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1. 아, 이건 좀
묵직한 무게의 선물.
‘뭐지?’
영감님이 여태까지 보였던 반응을 생각하면 애매한 물건을 보냈을 리는 없었다.
“형제님, 열어 보셔도 됩니다.”
교구장은 그런 진의 생각을 읽은 듯 선물을 확인해 보라고 권했다.
“스승님께 제가 그렇게 달라고 해도 주지 않으셨는데, 이제야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역시, 이런 물건에는 주인이 따로 있는 모양입니다.”
안 그래도 높았던 기대가 교구장의 말에 더욱 높아졌다.
‘대체 뭐길래.’
교구장이 탐을 낸 걸까?
고급스러운 천에 싸여 있었는데, 이 천도 범상치 않아 보였다.
[호오. 대체 뭐길래 천 쪼가리에 성법을 부여해 놓은 거지?]
진의 눈은 틀리지 않았다. 로메른 또한 천에서 뭔가를 느낀 거 같았다.
[빨리 열어 봐. 대체 뭐가 들어 있나 궁금해 죽겠네.]
동감이었다.
진도 대체 이 안에 뭐가 들어 있을지 너무 궁금했다. 천천히 천을 풀어 안에 들어 있는 물건을 확인했다.
‘어?’
열자마자 ‘와! 쩔어!’란 반응이 터져 나올 줄 알았는데, 생각 외로 전혀 다른 반응이 나왔다.
‘이게 뭐야?’
천 안에는 피가 덕지덕지 묻은 가죽 채찍이 들어 있었다. 그것도 일반 채찍이 아니었다.
쇳조각들이 흉악하게 박혀 있는 짧은 채찍. 피를 얼마나 머금었는지 검은색 채찍이 짙은 갈색으로 보일 정도였다.
그걸 보고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이랬다.
뭐야 이거 무서워!
대체 이게 어떤 의미지?
성자가 안 되면 채찍으로 후려치겠다는 경고인가!?
반쯤은 패닉에 빠졌을 때, 이 채찍의 용도를 알 수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여러 추기경님께서 사용하셨던 참회의 채찍입니다.”
참회의 채찍은 삿된 생각이 들었을 때, 자신의 등을 후려치는 채찍이었다.
“……어. 음.”
진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랐다.
싫어하기엔 교구장의 반응을 보니 그건 실례인 거 같았다.
그렇다고 좋아하자니 ‘와! 이 채찍으로 내 몸을 후려칠 수 있다니! 너무 행복해’ 이런 반응을 보여야 하는데.
‘그거 완전 변태잖아.’
한데, 교구장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정말 이건 보기만 해도 굉장한 것 같습니다. 수많은 선인의 고뇌가 묻어 있는 참회의 채찍이라니.”
눈을 반짝이며 채찍을 바라봤다.
진이 보기엔 고뇌보다는 ‘피’가 덕지덕지 묻은 흉악한 물건이었지만.
[오. 이 양반 진짜 여러모로 도움이 되는 양반이네.]
로메른마저 이런 반응을!?
진은 깜짝 놀라 로메른을 바라봤다.
[채찍 자체가 쓸모 있단 뜻은 아니야. 그 채찍에 묻은 ‘피와 사념’이 쓸모 있단 소리지.]
로메른은 곧장 설명을 이어 갔다.
[무려 추기경들의 피가 오랫동안 누적되어 있잖아. 고위 사제들의 피가 얼마나 대단한 건지 모르지?]
솔직히 말하면 당연히 모른다. 하지만 어디다 쓸 수 있을지 감이 왔다.
‘피의 정령.’
그렇게 대단한 거라면 피의 정령인 ‘루나’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표정 보니 감 잡은 거 같네. 이 정도 피면 루나가 최하급을 벗어날 수도 있을 거 같은데? 최하급 벗어나면 루나 녀석도 함께 정령 융합할 수 있을 거야.]
게다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피는 그렇게 쓰면 될 거 같고, 사념은 내가 쓰면 돼.]
사념이란 말에 전에 로메른이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처음 부제 임무 확인할 때 이거랑 비슷한 소리를 한 거 같은데.’
진은 그때 기억을 떠올렸다.
‘교황의 참회실을 정화하면, 사령도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였던 거 같은데.’
다음에 꼭 이 임무를 하자고 신신당부하던 게 기억났다.
[이거랑 원혼의 씨앗을 엮어서 써먹으면…….]
녀석은 벌써 어떻게 써먹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러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루나는 물론이고 로메른에게도 도움이 되는 물건이었다.
“이렇게 귀한 물건을 제가 받아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진은 교구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교구장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형제님이 아니시라면 그 누가 받을 수 있겠습니까. 마음에 들어 하시니 정말 다행입니다. 너무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물건이라 혹 싫어하실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긴, 생각해 보면 처음에 보고 표정 관리를 못하긴 했다.
