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8. 이게 되네
모든 엘프들의 변화가 끝나 엘프 농장이 사라진 뒤.
진의 영지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아아. 정말 좋아.”
“어머니의 나무시여.”
“어미니의 나무의 온기는 너무 따뜻해.”
영지민 하나 없던 진의 영지에 엘프들이 바글바글했다. 전부 어머니의 나무를 만나기 위해 온 이들이었다.
“이곳은 너무 휑하지 않아?”
“꽃을 심어 볼까?”
“어머니의 나무께서도 좋아하실 거야!”
그들은 어머니의 나무를 만나러 온 것도 모자라, 일꾼을 자처하며 영지 개선에 힘썼다.
“땅이 너무 울퉁불퉁한데?”
“이쪽도!”
“여기도 손을 볼까?”
꽃을 심는 것도 모자라 땅을 평탄하게 만드는 등 미관을 위해 시키지도 않은 일을 자꾸 했다.
덕분에, 좋아진 점이 하나 있었다.
‘해먹에 누워서 구경할 만한 게 늘었네.’
덕분에 진이 해먹에 누워 바라보는 풍경이 시간이 가면 갈수록 달라졌다.
‘역시 영주는 영지민이 있어야 돼.’
이렇게 알아서 일해 주는 영지민이면 더더욱 좋았다.
게다가 엘프들의 효용성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노바. 한판할까?”
“좋다!”
“살바람 숲에서 달리는 법을 배우고 싶다고 했지?”
“배우고 싶다.”
“활은 우리가 대륙에서 제일 잘 쏴. 어때? 요령 좀 배워 볼래?”
“저번엔 내가 더 잘 맞췄다. 그래도 엘프들의 궁술을 배워 보고 싶다.”
“그대는 주술과 성법을 섞어 사용한다고 했는데, 우리 쪽에도 나름의 기술이 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장로님.”
휴식을 위해 온 엘프들은 아이들의 스승을 자청했다.
저건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잘 섞일 수 있나 싶었더니. 완전히 섞였네.’
사막 전사와 엘프가 이렇게 친근하게 대화를 나눈다는 건 정말 신기한 일이다.
진의 명으로 노바와 아이들이 엘프 영지에 처음 갔을 때는 엘프들의 눈총을 받아야 했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엘프들을 끊임없이 공격하는 자들이 바로 ‘사막 부족’이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엘프들과 가까워지고, 어느새 엘프 일족처럼 취급받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진짜 열심히 생활했나 보네.’
서로 기술을 교류할 정도의 친분은 엄청난 신뢰와 전우애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건 아이들이 그만큼 열심히 적과 싸웠다는 증거나 마찬가지였다.
‘슬슬 올 때가 된 거 같은데.’
어머니의 나무를 찾는 건, 일반 엘프들뿐일까?
그럴 리가 없었다.
로브를 깊게 눌러쓴 엘프 하나가, 쭈뼛쭈뼛 어머니의 나무 근처로 다가갔다.
‘아니. 숨길 거면 제대로 숨기던지.’
그녀를 지키기 위해 뒤에 시립해 있는 엘프들.
“플로나 님도 오셨네요?”
“아.”
그걸 당연히 알아보는 엘프들.
그녀가 뒤집어쓴 로브 때문에 오히려 더 눈에 튀었다.
‘슬슬 가 볼까.’
이제 진이 나설 차례였다.
진은 해먹에서 일어나, 허둥거리고 있는 플로나 곁으로 다가갔다.
“플로나 님 오셨습니까?”
“…….”
플로나는 마치 자신은 플로나가 아니라는 듯 딴청을 피웠지만.
“플로나 님?”
진이 다시 한번 부르자 결국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예. 진 님. 잘 지내셨나요?”
어색하게 말하는 그녀 모습에 진은 웃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물론, 여기서 웃을 순 없었다.
지금 이 대화는 정말 중요한 대화였다.
“안 그래도 만나 뵙고 싶었는데,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 놀랐습니다. 역시, 플로나 님이십니다.”
진의 말에 그녀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예?”
“저 엘프들이 걱정돼서 오신 거 아니었습니까?”
진의 말에 그녀는 진이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진의 영지로 쏟아지고 있는 엘프들. 그 엘프들이 걱정돼서 찾아왔냐는 질문이었다.
“그 말씀이셨군요.”
“예.”
포도주는 시간이 지날수록 숙성이 되며 더 깊은 맛이 난다.
이번 계획 또한 비슷하다.
모든 엘프가 변화할 때까지 기다린 건 일종의 ‘숙성’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무르익었어.’
지금이야말로 진짜 수확을 할 타이밍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엘프들을 통제할 순 없어요. 어머니의 나무 곁으로 가고자 하는 건, 엘프의 본능이나 마찬가지예요. 다만, 이렇게 격한 반응이 나올 줄은 몰랐지만요.”
로메른과 성녀가 만든 꿈에 엘프의 본능까지 합쳐졌기에 이런 반응이 나온 것이다.
