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작가의 정령 천재-43화 (43/210)

043. 카이얀 대요새

벌써 며칠째 카이얀 대요새로 마차의 행렬이 이어졌다. 그 마차에는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이 실려 있었다.

물 대신 먹을 수 있는 과일.

전투에 필요한 각종 소모품들.

몰려드는 몬스터를 생각하면 물자가 부족한 게 당연했는데, 이 지원 덕에 물자가 넘쳐 났다.

“벌써 며칠째야!?”

“대체 누가 이렇게 많이 보내는 거야!?”

수많은 몬스터가 쏟아지고 있었지만, 이 엄청난 지원 덕분에 요새의 분위기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저건 뭐야?”

한데, 평소와는 조금 다른 마차 하나가 맨 끝에 끼어 있었다.

“가마도 실려 있어. 귀족의 마차 아니야?”

“아니야. 마차에 박혀 있는 문양 봐 봐. 교단의 마차인 것 같은데?”

“마부가 야만인이잖아. 교단에서 야만인을 마부로 쓰나?”

“대체 뭐야 저 마차…….”

병사들은 마차를 보며 수군거렸지만, 정작 그 안에 누가 타고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확실한 거 하난 있네. 저길 곧장 들어가는 걸 보니 끗발 있는 양반이 왔나 봐.”

마차는 곧장 대요새의 주인이 있는 내성으로 들어갔다.

“왔군.”

마차를 쳐다보는 사람 중엔 ‘말릭’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게 모두가 마차를 주목하고 있을 때 마차 내부에선 더 중요한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가뭄에 관한 정보는 충분히 모였어?”

마차에 타고 있는 진이 입을 열었다.

[어. 여기까지 오는 동안 정보는 충분히 쌓였어.]

“어때? 진짜로 마법으로 일으킨 가뭄이야?”

[솔직히 말하면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지는 모르겠어. 다만, 이 정도로 마법적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면 이건 오랜 시간 준비한 일이야.]

“오랜 시간?”

[어. 최소 10년 이상은 준비한 거 같은데?]

별거 아닌 정보인 거 같아 보이지만, 이건 진짜 중요한 정보였다.

“지식의 해방이니 뭐니 하는 놈들이 최소한 10년 전부터 활동했다는 거네?”

[그렇지.]

10년 동안 녀석들이 해 놓은 일이 이것뿐일까?

‘일단, 이것부터 해결하자.’

너무 깊게 생각할 필요 없었다.

지금 이런 걸 생각한다고 당장 해결책이 나오는 게 아니다.

그냥 심플하게 생각하면 된다.

‘녀석들이 10년 동안 준비한 일을 망치면 되는 일이야.’

일단 엿부터 먹이고, 그다음 일은 다음에 생각하면 된다.

‘뭐, 생각할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

로메른과 루나.

진 대신 생각할 정령이 둘이나 준비되어 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주인님, 내성에 도착했습니다.”

내성 안쪽까지 들어왔다.

“알겠어.”

진은 곧장 마차에서 내렸다.

“방문을 환영합니다, 부제님. 카이얀 대요새에서 수석 행정관 직을 맡고 있는 미로타입니다.”

“환영에 감사드립니다.”

그는 진의 인사를 받은 뒤 내성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성주께서 안에서 기다리시고 계십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진은 그의 안내를 받으며 내성 안쪽으로 들어갔다. 군사 시설인 요새답게 내부는 투박했다.

벽에는 장식품 대신 무구들이 걸려 있었고, 곳곳에 세월의 흔적이 보였다.

그렇게 주위를 둘러보는 사이 어느새 성주가 있는 성주실에 도착했다.

“성주님, 미로타입니다.”

수석 행정관의 말에도 안에서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한데, 수석 행정관은 그리 당황하지 않았다. 평소에 자주 있는 일이라는 듯 목소리를 한껏 높였다.

“성주님! 미로타입니다!”

그러자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거라.”

이제 막 잠에서 깬 거 같은 나른한 여자의 목소리.

“손님을 모셔 왔습니다.”

“누구?”

“가뭄 조사를 요청했던 부제님이십니다.”

“그럼 그냥 들어오거라.”

수석 행정관은 어색한 표정으로 진에게 말했다.

“조금 전까지 몬스터가 날뛰어서 이제 막 잠드셨었습니다. 성주님을 보고 너무 놀라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예. 알겠습니다.”

무슨 핑계를 이렇게 구구절절하게 대나 싶었는데,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카이얀 대요새에 온 것을 환영한다.”

성주실 내부는 개판이었다.

검과 판금 갑옷들이 곳곳에 놓여 있었고, 그녀는 몬스터의 피가 잔뜩 묻은 가죽 갑옷을 입은 채 소파에 누워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성주님. 부제 진 플린트입니다.”

