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5. 예비 성자
감찰부 특무대.
왕국 기사단.
교단 30번째 검과 성기사.
교구장과 사제들.
도시를 함락시킬 만한 병력이 카이얀 대요새를 향해 끊임없이 들어왔다.
덕분에 성주의 얼굴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하. 이쪽으로는 지원해 줄 병력이 없다고 하더니, 끝도 없이 들어오는구나.”
그녀는 그 말을 내뱉고, 진을 바라봤다.
“상황이 돌아가는 걸 보니 그대의 말이 사실인 거 같군. 믿지 못해 미안하다.”
“아닙니다. 애초에 저도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믿지 못했을 겁니다.”
안 그래도 연일 전투가 이어지고 있는 대요새에 악마가 소환된다고 말하면 미친놈 소리를 듣기 마련이다.
게다가, 이 난리가 난 상황에서 각 세력의 병력을 받아 주고 이런 자리까지 마련해 준 것만으로도 성주는 충분히 진을 배려한 상황이었다.
“후. 오늘도 채 두 시간을 자지 못하겠군.”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진을 바라봤다.
“그대에게 자리만 만들어 주고 난 들어가 쉴 것이다.”
그녀의 말에 진이 대답했다.
“그 정도만 해 주셔도 충분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진이 꾸벅 고개를 숙이자, 그녀가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미안해할 필요 없다. 내가 성을 지키는 것처럼, 그대도 세상을 지키는 것일 뿐이니.”
“그리 생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성주는 진의 말을 듣곤 휘적휘적 손님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간 뒤, 그녀가 소리쳤다.
“이곳은 카이얀 대요새. 그대들을 환영한다.”
그녀가 반말했지만, 그 누구도 반발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성주는 허리춤에 매인 작은 롱소드. 그 검은 살상을 위한 검이 아닌 예식을 위한 검이지만, 이건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왕을 대리하는 검이며, 왕국을 수호하는 이에게 하사된 검이다.
“이곳에 온 이상 모두 내 통제에 따라야겠지만.”
일반 영주와는 격이 달랐다.
그녀는 왕의 대리자였으며, 세상의 한쪽을 지키는 수호자였다.
오만할 자격이 있는 자.
그게 바로 이곳 카이얀 대요새의 성주였다.
“그대들이 이곳에 온 이유는 조금 다름을 알고 있다. 그러니 그대들을 독립 부대로 임명하고 독자적인 권한을 부여하겠다.”
그녀는 체계를 유지하면서도, 그들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한발 양보했다.
“단, 그대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는 건 ‘진 플린트’의 설명을 듣고 난 다음이다.”
그녀는 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모두의 시선이 진에게 모였다.
“나머진 진 플린트의 설명을 듣도록.”
그녀는 그 말을 하곤 내성으로 돌아갔다. 진은 그녀가 있던 곳으로 올라가 입을 열었다.
“다들 사정을 듣고 오셨을 겁니다. 그러니 긴 설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아니, 지금은 설명할 시간이 없습니다.”
진은 어딘가 다급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여러분이 비밀스럽게 오셨겠지만, 적들도 여러분이 이곳에 온 것을 이미 알고 있을 겁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한 강자들이 한꺼번에 움직였으니, 모를 리가 없었다.
“그들에게 선택권은 별로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이곳에 오신 걸 알고 있으니 사념을 옮기고 싶을 테지만, 저렇게나 쌓인 사념을 단숨에 옮기는 건 불가능합니다.”
저 정도로 막대한 양의 사념은 로메른이라도 쉽사리 옮길 수 없다.
“그렇다고 내버려 두면 저희가 그 사념을 제거할 게 확실합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들은 악마가 소환되기 전에 사념을 제거하기 위해 온 것이다.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전 그들이 어떻게 움직이는 게 우리에게 가장 치명적일지 생각해 봤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뭔가 다른 게 보였습니다.”
