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2. 갚아 줘야지
교구장이 돌아간 뒤.
진은 오랜만에 집 비밀 지하실로 내려왔다.
“요즘 바쁘게 지내더니, 여기 싹 정리했네?”
[원혼의 씨앗으로 악령 만들어서 갈아 넣는 게 슬슬 효율이 떨어지고 있어.]
반대로 말하면 효율이 떨어질 정도로 악령을 계속 갈아 넣어 성령이 한계치까지 강해졌단 뜻이었다.
“오. 벌써?”
[악령으론 한계가 있으니까. 그렇다고 사령을 만드는 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하지만 이것이 있다면 달라진다.
진은 채찍을 로메른에게 보여 주며 말했다.
“하지만, 채찍이 있다면?”
[성령 강화가 가능하지!]
그렇다고 해서 이게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채찍에 있는 사념과 원혼의 씨앗을 합치면 사령 하나를 만들 수 있을 거야. 원혼의 씨앗이 소모되긴 하지만, 사령을 만들 수 있다면 싸게 먹히는 거야.]
오랜만에 보는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얼굴이었다.
“천사의 모습으로 잘도 그런 말을 하네.”
[내가 이 모습이 되고 싶어서 됐나?]
로메른은 뻔뻔하게 되물은 뒤 다시 본래의 주제로 돌아왔다.
[문제는 사령이 너무 강력하다는 건데, 그건 이쪽이 성장하면 해결될 거야.]
로메른의 말에 여태 조용히 있던 루나가 입을 열었다.
[여러 추기경님의 숭고한 피를 제가 흡수해도 되는지 여전히 모르겠어요.]
그녀는 진이 채찍을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시선으로 채찍을 바라봤다.
마치 보물을 보는 듯한 눈빛.
여기선 진이 나설 차례였다.
“루나, 모든 건 악을 멸하고 세상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야. 추기경님들이 오히려 좋아하실걸?”
[야, 얘가 멍청이도 아니고, 그런 말에 승낙을…….]
로메른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했지만, 루나가 녀석의 말을 끊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네요. 세상을 위해 흡수하겠어요.]
그녀는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와, 이게 통하네.]
로메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진과 루나의 표정은 결연했다.
“루나, 부탁할게.”
[예. 선인들의 피로 이 세상의 평화를 지키겠어요!]
그녀의 말과 함께, 채찍에 묻어 있던 말라붙은 피들이 시간을 거스른 듯 원래의 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녀가 하급 정령이 되기 위해 힘을 사용하는 사이.
[내가 하급 될 때는 얼마나 고생했는데 저건 날로 먹네.]
“일부분 인정.”
진과 로메른은 자리를 잡고, 구경하기 시작했다.
[팝콘인가? 그거 있었으면 좋겠다.]
“육포는 챙겨 왔어. 오! 시작한다.”
채찍에서 핏방울들이 솟구쳐 올라 루나에게 흡수되기 시작했다. 피가 흡수되자 그녀의 몸이 더욱 새빨갛게 변했다.
“생각보다 극적인 변화는…….”
진은 말을 하다 멈출 수밖에 없었다. 루나의 몸에 본격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로메른이 하급이 됐을 때와 비슷하게, 루나의 몸이 커지기 시작했다. 단순히 몸만 커진 건 아니었다.
등에 달린 날개와 이마에 달린 작은 뿔도 커졌다.
‘모습이 이런데도 신기하게 성스러운 느낌이 드네.’
분명 악마와 더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는데, 묘하게 성스럽고 자애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질적인 모습이 그녀를 더 악마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렇게 최하급 피의 정령이던 그녀는 하급 피의 정령이 되었다.
[나쁘지 않은 감각이네요.]
그녀는 만족스럽다는 듯 말했다.
“떠오른 기억은 있어?”
[있긴 한데 당장 써먹을 만한 기억은 없어요. 게다가 중간 중간 내용이 비어 있어서 로메른과 대화를 해 봐야 할 것 같아요.]
당장 써먹을 기억은 없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네.”
진은 아쉽다는 듯 말했지만, 전혀 아쉽지 않았다. 당장 움직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니 진에겐 좋은 일이었다.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자고.”
게다가, 하급이 되면 단순히 기억만 떠오르는 게 아니었다.
“하급이 됐으니까 이제 정령 융합할 수 있겠네?”
[예. 가능할 거 같아요. 저는 서클이 아니라, 피에 융합할 생각이에요.]
피에 융합한다?