“그래. 교단에서 서신을 받았다.”

진은 이곳에 그냥 오지 않았다.

‘예비 성자가 됐는데, 교단의 힘은 팍팍 써먹어야지.’

무려 교황청의 정식 ‘서신‘을 보낸 뒤에 이곳에 왔다.

“가뭄을 조사하고 싶다고?”

진의 방문 목적은 간단했다.

<가뭄 조사.>

가뭄 조사란 말이 좀 이상해 보이지만, 그 내용은 간단했다.

“예. 그렇습니다. 가뭄이 얼마나 지속될지, 어디까지 영향을 끼칠지 조사해서 확인할 생각입니다.”

“이 가뭄이 대륙에 영향을 줄 거라 생각하시는 건가?”

“솔직히 말씀드리면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기에 확인하려는 겁니다.”

“이해했다.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구나.”

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지금은 카이얀 대요새만 지원하고 있지만, 조사를 통해 밝혀지는 것에 따라 지원 범위를 더 넓혀 갈 생각입니다.”

그 말에 성주의 눈이 커졌다.

“엄청난 골드가 들어갈 터인데.”

성주이기에 진이 하고 있는 지원의 규모가 얼마나 큰지 잘 알고 있었다.

“생명을 구하고 평화를 위해 하는 일인데, 골드로 해결할 수 있다면 싸게 먹힌다고 생각합니다.”

그녀는 진의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훌륭하다.”

만약 진이 귀족의 자격으로 이곳에 왔다면 음흉한 속내를 숨기고 접근한다고 의심했을 것이다.

한데, 눈앞의 진은 부제였다.

그것도 교황청에서 공식 공문을 보낼 정도로 인정받은 부제.

“아직도 그대와 같은 이들이 이 세상에 남아 있었구나.”

성주는 감회에 젖는 기분이 들었다. 평생을 이곳에 살면서 몬스터와 싸운 그녀이기에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저런 이들은 자신을 희생하고 남을 위해 가장 먼저 죽어 간다.

‘바보 같은 이들이지만, 저런 이들이 있기에 수많은 이들이 살아간다.’

그녀 또한 그런 바보 같은 이들의 도움을 받았기에 여태껏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 정도는 아닙니다.”

진이 어색하게 뒷머리를 긁적여도 오히려 겸손해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대의 계획엔 가장 큰 문제가 남아 있다.”

언제 웃었냐는 듯 그녀의 표정은 날카롭게 변해 있었다.

“그대가 가뭄을 조사하기 위해선 성벽 너머로 가야 할 터, 하나 지금은 몬스터들 때문에 넘어갈 수 없을 것이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가뭄을 제대로 조사하기 위해선 성벽 너머로 나아가야 했다. 하나 몬스터가 들끓는 지금은 쉽사리 넘어갈 수 없었다.

“그대의 마음이 선하고, 훌륭한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알겠다. 하지만 힘이 없다면 그건 공허한 계획일 뿐이다.”

그녀는 그렇게 말한 뒤.

“그러니 우리가 몬스터를 몰아낼 때까지 이곳 내성에서 기다리도록 하라. 그대의 일은 그다음부터다.”

그녀의 말도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다. 애초에 부제는 전투에 특화된 인원들이 아니었다.

뛰어난 이들도 있지만, 저 몬스터 대군을 뚫고 나아갈 수 있는 이는 부제 중 손에 꼽을 것이다.

그때 밖에서 큰 북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둥-! 둥-!

둥-! 둥-!

저 소리가 뭔지는 진도 알고 있었다. 몬스터가 쳐들어왔다는 신호였다.

“오늘도 두 시간을 채 자지 못했군.”

그녀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갑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저도 돕겠습니다. 애초에 아무런 힘이 없다면 가뭄을 조사한다고 오지 않았을 겁니다.”

그녀는 하던 일을 멈추고 진을 빤히 바라보다가 퉁명스레 입을 열었다.

“마음대로 하도록.”

이 정도 허락이면 충분했다.

“성벽에서 뵙겠습니다.”

진은 곧장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성주는 나가는 진의 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 * *

밖으로 나오자마자 진은 내성문 앞에 있는 노바를 찾아갔다.

“다들 장비 챙겨. 몬스터들이 쳐들어왔어. 우리도 한팔 거들 거야.”

진의 말에 아이들은 빠르게 자신의 장비를 챙기기 시작했다.

그사이 진은 용수바람을 따로 불렀다.

“용수바람.”

“예, 주인님.’

“이곳에 말릭이 있는 건 알고 있지?”

“……알고 있습니다.”

녀석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길게 말하지 않을게. 녀석과 충돌하지 마.”

“……명하신대로 따르겠습니다.”

“그래. 차라리 그냥 내 명령을 따른다고 생각해.”

