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7. 좋은 일과 나쁜 일
성안에 있는 모두가 악마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았다.
왕국 기사단.
감찰부 특무대.
교단의 30번째 검과 성기사.
카이얀 대요새의 정예.
이들 중 그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을 한 ‘사람’이 끝낸 것이다.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사제들의 말하던 예비 성자에게.
환호성을 지르고 승리를 축하해야 할 때였지만, 그들은 그러지 못했다. 더없이 신성한 진의 모습에 모두가 압도되었다.
그저 모두가 경의를 담아 진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 진의 입이 달싹였다.
“악이 물러가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다.”
그리 큰 목소리도 아니었다. 들릴 듯 말 듯 조용한 목소리였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요새에 있는 모두가 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강제로 비틀린 자연이 순리대로 흐를 것이다.”
이다음에 또 무언가 있는 건가?
모두가 그런 의문을 떠올렸을 때.
툭. 투둑.
진이 말한 이야기가 뭔지 모두가 알 수 있었다.
“……비야.”
“비?”
지독한 가뭄이 이어지고 있던 카이얀 대요새와 몬스터들의 대지에 비가 내렸다.
비가 오는 건 그리 단순한 일이 아니다. 몬스터가 카이얀 대요새를 쉴 새 없이 두드리는 건, 가뭄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비가 온다는 건.
“……악마만이 아니야. 모든 게 끝난 거야.”
몬스터들의 대규모 침공도 끝났단 뜻이었다.
성역을 만들어 악마가 성벽을 넘어오지 못하게 했고, 악마를 멸했으며, 가뭄마저 물리쳐 몬스터들의 침공마저 끝냈다.
이게 기적이 아니라면 무엇이 기적일까.
“끝났어.”
“……그래.”
그 말을 시작으로, 성벽 안에 있는 이들의 감정이 요동쳤다.
“끝이라고!”
지금까지 애써 눌러 놓았던 감정이 일시에 폭발했다.
“살았어! 올해도 버텨 냈어!”
“비야! 과일이 아니라 이제 물을 마셔도 돼!”
모두 비를 맞으면서 미친 듯이 웃고 떠들기 시작했다. 그것도 잠시, 병사들은 하나둘 진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러곤, 일시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성자님! 감사합니다!”
“성자님 만세-!”
“우와아아아! 살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카이얀 대요새에서 벌어진 악마 소환 사건은 그렇게 환호성과 함께 마무리되었다.
* * *
악마를 잡았다고 모든 일이 끝난 건 아니었다. 진짜 귀찮은 일은 뒷정리였다. 물론, 진은 귀찮은 뒷정리에서 빠질 수 있었다.
“형제님 절대 안정을 취하시면서 회복에 집중하셔야 합니다. 그런 기적을 발휘하셨는데, 몸에 부담을 주지 않았을 리 없습니다.”
교구장의 보증이 있는데, 진에게 뒷정리를 시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덕분에 진은 방 안에 누워 오랜만에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역시 쉬는 게 최고라니까.’
성역을 만들며 피를 토하고 초췌해진 얼굴만 보면 정말 몸이 안 좋은 것처럼 보였지만, 진은 멀쩡했다.
[신성력이 부족해요. 피를 촉매로 사용할게요.]
성역을 만들 때, 성녀의 힘을 빌리기 위해 연출한 것일 뿐 교구장이 생각하는 것처럼 생명력을 사용한 건 절대 아니었다.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데, 그딴 곳에 생명을 왜 써?’
덕분에 건강한 몸으로 맘껏 휴식을 즐길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진이 놀기만 한 건 아니었다.
“그럼 결산할까?”
이쪽도 이번에 얻은 것들을 정리하고 확인해야 했다.
[좋지!]
진은 가장 궁금했던 것 먼저 물었다.
“악마는 어떻게 된 거야? 비가 오는 걸 보니 계약은 지킨 거 같던데.”
[아, 그거? 말했잖아. 악마는 절대 계약을 어기지 않는다고. 자기가 능력이 안 돼서 못 데려갔다고 계약을 어길 순 없지.]
가뭄이 악마를 잡았다고 갑자기 끝날 리 없었다.
비가 내린 건 악마가 말릭을 데려간단 조건으로 내놓은 ‘보상’ 중 하나였다.
‘말릭만 주면 북부 지역 가뭄을 막을 수 있게 되는 거지.’
게다가 로메른은 악마가 그를 데려가지 못할 것을 반쯤 확신했었다.
[어차피 데려가지도 못하는 거, 준다고 약속하고 보상만 챙기자.]
덕분에 말릭은 굉장히 비싼 값에 팔려 나갔다. 가뭄을 멈추는 게 보상 중 일부였으니 말 다 한 것이다.