이건 얼른 만회해야 한다.
“이렇게 대단한 물건을 받을 줄은 몰라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하하. 그냥 기뻐해 주시면 됩니다.”
교구장의 말이 있은 다음에야 진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영감님 고마워요!’
여러 가지 의미로 정말 대단한 영감님이었다.
* * *
그렇게 선물 증정식이 끝나고 나서야,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됐다.
“일단, 예비 성자란 직책에 관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예비 성자.
성자면 성자지 이런 직책이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그런 진의 생각대로 이런 직책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형제님을 위해 만들어진 직책입니다.”
진을 위해 따로 만들어진 직책이었다. 교구장은 계속 설명을 이어 갔는데, 중요한 부분만 뽑아 보자면.
“교단은 예비 성자님께서 ‘위험’한 상황에 닥치시면 모든 역량을 동원해 보호할 것입니다.”
사람을 붙여 주는 것도 아니고, 고작해야 위험이 닥친 이후에 조치해 줄 뿐이지만.
[이거야.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거였어. 교단에서 이런 보호를 해 준다는 것만으로도 웬만한 세력들은 쉽게 접근하지 못할 거야.]
진을 건드린다면 교단의 집요한 공격을 감수해야 한다. 교단은 절대 포기하지 않고, 그들을 추적한다. 이 지독함을 알고 있으니, 진을 쉽게 건드리지 못한다.
‘내가 예비 성자인 것도 모를 정도의 적이라면 내 선에서 처리할 수 있으니까.’
이 보호는 어중이떠중이를 위해 필요한 게 아니었다. 진이 감당할 수 없는 적을 억제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그 외에도 부제의 권한을 행사하실 때도, 가장 우선되어 행사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 외에 다른 것들은 사실상 보너스 정도로 봐야 했다.
‘성자가 되면 귀찮은 일이 벌어졌을 텐데, 그런 일도 없을 것 같고.’
진에게 딱 필요한 요소들만 포함되어 있었다. 영감님이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었다.
“예비라곤 하지만 제가 이런 과분한 직책을 받을 자격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형제님. 부담 갖지 마시고 행하고 싶은 일을 행하시면 됩니다.”
진의 겸손에 교구장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진은 부끄럽다는 듯 말을 애써 돌렸다.
“아. 죄인들 조사는 잘 끝내셨습니까?”
그는 진이 황급히 화제를 돌린 걸 알면서도, 모른 척 응해 주었다.
“예. 잘 끝났습니다. 만족스러운 결과는 나오지 않았지만, 단서는 잡았습니다.”
“그 단서에 관해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예. 그들을 잡은 게 형제님이신데 당연히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한 뒤 설명을 이어 갔다.
“처음에는 이들이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이들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당연한 추론이었다.
“한데, 조사하면 할수록 뭔가 이상했습니다. 조직이라고 보기엔 조금 부족했습니다.”
“예?”
조직이 아니다?
이건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예. 연결점도 없고 서로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저희는 포기하지 않고 다방면으로 조사했고, 단서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어떤 단서입니까?”
“이들은 ‘지식의 해방이란 사상(思想)’을 받아들인 이들입니다.”
“사상이라면…….”
어려운 말처럼 보였지만, 풀어 쓰면 간단했다. ‘지식의 해방’이란 생각을 받아들인 자들이란 뜻이었다.
“그들은 그저 새로운 사상에 홀려 단독으로 움직였을 뿐입니다. 진짜 범인은 사상을 퍼트린 이들입니다.”
교구장의 말은 간단했다.
“그들이 조직인지 아니면 개인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그저 이런 사상을 뿌리는 이들이 있다는 단서만 잡았을 뿐입니다.”
단서만 잡았다고 말한 이유가 있었다.
‘그럼 우리가 사상과 싸우고 있었단 소리야?’
사상이란 건 고작해야 하나의 ‘생각’일 뿐이지만, 지구에선 이 사상 때문에 세상이 뒤집힌 적이 있었다.
‘멀리서 찾을 것도 없어. 공산주의 사상만 해도 그러니까.’
공산주의라는 생각이 전 세계에 들불처럼 번져 나가 세상의 한 축이 된 시절도 있었다.
만약 이 ‘지식의 해방’이 공산주의 사상처럼 파급력 있다면 비슷한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형제님의 표정을 보니, 이게 얼마나 위험한 건지 깨달으신 모양입니다.”
“……예.”
사상은 잡을 수도 죽일 수도 없다.