진은 녀석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렇다고 그냥 넘어가자는 건 아니야. 네 모든 것을 보여 줘. 말릭 따위가 너한테 닿을 수 없다는 걸 각인시켜 줘.”

용수바람의 표정이 변했다.

“말릭은 그 죗값을 반드시 치를 거야. 그건 약속할게.”

“……주인님을 믿습니다.”

녀석의 표정은 한결 편해져 있었다. 이 정도면 될 거 같았다.

“좋아. 다들 준비됐지? 모든 힘을 개방해도 좋아.”

이곳부터 시작이다.

“보여 줘. 그 누구도 너희들에게 야만인이란 말을 못하게.”

사막부족에 관한 인식은 이곳 카이얀 대요새를 시작으로 변해 갈 것이다.

진과 아이들이 내성을 나섰다.

* * *

성주는 전투 준비를 끝내자마자, 곧장 밖으로 나왔다.

‘병사들의 피로가 풀리지 않았을 터인데.’

거듭된 전투에 병사들은 지쳐 갔다. 그나마 조금 전에 봤던 부제가 보내 준 지원이 아니었다면, 피해는 더 컸을 것이다.

‘그 부제가 걱정이군. 객기 부리다가 죽지 말아야 할 터인데.’

원래라면 부제가 위험할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러 가지가 겹친 상황이었다.

병사의 피로도와 무식한 몬스터의 양. 카이얀 대요새는 평소보다 훨씬 지옥 같았다.

‘오늘도 이곳을 수호할 수 있길.’

평소처럼 각오를 마친 그녀가 내성 밖으로 나왔을 때.

놀라운 상황이 펼쳐져 있었다.

‘야만인?’

저 구릿빛 피부를 보면 영락없이 야만인이었는데, 그 뒤에 이상한 게 달려 있었다.

‘천사?’

천사가 수호하는 야만인이라니.

그녀는 이게 대체 뭔가 싶었다.

‘그것도 셋이나 되다니.’

한 명은 암살자처럼 그림자 속에서 나와 병사들을 구해 낸다. 원래라면 죽었어야 할 병사들이 살았다.

‘빠르고 은밀하다.’

한 명은 궁수였다. 그는 거대한 화살을 사용했는데, 마치 발리스타를 발사하는 것 같았다. 한 발에 몬스터 여러 마리가 날아갔다.

‘허어, 발리스타 같은 궁수라니.’

마지막으로 선봉에 서서 모두를 지키고 있는 자는 여러 가지 의미로 대단했다.

‘그야말로 진짜 전사군.’

최근 그녀가 눈여겨보고 있는 말릭과 똑같이 선봉에 서서 싸우지만, 저자는 말릭과 달랐다.

말릭과는 달리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를 지키기 위해서 선봉에 서 있었다.

‘이게 대체…….’

덕분에 원래라면 위태위태해야 할 상황인데, 병사들의 사기는 최고조였다.

그렇다면 대체 부제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부제의 위치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대체 저 부제는 어떤 존재이길래…….’

천사의 수호를 받는 야만인 하나가 그의 앞에 무릎 꿇고 있었다. 그런 그의 이마에 부제가 피로 성호를 그리자.

“신이시여 우릴 구원하소서!”

성벽 위에 있는 모든 병사들에게 신성력이 부여되기 시작했다.

보호의 성법이 공격을 막고.

재생의 성법이 그들을 치료하고.

활력의 성법이 피곤함을 덜어 주었다.

그녀는 오랜만에 느껴 보는 개운한 감각에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그런 감정을 느끼는 건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모든 병사들이 성벽 아래를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

‘힘이 없는 이의 공허한 계획이 아니었구나. 적어도 지원에는 최고…….’

그때, 부제가 움직였다.

부제의 손에서 빛의 구슬이 만들어지더니, 하늘로 올라갈수록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그 빛의 구슬은 성벽 아래 트롤 무리가 있는 곳으로 떨어졌다.

그녀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천사의 수호를 받는 야만인은 그저 그의 수족일 뿐이었다. 진짜 대단한 건 저 ‘부제’였다.

‘세상에…….’

자신들에겐 더없이 신성한 빛이 몬스터들을 증발시켰다.

‘내가 보지 못한 것이구나.’

저 부제는 모든 것을 준비한 뒤, 이곳 카이얀 대요새로 온 것이다. 여기서 가만히 있을 정도로 그녀는 무능한 지휘관이 아니었다.

“신의 전사들이 우리와 함께한다! 더는 두려워하지 마라! 왕국은 우리를 버리지 않았다!”

쩌렁쩌렁한 그녀의 목소리에.

“우와아아아아---!!”

“신의 전사가 우리와 함께한다!”

병사들이 소리쳤다.

절망이 가득하던 이곳 카이얀 대요새에 ‘희망’이 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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