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작가의 정령 천재-44화 (44/210)

044. 거대한 똥

다리가 후들거렸다.

온몸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버텨! 괜찮은 표정 지어!’

하지만 쓰러지지 않았다.

진은 정신을 다 잡고, 근엄한 표정을 유지했다.

하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아니, 근데 이 정도 반동이 온다고는 말 안 해 줬잖아!’

생각할수록 열 받았다.

진은 조금 전 로메른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기선 제압이 뭔지 보여 줄게.’

녀석의 말대로 기선 제압을 하긴 했다. 거대한 빛으로 몬스터를 격퇴해 임팩트를 남겼다.

하지만 반동이 상상 이상이었다.

‘딴생각할 때가 아니야. 지금은 기껏 만든 이미지를 유지해야 할 때야!’

그때 루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피를 활성화해서 기력을 빠르게 회복하고 있어요. 조금만 버텨 주세요!]

그녀는 로메른이 싸지른 똥을 치우기 위해 진의 피 속에서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로메른 이놈, 욕 처먹을 거 알고 도망간 건가?’

빛의 구슬을 던지고 녀석은 조사한다고 말한 뒤 성벽 쪽으로 날아갔다.

조사는 개뿔, 진이 보기엔 도망친 게 확실했다.

‘후. 침착하자.’

진은 오연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척했다. 이런 진의 개수작은 다행히 효과가 있었다.

“밀어붙여! 마지막 놈들이다!”

“신의 힘이 우리와 함께한다! 우린 절대 죽지 않는다!”

성벽에 넘어오던 몬스터는 쭉쭉 밀려나고 있었다. 병사들은 절대 죽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솔직히 말하면 한계였다.

용수바람은 탈진해 쓰러졌고, 진은 간신히 서 있는 상태였다.

‘애들이 잘하겠지.’

그나마 다행인 건 노바와 다른 아이들은 아직도 힘이 넘친단 점이었다.

그렇게 진이 근엄한 척하고 있을 때, 진의 곁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예비 성자님을 뵙습니다.”

진이 고개를 돌려 보니, 사제 하나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렇게 예를 취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 부제의 자격으로 이곳에 왔을 뿐입니다.”

진은 이 대화를 빠르게 끝내고 싶었지만, 둘의 대화를 듣고 다른 이가 끼어들었다.

“보통 인물이 아닐 거라 생각했는데, 예비 성자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어느새 성주가 바로 뒤에까지 다가와 있었다.

[미안해요. 다가오는 걸 확인할 만큼 여유가 없었어요.]

루나는 곧장 사과했지만, 진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차라리 잘된 일이야.’

자신의 입으로 ‘예비 성자’라고 말하는 것보다 이렇게 슬쩍 흘리는 게 더 좋은 일이었다.

“예비라는 말이 붙은 것처럼, 전 아직 아무것도 아닙니다. 교단 내부에서만 쓰는 직책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대의 뜻이 그렇다면 그렇게 하겠다.”

성주는 무뚝뚝한 것처럼 보였지만, 보면 볼수록 솔직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표정이 이렇게 잘 드러나는 귀족은 또 처음이네.’

그녀의 표정엔 호의적인 감정이 그대로 느껴졌다.

요새에서만 생활해서일까?

귀족들은 보통 표정을 숨기는 게 능한데, 그녀는 그렇지 않았다.

“우선, 사과부터 하겠다. 그대가 부족하다고 말했지만 그렇지 않다.”

“아닙니…….”

진이 겸손을 표하기도 전에,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는 훌륭한 이들을 수하로 두고 있고, 그대의 이상을 이룰 힘마저 가지고 있다.”

성주에게 사과를 받은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극찬까지 받았다.

“카이얀 대요새는 그대의 도움을 잊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왕국의 벽. 염치없는 자들이 아니다.”

진은 그녀가 어떻게 성주 자리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말 하나하나엔 힘이 실려 있었으며, 표현할 수 없는 위엄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왕국 모두가 카이얀 대요새에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진은 잠시 말을 고른 뒤 대답했다.

“그저,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진의 말에 그녀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훌륭하다.”

첫 만남에도 들었던 말이 또다시 튀어나왔다.

“어째서 그대가 예비 성자란 직책을 받았는지 알겠군.”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려 성벽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 뒷모습은 참으로 멋졌다.

