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3. 내가 양보한 거라니까!
자작은 파티라도 열 기세였지만, 진은 정중하게 거절했다.
“괜찮습니다. 자작님.”
다행히 여태 보여 준 게 있어서인지 자작은 진의 거절을 예상이라도 한 듯 받아들였다.
“역시, 성자님이십니다.”
저 ‘역시’에는 정말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여기서
진은 그저 빙그레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곧장 자작가에서 나온 건 아니었다.
“저, 자작님.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한 가지가 아니라 더 많아도 괜찮습니다.”
자작은 얼른 말해 보라는 듯 진을 바라봤다.
“따님을 잠깐 보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자작이 딸을 얼마나 아끼는지 진은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좋은 관계를 쌓았다고 해도 조심해야 했다.
“당연히 가능합니다. 오히려 제 딸을 봐주신다니 감사합니다. 성자님.”
한데, 그런 진의 생각과는 달리 그는 치료해 준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흔쾌히 허락한 걸 넘어, 감사를 표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진은 자작의 딸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아빠.”
그녀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자작은 후다닥 달려가 그녀에게 말했다.
“누워 있거라.”
몸을 일으키던 그녀가 다시 침대에 누웠다.
“성자님께서 널 잠깐 만나고 싶다고 하셨단다.”
“성자님이요?”
그녀의 시선이 진에게 닿았다.
“아!”
그녀는 진의 얼굴을 보자마자 감탄을 터트렸다.
“악마를 물리쳐 주신 분이시군요.”
그녀는 선망의 눈길을 담아 진을 바라봤다.
“정말 감사해요. 성자님 덕에 저는 악마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요.”
그녀는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는데, 진이 보기엔 내숭도 저런 내숭이 없었다.
진은 자작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잠시 둘이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괜찮으십니까?”
“예. 성자님. 전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자작은 밖으로 나갔다.
진은 의자를 가져와 침대 옆에 앉았다.
“정말 감사해요. 성자님.”
그녀는 수줍게 말하며 배시시 웃었는데, 진은 그녀의 말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딱딱한 어조로 질문만 할 뿐이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예. 물어보세요.”
“악마를 소환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 건 누구입니까?”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전 악마에 씌었던…….”
그녀는 당혹스럽다는 표정으로 주절주절 핑계를 이어 갔는데, 진은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 않았다.
“누구입니까.”
진이 다시 한번 되묻자 그녀가 입을 다물었다. 진이 모든 걸 알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거 같았다.
“성자란 말이 거짓이 아닌 모양이네요.”
“예비 성자입니다.”
어느새 그녀의 표정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오히려 이쪽이 억지웃음을 짓고 있을 때보다 나은 거 같았다.
“우연이었어요. 제가 도서관에서…….”
그녀의 이야기는 굉장히 뻔했다.
아름다움을 위한 갈망.
그 갈망을 위해 도서관을 뒤지다, 우연히 도움을 주는 자를 만난 뻔하디뻔한 이야기.
진이 원하는 건 이런 뻔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지식의 해방을 위하여.”
진이 나지막이 중얼거리자, 그녀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녀는 황급히 진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죠?”
그녀의 질문에 진이 해 줄 말은 하나뿐이었다.
“이제 세상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진은 그녀가 쓰러진 동안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었다.
‘지식의 해방’이라는 위험한 단체가 발견되고, 악마까지 소환한 일련의 과정을.
“……그, 그런.”
“왜 그러십니까? 그들에게서 지식이 해방되면 누구나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들었습니까?”
진의 말은 정답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피해자입니다. 만약 당신을 이용해 악마를 소환할 생각이었다면, 자작령의 모두가 죽었을 겁니다.”
물론. 그럴 일은 없었다.
그녀는 정식으로 계약했고, 대가를 지불할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팩트가 아니었다. 그녀를 피해자의 위치에 올려야 했다.
왜 그녀를 피해자로 만들어야 할까? 그 해답은 곧장 확인할 수 있었다.
“맞아요. 전 피해자에게요. 그들에게 이용당한 거예요.”
상황을 파악한 그녀는 곧장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더니.
“제게 그 정보를 알려 준 자는 도서관 사서였어요.”
누가 지식의 해방인지 술술 불기 시작했다.
생각대로 정말 영악한 여자였다.
“역시, 당신은 피해자가 확실합니다. 그들에 관한 정보를 전부 주시면, 제가 그들을 처리하겠습니다.”
“예. 그러니까…….”
그녀는 자신의 기억에 있는 모든 정보를 진에게 술술 불기 시작했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피해자였으니까.
* * *
진은 자작의 감사 인사를 받으며 자작가를 나섰다.
“좀 천천히 가자.”
“예. 주인님.”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이걸로 확실해졌네.’
세상에서 벌어지는 여러 일들은 ‘지식의 해방’이란 놈들의 손길이 닿아 있었다.