진의 말에 이야기를 듣던 이들의 표정이 변했다. 진이 하는 이야기가 뭔지 깨달은 것이다.
“일단, 저 사념을 사용하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우리가 완벽하게 준비되기 전에 사용할 겁니다.”
쇼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일까?
그건 바로 타이밍이다.
손님들이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쇼가 시작돼야 그들을 쇼 제작자의 의도대로 끌고 갈 수 있다.
“전 지금이 가장 위험한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진의 말과 함께.
둥-! 둥-!
둥-! 둥-!
몬스터가 왔다는 북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
끔찍한 비명과 함께 엄청난 마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주인--! 악마다--!”
멀리서 노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악마가 소환되고, 쇼가 시작됐다.
* * *
요새 안쪽에서도 보일 정도로 거대한 존재였다.
크고 두꺼운 뿔과 염소 머리.
악마의 머리가 성벽 너머로 얼핏 보였다. 여기서 봐도 이 정도의 존재였다. 그 크기가 얼마나 거대할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
그 악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팔을 뻗어 몬스터를 잡아 씹어 삼키고, 성벽을 향해 그 사체를 집어 던졌다.
퍼어어억--!
시체가 성벽에 부딪혀 떨어진다.
거기서 튄 피가 성벽 안쪽까지 들어왔다. 병사들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모두가 멈춰 있는 건 아니었다.
신의 전사들이 움직였다.
“나-! 지킨다-!”
노바의 목소리를 시작으로.
“지킨다-!”
“지킨다-!”
“지킨다-!”
다른 아이들의 목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진다. 그와 함께 등 뒤에 있는 성령이 거대해졌다.
그야말로 신의 전사 같은 모습.
그때, 불청객 하나가 끼어들었다.
“악마라……. 이건 베는 맛이 어떠려나.”
온몸에 상처를 달고 있는 남자.
말릭이 성벽 위로 올라왔다.
용수바람의 분노가 성령에 영향이 미친다. 성령이 일렁였지만, 그건 잠깐이었다. 녀석은 분노를 삼키고, 눈앞의 악마에 집중했다.
……!!
다시 한 번 악마가 울부짖자, 하늘에 수없이 많은 하수인이 소환됐다.
키에에엑-!!
새카맣게 하늘을 덮은 그 하수인들이 천천히 성벽을 향해 날아오기 시작했다.
‘이건 막을 수 없다.’
모두의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을 때.
“교구장님! 신성력이 필요합니다!”
진의 목소리가 공터에 울려 퍼졌다. 가롯은 기다렸다는 듯 움직였다.
“모두 허공에 신성력을 뿜어내세요!”
“예?!”
사제는 깜짝 놀라 가롯에게 되물었다. 허공에 신성력을 뿜으란 지시였다.
“당장!”
하지만 가롯의 서슬 퍼런 목소리에 사제들은 의문을 집어넣고 신성력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가롯을 비롯한 사제들의 신성력은 순식간에 공터를 가득 채웠다.
“신이시여!”
진이 소리치자 신성력이 진의 손에 이끌리기 시작했다.
“악이 침범할 수 없는 신성한 대지를 내려 주소서!”
그 신성력이 한데 뭉치더니, 엄청난 빛을 뿜어냈다.
“성역 선포!?”
가롯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성역 선포는 자신도 하지 못하는 고위 성법이다. 심지어 성역이 선포된 영역은 카이얀 대요새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교구장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이 정도 신성력으론 불가능한 일이었다.
“설마……! 모두 신성력을 전부 뿜어내라! 성역 선포는 이 정도 신성력으론 사용할 수 없다!”
그런 교구장의 선택은 정답이었다.
“컥!”
기침과 함께 진의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제야 교구장은 어떻게 되고 있는지 이해했다.
“뭣들 하느냐! 예비 성자께서 생명을 태우고 계신다! 전력을 다해라!”
교구장과 사제들이 쥐어 짜내듯 신성력을 뿜어내자 진의 표정이 한결 편해졌다.