진이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것처럼, 옆에 서서 진과 성주의 대화를 들은 사제 또한 진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때, 확인을 마친 로메른이 진을 향해 날아왔다.

[진! 확인 끝났어!]

* * *

옆의 사제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어서 로메른과의 대화는 한참 뒤에 이뤄졌다.

“끝이다!”

“으하하! 네놈 아직도 살아 있구나?”

“오늘도 버텼다고!”

성공적으로 몬스터들의 침입을 막은 다음 내성으로 돌아오고 나서야 로메른과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뭘 발견했는데? 날 고생시킨 보람이 있어야 할 거야.”

[걱정하지 않아도 돼. 솔직히 말하면 그 트롤 무리를 단숨에 죽이는 게 꼭 필요했어.]

녀석은 청산유수였다.

“좋아. 이야기해 봐.”

[그놈들이 노리던 게 뭔지 한참 고민해 봤어. 결국 두 가지로 좁혀지더라고.]

“두 가지?”

[어. 사막을 이용해 몬스터를 성벽으로 밀어붙여 죽이는 것 자체가 목적이다.]

“그사람 다음은?”

[몬스터가 빠지고 난 다음 그쪽 땅에서 뭔가를 하려고 했다.]

둘 다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한데, 녀석은 확인했다고 했다.

둘 중에 확인할 수 있는 건 전자였다.

“몬스터의 죽음을 이용하려고 했다는 거야?”

[어. 제법 은밀하게 작업해 놨더라고. 내가 아니었으면 발견하지 못했을걸?]

녀석은 무언가를 찾은 것이다.

“뭘 찾은 거야?”

[그걸 알고 있어? 죽음에선 많은 것들이 흘러나와.]

“죽음에서?”

진의 물음에 녀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진한 감정과 사념, 영혼, 피 이런 게 엄청나게 흘러나와.]

여기까지만 들어도 녀석들의 계획이 뭔지 감이 왔다.

“그것들을 모았다는 거야?”

[어. 한곳에다 모아 놨더라고.]

진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얼마나 쌓였어?”

[한동안 회수하지 못한 거 같던데? 애초에 지금 상황에서 저걸 회수할 수는 없었겠지.]

맞는 말이었다.

몬스터가 끝도 없이 밀려오는데 저걸 회수하는 건 힘든 일이다.

“각이 나올 거 같은데. 그거 우리가 쏙 빼먹을 수 있어?”

[우리가 가로채자는 거야?]

“어. 단순히 가로채면 재미없지. 이걸 유리하게 써먹어 보자.”

진의 얼굴에 악당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너 나랑 비슷한 생각한 거 같은데?]

그건 로메른도 마찬가지였다.

두 악당이 낄낄거리며 대화를 이어 갈 때, 세상에서 가장 성스러운 자가 입을 열었다.

[악을 괴롭히는 일이라면 저도 한팔 거들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성녀까지 참전했다.

정령사와 정령들의 대화는 깊은 밤까지 이어졌다.

* * *

특별한 전서구 하나가 교황청을 향해 날아왔다. 그 전서구는 그 누구도 거치지 않고, 곧장 교황에게 전해졌다.

“카이얀 대요새에 계신 예비 성자께서 보내신 전서구입니다.”

“내용은 보았는가?”

“봉해져 있기에 보지 못했습니다.”

교황은 고개를 끄덕이며 서신을 받고, 곧장 내용을 확인했다. 한데, 서신을 읽는 교황의 반응이 이상했다.

“…….”

교황의 표정이 점점 굳기 시작하더니, 이내 싸늘할 정도로 변했다.

“교황청의 검 중 대기 중인 이가 있는가?”

교황의 싸늘한 목소리에 사제는 황급히 대답했다.

“30번째 검께서 현재 대기 중이십니다.”

“……그로선 부족할 터인데.”

벽을 마주하고 있는 실력자가 부족하단 말에 사제는 이게 보통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내 서신을 써 줄 터이니 왕국 감찰부와 가롯 교구장에게 서신을 전달하게.”

그저 성기사를 더 차출할 줄 알았는데, 왕국 감찰부와 교구장의 이름이 교황의 입에서 거론됐다.

“최대한 빠르게 전달하겠습니다.”

