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작가의 정령 천재-38화 (38/210)

038. 깨어나보니 내가 성자!?

따듯하게 내리쬐는 햇살.

아름다운 에메랄드 빛 바다.

진은 선배드에 누워 바다를 감상하며 모히토를 한 잔 마셨다.

“크. 몰디브에선 모히또지.”

사실 진은 몰디브에 가 보지도 못했고, 모히토 또한 마셔 본 적 없었다.

그렇다면 이곳은 어디일까?

‘어디긴 어디야, 꿈속이지.’

지금 이것들은 전부 진이 만들어 낸 것들이었다.

몰디브면 이렇지 않을까 싶어서 만든 아름다운 바다와 생긴 것과는 달리 사이다 맛이 나는 모히토.

‘이게 낭만이지.’

저번에 얻은 구슬 덕에, 쓰러져 있는 지금도 꿈속 세상에서 제대로 쉴 수 있었다.

“쉬는 건 어째 질리질 않냐.”

그렇게 몰디브와 모히토를 즐기고 있을 때, 로메른이 나타났다.

[이야. 진짜 넌 쉬는 일에 관해선 창의력이 무궁무진하구나? 올 때마다 바뀌네. 저번엔 산이더니.]

녀석은 나타나자마자 꿈속 모습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진이 보기엔 이 낭만을 모르는 로메른이 불쌍할 뿐이었다.

일 중독자와 휴식에 관해 논해 봐야 평행선을 달릴 뿐이다.

진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벌써 보름이 넘게 지났는데, 밖은 어때?”

[독감은 전부 치료됐고, 쓰러졌던 기사들이랑 마법사도 전부 일어났지. 덕분에 밖은 난리도 아니야.]

그 난리가 나쁜 난리는 아닐 것이다.

“무슨 난리?”

[한둘이 아닌데, 일단 하나씩 설명해 줄게. 치료제가 공개되고 연금술 길드에서 대체 그 물약이 뭔지 알아내기 위해 교단 측에 접촉했었어.]

약을 제조하고 연구하는 연금술 길드가 교단에 접촉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평소라면 교단에서도 적극적으로 협조했겠지만.’

평소라면 교단은 세상을 위해 약을 공개하고 널리 퍼트렸을 것이다. 하지만 저 약은 평소처럼 만들어진 게 아니다.

“당연히 거절했겠네?”

[어. 그냥 거절한 것도 아니야. 불같이 화를 내면서 거절했어.]

진이 만든 건 ‘피’를 매개체로 이용해 제조한 일종의 ‘약’일 뿐이었지만, 사제들에겐 아니었다.

그들에겐 신께서 내려 주신 신혈(神血)이나 마찬가지다.

“난리 날 만하네.”

[더 놀라운 거 말해 줄까?]

“또 있어?”

[치료에 쓰고 남아 있는 신혈을 보호해야 한다고, 이단 심문관이랑 성기사들이 출동했어.]

“뭐?!”

진의 상상보다 스케일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렇게 된 이유도 골 때린다니까. 역병 전문 사제들 온다고 했던 거 기억나?]

열흘 뒤에 도착한다고 했던 역병 전문 사제들. 진이 쓰러진 지 벌써 보름이 넘었으니 진작 도착했을 것이다.

“어. 기억나.”

[역병 전문 사제들의 대장이 네가 했던 일을 듣고, 네 몸 상태를 보러 왔다가 눈물을 흘렸어.]

“날? 왜?”

지금 진은 침대 위에 죽은 듯 누워 있는 상태였다. 쳐다보는 것만으로 눈물 흘릴 일은 없었다.

오히려 눈물 흘릴 타이밍은 이야기를 들을 때였다.

[축복이 변한 걸 알아봤거든.]

“뭐?”

[교구장의 축복이 아닌, 그 위 등급의 축복이 걸린 걸 확인하고 눈물을 흘리던데?]

교구장의 축복보다 상위의 축복을 받으려면, 현재는 교황 외에는 축복을 걸어 줄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다음 단계의 축복으로 변한 걸 확인한 것이다.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존재는 딱 하나뿐이다.

[그걸 신이 축복을 걸어 준 거라고 생각하던데?]

신.

“……와.”

오해였다.

하지만 진에겐 ‘오예’였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그 양반이 신혈이 확실하다고 확언한 뒤, 신혈을 지킬 자들을 보내 달라고 교황청에 바로 보고했어.]

