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6. 이건 몰랐지?
성벽 위.
같은 성벽인데도 성역에 포함된 곳과 그렇지 못한 곳은 차이가 있었다.
성역에 포함된 곳은 악마가 다가오지 못했지만, 성역에 포함되지 못한 곳엔 악마가 다가올 수 있었다.
악마는 영리하게 움직였다.
성역에 포함되지 못한 곳을 공략했다. 악마의 거대한 주먹이 성벽을 두드렸다.
콰아아아앙-!!
몬스터들의 끊임없는 공격에도 굳건했던 성벽이 악마의 공격에 흔들렸다.
위태로운 상황이 이어지고 있을 때, 노바를 필두로 한 아이들이 악마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성역의 영역이 아닌 성벽 위로 올라왔다.
“지킨다!”
하지만 악마는 아이들을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악마가 다시 거대한 주먹을 휘둘렀다.
악마의 거대한 주먹을 막기엔, 아이들은 너무 작았다.
용수바람이 움직이기 전까지는.
“사막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모래바람이! 거대한 모래 폭풍이!”
용수바람은 주문을 외운 뒤 탈진한 듯 휘청였지만, 그가 만든 결과는 정말 놀라웠다.
노바 뒤에 있는 성령의 크기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지더니.
“물러서지 않는다!”
성령이 악마의 주먹을 막아 냈다.
원래라면 불가능한 일이지만, 상극인 마기를 지닌 악마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노바의 성령이 사라질 듯 위태롭게 일렁였지만.
퉁-! 퉁-!
악마를 향해 거대한 화살이 날아왔다. 날파람이 쏘아 낸 화살이었다.
……!!
악마는 귀찮다는 듯 팔을 휘둘렀다. 한데, 그 팔 위에 살바람이 튀어나왔다.
팔을 타고 살바람이 녀석의 얼굴이 있는 곳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
살바람의 목표는 악마에게 피해를 주는 게 아니었다. 녀석의 신경을 긁으며 신경을 분산시키는 것이었다.
그런 살바람의 목적은 달성됐다.
악마가 짜증이 난다는 듯 몸을 비틀며 성벽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
“고작 넷이서 막아 낸 거야……?”
“정말로 신의 전사들이었어!”
그 경이로운 모습에 병사들은 감탄을 터트리다가, 이내 현실을 깨달았다.
“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저걸 계속 막아 낼 수 있을까?”
악마의 공격을 막은 건 놀라운 일이었지만, 전력을 다해 간신히 막았을 뿐이었다.
그런 그들 옆으로 왕국 기사단과 감찰부 특무대가 나타났고.
“상급 기사를 제외하곤 전부 내려가라!”
마지막으로 성주가 나타났다.
성주의 말에 병사들이 물러가고, 고위 기사들이 악마를 향해 달려갔다.
그 순간, 변화가 시작됐다.
거대한 악마의 몸에서 엄청난 마기가 뿜어지더니, 녀석의 몸이 ‘다섯’으로 나뉘었다.
거대한 몸에서 나뉜 것치고 악마는 그리 크지 않았다.
인간보다 조금 더 큰 크기.
다섯으로 나뉜 악마가 성벽 위로 올라왔다.
갑작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이곳에 모인 이들은 이런 일에 당황한 이들이 아니었다.
“하나는 특무대에서 처리한다!”
특무대에서 하나.
“왕국 기사단이여! 우리가 제일 먼저 처리하고 도와야 한다!”
왕국 기사단에서 하나.
“대요새는 우리의 땅이다. 우리도 나선다.”
성주와 요새의 기사들이 하나.
“교단의 검으로서 악을 베어 낼지니.”
교단 측에서 하나.
넷은 세력별로 분배가 끝났는데, 문제는 남아 있는 하나였다.
“우리가 상대한다!”
남은 하나는 노바와 아이들이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
“재밌겠군. 함께하지.”
말릭이 합류했다. 아이들은 말릭을 알아보고 표정이 굳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싸울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협력한다.”
말릭과 임시 동맹이 이뤄졌다.
그렇게 2차전이 시작됐다.
* * *
다섯으로 나뉜 악마.
조금 전처럼 거대한 몸도 아니었고, 힘이 다섯으로 나뉘었으니 성벽 위에 모인 이들은 악마를 금방 죽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 그들의 생각처럼 유리한 상황이 잠시 이어졌다.
“역시 감찰부 특무대! 완전히 밀어붙이고 있어!”
“저쪽 왕국 기사단도 장난 아니야!”