이건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게 가능한 일인지 로메른을 바라보자, 녀석이 입을 열었다.
[나야 빛의 정령이니까 서클에 자리를 잡은 거지. 피의 정령이 피에 융합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잖아?]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그렇게 융합하면 어떤 효과가 있는 거야?”
[일단, 독에 면역이 되고, 상처를 빠르게 치료할 수 있어요. 제가 융합하고 있는 한, 죽을 일은 없다고 보시면 돼요.]
“세상에…….”
이것만으로도 엄청났는데.
[게다가, 신성력을 사용하실 때 제가 효율을 높여 드리거나 도움을 줄 수 있어요.]
[신성력 그 자체를 다루는 건 얘가 나보다 더 뛰어나긴 해.]
심지어 다른 부과 효과까지 있었다. 어째서 사령을 잡기 전에 루나의 등급을 올렸는지 이해가 됐다.
[좋아. 준비는 끝났으니까 슬슬 사령 소환을 시작한다!]
* * *
원혼의 씨앗 위로 채찍에 담겨 있는 사념이 쏟아졌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원혼의 씨앗이 원령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
원령들은 씨앗에 삼켜져 끔찍한 소리를 내며 하나로 합쳐지기 시작했다.
[곧 튀어나올 거야!]
로메른과 루나가 진의 몸속으로 들어왔다.
정령 융합.
서클 안으로 들어온 로메른은 확실히 느껴졌는데, 피에 흡수된 루나는 잘 느껴지지 않았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전 여기 있어요.]
하지만 느껴지지만 않을 뿐, 실패한 건 아니었다. 그렇게 진이 정령 융합에 성공하자마자 원혼의 씨앗에서 무언가 튀어나왔다.
[나쁘지 않네. 딱 생각한 대로 만들어졌어.]
수백 마리의 원령을 누더기처럼 기워 붙인 끔찍한 모습. 누가 봐도 로메른의 작품처럼 보였다.
곧이어 녀석이 울부짖었다.
……!!
녀석의 울음소리엔 강한 사념이 담겨 있었다. 사념이 쌓이면 그 자체만으로 힘이 된다.
녀석의 울음소리에 지하실이 흔들리고 벽이 갈라졌다. 진은 그걸 보면서도 막거나 피하지 않았다.
진의 몸에 미세한 상처가 났다.
[몸은 걱정하지 마세요.]
곧이어 미세한 상처가 전부 사라졌다. 마치 시간을 되돌린 것처럼 진의 몸은 멀쩡해졌다.
‘오호. 장난 아닌데?’
머리와 심장이 한 방에 날아가는 게 아니라면, 상처는 큰 위험이 될 거 같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맞을 생각은 없지만.’
진은 곧장 ‘상상’했다.
녀석을 죽이면 안 된다.
제압해서 우리가 써먹어야 했다.
‘거대한 꼬챙이.’
진이 떠올린 건 빛으로 만든 꼬챙이였다.
그 순간, 허공에서 빛으로 만든 꼬챙이 수십 개가 나타났다.
“로메른!”
진이 로메른을 부르자, 꼬챙이가 쏜살같이 사령의 몸에 박혔다.
……!!
마치 곤충을 박제하듯 녀석의 몸이 벽에 박힌다.
……!!
녀석은 그곳에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 쳤지만, 소용없었다.
[신의 힘은 전능하니. 넌 그곳에서 꼼짝하지 못할 것이다!]
서슬이 퍼런 성녀의 말과 함께, 꼬챙이에서 새하얀 빛이 뿜어졌다.
……!!
녀석은 단말마를 지르곤 움직임을 멈췄다.
“어? 죽은 거 아니지!?”
진은 깜짝 놀랐다.
녀석이 죽으면 곤란해진다.
[어. 아니야. 신성력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는 거야.]
다행히 죽은 건 아니었다.
[마나량이 간당간당했어. 하급 정령 되기 전이었으면 못 잡았을 수도 있었겠는데?]
그 말대로였다.
진은 말도 안 되는 힘을 사용하는 것 같지만, 그것도 마나가 허락하는 안에서 사용할 수 있을 뿐이다.
진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나이스였어. 이제 이 녀석으로 성령들 강화하는 거야?”
진의 질문에 로메른이 몸 밖으로 나왔다.
[어. 일단 사령의 눈이란 것만 꺼내고, 곧장 성령으로 변화시켜서 성령들 강화할 거야.]
“사령의 눈은 또 뭐야?”
[마리아한테 줄 거야. 빙의하는 데 도움이 되는 물건이야.]