한평생 대륙을 떠돌며 역병을 치료하던 이가 그런 부탁을 했으니.

“진짜 난리 났겠네…….”

[당연하지. 신의 축복을 받은 자가 나타났는데.]

“……루나는 뭐라고 해?”

루나가 여기까지 내다본 건 아니었을 것이다. 성녀의 축복을 거는 건 겸사겸사 보너스였을 뿐이다.

[신을 사칭한 죄를 지었다고, 채찍으로 등짝 후려치면서 기도 중이야. 네가 가끔 하던 말 있잖아? 꿀잼. 그 뜻을 이번에 이해했다. 진짜 구경하기만 해도 입이 달더라.]

밖은 그야말로 개판이었다.

[아. 그리고 너, 큰일 났다.]

“큰일?”

[남작이랑 니네 형 완전 화났어.]

“……어. 음.”

[집안일까지 우리한테 부탁할 건 아니지?]

로메른의 저 표정이 오늘따라 더 얄미워 보였다.

[슬슬 깨어날 테니까 준비하고 있어.]

“……천천히 깨워.”

진의 말에 녀석은 웃음을 터트렸다.

* * *

남작령의 기사단장 첸.

그는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확인해야 한다.’

그는 단순히 남작령이 은퇴하기 괜찮은 곳이라 온 게 아니었다.

그에겐 ‘숭고한’ 목적이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질 거라곤 생각했지만…….’

물론 그게 역병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처음엔 그도 당황했다.

그가 경계하고 있던 건, 역병이 아니었다. 그는 ‘적의 습격’을 대비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 역병이 터졌으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역병이 해결되긴 했지만.’

진이 역병을 해결하며 여유가 생기자 그는 뭔가 이상한 걸 느낄 수 있었다.

‘너무 공교롭다.’

교구장이 마침 자리를 비운 사이에 발생한 역병. 이건 아무리 봐도 뭔가 이상했다.

만약 진이 역병을 해결하지 못했다면, 자신 또한 역병에 걸려 죽었을 터.

‘소름이 끼치도록 대담한 계획이다.’

무주공산이 된 남작령에서 그가 기다리는 적은 손쉽게 목적을 달성했을 것이다.

물론 오해였고 착각이었다.

이 역병은 기사단장을 노린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역병을 뿌린 거라면…….’

아이러니하게도 쌓이고 쌓인 오해 덕에 기사단장은 진실에 다가갈 수 있었다.

‘역병이 끝나 가는 지금이야말로 그들이 다시 움직일 터. 그들을 찾아야 한다.’

남작령에 웅크려 있던 숨은 강자가 적을 찾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적을 찾아 나서자마자, 그는 이상한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 아이들이 도련님의 주위를 떠날 리가 없을 터인데.’

아이들은 도련님을 지키는 걸 자신들의 사명으로 알고 있었다. 한데, 아이들은 은밀하게 무언가를 쫓고 있었다.

그는 이내 아이들이 무엇을 쫓고 있는지 깨달았다.

‘연금술사?’

아이들은 연금술사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허어…….’

그 이유가 뭘지는 쉽게 짐작됐다.

‘막내 공자는 알고 있었구나.’

이게 적들의 공격인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심지어 적을 특정하고 벌써 조사 중이었다.

‘여기까지 안배해 둔 것인가…….’

이 역병을 해결한 것도 진이었는데, 그 원인을 해결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 것도 진이었다.

‘난 부족하구나. 부족해.’

막내 공자에 비하면 자신은 한참 부족했다.

‘어쩌면 소문이 사실일지도 모르겠구나.’

남작령엔 묘한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막내 공자가 생명을 소모해 신의 힘을 빌려 왔다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이었다.

소문이 진짜든 아니든 어쨌든 막내 공자는 심력을 쏟아 이 역병을 막았다.

‘그동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구나.’

이제 막 성인이 된 아이가 어떻게든 역병을 막기 위해 움직이는 동안,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뭐가 수호자란 말이냐.’

수호자란 말이 어울리는 건 막내 공자였다. 그는 그저 방관자였을 뿐이다.

‘더는 지켜보지만 않겠다.’

그가 독단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건 몇몇 적들을 상대할 때뿐이지만, 지금 그 적을 찾은 것 같았다.

물론 그의 정체가 드러나는 건 치명적이다. 정체를 숨기며 적을 잡아야 한다.

‘저 아이들을 도와준다면?’

제법 괜찮은 그림이 나올 거 같았다.