“정말 오랜만에 어머니의 나무를 봐서 더욱 그런 거 같아요. 저만 해도 이렇게 어머니의 나무를 찾아왔으니까요.”
심지어 도시의 지도자마저도 어머니의 나무에 빠진 상황. 진은 이 상황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여러분께서 이렇게 나무를 좋아해 주시듯, 이 나무 또한 여러분과 함께하고 싶어 합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그녀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나무도 여러분을 원하고, 여러분도 나무를 원하는데 뭔가 대책을 내놓아야 할 것 같아서 만나 뵈려고 했던 겁니다.”
“아……!”
그녀는 감격한 얼굴로 진을 바라봤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그리 좋지 못합니다. 엘프들의 영역과 제 영지는 생각보다 거리가 있으니까요.”
“그건 맞아요. 저만 해도 찾아오기 힘들었던 이유가 거리 때문이었으니까요.”
“그러니, 거리를 줄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
거리가 머니 거리를 줄이자.
말은 정말 쉽지만, 그 방법이 문제였다.
“어렵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나무를 옮기면 해결될 일이니까요.”
“어, 어머니의 나무를 옮긴단 말씀이십니까?”
그녀는 더욱 모르겠다는 얼굴로 변했다.
“그렇게 되면 정말 좋겠지만, 전 어머니의 나무를 옮겨 심었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습니다.”
물론, 어머니의 나무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 나무는 어머니의 나무가 아니었다.
로메른이 디자인한 ‘짝퉁 세계수’일 뿐이었다.
“이 나무를 일반적인 어머니의 나무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여러분이 변했듯 이 나무 또한 변했습니다.”
진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충분히 가능하다고 나무가 제게 속삭이고 있습니다.”
플로나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얼굴이었지만,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었다.
“……만약, 어머니의 나무를 옮기는 게 가능하다면.”
정말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다.
그녀는 그걸 잘 알고 있었다.
* * *
엘프 회의가 소집됐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건, 엘프 마을에서 회의가 소집된 게 아니었다. 회의에 참석할 과반수의 엘프가 진의 영지에 있었다.
덕분에, 진은 생각지도 못하게 엘프들의 회의를 구경할 수 있었다.
“쉬는 분들을 모아 회의를 소집한 건 정말 시급한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 어렴풋 눈치채고 있었다.
이렇게 급하게 회의가 소집될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어머니 나무’.
그 외에 이렇게 급하게 소집될 이유가 없었다.
그런 모두의 예상대로 어머니의 나무 이야기가 플로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진 님으로부터 어머니의 나무를 옮길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만약, 어머니의 나무를 옮길 수 있다면 우린 어떻게 해야 할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다만, 그 이야기가 상상을 너무 초월했다는 게 문제였다. 엘프들은 한 번에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플로나 님?”
그 모습에 플로나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자신 또한 저런 표정을 지었으니까.
“들으신 게 맞습니다. 어머니의 나무를 옮기는 겁니다.”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장로로 보이는 엘프가 그녀에게 물었다.
“예. 어머니의 나무께서 가능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변했듯 어머니의 나무도 변하셨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얼떨떨해하던 회의 분위기가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여기 모인 엘프들은 모두 어머니의 나무를 보러 온 자들이었다. 이걸 싫어할 이는 아무도 없었다.
“흐음.”
“이거 참.”
다만, 쉽게 이야기를 꺼내기엔 너무 여러 가지 문제가 얽혀 있었다. 단순히 나무를 옮긴다고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플로나 님께서 이 이야기를 들으셨다는 건, 성자님께서 말씀해 주신 겁니까?”
다 들린다, 이 양반들아.
나름 조용히 말한다고 했는데, 그게 들리지 않을 리 없었다.
“예. 맞아요. 진 님께서 먼저 말씀해 주셨어요.”
그 말에 엘프들의 시선이 진에게 모였다. 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어머니의 나무는 본래 여러분의 것입니다. 지금은 소통과 정화를 위해 제가 가지고 있지만, 모든 게 끝나면 여러분께 돌려드릴 생각입니다.”
물론, 모든 게 끝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진 모르겠지만.
하지만, 이런 진의 속마음을 모르는 엘프들의 반응은 굉장했다.
“허어. 역시 성자님이십니다.”
“어머니의 나무를 저희에게 돌려주신단 말입니까?”
“역시 어머니의 나무께서 괜히 성자님을 선택한 게 아닙니다.”
“다들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전 어머니의 나무께서 선택하신 진 님을 믿어요. 우리가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인간이라 생각해요.”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에게 진은 경계해야 할 ‘인간’이 아니었다. 나무의 선택을 받은 그 누구보다 고귀한 ‘엘프’였다.
“그러니 정치적인 생각은 접어 두었으면 해요.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보다 더 직관적으로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그녀의 말은 간단했다.
“어디로 옮기는 게 최고의 선택일까요? 이 질문에 답하는 게 이 회의를 소집한 목적입니다.”
플로나가 지도자인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핵심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뭐가 최고의 선택인진 이미 알고 있지.’
이미 로메른과 루나와 대화해 어디로 옮길지 최적의 장소를 봐 뒀다.
