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9. 왕을 알현하다
수도까지 오는 동안, 진의 머릿속에 의문 하나가 맴돌았다.
‘대체 왜 마차를 이용한 거지?’
왕실 마차라는 건 멋지긴 하지만 굉장히 비효율적이다. 그렇다고 마차 외에 이동 수단이 없을 것도 아니었다.
이 세상엔 마법이 존재했다.
워프 게이트.
사용하는 데 굉장한 골드와 인력이 들어가지만, 단숨에 왕궁까지 가는 방법이 존재했다.
‘그렇다면 이유가 있는 건데.’
그 이유가 뭔지는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알 수 있었다.
“진 플린트 님 만세!”
“진 님! 이쪽을 봐 주세요!”
“테스 백작가 만세!”
“꺅! 말릭 님! 사랑해요!”
환영 인파의 엄청난 환호성.
사람들이 가도를 가득 메우고 있었고, 도시 경비병들이 사람들이 나오지 못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손이라도 흔들어 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마차를 호위하던 기사가 가까이 다가와 입을 열었다.
“아, 예.”
진은 떨떠름하게 대답한 뒤.
손을 들고, 그들에게 흔들어 주었다. 그러자 엄청난 반응이 터져 나왔다.
“꺅! 진 님이 손을 흔들어 주셨어!”
“우와아아아!”
“진 님! 저희에게도 축복을!”
“젊은 영웅! 왕국의 보배!”
고작 손을 흔들어 주었을 뿐인데, 사람들은 자지러지듯 소리를 질렀다. 그 압도적인 함성에 진의 등으로 소름이 돋고 전율이 일었다.
[취하겠네. 취하겠어.]
여태 조용하던 로메른이 입을 열었다.
[사람들의 환호성에 취하지 마. 이걸 감동으로 생각하지도 말고.]
시니컬한 로메른의 말.
[맞아요, 진. 이 함성에 사로잡히면 안 돼요.]
심지어 루나마저 로메른의 말에 동의했다.
[경험자가 해 주는 충고야. 네가 한 번 실패하면 저들은 언제 환호성을 질렀냐는 듯 등을 돌릴 거야.]
[맞아요. 그러니 저 환호성에 너무 사로잡히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저희도…….]
루나가 뭔가를 말하려고 할 때, 로메른이 루나의 말을 잘랐다.
[그딴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더러운 기억 떠오르게 하지 마.]
[그건 그러네요.]
듣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오히려 이쪽은 진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지구의 인터넷을 생각하면 된다.
사람들의 환호를 받다가, 나락까지 떨어진 이들이 비일비재했다.
‘고마워.’
머릿속이 차가워지자, 왕국이 왕실 마차를 보내 이런 방식으로 초대한 이유 중 하나가 보였다.
젊은 영웅을 공명심에 취하게 만드는 것.
‘저놈한텐 소용없어 보이지만.’
말릭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고 있지만 저건 연기였다. 녀석은 환호성에 휩쓸리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관심이 없었다.
‘뭐,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 않네.’
[그래. 딱 그 정도가 좋아. 즐길 건 즐겨. 취하지만 않으면 되는 거야.]
[로메른 당신 오랜만에 좋은 말을 하네요.]
진은 그 환호성을 즐기며, 왕성으로 들어갔다.
* * *
그 뒤에는 예상대로의 일이 벌어졌다.
알현실에 도착해 왕 앞에 무릎을 꿇고, 공치사를 받는 일.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었으며, 영웅적인 일이었다.”
이는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이었고 진에게도 나름 뽕 차는 일이긴 했지만, 진은 집중할 수가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알현실 한쪽에 당연하다는 듯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
평생 역병과 싸운 추기경이며, 진에게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주었던 영감님.
그 영감님이 알현실에 있었다.
‘대체 여긴 또 어떻게 오신 거야?’
아무런 용무가 없는데 이곳에 왔을 리 없었다. 이건 무조건 자신 때문에 이곳에 온 것이다.
‘눈물은 또 왜 흘리시는 거야?’
영감님은 진을 바라보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
‘또 무슨 오해를 하고 계시길래.’
조금 걱정이 되긴 했지만, 영감님은 언제나 좋은 방향으로 오해하고 진에게 가장 필요한 도움을 주었다.
그렇게 진이 영감님을 힐끔힐끔 보자, 영감님은 그 시선을 느끼고 조용히 사인을 보내기 시작했다.
‘……저래도 되는 거야?’
여긴 왕성이었고, 지금 왕이 진에게 상을 주기 위한 행사 중이었다. 한데, 영감님이 꼼지락꼼지락 수신호를 보내셨다.
‘대체 저게 무슨 뜻이야.’
문제는 영감님이 보내는 사인을 진이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한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해답이 들려왔다.
[묵언 수행할 때 은밀히 사용하는 수신호예요. 저도 많이 사용했어요.]
역시 성녀라 그런지 이런 것까지 알고 있었다.
