸? 혹시 그거 나를 말하는 겐가?]
검성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했는데, 어처구니가 없는 건 이쪽이었다.
[진. 확인했지? 이 정도라니까.]
‘와. 너희가 꼰대라고 할 땐 이 정돈 아닐 줄 알았는데…… 정말 너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진은 그 말을 함과 동시에, 써클을 통제했다. 그에게 가는 모든 힘을 끊었다.
그러자, 검성이 흐느적거렸다.
[이, 이것이 대체…….]
그가 놀라 진을 바라봤다.
‘규칙은 로메른에게 들었지? 나한테 뭘 요구하고 싶으면, 대가를 내놔. 서로 주고받는 거야.’
[세상을 구하는데 대가라니!]
검성은 절대 안 된다는 듯 말했지만, 그런 행동은 진을 자극할 뿐이었다.
‘됐고, 한동안 그렇게 생활하다가 정신 차리면 말해. 그때부터 시작이니까.’
진이 그렇게 말하자, 검성은 노선을 변경했다.
[자네를 지도해 주겠네.]
대화는 여기까지.
이제부터는 무력 행사에 나서려는 것 같았다.
아무런 힘이 없음에도, 그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검성이란 칭호가 괜히 붙은 게 아닌 모양이었다.
진은 그 모습이 전혀 무섭지 않았다. 로메른과 루나가 있었고, 써클마저 통제된 상황.
그저 짜증이 날 뿐이었다.
‘씁! 그만해.’
진은 마치 애완동물에게 하듯 말했는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아, 아니. 이게 무슨]
그만하라는 진의 말에 검성의 몸이 멈췄고, 형형한 눈빛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
[어?]
진과 로메른이 동시에 놀랐다.
‘뭐야. 이거?’
진이 고개를 갸웃할 때 로메른이 뭔가 감을 잡은 듯 입을 열었다.
[설마……. 친화력?!]
‘친화력이 왜?’
[친화력이 너무 높아진 거 같은데? 친화력이 높아지면 속성 지배력이 생기는데, 그거 때문인 거 같아.]
‘속성 지배력?’
지배력. 지배하는 힘.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확인해 보면 될 일이었다.
‘이리 와.’
진이 의지를 담아 검성에게 말하자.
[어, 어찌!]
검성이 진의 앞으로 끌려왔다.
‘손.’
[그대는 공경이란 없는 겐가!]
그런 살벌한 말과는 달리, 검성은 진의 손 위로 자신의 한쪽 손을 살포시 올려놓았다.
‘…….’
[…….]
진과 검성이 말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흠! 이것은 그러니까 내 의지가 아닐세.]
그는 당황한 얼굴로 허둥거렸는데, 진은 이 영감님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감이 왔다.
‘처신 잘해. 나머지 손까지 주기 싫으면.’
[어찌 이리 무도한 자가 우리의 소환사란 말인가…….]
그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건 검성의 생각이었고, 진의 생각은 달랐다.
‘로메른 이 양반, 쓸 만하겠는데?’
[속성 친화력을 이렇게 써먹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네. 확실히 쓸 만할 거 같아.]
진과 로메른의 얼굴에 악당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세상이 어찌 되려고…….]
나지막이 검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진은 그런 검성에게 물었다.
‘그렇게 좋아하는 좋은 일 한번 해 볼래?’
나왔으면 바로 써먹어야 하는 법이다.
* * *
엘프들은 어머니의 나무 앞을 지날 때마다 기도했다.
“어머니의 나무시여. 진님을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진의 회복을 바라는 엘프들의 행렬.
그 행렬엔 플로나와 장로급 엘프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매일같이 기도를 드려서일까?
어머니의 나무께서 응답하셨다.
포근하고, 안락한 대지의 기운.
그런 대지의 기운이 엘프 마을에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이 기운은?!”
“어, 어머니의 나무시여!”
“어머니의 나무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신 거야.”
엘프들은 깜짝 놀라 어머니 나무 주위로 모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이 세계수 나무 밖으로 걸어 나왔다.
“진 님!”
진이 나오자마자, 플로나가 소리쳤다. 그 말에 모든 엘프들의 시선이 진에게 모였다.
“예. 플로나 님.”
“몸은 괜찮으신 겁니까?”
“예. 괜찮습니다. 오히려 더 건강해진 기분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다만, 뭔가 좀 이상한 기분이 듭니다.”
“이상한 기분이요?”
“예. 뭐랄까. 아. 보여 드리겠습니다.”
진은 주위에 가득한 대지의 기운을 움직였다. 진의 손짓에 따라, 대지의 기운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 모습에 플로나의 눈이 커졌다. 당연한 일이었다. 어머니의 나무가 뿌린 기운을 인간이 통제하고 있었으니까.
