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1. 이 몸 등장!
“성자님, 언제나 행하고자 하는 일은 하시면 됩니다. 항상 신께서 인도하실 겁니다.”
“예. 추기경님. 언제나 감사합니다.”
“허허. 아닙니다. 이 노구가 도움이 되어 다행입니다.”
영감님과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헤어졌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일만 남아 있었다.
집까지 돌아가려면 꽤 시간이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폐하께서 워프 게이트를 개방해 주셨습니다. 원하시는 곳을 선택해서 가실 수 있습니다.”
정말 왕궁에서 와서 아낌없이 받고 가는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잠시만 대화를 나누고 곧 출발하겠습니다.”
덕분에, 여기서 바로 말릭을 보내도 될 거 같았다.
“말릭.”
“예. 세인트 남작님.”
“아까 줬던 열쇠, 가지고 있지?”
“그렇습니다.”
녀석은 품 안에 넣어 두었던 열쇠를 꺼냈다.
“돌려드리면 되겠습니까?”
진은 고개를 저었다.
“네가 내 부탁을 들어줬으니. 이번엔 내가 네 부탁을 들어줄 생각이야.”
무표정하던 녀석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
뭐가 역시야 역시는.
진은 목 끝까지 튀어나온 말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
[필레트의 골짜기. 그곳으로 가라고 해.]
진은 로메른의 말을 전했다.
“그곳으로 가면 끝입니까?”
“어. 그곳에 가면 길이 보일 거야.”
진은 그렇게 말하며 열쇠를 가리켰다.
“그게 봉인된 곳을 안내해 줄 거야.”
녀석을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재미있겠군요.”
“다른 건 안 물어봐?”
“괜찮습니다. 모르고 겪는 게 더 즐겁습니다. 오히려 말해 주지 않으셨으면 좋겠군요.”
와. 미친놈이다. 미친놈.
저런 놈인 걸 알고 있는데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시간은 한 달 정도면 충분할 거야. 그보다 늦으면 죽은 줄 알게.”
녀석은 진의 말을 듣더니.
“저번에 제가 했던 이야기, 기억하십니까? 그때와 제 대답은 같습니다. 저흰 다시 만날 겁니다.”
이딴 말을 했다. 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
“그래. 그렇다 치자.”
로메른의 말대로라면 살아 돌아오기 힘든 곳이다.
왠지 이 녀석이라면 돌아올 거 같았지만, 돌아오면 또 어딘가로 보내면 될 일이었다.
‘녀석이 믿을 만한 스타일은 아니지만.’
저 녀석이 원하는 걸 계속 던져 주면 이쪽의 의도대로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집에 가자.’
쉴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일단 가서 설명부터 해 드리는 게 우선이었다.
* * *
돌아가는 길은 화기애애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주인님.”
노바와 아이들의 입은 귀에 걸려 있었다. 녀석들이 받은 기사 작위는 단순한 작위가 아니었다.
야만인에서 왕국민으로 인정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선례가 생긴 거지.’
처음이 어려운 법이지, 선례가 생기면 앞으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이건 하나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였다.
“너희가 잘해서 받은 거야.”
적당히 대꾸해 주었지만, 녀석들은 감격에 찬 표정으로 진을 바라봤다.
‘어!?’
심지어, 언제나 묵묵했던 살바람은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됐어! 오그라드는 거 할 생각하지 말고, 빨리 집으로 가자.”
워프게이트를 이용해 남작령과 최대한 가까운 곳으로 이동했고, 나머지는 마차로 이동한 덕에 집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집으로 가지 말고, 일단 아버지 뵈러 가자.”
카이얀 대요새를 갈 때, 허락을 받고 갔을까?
‘전혀 아니지.’
애초에 허락해 주시지 않을 걸 알고, 야밤에 도주하듯 몰래 출발했다.
‘소식을 들으셨을 수도 있으니.’
얼른 가서 죄송하다고 싹싹 빌어야 했다.