“그래도 형제님께서 빠르게 발견하셔서 다행인 일입니다. 안 그랬다면 뭐에 당하는지도 모른 채 세상엔 이 사상이 널리 퍼졌을 겁니다.”
교구장의 말대로였다. 적을 찾았으면 해결책도 만들 수 있는 법이다.
“왕국을 시작으로 차례차례 공문을 보내고 있습니다. 적어도 사람들이 이 위험을 인지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겁니다.”
교단 측이 준비한 해결책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게다가 교단은 조사팀을 따로 만들어서 그쪽을 더 파 볼 예정입니다.”
문제를 알리고, 그 근원인 조직을 추적한다. 교단이 이 사상을 얼마나 경계하고 있는지 보여 주었다.
“이와 관련해서 부제의 임무가 올라오면 저도 돕겠습니다.”
진은 예의상 한 말이었는데.
“그런 임무가 등록된다면 바로 알려 드리겠습니다. 형제님께서 도와주시면 이 사상도 금방 없앨 수 있을 겁니다.”
진은 몰랐지만, 교구장은 진이 예의상 말한 것이라곤 전혀 생각지 않았다. 오히려 도와준다는 진의 말에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모든 건 신의 뜻대로.”
작은 오해가 또다시 쌓여 갔다.
* * *
북부의 끝자락 카이얀 대요새.
요새 앞에는 몬스터들의 사체가 가득 쌓여 있었다. 아무리 카이얀 대요새가 지옥 같다고 해도, 이건 비정상적이었다.
게다가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아니, 물이 없는 게 말이 돼!?”
“가뭄이 생각보다 빠릅니다. 근처에서 수원을 확보할 수가 없습니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거리가 너무 멀어서 병력을 꽤 많이 차출해야 합니다. 한데, 지금 상황이…….”
심지어 물까지 부족했다.
두터운 방벽이 있어 봐야 아무 소용 없었다. 결국 몬스터를 처리하는 건 사람의 몫이었다.
카이얀 대요새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한데, 이런 상황에서도 미소를 머금은 이가 있었다.
“후우. 후우.”
그는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치명적인 상처는 없지만 자잘한 상처가 모이면 치명적인 법이다.
극심한 통증에 숨을 몰아쉬고 있지만, 그의 얼굴에선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후. 그나마 저 양반이 있어서 다행이지.”
그런 그를 보며 한 병사가 중얼거렸다. 그런 말과는 달리 병사의 얼굴엔 꺼림칙한 표정이 가득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우리가 살아 있는 건 저 양반 덕이니까.”
“하긴, 악마도 우리 편이면 든든한 법이지.”
그는 언제나 최선두에서 싸웠다. 그 덕에 몰려오는 몬스터들의 부담이 한참 줄어들었다. 원래라면 모두의 존경을 받았겠지만, 그의 잔인한 손 속이 문제였다.
덕분에 그는 악마라 불렸다.
카이얀의 악마 말릭 테스.
그는 아직 살아 있었다. 그런 그의 눈에 묘한 마차 행렬이 들어왔다.
“물이다! 물이야!”
“다들 나와!”
지금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물’을 실어 온 마차였다.
‘어떻게?’
그의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다.
그는 몸을 일으켜, 마차 쪽으로 다가갔다. 모두 목이 마른 상태인데도, 그가 다가가자 자리를 비켜 준다.
“물이 아니군.”
마차에 실린 건, 수분이 많기로 유명한 과일이었다. 그는 과일 하나를 챙겨, 마차를 끌고 온 자에게 다가갔다.
“어디서 온 마차지?”
“아이고 나으리. 이건 플린트 남작가에서 보낸 물건입니다.”
“플린트?”
“그렇습니다. 나으리.”
말릭은 웃음을 터트렸다.
진 플린트.
그가 보낸 마차였다.
‘그가 이곳을 주시하고 있다.’
그러니 이렇게 적절한 시기에 지원을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나처럼 특별한 인간이다.’
물론 서로 특별한 점은 달랐다.
그는 ‘살해’를 위해 살아가지만, 진 플린트는 다른 ‘무언가’를 위해 살아간다.
‘확실히 가짜들과는 다르다.’
자신의 것도 아닌, 남의 ‘생각’ 따위에 휘둘려 자신이 특별한 줄 아는 가짜들. 그딴 가짜들과 비교가 되지 않는 인물이었다.
말릭은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서신을 하나 써 주지. 진 플린트. 그에게 전달해라.”
말릭은 그 말과 함께 골드를 하나 내밀었다. 서신을 전달하고 받기엔 지나치게 큰돈이었다.
“아이고, 나으리. 반드시 전하겠습니다.”
그는 서신을 빠르게 작성해 나갔다.
‘당신이 가짜를 마주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군요.’
진을 떠올린 말릭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