이번 ‘역병 사건’은 막내 공자의 손에 모든 게 끝날 것이다.

* * *

보름이나 눈뜨지 못하던 진이 드디어 눈을 떴다.

“진!?”

“진아, 일어난 게냐!?”

대공자와 남작의 목소리가 진의 귀에 꽂혔다. 진은 입을 열었다.

“아버지? 형?”

진이 눈을 뜨고 가장 먼저 본 것은 남작과 대공자의 얼굴이었다.

“다행이구나.”

남작은 길게 말하지 않았다.

그저, 깨어나서 다행이라고 말할 뿐이었다. 단 한마디였지만 진심이 그대로 느껴졌다.

“죄송해요.”

진은 혼날 각오를 했는데.

“괜찮아.”

의외로 혼나지 않았다.

“네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그런 표정을 하는 것이냐. 오히려 고맙구나.”

혼나지 않는 걸 넘어 칭찬을 받았다.

“네가 어떤 마음으로 그런 일을 했는지 잘 알고 있단다.”

예? 무슨 마음요?

“모두 들었단다.”

예? 뭘 들어요?!

“어쩌면 이 아비가 널 너무 가둬 두려고 했던 건지도 모르겠구나.”

예?! 아, 아버지!?

진은 생각지도 못한 흐름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버지와 형에게 혼나고, ‘외출 금지’ 정도를 받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 생각과는 전혀 달랐다.

‘대체 이게 뭐야?!’

분명 로메른의 말대로라면…….

그 순간 진은 깨달았다.

‘할 농담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농담이 있지!’

그 때려 주고 싶을 정도로 얄미웠던 미소가 이제야 이해가 됐다.

로메른이 장난친 게 확실했다.

그렇게 진실을 깨달은 사이, 이야기는 다시 한 번 이상한 흐름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손님이 있단다.”

“손님요?”

“그래. 만나 보거라. 네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린 분이란다.”

여기서 손님이라니.

그렇게 진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때.

손님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인사드립니다.”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가 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심지어 그냥 할아버지도 아니었다.

사제복을 입고 있으니 이분은 ‘사제’였다.

“이, 이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진은 깜짝 놀라 황급하게 입을 열었다. 한데, 할아버지는 진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가롯에게 대단한 분을 발견했다고 들었을 때 전 믿지 못했습니다.”

가롯은 교구장님의 이름이었다.

‘미친.’

그런 교구장을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위치의 사제란 뜻이었다.

“전 수많은 절망을 만났습니다. 역병은 물리쳐도 끝이 없고, 저희는 계속해서 실패했습니다.”

진은 그제야 이 할아버지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역병 전문 사제들의 대장.

그게 바로 이 할아버지였다.

“전 평생을 구하지 못한 이들을 생각하며 후회하며 살았습니다. 이게 신의 뜻인지 의심마저 했습니다.”

평생을 역병과 싸워 온 사제.

“그런 삿된 생각이 제게 심처럼 박혔습니다. 신께선 제게 어찌하여 이런 임무를 맡기신 건지 한평생 그 이유를 찾았습니다.”

끝없는 절망을 마주해야 할 이유를 평생 찾은 사제.

“전 당신을 만나며 이유를 찾았습니다. 신께서 제게 이 모든 시련을 내려 주신 건 당신을 만나게 하려고 계획하신 겁니다.”

그런 그가 신의 뜻을 확인한 것이다.

“성자시여. 전 당신을 알아보았나이다.”

끝없는 절망을 마주한 이유. 그 이유는 바로, 그 절망을 밝혀 줄 사람을 찾기 위해서였다.

“부디 이 세상에 가득한 절망을 희망으로 바꿔 주시길.”

그의 말은 신성했으며 진지했고, 거대한 세월의 무게가 느껴졌다.

진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똑- 똑-.

다음 손님이 방문했다.

“누구냐.”

남작이 조용히 입을 열자, 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사단장입니다, 남작님.”

“급한 일이 아니면 나중에 이야기했으면 합니다.”

“급한 일입니다.”

그런 기사단장의 말과 함께.

“주인, 내가 잡았다!”

노바의 커다란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뭘 잡아? 설마…….’

남작이 무슨 말이냐는 듯 진을 바라봤다. 진은 솔직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역병을 퍼트린 범인을 잡은 거 같습니다.”

“범인?!”

남작은 깜짝 놀라 되물었지만.

“모든 건 신의 뜻대로.”

할아버지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회귀자의 계획은 효과가 좋아도 너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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