사제가 대답하자 교황이 입을 열었다.

“은밀하게 보내게. 지금은 속도보다 은밀함이 중요할 터이니.”

교황청에서 날아오른 전서구가 플린트 남작령과 왕국으로 향했다.

며칠이 지나고, 왕국은 교황청에서 보내온 서신을 확인했다. 그리고 교황청과 비슷한 반응이 터져 나왔다.

“감찰부를 불러와라! 왕국 기사단의 절반을 차출한다!”

이쪽은 교황청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회의가 필요한 일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은 왕명으로 진행할 것이다!”

서신대로 일이 벌어진다면, 왕국엔 치명적인 구멍이 뚫리게 된다. 귀족 회의를 하고 의견을 조율해 병력을 파견할 때가 아니었다.

하나하나 강자들로 구성된 병력이 필요했다.

“모두 카이얀 대요새로 향하라!”

왕국은 숨 가쁘게 움직였다.

한데, 왕국과는 조금 다른 반응을 보이는 곳도 있었다.

플린트 남작령 교구.

“모두 신의 뜻일지니.”

그곳의 교구장 가롯은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준비했다.

교황청의 검.

왕국 기사단과 감찰부.

교구장급 사제.

그들 모두가 카이얀 대요새를 향하기 시작했다.

* * *

왕국과 교황청이 떠들썩하게 움직이는 사이. 그 사태를 일으킨 진은 나름대로 평온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둥-! 둥-!

둥-! 둥-!

전투를 알리는 북소리가 울리면, 밖으로 나가서 근엄하게 서 있기만 해도 사기는 끝도 없이 치솟았다.

종종 위험할 땐.

[용수바람의 이마에 피로 성호를 그려 주시겠어요?]

용수바람 이마에 성호를 그려 주면 해결이었다.

‘내가 귀찮아서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니까.’

로메른이 성벽 밖에서 다른 작업을 하고 있어서, 뭘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게 이제는 그냥 진이 서 있기만 해도 병사들의 사기는 쭉쭉 올라갔다.

‘오늘도 무난하네.’

그렇게 몬스터들이 물러가면, 진은 로메른에게 작업 경과를 확인했다.

“얼마큼이나 진행됐어?”

[소환식을 구성하고 있어. 시간이 걸리는 건 어쩔 수 없어.]

진과 로메른은 녀석들이 챙겨 가기 전에 이걸 써먹을 생각이었다.

“근데 진짜 소환해도 괜찮은 거야?”

물론 기왕 소환할 거 여러 가지를 챙길 수 있는 것을 소환할 생각이었다.

[괜찮아. 말했잖아. 이놈들이 처먹은 만큼은 일해 준다니까? 의외로 굉장히 합리적인 놈들이야.]

[그건 저도 동의합니다. 다만, 그 합리적인 것이 선, 악을 따지지 않으니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악으로 불리는 겁니다.]

로메른은 그렇다 쳐도 성녀마저 이 존재를 합리적이라고 생각할 줄은 몰랐다.

“철저하게 우리 쪽 의도대로 움직여 준다는 거지?”

[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내가 여럿 소환해 봤는데, 그중에 제일 센스 있는 놈으로 소환 준비하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다행이었다.

처음 이 존재를 소환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진은 경악했다.

“하. 내가 하다 하다 악마를 소환할 줄이야.”

사념을 이용해 소환하기로 한 존재는 다름 아닌 ‘악마’였다.

진과 로메른, 성녀.

셋이 머리를 맞대고 토의한 결과였다. 성녀가 있는데 악마가 무슨 말인가 싶었는데, 의외로 성녀는 열린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위험한 칼일 뿐 정말 위험한 존재는 아니에요. 물론, 회귀 전 몇몇을 멸하긴 했지만요.]

이건 회귀 전 수많은 경험을 한 성녀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아직 대륙에선 악마가 바로 ‘악’이었다.

그런 악마가 지식의 해방 이름으로 소환되면 어떻게 될까?

“녀석들에게 거대한 똥을 투척해 주자고.”

왕국과 교단만 그들을 경계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대륙 전체가 그들을 경계할 것이다.

[이거 진짜 재밌어지겠네.]

악마 소환 쇼.

이게 바로 진이 지식의 해방을 위해 준비한 거대한 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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