한데, 막상 도착했는데 분위기가 묘했다.
“진! 왔구나!”
남작은 환한 얼굴로 진을 환영해 주었다.
“아버지?”
“허허. 네가 큰일을 했구나. 역시 저번에 내가 했던 말이 맞았다. 이 아비가 널 너무 가둬 두려고 했던 거였어.”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다.
마치 어떻게 된 일인지 이미 알고 계신 것 같은 분위기였다.
“혹시 소식 들으셨어요?”
“들었지. 내가 아들 덕에 폐하께 감사패를 받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단다. 교구장님께서 오셔서 다 설명해 주셨단다.”
“……감사패요? 심지어 교구장님이 설명해 주셨다고요?!”
뭐지?
이곳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진은 도움을 요청하듯 큰형을 바라봤는데.
“진. 네가 정말 자랑스럽다.”
큰형의 반응도 비슷했다.
“형?”
“플린트 가문의 명예를 드높여 주어 고맙구나.”
진이 어떤 일이 벌어진 건지 알게 된 건, 그 뒤로도 한참이나 칭찬을 들은 다음이었다.
국왕이 보낸 편지엔 도장이 2개 찍혀 있었다.
국왕과 추기경.
‘설마 영감님이 이것까지 준비하신 거야?!’
이는 그리 단순한 선물이 아니었다. 명예에 죽고 사는 귀족에겐 금은보화보다 값진 선물이었다.
‘물론, 나한텐 다른 의미지만.’
집에 와도 곤란한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하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역시 영감님!’
영감님은 진을 칭찬했지만, 진이 보기엔 영감님이야말로 빛과 소금이었다.
‘다행히 별일 없이 끝났네.’
그렇게 한숨 돌렸을 때, 애써 외면하고 있던 일이 남작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래. 영지로는 언제 가 볼 생각인 게냐? 귀족은 그 의무를 다해야 하는 법이다.”
엄격, 근엄, 진지한 남작의 표정.
“조금만 쉬었다가…….”
“어허! 어찌 영주가 되어서 태만하여질 생각을 한단 말이냐.”
아, 아부지!?
저 귀염둥이 막내입니다!
이런 항의는 해 보지도 못했다.
“이미 네가 살고 있던 집의 짐은 전부 그쪽으로 보냈다.”
“……벌써요?”
이미 진이 가는 걸로 확정된 상태였다.
“진. 영주란 그런 존재다.”
솔직히 진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거기 영지민 없대요!’
이 말을 하고 싶었지만, 남작의 표정을 보니 그런 말은 할 수 없었다.
‘저런 표정까지 지으시는데…….’
남작의 근엄한 표정엔 뒤엔 자랑스러움과 대견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
“예. 바로 가 볼게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진의 말에 남작이 진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나지막이 말했다.
“이 아비는 언제나 네가 걱정이구나. 이번 여행에서 또 얼마나 자신을 희생했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구나. 그것이 네 길이라면 말리지 않으마. 다만, 이 아비보다는 훨씬 오래 살아야 한다. 너의 가문이 있으니 그 가문을 위해서라도.”
진심 어린 남작의 말과 따듯한 아버지의 품. 왠지 진은 눈물이 날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고마워요. 아버지.”
“내가 더 고맙다.”
그렇게 가족 간의 진심이 담긴 대화가 한동안 이어진 뒤.
‘후. 그럼, 출발해 볼까.’
진은 마리아를 데리고 새로운 영지를 향해 출발했다.
* * *
진의 여행은 매우 평온했다.
‘당연한 일이지.’
진의 마차에는 3개의 깃발이 메여 있었다.
왕국 감찰부, 교단, 귀족.
진이 ‘공식적으로’ 가지고 있는 직책들이었다. 깃발을 걸어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덕분에, 사람들은 진의 마차를 신기하게 쳐다봤다.
“대체 왕국 감찰부이면서, 교단에 속하면서, 귀족인 사람이 누구야?”