“교단 쪽의 저 성기사는 누구지? 악마의 몸을 베어 낸 거 같은데?”
“니들 성주님은 보이지도 않는 거냐!”
“그게 문제가 아니야. 신의 전사들이 위태로워 보여.”
노바와 말릭이 상대하는 악마를 제외하곤 다른 쪽 악마는 궁지에 몰렸다.
치명상을 입거나 큰 피해를 보지는 않았지만, 명백하게 밀리기 시작했다.
한데, 상황이 뒤바뀌기 시작했다.
“역시 신의 전사! 밀어붙이고 있어!”
마치 악마의 힘이 사라진 것처럼 노바 쪽 악마가 조금씩 밀리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동수를 이루기 시작했다.
“유지! 우린 버틴다!”
노바의 판단은 간단했다.
‘이쪽은 버티기만 하면 다른 곳에서 악마를 죽이고 도와줄 것이다.’
그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생각이었다. 이쪽에 있는 악마의 힘이 줄어든 만큼 다른 쪽 악마의 힘이 늘어났다.
“뭐야!?”
“기사님이 쓰러졌어!”
다섯 악마는 서로의 힘을 자유자재로 공유할 수 있는 것만 같았다. 압도적으로 밀리던 악마가 여유를 찾고, 힘이 계속해서 변화했다.
이런 전투는 그 누구도 경험해 보지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이 조금씩 역전되기 시작했다.
……!
다섯 악마의 말은 알아들을 수 없지만, 다들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저 표정을 보면 녀석은 이들을 비웃고 있었다.
상황은 시시각각 불리해졌다.
처음엔 조금 밀릴 뿐이었다.
하지만 그게 길게 이어지자 체력이 떨어지고, 마나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조금씩 균열이 생겼다.
“신이시여! 빛을 내려 주소서!”
회복한 사제들이 성벽 위로 올라와 지원했지만, 한 번 생기기 시작한 균열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왕국 기사단이 하나둘 쓰러졌다.
특무대의 완벽한 합격진이 깨졌다.
교황청의 30번째 검은 악마에게 닿지 못했다.
성주는 최악의 상황을 떠올렸다.
성벽 아래에서 떠들던 병사들조차 어느새인가 입을 다물었다.
절망이 퍼지고 있었다.
모두가 그 절망을 실감했다.
하지만 절망하지 않는 이들이 있었다.
노바와 아이들, 말릭.
그리고 가롯 교구장과 사제들.
“성자님께서 무언가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됩니다! 그분께서 다시 한 번 기적을 보여 주실 겁니다!”
확고한 신념이 담긴 교구장의 목소리에 모두들 조금 전에 봤던 기적을 떠올렸다.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성자가 만든 ‘성역’ 덕에 그 누구 하나 죽지 않았다.
최악의 상황 같지만 정말 최악은 아니었다.
“다들 버텨라! 우린 이곳에서 죽는다!”
성주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대답 소리는 없었지만,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신이시여. 조금만 서둘러 주시옵소서.”
가롯 교구장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 * *
말릭은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도 즐거웠다.
‘악마를 죽여 볼 수 있다니.’
상상만 해도 즐거웠다.
과연 악마를 죽일 때는 몬스터와 사람과 뭐가 다를지 미치도록 궁금했다.
그래서 앞으로 나섰다.
협공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악마는 그만한 ‘강자’였다. 이런 강한 존재를 살해할 수 있는데, 협공도 나쁘지 않았다.
‘이상해.’
한데, 악마를 상대하면 할수록 뭔가 이상한 게 느껴졌다.
‘녀석에겐 살의가 없다.’
공격 하나하나에 살기가 담겨 있지만, 진짜로 죽이고자 하는 마음인 ‘살의’가 빠져 있었다.
‘살기는 있으나 살의는 없는 공격이라니.’
다른 이들은 느끼지 못하겠지만, 살해의 업을 지닌 말릭은 그걸 느낄 수 있었다.
‘악마는 여기 있는 인간들을 죽일 생각이 없다.’
어째서?
한 번 의문이 떠오르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이 이어졌다.
그리고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진 플린트.’
이 특별한 인간이 뭔가를 한 것이다.
그는 미치도록 즐거웠다.
자신이 한 선택은 옳았다.
‘특별한 척하는 가짜들은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지.’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진짜 특별한 인간이라고 인정한 진 플린트가 벌인 일이 확실했다.
‘아쉽구나. 악마와 진짜로 싸워 보고 싶었는데. 맥 빠지는군.’
