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4. 이게 영지냐!
아무리 산골짜기에 있는 영지라고 해도, ‘영지’라면 나름의 기대를 하기 마련이다.
한데, 막상 마주한 영지는 상상을 초월했다.
“이게 영지냐!”
영지 외곽에 도착한 진이 마차 밖을 보며 소리쳤다.
나무, 바위, 나무, 나무, 산.
주위엔 자연이 가득했다.
‘아니. 가득하다 못해 넘치잖아!’
이건 영지가 아니라 야생이었다. 혹시 유배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내가 자연인도 아니고.”
진이 투덜거리자, 로메른과 루나는 좋은 점도 있다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자연의 마나는 확실히 풍부하네.]
[아예 사람 손을 타지 않은 건 아니에요. 그랬다면 마차가 안쪽까지 들어가지 못했을 거예요.]
둘은 괜찮다는 듯 말했지만, 속으면 안 된다. 저건 간신히 쥐어 짜낸 장점이었다.
그런 진의 생각처럼 로메른과 루나의 칭찬은 그걸로 끝이었다.
‘그래. 좋게 좋게 생각하자.’
이런 시골일 줄 모른 것도 아니었고, 어떻게 지낼지 대비책도 만들어 둔 상태였다.
그렇게 진이 마음을 간신히 다잡아 갈 때쯤.
“저건 또 뭐야…….”
진의 눈에 뭔가 보이기 시작했다. 진은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어 눈을 비볐다.
“아…….”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나무 사이로 희끄무레한 형체가 보였다.
그것도 한둘이 아니었다.
‘뭔 놈에 귀신들이 이렇게 많아?!’
외곽에서 조금 안쪽으로 들어오자, 숲에 귀신이 득실득실했다.
마치 공동묘지에라도 온 것…….
‘이거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거야?’
3개의 영지가 감싸고 있는 주인이 없는 숲.
[풍장(風葬)을 한 거 같은데?]
로메른이 고급스럽게 표현했지만, 저걸 해석하면 아주 기막힌 내용이 나온다.
‘왕국에 풍장을 하는 곳 없잖아.’
풍장.
비바람에 시체가 자연스럽게 썩게 만드는 일종의 매장 방법이었지만.
‘그냥 숲에다 시체를 갖다 버린 거잖아.’
왕국에서 사용하는 방법은 아니었다. 시체가 쓰레기처럼 버려졌다면, 당연히 ‘죄수’의 시체인 게 확실했다.
[그건 그렇지. 애초에 풍장이었으면 이렇게 원한이 남은 영혼이 많을 리도 없고.]
‘진짜 여러 가지 의미로 환상적이네…….’
영지는 산골짜기인 것도 모자라서 귀신까지 득실거렸다. 진은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는데, 진과 전혀 다른 기분을 느끼는 정령 놈이 있었다.
[오오! 대장장이잖아? 진! 저 녀석 잡아 올게!]
녀석은 신이 나서 주위를 날아다녔다.
[진! 이쪽에 목수도 있어! 여기 최고야! 안 그래도 마리아 빙의용 영혼들이 필요한 참이었는데.]
그래. 너라도 신나면 된 거지.
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괜찮아요. 진. 영지는 하루가 다르게 달라질 거예요.]
루나는 괜히 성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진의 무너진 억장을 보듬어 주었다.
‘고마워. 솔직히 말하면 이곳이 진짜 나쁘지 않은 것도 알고 있어. 그저 기분의 문제인 거야.’
귀신이 판치고, 산골짜기가 못해 자연 그 자체인 영지. 그 꼴을 보고도 싱글벙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야. 여기 낙원이야. 낙원이라고!]
물론, 싱글벙글하는 정령 놈도 있긴 했지만.
진의 마차가 빠르게 나아갔다.
* * *
영지의 꽃.
영주 저택 혹은 성.
진은 자신의 영주 저택을 바라봤다.
“그래. 끝까지 이래 줘야지.”
저택이 아니라, 오두막이라고 부르는 게 맞았다.