진의 말에 루나가 입을 열었다.
[이건 최악의 상황이에요. 저희가 모르는 적이 있을 거라는 건 상정하지 못했어요.]
[하긴, 우리가 세운 모든 계획은 ‘사건’에 집중했지 그 뒤에 적이 숨어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루나와 로메른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 말했지만, 진이 보기엔 그리 나쁜 상황이 아니었다.
‘오히려 다행 아니야? 숨어 있는 적이 진짜 무서운 거잖아 어쨌든 우린 적이 있다는 걸 확인했잖아.’
[하긴 모르고 당하는 것보단 훨씬 낫긴 하지.]
‘게다가, 최악이라고 하기엔 우리가 잘해 오지 않았어? 적을 양지로 끄집어냈잖아.’
[맞아요. 악마를 소환해서 모두의 적을 만들었으니까요.]
덕분에, 녀석들은 거의 대륙 공적이 되어 각국에 추적을 받고 있었다.
‘날 바로잡아 죽이지 못하는 이유기도 하지.’
오랫동안 그들이 작업해 놓은 것을 진이 엉망으로 만들었는데도, 그들은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못했다.
‘뭐, 다른 이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녀석들이 쉽게 못 움직이는 건 확실해.’
[그건 맞아. 반응이 없어도 너무 없어.]
녀석들이 반응이 없다고 속상해 할 필요 없다. 반응이 없는 지금이야말로 기회였다.
‘어차피 어떤 사건이 문제가 될지는 알고 있잖아?’
[그렇지?]
이곳이 최고의 위치라고 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이 주변에서 다양한 사건들이 일어난다.
‘이 주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해결할 생각이지?’
[당연하지.]
만약, 그 사건들이 지식의 해방과 연결되어 있다면?
지금처럼 범인 색출이 가능하다면?
‘사냥 시간이나 마찬가지 아니야?’
[지식의 해방을 사냥한다?]
‘그렇지.’
[그럼, 일이 너무 많아지지 않아?]
‘그러니까 지원을 받아야지.’
그것도 공짜로 든든하게 빌릴 수 있는 곳이 있었다.
[아! 뭔 말인지 이해했어.]
로메른도 이해한 모양이었다.
계획이 섰으면 곧장 움직여야 하는 법이다. 진은 곧장 입을 열었다.
“도시 뒷골목 쪽으로 가자.”
“예. 주인님.”
진의 마차가 도시의 뒷골목을 향해 나아갔다. 그것도 일반적인 뒷골목이 아니었다.
뒷골목 그 안쪽.
일반인들은 모르는 곳으로.
물론, 뒷골목이라고 마차 근처에 오는 사람은 없었다. 접근하기엔 꽂혀 있는 깃발이 너무 살벌했으니까.
* * *
뒷골목에 있다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화려한 술집. 그 술집의 문을 열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
딸랑. 딸랑.
문을 여는 소리와 함께, 모두의 시선이 모인다. 그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카운터에 가서 앉았다.
“제일 비싼 와인으로.”
이제 막 성인이 된 듯한 앳된 목소리.
그는 다름 아닌 진이었다.
“손님. 가게를 잘못 찾으신 거 같습니다.”
바텐더는 정중하게 거부했지만, 진은 고개를 저었다.
“피 냄새가 이렇게 나는 걸 보면 잘 찾아온 거 같은데?”
피 냄새란 이야기에 바텐더의 표정이 변했다. 손님 중 몇몇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마치 진을 둘러싸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비를 걸러 온 거 아니야. 흡혈귀 사냥꾼은 더더욱 아니고.”
그 말에도 녀석들은 포위를 풀지 않았다. 그래도, 효과가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럼, 무슨 용건으로 방문하신 겁니까?”
바텐더는 굳은 얼굴로 진에게 물었다.
“내 이름은 진 세인트. 예전엔 진 플린트란 이름이었어.”
그 이름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예비 성자……?”
진의 명성 때문에 놀란 이도 있었지만, 진짜 놀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신분을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흡혈귀는 진에게 빚이 하나 있었다. 누명을 벗겨 주고, 사태마저 수습해 주었다.
진은 신분패를 그에게 건넸다.
그가 신분패를 확인한 뒤, 고개를 끄덕이자 뒤에 있던 이들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죄송합니다. 잘못 찾아오신 손님이신 줄 알았습니다.”
바텐더의 태도는 180도 변했다.
녀석은 와인잔에 와인을 따랐다. 고작해야 술을 내준 거지만, 이건 손님으로 인정한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진은 와인을 한 모금 한 뒤.
“자작령에서 가장 높은 분은 누구야?”
진은 그 질문을 던진 뒤, 옆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분?”
아무도 없던 진의 옆자리에 어느새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내 기척을 느낀 건가? 소문대로 대단하군.”