“이, 이게 대체…….”
“깨어나고 나니, 마치 나무와 하나가 된 것만 같은 감각이 느껴졌습니다.”
그 말에, 그녀의 눈이 커졌다.
“설마…….”
“나무의 모든 게 느껴집니다. 이건 조금 이상한 기분입니다.”
플로나는 곧장 장로를 불러 진이 말한 것을 설명했다. 그 설명을 들은 장로의 표정은 가관이었다.
“설마 이것은…… 동화가 너무 깊게 진행된 것이 아닐지…….”
“게다가 진 님께 세계수의 씨앗까지 드렸으니까요.”
“어머니의 나무께서 내뿜으신 기운은 그 자체로 의지를 갖고 있을 텐데 이런 게 가능하단 것은…….”
“확실해요. 어머니의 나무께서 그를 그냥 선택하셨을 리 없죠.”
“맞습니다.”
곧이어, 엘프들은 말도 안 되는 결론을 내렸다.
“진 님께서 어머니의 나무와 하나가 되신 거예요.”
“저도 그렇게 보입니다. 일종의 화신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오해였다.
그것도 진짜 심각한 오해.
하지만, 이 오해는 나쁜 오해가 아니었다.
“진 님은 어머니의 나무십니다.”
“어머니의 나무시여.”
엘프들이 소리치자 어머니의 나무에 변화가 생겼다.
쏴아아아아-.
나뭇가지가 흔들리더니, 빛의 힘과 피의 힘이 뒤섞여 사방에 흩뿌려졌다.
“어머니의 나무시여!”
엘프들은 확신이라도 한 듯 소리높여 진을 어머니의 나무라고 불렀다.
상황은 점점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진은 굉장히 당황한 상태였다.
애초에 뭔가 임팩트를 남기려고 벌인 일이었지만, 이런 오해가 생길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여기서 뭔 말을 해야 할까?
진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아 모르겠다.’
일단, 이 오해에 올라타기로 했다.
“여러분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 나무가 제게 길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어떤 길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구원을 바라는 이들이 어디에 있는지 제게 속삭여 주고 있습니다.”
진은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 주고 있습니다.”
성공인가?
진은 엘프들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 순간, 엘프들은 하나가 되어 소리쳤다.
“어머니의 나무시여. 뜻대로 행하소서!”
오해에 올라타는 건 성공이었다.
그때, 검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좋은 일을 이용해 어찌 엘프들을 속이는 것인가! 이것은 사기나 다름없는 일일세!]
사기? 그건 아니다.
엘프들이 약간의 오해가 있었을 뿐.
‘맞잖아? 아니야?’
* * *
깊은 땅속.
“아, 내가 왜 거기서 개소리를 해서!”
오해에 올라탄 건 좋았다.
엘프들은 이제 뭐 더 작업을 할 필요가 없이 완전히 진의 편이라고 봐도 됐다.
어머니 나무 = 진.
이 구도가 완성됐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쉬지도 못하고 벌써 다음 일을 하냐, 이거야!”
개소릴 한 덕분에 마을에서 쉴 수가 없었다. 뭔가를 하러 가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물론, 그런 진의 말과는 달리 굉장히 편한 자세를 하고 있었다.
흙으로 만들어진 침대에 누워, 간식까지 꺼내먹고 있었으니까.
[어찌 저런 자가 우리의 소환자란 말인가! 내가 처음에 소환됐어야 했는데, 내가 늦고 말았구나.]
검성은 꼰대력 가득한 말을 하고 있었지만, 어느새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익숙해졌다.
[그래도 검성을 소환한 덕에, 이번 일은 쉽게 끝나지 않겠어?]
“맞아. 괜히 후작가를 마지막에 처리하려고 했던 게 아니니까.”
[하긴, 지하에 숨어 들어가는 게 보통 일이 아니긴 하니까.]
후작가의 지하에는 수많은 이종족 노예가 갇혀 있었다.
처음에는 작았던 노예 시설이 수백 년이 지나며 일종의 지하 도시로 변모했다. 이제는 새로운 노예를 집어넣지 않아도 유지가 되는 시설.
후작가는 이 시설을 이용해 막대한 부를 쌓고 세를 불려 왔다.
“이건 딱 봐도 나중에 문제가 터질 것 같네.”
[맞아. 이것 때문에 대륙이 얼마나 난리였는지 모를 거야.]
수백 년간 쌓인 증오와 분노.
이건 문제가 안 될 수가 없었다.
진은 땅굴을 이용해 그곳에 진입해서, 노예들을 빼 올 생각이었다.