집 주위에는 수레 여러 대가 놓여 있었는데, 다름 아닌 아버지가 미리 보낸 진의 짐이었다.
오두막 안에 넣질 못하니 수레를 통째로 놓고 간 거 같았다.
“주인님. 빠르게 치우면 되겠습니까?”
노바가 마리아와 함께 와서 물었는데, 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아. 치운다고 되는 게 아니야.”
진의 말투는 평온했다.
놀랍게도 이젠 화도 나지 않았다. 그저, 헛웃음이 조금 나왔을 뿐이었다.
‘뭐, 대책을 안 세운 것도 아니니까.’
대책은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노바. 애들이랑 영지 한 바퀴 돌면서 주위 좀 살펴봐. 엘프의 영역이 어디까지인지 꼭 확인하고.”
“예. 주인님.”
일단 노바를 보낸 뒤.
“마리아. 넌 나 좀 도와줘.”
“예. 남작님.”
이쪽은 마리아의 도움만 있으면 충분했다.
“뒷골목에서 사 온 작은 묘목 있지? 그거 좀 꺼내와.”
“예. 바로 가져오겠습니다.”
흡혈귀에게 비싼 값(?)을 치르고 사 온 혈화목(血花木). 이게 바로 준비해 온 대비책이었다.
‘제대로 손봐 놓은 거지?’
[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씨앗을 개조하는 거에 비하면 묘목을 개조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야.]
하긴, 여러 씨앗을 개조하던 걸 생각하면 로메른의 실력은 확실했다.
‘좋아. 그럼 바로 시작하자.’
오두막 앞에 있는 공터.
진은 적당히 위치를 잡았다.
“남작님. 묘목은 어디다 두면 되겠습니까?”
“여기 심을 거야.”
“예. 알겠습니다.”
척하면 척이었다. 마리아는 성령을 움직여 순식간에 묘목을 심었다.
“마리아. 공터 밖으로 나가.”
“예. 알겠습니다.”
이제부턴 진의 차례였다.
진은 단검을 꺼내 손가락 끝에 상처를 낸 뒤, 루나를 불렀다.
‘루나. 부탁할게.’
[예. 잠깐만 기다리세요.]
신기하게도 진의 손가락엔 상처가 났는데도, 피가 흐르지 않았다.
[조금 탈력감이 드실 거예요.]
‘괜찮아.’
진은 괜찮다고 당당히 말했는데, 루나의 ‘조금’과 진이 생각한 ‘조금’은 큰 차이가 있었다.
몸에서 힘이 서서히 빠져나가더니, 순간 다리가 휘청거렸다.
서클에 있는 마나는 물론이고, 체력마저 전부 빠져나간 기분이었다.
[다 됐어요.]
진은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던, 진의 손가락 끝에서 피 한 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그 피가 혈화목에 떨어졌다.
그러자 놀라운 변화가 생겼다.
드드득. 드드드득.
땅이 잘게 떨리고, 기묘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진. 뒤로 물러나야 돼!]
진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공터 밖까지 나와 나무 아래에 털썩 주저앉았다.
“남작님. 괜찮으십니까?”
진은 적당히 고개를 끄덕인 뒤, 눈앞의 상황에 집중했다.
나무의 변화는 놀라울 정도였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허리까지도 오지 못하는 작은 묘목이었는데, 어느새 진의 키만큼 커져 있었다.
[아직 큰 것도 아니야. 이제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할 거야. 난 나무 쪽에 가 있을게.]
로메른은 진의 써클에서 나와 혈화목 쪽으로 날아갔다.
[혈화목이 성장을 할 만큼 충분한 피를 줬으니, 나머지는 로메른에게 맡기시면 돼요. 위험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혈화목은 사람의 피를 먹고 성장하는 나무다.
‘피를 먹는 나무.’
흡혈목이라고 불리는 이 나무는 한 번 피를 먹기 시작하면, 꽤 위험하게 변한다. 마치 생물처럼 사람과 동물의 피를 탐한다.