궁금해하긴 했지만, 대놓고 물어보거나 마차를 막지는 못했다.
그야말로 바다를 가르는 모세처럼, 진의 마차가 등장하면 길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
‘이게 권력의 달콤함인가.’
그렇게 영지에 거의 다 와 갈 때쯤, 마차가 멈춰 섰다.
“주인님. 누군가 길을 막고 있습니다.”
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체 어떤 놈들이길래 이 마차를 세워?’
다른 건 몰라도 ‘감찰부’ 깃발은 귀족이라면 연관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거기에, 귀족이라도 손대기 힘든 교단의 깃발까지 있는데 멈춰 세운다?
‘이건 미친 거지.’
아니면 미친 짓을 할 이유가 있거나.
“혹시 예비 성자님의 마차가 맞습니까?”
다행히 길을 막은 이들은 후자였다. 이유가 있기에 여기서 진을 기다린 것이다.
슬쩍 보니, 저 기사들은 최소 3일은 밖에서 진을 기다린 거 같았다.
‘허. 길에 아예 자리를 잡았네.’
모닥불과 녀석들의 짐을 보니, 아주 작정하고 나온 거 같았다.
‘자작 쪽인 거 같지?’
[확실해. 그쪽 아니면 널 기다릴 사람이 있겠어?]
‘그건 그렇지.’
이들이 나와서 기다릴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지만, 도움을 요청할 거란 건 알고 있었다.
만약 기다리지 않았다면, 직접 찾아갈 생각이었다.
“가까이 오라고 해.”
“예. 주인님.”
진의 명이 떨어지자 그쪽 기사 중 하나가 다가왔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들이 무례한 건 알고 있으나 그럴 만한 사정이 있습니다.”
알고 있다. 안 그래도 오면서 로메른과 계속 이야기했다.
‘처음으로 부제 임무를 하기 위해 서류를 뒤적였을 때였나.’
-악마에 빙의된 소녀. 현재 봉인 중.
-구마(驅魔) 능력을 지닌 철급 이상의 부제.
이런 임무가 있었다.
철급이라고 무시하면 안 된다.
‘구마(驅魔) 능력’은 굉장히 드물다.
[말이 구마지 저거 완전 깡패야. 정식 계약된 걸 웬 사제놈이 와서 강제로 깨부수는 거라니까? 악마가 구마 사제들 괜히 죽이는 게 아니야.]
악마와 인간의 계약을 강제적으로 파기하는 ‘능력’.
그게 바로 구마 능력이었다.
이건 힘이 강하다고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닌 특수한 능력이 필요한 일이다.
“자작가에서 나오신 거 맞습니까?”
“헛! 그걸 어떻게…….”
리액션이 굉장한 기사였다.
“구마가 필요한 게 자작님의 따님이셨습니까?”
기사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진을 바라봤다.
“사정은 알고 있습니다. 안 그래도 영지에 들르기 전에 자작님을 찾아뵈려고 했습니다.”
“과연 대단하십니다! 교구장님도 실패하시면서 철급에서 은급으로 상승됐는데, 이렇게 흔쾌히 찾아주시다니요!”
이제는 감탄한 얼굴로 진을 바라봤다.
한데, 생각지도 못한 정보가 있었다.
‘은급으로 상승이 됐다고?’
이건 상상 이상으로 강한 악마란 뜻이었다.
뭐, 그렇다고 문제가 될 건 없었다.
오히려 더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예비 성자’의 명성은 올라갈 것이다.
“타시죠. 빠르게 가겠습니다.”
진의 말을 이해한 듯 그 기사는 다른 기사들에게 소리쳤다.
“3번대 정리하고 와라! 난 먼저 복귀한다!”
그렇게 기사와 함께 동행이 시작됐다.
* * *
마차 안에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지만, 그건 기사의 입장이었다.
진은 굉장히 바빴다.
어떻게 해결할지 의논이 필요했다.