‘아니, 잠깐만. 영감님은 내가 이걸 어떻게 알 거라고 생각한 거지?!’
그때 성녀가 입을 열었다.
[당신을 성자라고 생각하니까요.]
‘그게 무슨 상관이야?’
진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한데, 성녀의 대답은 간단했다.
[성자나 성녀는 사제들에게 그런 존재예요. 그들에게 당신은 신의 대리인이랍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역시 종교인의 사고방식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보다, 지금은 추기경님이 하는 말이 더 급한 거 아닌가요?]
‘맞아.’
곧이어 그녀는 영감님의 말을 통역해 주기 시작했다.
[최고의 보상을 준비해 놨으니 기대하셔도 좋답니다. 여태 역병 지대를 돌아다닌 게 크게 도움이 됐다고 하시네요.]
그건 그럴 것이다.
왕국에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고, 수많은 역병을 치유하러 다닌 영감님이다. 왕국 전체가 영감님에게 빚이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역시 영감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영감님이 준비해 준 보상이다. 기대해도 될 거 같았다.
물론 좀 신기한 점도 있었다.
‘교단이 생각보다 너무 빠르게 움직였는데?’
진은 교단이 이렇게 빨리 움직일 줄 몰랐다.
[진. 그게 바로 예비 성자란 직책이 갖는 힘이에요. 교단은 당신의 움직임에 촉각을 세우고 있답니다. 방패로 쓰려면 이 정도는 돼야죠.]
그녀의 말대로였다.
예비 성자가 된 건, 교단이란 거대한 방패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렇게 말한 뒤 다시 수신호를 번역하기 시작했다.
[성자님, 믿고 있었습니다.]
[이 노구가 요즘 성자님 덕에 다시 살아 있음을 느낍니다.]
[당신은 빛이며 소금입니다.]
…….
여, 영감님!?
중요한 정보는 사라지고, 어느새 칭찬 일색으로 변했다.
그렇게 진이 당황하고 있을 때.
“진 플린트는 자리에서 일어나라.”
어느새 행사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에겐 계승 남작의 작위를 내리며.”
단승 남작이나 자작 정도를 생각했지, 계승 남작을 줄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영감님 믿고 있었습니다!
진은 환호성을 지르고 싶었는데, 그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세인트라는 성을 하사하겠다.”
진 세인트.
‘이걸 번역하면…….’
‘성스러운’ 진.
뭐지? 신종 괴롭힘인가?
성을 왕이 하사하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했더니.
‘아, 영감님.’
영감님이 엄지를 치켜들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계셨다.
‘아무리 그래도 성스러운 진은 아니잖아요.’
게다가 보상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또한, 그대와 함께 싸웠던 4인의 전사들이 있다고 들었다. 그들에게도 기사 작위를 내린다.”
노바와 아이들은 노예에서 단숨에 기사가 됐다. 그것도 왕이 직접 작위를 내린 기사였다.
‘만족스럽네.’
이 정도면 충분했다.
계승 남작은 단승 자작보다 끗발이 좋았다. 어디 가서 무시당할 직책이 아니었다.
‘애들에게도 보상이 됐고.’
야만인이 왕실에서 기사 작위까지 쟁취했다.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한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마지막으로 그대는 ‘부제’의 자격을 획득하였다고 들었다. 그대는 앞으로도 왕국과 세상을 위해 움직일 터.”
아직 보상이 남아 있었다.
“그대에게 명예 감찰대장의 신분을 내린다. 그대는 독자적으로 감찰 활동을 할 수 있고, 감찰대원을 동원할 수도 있다.”
한데, 그 보상이 너무 대단했다.
‘미친. 이걸 준다고?’
명예 감찰대장.
감찰부의 권한을 고스란히 사용할 수 있는 직책이었다.
‘……어떻게?’
이제는 자연스럽게 고개가 슬쩍 돌아갔다. 영감님을 향해서.
[성자님을 결코 잃을 수 없습니다. 이 노구가 드릴 수 있는 두 번째 방패입니다.]
[진짜 대단한 양반이네. 이건 나도 인정할 수밖에.]
로메른과 똑같은 마음이었다.
기대하라는 영감님의 말대로 보상은 정말이지 엄청났다.
“다음은 말릭 테스.”
말릭에 관한 보상은 다른 의미로 놀라웠다.
“그대는 죄인의 신분으로 카이얀 대요새에 입대했지만, 그 공이 크니 모든 죄를 사하고 복무 기록은 일반 신분으로 입대한 것으로 변경될 것이다.”
말릭의 입대 사유가 세탁됐다.
‘당연한 일인가.’
젊은 영웅으로 데려왔는데 죄인의 신분이니 나름 문제였을 것이다.
“그대는 카이얀 요새에 머물며 진급을 할 수도 있으며, 전역하고 영지로 복귀할 수도 있다.”