때문에 이 나무는 흡혈귀의 엄중한 관리를 받는 물건이었다.
물론, 진은 쉽게 구매한 것 같지만, 쉽게 구한 게 아니었다.
진이 ‘예비 성자’란 직책을 지니고 있고, 흡혈귀 쪽에도 빚이 있으니 손쉽게 손에 넣은 것이었다.
‘만약, 그게 아니었으면…….’
[구하기 쉽지 않았을 거예요.]
그녀의 말대로 구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솔직히 이런 끔찍한 물건은 구하기 쉽지 않아야지.’
인간의 피를 오랫동안 먹이면 ‘열매’가 열리는데, 이 열매가 흡혈귀 사이에선 ‘진미’로 불린다.
‘농축된 피가 열매로 열리는 나무라니…….’
흡혈귀들의 금지된 ‘사치품.’
물론, 진은 이 나무를 그렇게 쓸 생각은 아니었다.
이 나무는 다양한 용도가 있다.
‘생각대로 될지는 모르겠지만.’
진은 혈화목을 바라봤다.
혈화목은 조금 전과 그다지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드드득. 드드드득.
소리는 더 커졌고, 땅의 진동도 더 커졌다. 대체 이게 무슨 소린지 금방 확인할 수 있었다.
촤-악!
땅속에서 뿌리가 튀어나왔다.
마치 채찍처럼 뿌리가 움직이더니, 이내 주위에 있는 나무들에 뿌리를 박아 넣기 시작했다.
[역시! 내 개조가 틀릴 리 없다니까!]
로메른의 신난 목소리가 진이 있는 곳까지 들려왔다. 로메른이 개조한 혈화목은 더 끔찍하게 변했다.
파스스스스.
뿌리를 박아 넣었던 나무가 바싹 마르더니, 이내 가루처럼 부서지기 시작했다.
이 혈화목은 피만 먹지 않았다.
다른 ‘나무’도 먹어치웠다.
드드드드득-
혈화목이 탐욕스럽게 주위 나무를 먹어치워 갔다.
‘끔찍하다, 끔찍해. 꼭 저렇게 만들어야 했나?’
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게, 주위 나무를 먹어치우던 혈화목은 어느 순간 급격하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세, 세상에…….”
그 모습은 냉정 침착의 대명사 마리아조차 깜짝 놀랄 정도였다.
쿠득. 쿠득.
드드드득. 드드득.
진의 허리춤 높이밖에 되지 않던 나무는 어느새 이 숲에서 가장 큰 나무가 되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주위에 남아 있는 나무가 별로 없었다. 커다란 나무는 이미 저 혈화목에 다 먹힌 상태였다.
그렇게 성장한 혈화목은 조금 신기한 모양이 되었다.
‘나무가 아니라 나무 모양 탑이라고 해도 될 거 같은데…….’
진의 감상처럼, 나무는 마치 탑처럼 창문과 출입구가 뚫려 있었다.
‘제대로 만들어진 거 같은데?’
이 나무의 첫 번째 용도는 다름 아닌 ‘영주 저택’이었다.
‘로메른. 구경해도 돼?’
[어. 와도 돼. 내부는 얼추 완성된 거 같은데? 계획보다 훨씬 좋아. 아까 잡은 영혼 중에 건축가도 있었거든. 그 녀석 도움 좀 받았어.]
진의 억장을 무너트렸던 귀신들이 도움이 됐다니,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마리아. 따라와.”
“예. 남작님.”
진은 마리아와 함께 나무에 가까이 갔다.
여전히 진동을 내며 조금씩 커지고 있었지만, 아까처럼 급격한 성장은 로메른 말대로 끝난 거 같았다.
진은 나무 안으로 들어왔다.
‘자신 있어 할 만했네.’
내부의 모습은 신기할 정도였다.
마치 인간의 손이 닿은 것처럼 벽은 맨질맨질했고, 각 구역과 층이 확실히 나뉘어 있었다.