“오호. 마리아까지?”
노바와 아이들의 성령만 강화하는 게 아니라, 마리아의 성장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어. 마리아의 재능을 썩히긴 아깝잖아. 겜블러까지 구했는데, 더 성장해야지.]
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부터 내 도움은 필요 없지?”
[어. 올라가 봐.]
나머지는 로메른의 일이었다.
진은 비밀 지하실에서 나왔다.
* * *
며칠간 평온한 하루하루가 이어졌다.
“아. 날씨 좋다.”
물론 그건 진만 그랬다.
바쁘게 오가는 짐마차 때문에 마리아는 이곳저곳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고, 로메른은 성령 강화와 사령의 눈 때문에 지하실에 처박혀 나오지 못했다.
‘뭐, 따지고 보면 나도 일하고 있는 거지.’
솔직히 말하자면 해먹에 누워 햇볕을 쬐고 있을 만한 날씨는 아니었다.
이제 슬슬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고, 날이 제법 쌀쌀해졌으니까. 그런데도, 이렇게 나와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실제로 진은 따듯하다고 느끼는 상태였다.
[체온 유지가 제대로 되는 모양이네요.]
루나는 진의 핏속에 융합해 이것저것 다른 활용법을 시험해 보고 있었다.
그렇게 평온한 일상을 보내고 있을 때.
“도련님. 서신이 하나 왔습니다.”
마리아가 진에게 서신 하나를 건넸다.
“서신? 어디서 온 건데?”
“카이얀 대요새에서 보낸 서신이라고 합니다.”
카이얀 대요새?
“설마…….”
진은 해먹에서 벌떡 일어나 서신을 뜯었다.
“미친…….”
말릭 테스.
그 인간이 보낸 편지였다.
그 지독한 인간은 죽지도 않고 살아 있었다.
“진짜 끈질기다 끈질겨.”
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서신을 읽어 내려갔다.
“어!?”
한데, 거기엔 놀라운 내용이 적혀 있었다.
지식의 해방.
‘이놈들이 왜 여기서 나와!?’
말릭은 이들을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일까?
게다가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가뭄은 그들의 소행이다.
“이게 무슨 개소리야?”
가뭄은 일종의 자연 현상이었다.
그걸 저들이 일으켰다고?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걸 그럴 리 없다며 넘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루나. 서신 내용 봤지?”
[예. 봤어요.]
“어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 쓴 서신처럼 보이네요.]
그녀의 말대로 말릭이 쓴 서신은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 쓴 거 같아 보였다. 저 두 내용을 빼면 뭔가 광기가 느껴지는 내용이 채워져 있었으니까.
“이 미친놈의 말이 사실일 가능성은?”
[없다곤 할 수 없어요. 애초에 인간 영토 밖에서 일어난 가뭄이기에 원인 조사를 하지 못했다 들었어요.]
진은 서클을 움직여 로메른에게 신호를 보냈다.
잠시 후, 녀석이 투덜거리며 나타났다.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왜 부른 거야?]
“이거 봐 봐.”
진은 녀석에게 서신을 내밀었다.
시큰둥한 표정으로 서신을 읽던 녀석의 표정이 점점 딱딱하게 굳어 갔다.
[하. 가뭄을 인위적으로 일으켰다?]
“불가능한 일이야?”
[아니. 시간만 충분하다면 얼마든지 일으킬 수 있어.]
“……진짜?”
[어. 나만 해도 가뭄을 일으킬 방법이 적어도 셋 이상은 돼.]
로메른은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가뭄을 왜 일으켰을까?]
“몬스터들이 날뛰게 하려고?”
[어차피 카이얀 대요새는 못 넘어. 혼란이라고 해 봐야 그다지 크지 않고.]
그렇다면 관점을 바꿔야 했다.
“몬스터들이 떼죽음을 당하길 원했다면?”
무슨 이유 때문에 이런 일을 벌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게 제일 그럴싸한 추측이었다.
[그렇게 해서 뭘 얻으려고 한 건지는 가서 확인해야 봐야 할 거 같아.]
로메른도 동의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건 그리 어려운 질문이 아니었다.
“당연히 녀석들을 엿 먹여 줘야지.”
[그치? 뭐가 됐든 못 가져가게 하면 되는 거야.]
로메른과 진의 얼굴엔 비슷한 미소가 떠올랐다.
[한번 갚아 주자.]
“오케이. 이건 귀찮아도 인정이지.”
다음 행선지가 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