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작가의 정령 천재-57화 (57/210)

057. 영지에 농장이 생기다

플로나 다음엔 룬타의 변화가 시작됐다.

“오오. 룬타 님마저!”

“설마 전사에게도 가능했다니!”

“마법사에 한정된 변화가 아니었어!”

원래 오늘은 지도자 외에 다른 엘프를 변화시킬 생각은 없었는데, 생각이 변했다.

[저 친구 눈이 맛이 간 거 같던데? 보통 광신도들이 저런 눈을 하던데…….]

[광신도라니요. 신앙이 깊은 분들이지요. 아쉽네요. 엘프만 아니셨다면, 사제로 모셨어도 좋았을 거 같은데요?]

들으면 들을수록 딱 좋았다.

‘이런 친구가 하나 있어 줘야지.’

플로나만 해도 이미 진의 편이나 다름없었지만, 그녀는 지도자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었다.

마을을 위해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배제해야 한다.

하지만, 룬타는 다르다.

플로나에게 회의 때 이야기를 들어 보니, 룬타가 혁혁한 공을 세운 것 같았다.

그녀가 결심을 하게 된 계기가 바로 룬타 때문이라고 했다.

‘게다가 마을 방어를 책임지는 친구라던데 이건 무조건이지.’

앞으로의 계획까지 생각하면 그의 직책마저 좋았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사이, 룬타의 변화가 중반에 도달했다.

‘아까랑은 비슷한 거 같더니, 확실히 마법사랑 전사랑 다르네.’

근육이 압축되고 호리호리한 몸으로 돌아가는 건 똑같았다.

물론, 이쪽의 근육이 무지막지하기에 그 효과가 덜하긴 했지만, ‘무식한 근육’이 ‘보기 좋은 근육’으로 변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다지 달라진 게 없어 보이지만, 그다음이 문제였다.

‘전사는 빛의 정령을 못 받아들일 줄이야.’

전사는 빛의 정령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렇다고 정령을 소환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피의 정령인 게 문제지.’

빛의 정령처럼 신성한 느낌이 아니었다. 피의 정령은 뭔가 ‘악’에 가까운 힘처럼 보였다.

“룬타 님의 머리는 새빨개!”

“대체 저건!”

“어머니의 나무시여!”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그런 진의 생각처럼 엘프들은 당황해서 소리치기 시작했다. 이게 바로 흰색과 빨간색의 차이였다.

‘이걸 어떻게 포장한담.’

진이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

[진! 얘 깨어나려고 하는데?! 이미 정령 계약까지 했어. 뭐야 이놈!?]

룬타가 눈을 떴다.

그것도 피의 정령을 소환한 채.

룬타는 진을 빤히 바라봤다.

‘와. 무슨 놈의 눈빛이.’

살벌했다.

마을의 외곽을 책임지는 대장.

그가 얼마나 많은 전투를 치렀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가 진에게 다가왔다.

그리곤 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였다.

‘……어?’

예상치 못한 상황.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룬타의 행동에 엘프들조차 깜짝 놀랐다.

“이 룬타가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커다란 룬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두를 지키기 위해 모든 걸 포기했습니다. 피와 전투밖에 없던 저에게 아직 함께해 줄 정령이 있었습니다!”

불길해 보이는 피의 정령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더없이 성스러워 보였다.

“그런 제게 정령을 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룬타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피의 정령은 울지 말라는 듯 룬타의 뺨에 자신의 얼굴을 비볐다.

진은 이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다.

“제게 감사해하실 것 없습니다. 룬타 그대가 그만큼 고귀한 전사라는 증거입니다.”

룬타 덕분에 불길한 피의 정령은 ‘고귀한 전사’의 증표가 되었다.

“그대와 플로나 님을 보니, 이 나무가 제게 무엇을 도와 달라고 했는지 알겠습니다.”

진은 나무를 올려다봤다. 그런 진처럼 엘프들 또한 나무를 올려다봤다.

새로운 ‘어머니의 나무’를.

* * *

“플로나 님과 룬타는 특수한 경우였습니다. 나무가 큰 힘을 쓰기에 사실 자주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닙니다.”