“꼭대기 층에 내 방이랑 집무실이 있을 거야. 밖에 있는 짐 정리하면 돼.”
“…….”
한데, 마리아는 이렇게 뚝딱 집이 나올 거라곤 상상도 못한 모양이었다.
넋 놓고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마리아.”
진이 다시 한번 마리아를 부르고 나서야.
“죄, 죄송합니다.”
그녀는 정신을 차렸다.
진은 그녀에게 간단하게 지시를 내린 뒤.
“내 방을 제외하면 각자 원하는 곳을 선택하면 돼. 괜히 작은방 잡지 말고, 연구 도구까지 전부 집어넣을 수 있는 큰 곳으로 잡아.”
“예. 알겠습니다. 남작님.”
그리고 진은 그녀에게 한 가지 소식을 더 알려 주었다.
“아 그리고, 마리아 넌 이제부터 이 탑의 총관이야. 총관이 어떤 자리인지는 알지?”
그녀는 진의 말에 숨을 들이켰다. 총관이 어떤 자리인지는 그녀가 더 잘 알고 있었다.
더는 고용인의 신분이 아니었다.
그녀가 꿈꿨던 ‘시녀장’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자리. 이제는 정식으로 진의 ‘가신’이 된 것이다.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마리아는 감정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전부를 숨길 순 없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지금처럼만 해.”
진은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 밖으로 나왔다. 안에서 기쁨의 울음소리가 들렸지만, 진은 모른 척해 주었다.
‘로메른!’
진은 나오자마자 로메른을 불렀다. 녀석은 나무 위쪽에서 뽀르르 날아왔다.
[어때? 안에 봤어?]
‘좋던데?’
[진. 나 로메른이야.]
진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다음 단계 시작할까?’
[좋지! 오늘 느낌 좋아.]
지금부터 할 일은 정말 간단한 아이디어에서 시작된 계획이었다.
로메른의 지식과 빛의 힘으로 악령을 성령으로 개조했다.
그럼 혈화목을 악령처럼 개조하면 어떻게 될까?
물론, 이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악령을 바꾸는 거랑 혈화목을 바꾸는 거랑은 정말 많은 차이가 있어. ‘근원’을 바꾸는 거긴 하지만, 악령은 영체고 혈화목은 식물이잖아.]
영혼의 기운을 바꾸는 것과 나무 자체를 바꾸는 건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이쪽은 회귀자가 둘이었다.
[제가 도와 드리면 어때요? 진의 혈액을 나무에 먹이고 내부를 뒤바꾸면 될 거 같기도 한데요.]
[오. 혈화목도 결국 ‘피’라는 근원을 갖고 있으니까 가능성 있을 것 같은데? 아니. 될 거 같아.]
결국 될 것 같다는 결론이 나왔지만, 이걸 가능하게 만들려면 엄청난 조건이 필요했다.
흑마법의 극의에 도달한 빛의 정령과 성녀급 능력이 있는 피의 정령.
이 세상에서 오직 진만 만들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근데, 악령은 성령이 됐잖아. 그럼 혈화목은 뭐가 되는데?’
[혈화목에는 피를 탐하는 자아 비슷한 게 있으니까, 자아를 지닌 신성한 나무가 되겠지.]
이 대륙에 신성한 나무는 몇 가지가 있지만, ‘자아’를 지닌 신성한 나무는 딱 하나뿐이었다.
‘세계수?’
[어. 우리가 짝퉁 세계수를 만들어 내는 거야.]
엘프들에게 세계수는 하나의 ‘신앙’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진의 영지에 짝퉁 세계수가 생기면?
[고놈들, 못 참을걸?]
엘프가 진의 영지에 알아서 걸어 들어올 것이다.
‘솔직히 찾아가서 문제 해결해 주는 건 옛날 방식이지.’
[그렇지! 이제는 찾아오게 만들어야지.]
후작과 백작 쪽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 우선 등 뒤에 있는 엘프들 문제부터 해결할 생각이었다.
‘시작하자.’
짝퉁 세계수 계획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