물론, 이 계획에 모두가 동의하는 건 아니었다. 조금 색다른 시각을 지닌 꼰대도 존재했다.
[허. 사람이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면, 설득해서 죄를 깨닫게 하고 스스로 포기하게 만들어야 하는 법인데 어찌하여 이런 방법을…….]
물론 진이 보기엔 개소리나 다름없었다. 애초에 말로 설득됐으면, 이런 짓을 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세인트 남작. 그대는 눈을 떠야 합니다. 세상의 평화는 선의에서 나오는 법. 이런 방식으로 ‘후작’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진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후. 땅이나 파세요.”
한데, 진의 말에도 검성은 그 입을 다물지 않았다.
[어찌하여 쉬운 길만 찾는단 말입니까. 제가 어렸을 때는 이런 일은 상상도 하지 못할…….]
진은 마지막 수단을 썼다.
“어이. 검씨.”
[거, 검씨!?]
진의 말에 그가 화들짝 놀랐다.
“헛소리 말고 땅이나 파세요.”
써클의 기운이 그를 옥죄고, 압도적인 대지의 친화력이 그를 강제한다.
[지배력 효과 확실하구만.]
[정말 다행이에요. 검씨가 땅을 파시네요.]
두 정령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허어. 세상이 어찌 되려고!]
물론, 한 정령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검씨!”
진이 다시 한번 소리를 치자.
[파고 있네! 파고 있어!]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지하 도시 앞까지 땅굴을 파는 건 금방 끝났지만, 단순히 일자로 길을 뚫어선 의미가 없었다.
[탈출이 더 문제야.]
로메른의 말대로 침입보다 탈출이 더 문제였다.
진 혼자만 도망치는 게 아니라, 노예들까지 도망쳐야 하니 그냥 땅굴론 부족했다.
[그만파! 옆에 지하수 있어! 좋아. 이 정도면 물이 부족하진 않을 거 같은데……. 잠시만 마법진 좀 그리고 갈게.]
탈출 방법은 간단하다.
지하수를 이용해 한 방에 쭉 도망칠 생각이었다.
그럼, 여기서 끝일까?
전혀 아니었다.
‘후작이 어떻게 된 일인지 조사하겠지.’
그 조사를 대비해서 ‘더미용’ 땅굴까지 준비했다. 그 더미용 땅굴에는 멋들어진 글귀를 추가했다.
<지식의 해방을 위해!>
모든 욕을 대신 먹을 욕받이까지 준비한 다음에야, 모든 준비가 완료됐다.
‘그럼, 진입할까?’
노예 시설로 시작해 이제는 지하 도시가 되어 버린 미지의 장소.
[마법진이 내부에 그려져 있어서 문제긴 한데, 검성이 있으니까 상관없어.]
그만큼 보안이 철저하지만, 이쪽엔 새로운 멤버가 포함되어 있었다.
‘검성. 부탁할게.’
[흐음. 이번 부탁을 들어 주면, 그대도 내 부탁을 들어 주는 것인가?]
‘에헤이. 세상을 구하는 데 거래를 사용하면 돼?’
[크흐흠. 이번만 도와주겠네.]
말하는 걸 보면 영 허당 같은 영감님이었는데 그가 진의 몸에 ‘정령 융합’을 한 뒤 검을 들자.
[이 촉감과 무게. 오랜만이군.]
그가 풍기는 분위기가 전혀 달라졌다. 흙 잘 파는 꼰대 영감에서 ‘검성’으로 변화했다.
[검의 끝에 도달하면 그 무엇도 베어 낼 수 있다네. 마법진은 아무것도 아니지.]
그는 진에게 물었다.
[자네 오른손잡인가?]
‘어. 그런데?’
[그럼 왼손으로 해야겠군.]
[영감! 살살해. 살살. 육체를 개조했다고 해도 못 버틸지도 몰라.]
[흘흘. 알겠네. 걱정하지 말게.]
진은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싶었는데, 그가 가볍게 검을 휘두른 순간.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었다.
투득.
투득.
진의 육체가 단 한 번의 ‘베기’를 견디지 못했다. 팔에선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다.
[일단, 응급처치만 해 주겠네.]
영감님은 진의 팔 곳곳을 두드렸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통증이 사라졌다.
[왼팔은 한동안 쓰지 말게.]
‘알겠어.’
진은 그러고 나서야 눈앞의 결과물을 볼 수 있었다.
‘미친.’
마치 포탈이 열린 것처럼 벽이 베어져 있었다.
[자, 얼른 들어가시게.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적당히 베어 냈으니 곧 닫힐 걸세.]
진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 벽 안으로 들어갔다.
‘검성은 검성이네.’
극에 도달한 검술은 마법과 그다지 다를 게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