‘엘프와 인간의 영역이 겹치는 부분.’
그 자리가 딱이었다.
엘프들이 도출한 결과도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밖에 없습니다.”
젊은 엘프도.
“흠. 원래라면 정치적 문제들 때문에 안 된다고 하겠지만, 저도 동의합니다. 효율만 놓고 따지면 경계로 옮기는 것이 최고의 방법입니다.”
장로급 엘프도.
“제 생각도 그래요. 몇 가지 조정해야 할 건 있겠지만, 저도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해요.”
지도자인 플로나도 같은 곳을 선택했다. 그곳은 바로 엘프와 진의 영역이 마주하는 곳이었다.
플로나는 결론을 내리고, 진을 바라봤다.
“진 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제 생각도 같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보다 좋은 장소는 없습니다.”
“진 님까지 그렇게 생각하시면 위치는 이곳으로 할게요.”
그렇게 나무가 옮겨질 위치가 결정되었다.
원래라면 지금부터가 더 중요했을 것이다. 나무가 옮겨지니 그에 따른 많은 것들이 달라지니까.
‘여기서 곧장 이야기할 필요는 없어.’
일단 나무를 옮겨 놓고, 그 다음 이야기하는 게 맞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진.
엘프들은 그런 진에게 고마워하며 알아서 착각해 줄 것이다.
‘그게 고스란히 돌아오는 거지.’
만약 안 돌아오면?
그땐 나무를 다시 옮기면 될 일이다.
어차피 주도권은 자신에게 있으니까.
진은 짧게 생각을 마친 뒤 입을 열었다.
“결론이 나온 것 같네요. 그럼, 나무를 옮기겠습니다.”
그 말에 엘프들이 깜짝 놀랐다.
그들을 위해 나무를 옮기는데도, 진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으니까.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진은 그런 건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엘프들의 표정에 깊은 신뢰가 담겼다.
“예. 부탁드립니다. 진 님.”
플로나가 고개를 숙이자, 엘프들이 고개를 숙였다.
회의하고 있던 엘프들은 물론이고, 회의를 구경하고 있던 다른 엘프들까지.
“정말 감사합니다!”
진심이 담긴 감사 인사에 진의 얼굴엔 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고맙긴, 내가 고맙지.’
* * *
플로나를 비롯한 엘프들은 어머니의 나무에서 좀 떨어진 곳에 모여 있었다.
“허어. 성자님께선 어떻게 옮기실 생각인 건지 모르겠군.”
“그러게 말이야. 대체 어떻게 옮기실 생각인건지.”
“다들 걱정하지 말게. 어머니의 나무께서 선택한 성자님 아닌가.”
“맞습니다. 저희는 믿고 기다려야 할 때가 아니겠습니까?”
엘프들은 걱정 반 기대 반으로 나무를 바라봤다.
물론, 걱정을 하는 이들이나 기대를 하는 이들이나 저 커다란 나무가 대체 어떻게 움직일지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건 플로나도 마찬가지였다.
“진 님.”
그녀는 방금 전, 진의 모습을 떠올렸다.
‘제가 있어야 옮길 수 있습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다려 주세요.’
이 말을 남기고 진은 어머니의 나무 안으로 들어갔다.
“해내실 거야.”
그녀도 어머니의 나무를 어떻게 옮길지 상상도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진이 해낼 거란 확신이 있었다.
그런 그녀의 생각은 정답이었다.
잠시 후.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떨리기 시작했다.
드드드득. 드드드득.
곧이어 땅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정말로 옮기는 건가?”
엘프들이 당황해서 중얼거리고 있을 때, 또다른 변화가 생겼다.
쿠드드득. 쿠드드득.
기묘한 소리와 함께, 진동이 더욱 심해졌다. 대체 이곳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무도 감을 잡지 못했다.
그때, 한 엘프가 입을 열었다.
“우, 움직였어!”
“뭐가? 뭐가 움직여?”
“어머니 나무! 어머니 나무가 움직였다고!”
모두의 시선이 다시금 어머니의 나무에 꽂혔다. 그리고 놀라운 걸 목격할 수 있었다.
정말로 어머니의 나무가 움직이고 있었다.
“저, 저게 무슨!”
“어머니의 나무가 움직이시는 거야!?”
“아니. 이게 대체!”
엘프들은 반쯤 패닉에 빠졌다.
나무 자체가 움직일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드드드득.
뿌리가 땅에서 튀어나오고, 사방으로 흙이 비산한다. 혼란에 빠질 만도 한데, 엘프들에겐 전혀 다르게 보였다.
축복!
기적!
흩날리는 흙들이 마치 축복처럼 보였고.
쿠우우우웅!
어머니의 나무가 움직일 때마다 떨리는 진동이 그들에겐 곧 기적이었다.
“어머니의 나무시여.”
누군가 읊조린 그 말이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어머니의 나무시여!”
쿠우우우웅!
“어머니의 나무시여-!”
그 시끄러운 소리를 뚫고, 엘프들의 목소리가 숲에 울려 퍼졌다.
어머니의 나무께서 걷고 계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