“이제 와 묻는 거지만, 어떻게 알았어?”
[뭘?]
“악마가 말릭 못 데려가는 거.”
[뭐, 어려운 이야기도 아니야. 살해의 업을 가졌으니까. 악마의 ‘살의’가 이상하단 걸 느꼈을 거야. 그러니까…….]
그제야 성벽 위의 상황이 이해됐다. 말릭은 노바와 아이들을 방패로 삼으며 악마의 공격을 피했다.
살의를 읽어 내는 힘.
그 힘이 있기에 말릭이 잡히지 않을 거라 확신한 거 같았다.
[뭐, 계약 덕분이기도 해. 덕지덕지 붙은 계약 때문에 악마도 자신의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으니까.]
진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뭐, 우리야 짭짤하게 챙겼으니까. 나쁠 거 없나?”
[앞으로 세상을 구해야 하는데 이 정도는 챙겨야지.]
“아, 이번 일 때문에 악마랑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지?”
[그럴 리 없어. 그쪽에서 억울하긴 하겠지만, 애초에 실패 확률이 있는 일이었어. 그쪽 책임인 거지.]
깔끔 그 자체였다.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자.”
이제 진짜 보상에 관해 알아볼 차례였다. 앞서 말했듯 말릭을 비싼 값에 팔아치웠다. 가뭄을 끝내는 건 시작일 뿐이다.
“몬스터 대지 쪽에는 뭐 있대?”
[없대. 악마가 확인한 거니까 이건 확실히 믿어도 돼. 사념만 챙길 생각이었던 거 같아.]
“그건 다행이네.”
몬스터 대지 확인.
이것도 보상 중 하나였다.
[이런 걸 보상으로 할 생각은 어떻게 한 거야? 진짜 게으른 건지 똑똑한 건지.]
로메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지만, 진이 보기엔 당연한 일이었다.
‘그 위험한 곳에 직접 갈 필요는 없잖아?’
일 잘하는 호구 하나가 있는데 굳이 갈 필요 없는 일이었다.
[질문할 거 더 있어?]
로메른은 초조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가 그렇게 급해.”
[영기(靈氣)가 이렇게 많잖아!]
진은 그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악마가 주고 간 마지막 보상.
몬스터 대지에 쌓인 영기(靈氣).
악마는 그것을 하나로 모아 진에게 건네주었다. 흡수야 로메른의 기술로 이미 끝난 상태였다.
“어떻게 사용할 거야?”
[굳이 말로 대화할 필요 없게, 머리 쪽 조금 개조하고 나머지는 ‘눈’에 전부 때려 박을 거야.]
“눈?”
[어. 한쪽씩 작업할 거라 아예 안 보이지는 않을 거야. 아무튼 무슨 효과인지는 개조한 뒤 봐.]
녀석은 몸이 달았는지 대충 설명했다.
‘로메른 말대로 개조가 끝나고 확인해도 될 일이니까.’
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어.”
[개조 끝날 때까진 침대에 누워만 있어.]
“알겠어.”
그렇게 마지막 보상 영기로 몸뚱이 개조가 시작됐다.
* * *
진이 열심히 몸을 개조하고 있을 무렵.
왕국에선 회의가 한창이었다.
“현 상황으로 봤을 때, 지식의 해방이란 사상을 퍼트리는 이들은 굉장히 위험하다고 판단됩니다.”
감찰부 특무 대장이 보고를 끝내자마자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위험한 이들이란 건 진작 알고 있었지만, ‘악마 소환’을 할 줄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위험인 줄 알았는데, 위험은 코앞에 와 있었다.
“그들의 위험도를 최상급으로 격상하고, 이 소식을 다른 왕국에 알려라.”
“명을 따릅니다!”
왕국은 그들의 적으로 규정하고,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회의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조금 전 나왔던 안건만큼이나 중요한 안건이 남아 있었다.
“진 플린트.”
국왕이 그 시작을 끊었다.
“교단 쪽에선 예비 성자로 부르고 있으며, 그가 한 일은 그야말로 기적이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특무대장이 곧장 진에 관해 설명했다. 그 말에 귀족들의 표정이 마치 이리 떼처럼 변했다.
“흠흠. 예비 성자란 건 성자는 아니란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자세히 알아본 결과 이번에 새로 생긴 자리라고 합니다.”
“오호. 그럼 성자처럼 제한이 있진 않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진 플린트가 가진 공식적인 직책은 부제뿐입니다.”
성자는 물론이고 사제라는 직책을 얻게 되면 왕국의 손을 완전하게 벗어난다.
개입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한데, 지금은 그 반쯤에 걸쳐 있는 부제의 직책뿐이었다.