하지만 그래도 부족했다.
내부는 성역이 선포됐지만, 성벽 전체를 감싸는 건 힘들었다. 군데군데 빈틈이 생겼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끼에에에엑-!
하수인들은 성벽 너머로 넘어오지 못했다. 성역 안에 들어오자마자 녀석들은 비명을 지르며 소멸했다.
절망은 성안에서 피어난 희망 앞에 사라졌다.
모두가 경이의 눈빛을 담아 기적을 만든 진을 바라봤다.
“하아, 하아. 죄송합니다. 모든 성벽을 감싸지 못했습니다.”
한데 진은 기적을 보여 줘 놓고, 자신의 부족함을 사과했다.
“그러니!”
그래도 괜찮았다.
이곳엔 그 부족함을 채울 힘이 얼마든지 있었다.
“여러분의 힘이 필요합니다. 부디 세상을 위해 힘을 보태 주셨으면 합니다!”
진의 말을 거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왕국의 검은 왕국을 수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법. 왕국은 그대의 헌신을 기억할 겁니다. 왕국 기사단이여, 왕국의 적을 상대하라!”
왕국 기사단을 시작으로.
“다들 죽지 마라. 감찰부에 밀린 일이 많으니.”
감찰부 특무대.
“예비 성자님과 또다시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교황청 30번째 검과 성기사.
“후. 오늘은 10분을 채 잠들지 못했구나. 그래도 하나만 상대하면 되니 일찍 끝나겠지. 수고했다. 나머지는 우리에게 맡기거라.”
어느새 밖으로 나온 성주까지.
모두가 성벽을 향해 달려갔다.
사람들이 가득하던 공터에는 진과 교구장 그리고 사제들만 남게 되었다.
교구장은 황급히 진의 곁으로 달려왔다.
“괜찮으십니까!?”
그는 눈물마저 뚝뚝 흘리며 진에게 다가왔다. 그의 질문에 진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분합니다.”
“……예?”
“이것밖에 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너무 분합니다.”
교구장과 사제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그들은 알고 있다.
진은 성벽 안에 있는 이들과 더 안쪽에 있는 왕국을 구했다. 그것도 자신의 생명을 불태워서!
눈앞에 있는 이는 그저 ‘예비 성자’라 불릴 만한 이가 아니었다.
그는 성자 그 자체였다.
“성자님. 그래서 제가 온 거 아니겠습니까.”
가롯은 진의 기운을 북돋아 주려는 듯 애써 밝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번에 축성된 물건들을 이용하셨단 이야기를 듣고, 이곳에 오는 동안 여러 교구에 들러 챙겨 왔습니다.”
교구장은 그렇게 말한 뒤, 사제들에게 말했다.
“가져오세요.”
그의 말에 사제들은 마차를 끌고 왔다. 그 마차엔 수십 개가 넘는 축성된 물건이 실려 있었다.
“부족한 힘은 제가, 아니, 교단이 채워 드리겠습니다. 부디 행하고자 하는 일을 하셨으면 합니다. 성자님 뒤에는 교단이 있습니다.”
진은 멍하니 그 마차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교구장님.”
진의 감사 인사에 교구장은 언제나처럼 말했다.
“모든 건 신의 뜻대로.”
그 말에 딱딱하게 굳어 있던 진의 표정이 풀렸다.
“제가 할 수 있는 걸 하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진의 몸에서 성령들이 튀어나와 축성된 물건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마차에 실려 있던 축성된 물건들이 진의 주위로 날아왔다.
“교구장님, 제가 악을 물리칠 준비를 하는 동안, 성벽에 있는 이들을 도와주시겠습니까?”
“예. 알겠습니다. 성자님께서 다시 움직이시기 전까지 반드시 버티겠습니다!”
교구장과 사제들이 물러난 뒤, 엄청난 신성력이 진의 몸을 감쌌다.
진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신성력이.