“그렇습니까?”

“예. 그래도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시간을 들여 천천히 변화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어머니의 나무께선 무리하시지 않는 겁니까?”

“예. 게다가 이건 시간이 많이 들어가는 대신 많은 엘프를 한꺼번에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역시, 어머니의 나무이십니다!”

이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진짜로 엘프들을 한 번에 변화시킬 방법이 있었다.

‘뭐, 방법이 좀 그렇긴 하지만.’

자연 친화적인 엘프니까 이해해 줄 거라고 믿는다.

“엘프를 보내는 만큼 방어에 균열이 생길 텐데,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지원이요?”

“얘들아!”

진의 말에 노바와 아이들이 진에게 다가왔다.

“……사막전사.”

플로나의 얼굴엔 진한 경계심이 떠올랐다. 진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저의 기사들입니다.”

“사막 전사가 아닌 겁니까?”

약은 팔 수 있을 때 팔아야 하는법. 오그라들긴 해도 지금은 그게 직방이었다.

이건 직접 보여 주는 게 빨랐다.

성령과 함께하는 아이들을 보자, 플로나의 눈은 혼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과분하게도 신의 기사들로 불리는 아이들입니다. 이 아이들이 방어를 도울 겁니다.”

“……이걸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나무가 직접 축복한 아이들입니다. 이 아이들이 방어를 돕는 이상, 거리가 있다고 해도 나무가 방어를 지원할 겁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아이들이 있어야 그 먼 거리까지 나무가 움직일 수 있었다.

아이들은 일종의 ‘중계기’였다.

“아!”

짝퉁 세계수가 돕는단 이야기에 그녀의 표정이 변했다.

“감사해요.”

그녀의 승낙이 떨어졌다.

“들었지?”

“예. 주인님.”

“거기서 어떻게 움직일지는 자율에 맡길게. 단, 선은 넘지 마.”

엘프들과 마주하고 있는 건 사막 부족이다.

“예. 주인님.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정도만 말해도 충분히 이해할 아이들이다. 더 이야기해 봐야 잔소리가 될 뿐이다.

“그래. 그거면 됐어.”

그렇게 아이들과 대화는 끝이었다.

“저들을 많이 믿으시는 모양이네요.”

플로나는 신기하다는 듯 진에게 물었다.

“제 등을 맡긴 아이들입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뭘 알겠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말 덕에 그녀의 신뢰도는 한층 올라간 거 같았다.

게다가,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진을 바라보는 아이들은 보너스였다.

* * *

아이들과 엘프들이 돌아간 뒤.

진에겐 오랜만에 휴식시간이 찾아왔다.

‘역시 마리아야. 확실하다니까.’

햇빛도 쬐고 주위도 둘러볼 수 있는 명당에 해먹이 걸려 있었다.

진은 그곳에 누워 마리아를 불렀다.

“마리아!”

진이 마리아를 부르자, 얼마 지나지 않아 마리아가 다가왔다.

“예. 남작님.”

“땅 좀 파.”

“어떻게 파면 되겠습니까?”

진은 품속에 있는 종이 하나를 그녀에게 건넸다.

깊이와 폭이 적혀진 종이.

“그대로 파면 돼.”

“나무 근처에 파면 되겠습니까?”

“어.”

마리아는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고, 진의 말대로 열심히 땅을 팠다.

솔직히 말하면 마리아가 판 건 아니었다. 성령을 삽에 빙의 시키고 그 삽을 움직여서 팠을 뿐이다.

그렇게 수십 개의 구덩이가 파졌을 때쯤.

[진. 왔다!]

엘프들이 어머니의 나무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변화를 위해 보낸 엘프들이었다.

진은 해먹에서 일어나 그들을 환영했다.

“다들 잘 오셨습니다.”

엘프들에게 간단하게 인사를 건넨 뒤.

“이곳에 여러분이 오래 있으면 있을수록 마을에 남아 있는 이들의 부담이 심해지는 건 잘 아실 겁니다.”

진의 말은 맞는 말이었다.

