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7. 나를 희생해 모두를 구한다
[재밌네, 재밌어.]
재밌다고 말하는 것과는 달리, 로메른의 표정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대충 감 잡았어.]
벌써?
진짜인가 싶어 루나를 바라보니, 그녀가 입을 열었다.
[로메른의 추리는 타당해요.]
[당연하지. 이 개 같은 것들을 우리가 기억하지 못할 리도 없으니까.]
로메른은 그렇게 말한 뒤 설명을 이어 갔다.
[길게 말하지 않고, 간단하게 핵심만 설명해 줄게.]
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독과 역병은 일단 잊어.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맞아요. 지금 중요한 건, 이런 일이 벌어진 ‘이유’예요.]
그 말대로였다.
이유를 알아야 이쪽도 대처 방법을 정하고, 독과 역병을 해결할 수 있다.
[애초에 이놈들의 목적이 뭘까?]
목적?
그거야 간단하다.
‘우리가 흑마법사를 잡았으니 보복하는 게 아닐까?’
그런 진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녀석이 입을 열었다.
[단순히 보복하자고 벌인 일이었다면, 그냥 너한테 독을 먹이면 되는 일 아니야?]
어?!
생각해 보니 그랬다.
독이라고 했으니, 여러 인원이 투입돼서 이런 상황을 만들었을 것이다. 한데, 보복이 목적이라면 이렇게 복잡하게 할 이유가 없었다.
차라리 그냥 진한테 독을 먹이면 될 일이었다.
[그치? 뭔가 이상하지?]
로메른의 말대로 뭔가 이상했다.
이건 보복이 아니었다.
보복이라고 하기엔 너무 복잡한 방법이었다.
“그럼?”
진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진이 입을 열자 주위에서 진을 바라봤지만, 지금 그딴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역병이 퍼져서 영지가 심각한 상황에 도달했다고 생각해 보자고, 그럼 넌 어땠을까?]
만약 그랬다면 절망까진 아니어도, 굉장히 복잡한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너한테 ‘금지된 지식’을 들고 접근하는 사람이 있다면?]
당연히 그 지식을 갈구할 것이다. 잘못됐다는 걸 알고 있다고 해도, 한 번쯤 확인했을 것이다.
[흑마법사가 했던 말 떠올려 봐.]
그가 했던 말.
‘지식의 해방.’
그는 광기에 가득 차 지식의 해방을 갈구했다.
‘만약에 그 흑마법사도 구해야만 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진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건 빠져나갈 수 없는 늪이었다.
[표정 보니까 대충 감 잡은 거 같네. 이 녀석들의 목표는 너였어. 널 회유하려고 했던 거야.]
영지 하나를 쑥대밭으로 만든 이유는 단 한 사람을 위해서였다.
‘미친…….’
상상도 할 수 없는 커다란 스케일에 진은 기가 질리는 기분이었다.
물론 진의 그런 감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쫄지 마. 독이랑 역병은 지금 당장에라도 약을 만들 수 있어. 그건 그다지 어려운 게 아니야.]
[맞아요. 지금 중요한 건 단순히 이 역병과 독을 몰아내는 게 아니에요.]
[진짜 중요한 건 어떻게 해결하느냐는 거야. 그 방법이 중요해.]
진의 앞엔 회귀자가 있었다.
[기대하세요.]
그것도 둘이나.
이건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방법은?”
진의 물음에 로메른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시는 손대지 못할 존재가 되면 되는 거야.]
손대지 못할 존재?
* * *
진은 제일 먼저 마리아를 불렀다.
“마리아.”
“예, 도련님.”
진은 그녀에게 가까이 오라고 한 뒤,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놀라거나 당황한 티 내지 마. 최대한 담담하게 내 이야기를 들어. 연금술사들을 감시해. 노바와 아이들에게도 감시하라고 전하고, 의심스러운 행동을 해도 잡지 말고 일단 내버려 둬. 일단 확인만…….”
진의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그녀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저, 진이 모든 이야기를 끝냈을 때.