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악마에게서 ‘살의’가 느껴졌다. 그것도 온전히 자신에게만 향하는 살의가.
‘어떻게 이런 일이?’
우연? 그럴 리 없다.
이 상황을 만든 건 ‘진 플린트’다.
그는 상상을 초월하는 정말 특별한 인간. 그가 통제하고 있는 상황에 이런 실수가 생길 리 없다.
‘내가 원하는 걸 준 것인가?’
어째서?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지만, 그 의문은 이내 사라졌다. 악마가 보내는 살의는 말릭을 미치게 했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말릭의 머릿속을 살의가 가득 채웠다.
물론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
‘녀석을 죽이기 전에 내가 죽는다.’
그 생각이 맞을지 시험해 보는 것도 즐겁겠지만, 그는 악마를 죽여 보고 싶었다.
죽이고 싶다.
악마의 목에 칼을 쑤시고 싶다.
그의 강한 의지에 ‘살해의 업’이 호응한다.
마치 용수바람의 재능처럼 과정 없이 살해할 수 있는 결과를 도출해 낸다.
‘저 악마는 다른 인간을 살해하지 못한다.’
주위의 녀석들을 방패로 사용해 녀석의 공격을 무력화했다.
자신을 살해하려던 공격이 다른 녀석들을 방패로 사용하자, 살해의 의지가 사라진다. 분명 죽을 만한 공격인데, 치명상조차 입지 못한다.
그렇게 악마의 공격을 봉쇄할 방법을 마련했다.
그럼, 이제 남은 건 하나다.
‘쑤신다.’
어떻게?
살해의 업이 움직였다.
살해의 업이 말릭의 가능성을 억지로 열어젖힌다.
이건 옳지 못하다.
미래의 가능성을 포기하고 지금 당장의 가능성을 강제로 개화시켰다. 미래를 희생해 현재 닿지 못할 경지에 닿게 했다.
살해의 업이.
강제로 상승한 경지가.
세상의 법칙을 찢어발겼다.
그의 검이 악마의 가슴에 박혔다.
‘좋다! 좋아!’
악마는 마치 불가능을 목격한 것처럼 눈을 치켜떴다.
말릭은 그 눈 안에 가득한 혼란과 놀람이 이 세상 그 어떤 보물보다 값지다고 생각했다.
말릭의 살의가 악마의 살의를 삼켰다.
그렇게 악마가 하나 쓰러지자 힘의 균형이 무너졌다.
“우와아아아아!”
“신의 전사!”
“카이얀의 악마!”
“악마와 신의 전사가 악마를 잡았다!”
분위기가 변했다.
악마는 꽤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 * *
악마들의 행동이 변했다.
한껏 여유를 부리며 모두를 비웃던 악마들이 분노에 차 움직이기 시작했다.
악마 넷은 자신의 몸을 살피지 않고, 말릭을 향해 돌진했다.
넷의 공격이라면 말릭은 죽을 수밖에 없다.
모두가 깜짝 놀랐을 때.
말릭은 굉장히 현명하게 행동했다.
“오늘은 충분히 즐겼다.”
그 말을 남기곤, 성역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
……!!
……!!
……!!
분노에 찬 악마의 절규가 울려 퍼졌다.
그 순간, 성벽 내부 ‘진’이 있는 곳에서 엄청난 신성력 유동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마나를 느끼지 못하는 자들마저, 신성력의 유동을 느낄 정도였다.
대체 어떤 성법이길래 이 정도 유동이 느껴지는 것일까?
모두의 머릿속에 비슷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 답은 금방 알 수 있었다.
하늘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모두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손?”
하늘에서 빛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손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것을 본 사제들은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고 소리쳤다.
“예비 성자님께서 성법을 완성하셨다!”
“전능하신 신이시여 당신의 손길로 우리를 보호하소서!”
곧이어 거대한 빛의 손이 카리얀 대요새에 떨어졌다.
충격은 없었다.
오히려 따듯하고 포근했으며, 행복했다. 단순히 그런 감정만 드는 게 아니었다. 온몸에 가득하던 상처가 치유되고, 쓰러졌던 이들이 깨어났다.
그제야 사제들이 왜 저런 반응을 보였는지 알 수 있었다.
‘신의 손.’
마치 신의 손길을 받은 것만 같았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
악마는 그 빛의 손에 의해 소멸하기 시작했다.
……!!
녀석의 시선은 사라지기 전까지 말릭에게 고정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