“국왕 폐하. 이건 기회입니다. 지금 끈을 만들어 두면 미래의 성자와 연을 이어 갈 수 있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부제라면 왕국의 명을 거부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닙니다.”
이리 떼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국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득에 밝은 귀족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건 그가 보기에도 손해 볼 게 없는 일이었다.
국왕은 특무대장을 바라봤다.
“대요새에서 진 플린트 외에도 특출 난 공을 세운 자가 있었나?”
특무대장은 곧장 대답했다.
“예. 악마가 소환됐을 때 진 플린트 외에도 악마를 죽인 자가 있었습니다. 테스 백작의 아들 말릭이란 자입니다.”
말릭 테스.
그 이름을 듣자 국왕은 예전에 보고받았던 일이 떠올랐다. 교단 측에서 도움을 요청했던 드문 일이었다. 공교롭다면 공교로운 일이었다.
“폐하. 말릭과 진, 둘을 불러서 함께 포상하시면 어떻겠습니까?”
왕은 귀족들이 그리고 있는 그림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카이얀 대요새와 왕국을 구하고, 악마를 죽인 젊은 영웅들.>
“진 플린트와 말릭 테스의 위치는?”
“현재 카이얀 대요새에 머물고 있습니다.”
국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보도록.”
국왕의 명이 떨어지자, 이리 떼가 달려들었다.
“포상의 규모는…….”
“적어도 이 정도는 되어야…….”
회의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 * *
살다 보면 때때로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는 법이다.
‘몸의 개조가 끝난 건 좋았는데.’
지금 진의 상태가 딱 그랬다.
[왜? 그래도 개조는 확실하게 끝났잖아.]
진은 입을 열지도 않았는데, 로메른이 진의 생각에 대답했다.
‘아니. 이런 더러운 상황이 펼쳐질 줄 몰랐으니까 하는 소리지!’
[하긴 나도 왕국에서 반응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까지는 나올 줄 몰랐어.]
[동감이에요. 아무리 성자가 탐난다고 해도 이렇게 노골적으로 움직일 줄은…….]
산전수전 다 겪은 로메른과 루나가 이런 말을 할 정도였다.
진은 지금 마차를 타고 있었다.
이건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누구랑 타고 있냐는 것이었다.
“이거 안 치웁니까? 대체 몇 번쨉니까?”
진이 짜증을 가득 담아 말하자, 말릭이 씩 웃었다.
“저번엔 그저 느끼시는 거 같더니. 이제는 마치 눈으로 보시는 거 같아 신기해서 그렇습니다.”
미친놈.
입 밖으로 내뱉고 싶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왕실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데, 여기서 소란을 피우면 여러 가지로 귀찮아진다.
‘짜증 나네.’
말릭이 진 근처로 보내는 건, 마나같이 그저 신경이 쓰이는 기운이 아니었다.
‘살의(殺意)’.
진의 눈에는 말릭이 뿜어내는 살의가 보였다.
‘아, 진짜, 안 그래도 쓸데없는 게 보여서 정신 사나운데.’
물론 살의만 보이는 게 아니었다. 진은 새로운 눈을 얻고,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마나, 신성력, 진한 감정, 하다못해 살의까지.
개조된 눈은 정말 특별했다.
[그래도 나름대로 도움이 됐잖아. 저 또라이 덕분에 살의까지 볼 정도의 눈인 걸 확인했잖아.]
진은 로메른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여기 미치광이가 또 있었다.
한데, 말릭은 이런 진의 행동을 다르게 해석했다. 자신의 살의를 보고도 그는 짜증만 낼 뿐 조금도 긴장하지 않았다.
말릭은 진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닿지도 못할 정도로 성장하신 겁니까?”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살의가 마차를 가득 채웠다.
“저번에도 했던 말인데.”
한데, 진의 표정엔 여전히 짜증만 가득했다.
“지금 생각하고 있는 거 행동으로 옮기면 머리통에 구멍 날 겁니다.”
물론 저번과 똑같진 않았다.
“이번엔 그 행동을 옮겼으면 좋겠습니다. 여기서 끝내 버리게.”
그 순간 진의 눈동자에서 옅은 황금빛이 뿜어져 나오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마차 안에 있는 ‘모든 기운’이 일순 사라졌다.
[이야, 내가 만들었지만 진짜 끝내주네. 눈으로 주변 기운을 삭제한다니.]
로메른의 말대로 이 눈의 가장 큰 힘은 눈에 보이는 모든 기운을 삭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뭐, 제한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런 눈의 힘을 사용했으니 당연히 말릭의 ‘살의’마저 사라진 상태였다.
한데, 녀석은 놀라지 않았다.
“역시 당신은 진짜입니다.”
미친놈과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