그 대신 말릭의 포상은 이걸로 끝인 것 같았다.
“폐하, 청이 있습니다.”
그때 말릭이 입을 열었다.
말릭의 돌발 행동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한데, 왕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영웅의 청을 거부할 수 없지. 해 보거라.”
“저의 죄는 아직 씻기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진 세인트의 곁에서 세상을 위해 힘쓰고 싶습니다.”
말릭의 말에 왕이 웃음을 터트렸다.
“좋구나. 우리 왕국에 이런 젊은이가 있었다니.”
물론 정반대의 기분을 느끼는 사람도 있었다.
‘저건 또 왜 달라붙어!?’
진은 말릭의 끔찍한 소리에 소름이 다 돋았다. 저걸 데리고 다녀야 한다? 이건 진짜 ‘극혐’이었다.
‘아, 잠깐만. 이거 나쁘지 않은데?’
말릭이 싫은 걸 떠나서 냉정히 생각해 보면 나쁘지 않았다. 물론, 말릭이 나쁘지 않다는 게 아니었다.
‘어차피 어디 보내려면 근처에 두는 게 맞긴 하는데.’
서신을 통해 일을 시키기엔 낭비되는 시간이 너무 많다.
‘개처럼 부려야 되는데 그건 안 될 말이지.’
어차피 일을 시키고, 죽을 자리에 보내려면 바로 곁은 몰라도 근처에 두긴 해야 했다.
그렇게 진의 생각 정리가 끝나려고 할 때.
“추기경. 어떻습니까?”
왕은 영감님에게 물었다.
‘와. 영감님 대단하네.’
왕이 영감님을 존중하기에 의사를 물어본 것이다. 왕이 한발 양보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루나. 좋다는 신호는 어떻게 보내는 거야?’
[어렵지 않아요. 그건…….]
진은 루나가 알려 주는 대로 긍정의 사인을 영감님에게 보냈다. 영감님은 진의 사인을 본 후 왕에게 대답했다.
“만약 그렇게 해 주신다면, 저희 교단에서 걸었던 ‘치료 제한’을 해제해 주겠습니다. 다만, 교단은 죄를 잊지 않습니다. 기록은 유지될 것입니다.”
영감님도 왕의 체면을 세워 주었다. 교단에서 치료 제한을 해제하는 건 정말 드문 일이었다.
왕이 영감님을 배려해 준 것처럼 영감님도 왕을 배려해 준 것이다.
“좋습니다. 말릭 그대의 청을 허한다. 추기경의 말대로 죄는 잊히지 않으니, 그 죄가 덮일 만큼 세상을 위해 힘쓰도록.”
“감사합니다, 폐하.”
왕은 흐뭇한 얼굴로 진과 말릭을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원래라면 여기서 끝내야겠지만, 그대들을 보니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없구나.”
왕은 호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들에게 왕실 보물전 입장을 허한다.”
짜인 각본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주위의 모두가 놀랐다.
‘에이, 진짜 돌발 행동은 아니겠지.’
이미 영감님과 대화가 끝난…….
고개를 돌려 영감님을 바라보니, 영감님도 놀라셨는지 입을 떡하니 벌리고 계셨다.
곧이어 진을 바라보더니 이게 진의 계획이라 생각했는지 ‘쌍따봉’을 날렸다.
[와, 이걸 이렇게 들어가네.]
[안 그래도 들어갔어야 했는데, 잘됐네요.]
진짜 100퍼센트 돌발 상황인 모양이었다.
‘개꿀?’
살다 보니 말릭 저놈이 도움이 되는 날도 다 있었다.
* * *
보물전 입장 전에 잠시 시간이 주어졌다. 이 시간은 굉장히 중요한 시간이었다.
“말릭.”
“예, 세인트 남작님.”
일단 서열 정리부터 해야 했다.
“너 장자 아니지?”
“그렇습니다.”
“백작 될 생각도 없고?”
“예. 전혀 없습니다.”
“말 놓는다.”
“예, 남작님.”
물론 이런 서열 정리만 하기 위해 녀석을 부른 게 아니었다.
“왕실 보물전에서 너랑 나랑 하나씩 꺼내 올 수 있잖아? 너 그거 필요해?”
“……남작님?”
말릭은 진이 무슨 일로 자신을 불렀는지 깨달았다.
“필요해?”
그렇다.
진은 삥을 뜯고 있었다.
보물전에 들어가기 전에 삥을 뜯는 진도 기가 막혔지만, 말릭의 대응 또한 기가 막혔다.
“세인트 남작님께서 괜한 욕심을 부릴 분은 아닌 걸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안에 무언가 있는 거군요?”
녀석의 추론은 소름 끼칠 정도였다.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그래야 남작님 주위에서 재미난 일들이 튀어나올 테니까요.”
녀석은 즐겁다는 듯 대답했다.
‘뭘 좋다고 웃어.’
역시, 미친놈의 사고방식은 이해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