쇠로 긁는 듯한 목소리도 특이했는데, 더 특이한 건 그의 얼굴이었다. 그는 새빨간 가면을 쓰고 있었다.
“진 세인트입니다.”
“이곳의 책임자다.”
그는 그저 자신을 책임자라 소개했다.
‘뭐야 저 가면은?’
[흐으으음. 저 가면 어디서 본 기억이 나는데. 루나, 넌 어때?]
[전 기억이 나질 않아요.]
[그럼, 내 개인적으로 연관이 있단 소린데…… 하여간 나쁜 기억은 아닌 거 같은데?]
이 정도 정보만 해도 충분했다.
“몇 가지 구매하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우리와 거래하는 게 어떤 의미인진 알고 있나?”
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은 화폐가 좀 이상했다.
골드나 보석은 그다지 의미가 없었다. 진은 품속에서 물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가치를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알고 있었군.”
그는 물주머니를 받아, 뚜껑을 열었다. 고작 뚜껑을 열었을 뿐인데.
“흐읍!”
그는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켜며, 뚜껑을 황급히 닫았다.
한데, 그 잠깐 사이 물주머니에서 퍼진 향기가 가게 곳곳으로 퍼졌다.
“크르르.”
“샤아아아!”
평범해 보이던 사람들이 모두 송곳니를 꺼낸 채 물주머니 쪽을 바라봤다.
‘이거 괜찮은 거 맞아?’
저 물주머니에 담긴 피는 진의 피가 아니었다. 맹물을 루나와 로메른의 힘으로 피로 변환한 물건이었다.
[효과 끝내주지?]
‘아니. 너무 끝내주잖아!’
흡혈귀들의 눈이 번들거렸다.
[그럼 내가 만들었는데 효과가 당연히 끝내주지. 당연한 거 아니야?]
[성자의 피는 이 정도는 되는 게 당연해요.]
‘아니. 지금 상황 심각한 거 아니야?’
[괜찮아. 책임자랑 있는데 뭔 걱정이야.]
‘그게 무슨…….’
둘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는데, 그 이유가 있었다.
책임자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다들 송곳니 집어넣고 앉아라.”
고작 그 말로 통제가 되나 싶었는데, 번들거리던 눈이 원래대로 돌아오고 흡혈귀들은 곧장 자리에 앉았다.
“미안하군. 그대가 너무 대단한 걸 가져와서 그렇다. 그대의 피인가?”
진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미소만 지었다.
“그렇군.”
그 미소를 본 책임자는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원하는 게 무엇인데 이 피를 가져온 것이지?”
“키울 수 있는 혈화목(血花木)이 필요합니다.”
“……키울 생각인가?”
“예.”
“위험할 텐데?”
그의 말에 진이 대답했다.
“지금부터 사냥할 생각이라, 대비 좀 해 놓을 생각입니다.”
“사냥?”
“지식의 해방. 그놈들이 벌여 놓은 일을 해결하고, 그 뒤에 숨어 있는 녀석들을 사냥할 생각입니다.”
“호오.”
그는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흡혈귀의 성격을 딱 말해 주는 말이 있었다.
[흡혈귀는 은혜는 잊어도 원한은 절대 안 잊어.]
원한은 절대로 안 잊어버리는 이들.
“혈화목을 팔겠다. 대신 조건이 있다.”
“어떤 조건입니까.”
“지식의 해방. 그자들을 우리가 사냥하고 싶다.”
“저는 문제만 해결하고, 지식의 해방 녀석들을 넘기란 말씀이십니까?”
“그래. 제일 맛있는 부분을 양보해 줬으면 한다.”
맛있는 부분?
아니었다. 진에겐 귀찮고, 여러 가지 절차가 필요한 매우 곤란한 일이었다.
물론, 진짜 속마음을 내색할 필요는 없었다.
“절 몰이꾼으로 쓰실 생각이십니까?”
사냥을 위해 사냥감을 몰아오는 역할.
‘몰이꾼.’
얼핏 보면 진의 입장과 비슷했다.
“싫은가?”
진은 잠시 고민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군요. 양보하겠습니다. 대신, 정보는 확실하게 뽑아 주셨으면 합니다.”
“이 정도 양보해 줬으니 우리도 보답을 해야겠지. 정보는 확실하게 뽑아 주겠다.”
진이 도움을 받는 처지인데, 둘의 대화만 들어 보면 진이 양보한 것 같은 상황이 펼쳐졌다.
“그대의 배려는 우리가 잊지 않겠다. 원한을 갚을 기회를 줘서 고맙다.”
앞서 말했든 공짜로 든든하게 흡혈귀라는 고급 병력을 빌릴 수 있었다.
‘사냥개를 구했으니.’
이제 사냥 실력을 볼 차례다.
“후. 첫 번째 목표부터 알려 드리겠습니다. 도서관 사서로 자작가에…….”
흡혈귀와 성자의 기묘한 사냥 동맹이 체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