‘가능해?’
[계약 파기?]
‘어.’
[어림도 없지. 자기가 원해서 계약해 놓고, 우리가 그 똥을 치우라고?]
하긴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단지 실수라고 하기엔 악마와 계약하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충동적으로 저지를 수 있는 일은 아니지.’
[그렇지. 뿌린 대로 거두는 거야. 부당 계약이었다면 악마의 목이라도 뽑았겠지만, 정상 계약이라면 난 파기 못해 줘.]
[저도 동의해요. 자진해서 계약을 하고 그 뒤처리를 남에게 맡기다니요.]
심지어 루나마저 동의를 표했다.
이야기하는 것만 들으면 전혀 도와줄 필요가 없었는데, 그래도 가는 이유가 있었다.
‘어쨌든 살리긴 해야 하지 않아?’
[그건 그런데…… 아 골치 아프네.]
흑마법사가 악마와 계약했다면 이해를 했을 것이다. 한데, 이 일은 다르다.
뜬금없이 귀족가 영애가 악마와 계약했다. 이건 이해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었다.
‘이런 위험한 지식이 어디서 났는지는 예상이 가긴 하지만.’
원래라면 우연이 겹친 사고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식의 해방’을 만난 이상 그렇게 생각하는 건 멍청한 짓이다.
진의 원래 성격대로라면 얽히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겠지만.
‘이미 너무 얽혔어.’
녀석들에게 거대한 똥까지 투척했는데, 인제 와서 연관 없기를 바라는 건 불가능했다.
‘무시가 안 되면 뿌리를 뽑아야지.’
[그렇지. 우리가 움직일 때마다 녀석들이 턱턱 걸리는 걸 보면, 그놈들 내버려 두면 우리가 위험해.]
마차는 빠르게 자작령을 향해 나아갔다.
* * *
자작령의 내성을 들어오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안 그래도 마차에 걸린 깃발 때문에 빠른데, 안에 타고 있는 기사는 나름 자작령에서 끗발을 날리는지 더 빨라졌다.
그렇게 순식간에 내성까지 들어올 수 있었다.
“예비 성자님을 환영합니다. 뒤퐁 자작입니다.”
환영한다는 말과는 달리, 그의 표정은 초조해 보였다.
“자작님. 죄송합니다만, 대화는 뒤로 미루겠습니다. 빠르게 환자를 보고 싶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자작은 감격한 표정으로 진에게 말했다. 그의 태도만 봐도, 딸 사랑이 얼마나 지극한지 알 것 같았다.
“다들 대기하고 있어.”
진은 그 말을 한 뒤, 곧장 자작과 함께 이동했다.
저택의 가장 안쪽 방.
아직 대낮인데도, 마치 햇빛이 들어오지 못하는 것처럼 복도가 어두컴컴했다.
“저 안쪽 방입니다. 한데, 교구장님께서 봉인하셨는데 교구장님을 모셔오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예전이면 몰라도 지금은 상관없었다.
“예.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 역시…….”
진의 즉답에 그의 표정엔 신뢰가 가득해졌다.
‘봉인은 어때?’
[그다지 어려운 건 아니에요. 그냥 들어가시면 돼요.]
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철컥.
문이 열렸다.
키에에에엑-!
문 안쪽에서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리, 리아가, 저런 끔찍한 소리를…….”
자작은 절망이 가득한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키에에에엑-!
안에서 끔찍한 소리만 계속 들려올 뿐이었다.
진은 자작의 어깨에 손을 올려 둔 뒤 신성력을 부였다.
“자작님.”
불안정하던 자작의 표정이 제대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제가 나오기 전까지 절대로 문을 여시면 안 됩니다.”
“아, 알겠습니다. 제발, 제 딸을 부탁드립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진이 문을 열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쿵.
진이 들어가자마자 문이 닫혔다.
“……성자님. 제발 제 딸을.”
자작에겐 이미 진이 ‘성자’나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