이들이 빠진 만큼 나머지가 방어를 책임져야 했다.

“그러니, 곧장 시작하겠습니다.”

시작한다는 말에 다들 눈을 빛냈다. 아마도 룬타와 플로나가 변화한 이야기를 듣고 기대한 모양인데, 어림도 없는 소리.

이들에겐 냉혹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앞에 보시면 구덩이가 보이실 겁니다. 마음에 드는 구덩이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나마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연 건, 엘프들을 인솔한 인솔자였다.

“……예?”

“들으신 게 맞습니다. 구덩이에 들어가시면 됩니다.”

“……예?”

이 양반이 귀가 먹었나.

갑자기 구덩이에 들어가라고 하면 당황하는 게 당연한 일이다.

설명이 필요할 거 같았다.

“여러분은 꽃이 되시는 겁니다.”

“어. 음. 예?”

조금 전 설명은 부적절한 거 같았다.

“여러분을 땅에 심고, 변화시킬 생각입니다. 나무의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 땅의 힘을 빌리기 위함이니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드디어 이해할 만한 이야기가 나왔지만, 엘프들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못했다.

“그러니까 저희는 변화하는 동안 식물이 되는 겁니까?”

날카로운 지적이었지만, 어림도 없지. 진과 입으로 싸우기엔 아직 한참 몰랐다.

“그렇습니다. 나무와 더 가까운 존재가 되는 겁니다.”

“아!”

엘프가 던진 논리가 엘프들을 옥죄었다. 아니 옥죄다 못해 납득한 모양이었다.

엘프들은 하나씩 구덩이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어깨부터 머리는 구덩이 밖으로 올라오는 게 딱 좋았다.

“마리아! 덮어!”

“예. 남작님.”

마리아는 전에 진을 묻으며 이 일을 경험해 본 적이 있었다.

수십 자루의 삽이 날아다니며 구덩이를 메우기 시작했다.

“허. 이게 대체.”

“내가 꽃이 되다니.”

“이건 들은 것과 좀 다른 거 같은데.”

“이게 맞나?”

다들 혼란스러운 눈치였지만, 전혀 상관없었다.

[그럼, 시작한다.]

꾸드득. 꾸드득.

뿌리가 움직이고, 그 뿌리가 엘프들에게 닿은 순간.

“아!”

“뭔가 날 찔렀…….”

“이게…….”

다들 길게 말하지 못했다.

아니. 말을 떠나서 눈을 뜨고 있는 엘프가 하나도 없었다.

[전원 기절 완료!]

[몸이 상하지 않게 관리할거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가끔 물이나 좀 주세요.]

룬타와 플라나의 변환이 고급 버전이었다면, 이 엘프들을 변환하는 건 하급 버전이다.

깨어난 상태로 변화하는 건 ‘옵션’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마리아. 물 좀 줘.”

진의 말에 마리아가 아무렇지 않게 움직였다.

“예. 남작님.”

심어진 엘프들에 물을 주기 시작했다.

“올해 농사는 잘 돼야 할 텐데.”

뭐, 로메른과 루나가 하는 일이니 무조건 잘될 테지만.

진은 다시 해먹 위에 누웠다.

‘확실히 짝퉁 세계수가 좋아.’

저 나무 덕에 따뜻했다.

* * *

플로나는 요즘 너무나 행복했다.

엘프들이 진의 영지를 다녀올 때마다 확연히 변화했기 때문이다.

어느새 마을엔 하얀색과 빨간색 머리색을 지닌 이들이 크게 늘었다. 달라진 점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엘프들은 저마다 정령을 하나씩 데리고 다녔다.

게다가 그들이 경험했던 이야기는 정말이지 놀라웠다.

“전 꽃이 되었어요.”

“꽃이요?”

“예. 플로나 님. 꽃이 되어 어머니의 나무의 품에 안기는 기적을 경험할 수 있었어요.”

“굉장하네요.”

“예. 저만 이런 경험을 한 게 아니에요. 처음엔 좀 꺼림칙했지만, 변화가 끝난 뒤에는 모두가 만족했어요.”