* * *
신성력 속에 있는 진은 의외로 눈이 부시지 않았다. 밖에서 보기엔 안에는 빛이 가득할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렇게 한 이유는 간단했다.
[진, 데려왔어.]
진짜 중요한 미팅이 잡혀 있었다.
“어디?”
[야. 빨리 모습 안 드러내?]
그 말과 함께 로메른 옆에 다른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거 참 죄송합니다. 절대 들키면 안 된다고 하셔서, 준비하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악마라서 어떤 존재일지 기대했는데, 상상과는 전혀 달랐다.
지구의 정장과 비슷한 걸 입은 30대 아저씨였다.
머리의 뿔과 등의 날개 그리고 악마의 꼬리가 아니었으면 그를 악마라고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악마 단탈리온입니다.>
심지어 악마답지 않게 예의가 발랐다.
“어. 안녕하세요.”
덕분에 진도 꾸벅 인사를 했다.
[야. 뭔 존댓말이야. 우리가 비용 지불하고 쓰는 건데, 반말해도 돼.]
역시 로메른인가.
악마한테 갑질을 권장하다니.
“어 그래?”
물론 로메른이 그러라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터. 진은 곧장 갑질에 들어갔다.
“반가워.”
<……범상치 않은 정령도 놀라웠는데, 정말 놀라운 건 그 정령을 소환한 분이셨군요.>
진의 태세 전환을 그렇게 평했지만, 진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어. 칭찬 고마워. 근데 우리가 대화하고 있어도 되는 거야?”
<예. 제 특기 분야 중 하나가 바로 ‘환영(幻影)’입니다. 저 성벽 너머에 있는 건 제 환영일 뿐 제가 아닙니다.>
“……저게 환영이라고? 너 장난 아니구나?”
<하하. 지금은 특수한 경우입니다. 엄청난 사념을 대가로 소환됐으니 가능한 일입니다. 게다가 소환 시간도 생각보다 짧게 정해 놓으셔서 사실상 ‘무적’이라고 보셔도 됩니다.>
긴 설명이 이어졌지만, 요약하자면 밖에 있는 건 환영이고 여러 가지 상황이 겹쳐서 강한 상태란 뜻이었다.
진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로메른에게 질문을 던졌다.
“로메른, 어떻게 됐어?”
[협상은 잘 끝났어. 우리 쪽 생각대로 움직여 줄 거야. 진 네가 말했던 특수 효과? 그것도 넣어 준대.]
“오. 그것도 된다고?”
진의 질문에 대답한 건 로메른이 아니었다. 단탈리온이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제가 환영 전문이라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잘됐네. 그렇게 진행해 주면 될 거 같아.”
이렇게 협상이 완벽하게 마무리되나 싶었는데.
<저,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로메른 정령님. 아까 제가 말씀드렸던 거 좀…….>
[아! 그거?]
“뭔데?”
[말릭 좀 가져가고 싶다고 하던데? 비싸게 쳐준대. 살해의 업이 탐나는 모양이더라고.]
“……뭐?”
지금 인신매매를 권하는 거야?
[어때?]
진이 잠시 고민하자 단탈리온이 입을 열었다.
<보상은 선불로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 살해의 업을 지닌 녀석의 영혼도 제가 수확하겠습니다!>
[계약 때문에 그래. 전투하면서 자잘한 상처는 낼 수 있어도 죽일 수는 없으니까.]
<예. 맞습니다. 전부 해제해 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 말릭이란 인간만 예외로 해 주시면 됩니다!>
확실히 악마와의 계약은 나름대로 합리적이었다.
그래도 진이 고민하자, 녀석은 몸이 달았는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로메른 정령님과 협상했을 때보다 더 좋은 보상을 드리겠습니다!>
하. 사람을 뭐로 보고.
보상따위에 흔들리는 줄 알아?!
“보상이 뭔데?”
[제법 괜찮은 거야. 그러니까…….]
그렇게 신성력 속에서 성자와 악마와 정령이 밀담이 이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