“정말 좋았나 보네요.”

“예. 정말 꿈…… 만 같은 경험이었어요.”

“그 정도인가요?”

“예. 벌써 어머니의 나무가 그리워요. 다시 한번 꽃이 되고 싶을 정도예요.”

그 말을 들은 플로나는 정말 기분이 좋았다.

‘모두 자연과 친해지고 있어.’

스스로를 꽃으로 비유하는 게 바로 그 증거였다. 모두 변화하고 있었다.

“흠. 플로나 님.”

“장로님 오셨어요?”

“제 무례를 사과하러 왔습니다. 이 미련한 늙은이는 어머니의 나무를 의심하고 또다시 도망치려 했습니다.”

“괜찮아요.”

“아닙니다. 아니에요. 전 어머니의 나무께 꾸중을 들었습니다. 아집으로 현실을 보지 못했으니 제 잘못이 맞습니다.”

“어머니의 나무께서요?”

“예. 저를 혼내신 뒤, 따듯하게 안아 주셨는데 그분의 따듯함을 전 잊지 못합니다. 어머니의 나무가 확실합니다. 그런 어머니의 나무를 지키고 있는 영주 또한 성자가 확실합니다.”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고집불통 장로조차 영지를 다녀오면 이런 극적인 변화를 보였다.

다만, 작은 문제가 생겼다.

“요즘 따라 쉬는 이들의 외출이 잦네요?”

“쉴 때마다 다들 어머니의 나무를 보러 가고 있습니다.”

“아. 그런가요?”

“예. 어린 엘프일수록 더 자주 가는 것 같은데, 이게 문제가 되진 않을지 걱정입니다.”

“엘프가 어머니의 나무를 그리워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다만, 진 님께 폐가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보고하던 엘프가 그녀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요즘 마을에서 어머니의 나무가 있는 곳으로 이주를 하는 게 어떻겠냐는 이야기가 종종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나오면 놀라야 하는데, 플로나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그랬으면 좋겠네요.”

그녀조차도 어머니의 나무 곁으로 가고 싶었으니까.

‘정말 요즘 좋긴 한데 뭔가 부족해.’

코앞에 어머니의 나무를 두고, 가 보지 못한다는 건 그녀에게 고문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도 쉬고 싶다.’

그녀는 인생 처음으로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쉬어야 어머니 나무를 보러 갈 수 있을 테니까.

* * *

진은 해먹 위에 누워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제 거의 막바지 아니야?’

[어. 엘프들 변화는 끝나 가.]

‘분위기는 어때?’

[좋아. 진 네 말대로 재웠을 때 꿈을 이용한 게 적중했어. 그 유물을 사용할 생각은 어떻게 한 거야?]

자각몽을 꿀 수 있는 보물.

그 보물을 이용해 엘프들에게 맞춤형 꿈을 보여 주었다.

‘뭐, 기왕 자는 거 좋은 추억이라도 남기라고?’

천연덕스러운 진의 말에 로메른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와. 진짜 넌 우리 아니었으면, 악당이 됐을 거야. 아니다. 귀찮아서 악당도 못 했겠지. 뭐가 됐으려나.]

‘……그건 맞지.’

[하여간 도시 분위기는 이쪽 의도대로 흘러가고 있어.]

짝퉁 세계수는 감시만 되는 게 아니었다. ‘감청’마저 가능했다.

그렇게 모은 정보이니 확실했다.

‘그럼 슬슬 집어삼켜 볼까?’

[오. 표현 좋은데?]

진과 로메른이 낄낄거리자, 루나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들렸다.

[신이시여. 이 죄인들을 용서하소서.]

[그래서 빠질 거야? 꿈은 지가 다 만들어 놓고. 성녀 네가 제일 악질이야. 확실히 교단 쪽에 있어서 그런가 남 홀리는 건 최고라니까.]

[……저 마귀를 용서하소서.]

둘의 대화를 들으며 진은 생각을 정리했다.

이 영지엔 결여된 게 있었다.

영지민.

영지라고 하는데 영지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영지민’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괜찮아.’

이제 잔뜩 생길 예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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