“예, 도련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래, 수고해.”
그녀는 진이 말한 걸 정확히 알아들은 거 같았다.
‘시작하기 전에 안전장치는 마련해야지.’
이제부터가 진짜였다.
진은 곧장 사제들을 불러 모은 뒤, 본론으로 들어갔다.
“도움이 필요합니다.”
“방법이 있으신 겁니까?”
“예.”
진의 말에 사제들의 눈이 커졌다.
“정말이십니까?”
이 대화를 연금술사들이 못 들었을 리 없었다. 그들의 시선 또한 진에게 모였다.
“예. 다만, 저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교구장님께서 모든 도움을 아끼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을 도와 드리면 되겠습니까?”
그렇게 막 대화가 시작되려고 할 때.
“어떤 일인진 모르겠지만, 우리의 도움은 필요 없으십니까?”
연금술사 영감님이 다가왔다.
진은 고개를 저었다.
“예. 이건 빛의 정령의 도움을 받는 일이라, 교단의 도움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허어. 그럼 신성력으로 치료 방향을 잡으신 겁니까?”
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범인이 누군진 모른다.
범상치 않은 저 영감님일 수도 있고, 그와 함께 온 다른 연금술사일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면, 아예 제3의 인물일 수도 있지.’
무엇 하나 확실하지 않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
교단은 안전하다.
‘혹여나 흔들린다고 해도 스스로 채찍질해서 다 털어 내겠지.’
이쪽은 회유가 되지 않는다.
“지금 가장 귀한 건 ‘시간’입니다. 빠르게 움직이겠습니다.”
“예, 부제님.”
진은 사제들과 함께 교단으로 향했다. 아까 말한 대로 지금은 시간이 생명이었다.
진은 가면서 필요한 것들을 설명했다.
“철급 부제는 교단에서 여러 가지 물건을 지원받을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예. 맞습니다.”
“사제님들께서 축성하신 물건들이 최대한 많이 필요합니다.”
‘축성’이라는 특별한 의식을 통해 물건에 신성력을 부여한, 일종의 ‘일회용 성물’이다.
이 물건은 보통 마기에 오염된 지역이나, 마기에 오염된 사람을 정화할 때 사용하는 물건이었다.
“혹, 이번 역병이 마기와 연관된 것입니까?”
그런 물건이 대량으로 필요하다고 했으니, 사제의 이런 반응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꼭 필요합니다. 철급 부제의 자격이면 얼마나 받을 수 있겠습니까?”
“두 개가 최대입니다. 하지만 교구장님께서 모든 지원을 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필요하신 만큼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이러면 이야기는 빨라진다.
“도착하자마자 모두 꺼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바로 꺼내 드리겠습니다.”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아직 필요한 게 더 남아 있었다.
“그리고 커다란 항아리가 여러 개 필요합니다.”
“항아리 말입니까?”
“예. 그 항아리에는 물이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흠. 이것도 시간이 좀 필요할 뿐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그렇게만 준비해 주시면 될 거 같습니다. 나머지는 제가 이 아이들과 함께해 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은 사제들과 함께 교단에 도착했다. 진이 뭐라고 부탁하기도 전에, 사제들은 곧장 움직였다.
“축성한 물건을 전부 꺼내라!”
교단 안에 있던 물건들이 줄줄이 꺼내지고.
“교단에 있는 항아리를 전부 꺼내 물을 담아라!”
물을 담은 항아리가 준비되기 시작했다.
“우리가 얼마나 빨리 움직이느냐에 따라, 구할 수 있는 생명의 수가 달라진다!”
진이 원한 것들이 빠르게 준비되고 있었다.
* * *
사제들이 준비하는 동안, 진도 가만히 있던 건 아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순서를 알려 드릴게요. 제가 옆에서 계속 도와 드리겠지만, 일단 알고 계셔야 해요.]
루나의 설명을 들으며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렇게 진이 준비하는 사이.
“부제님, 준비됐습니다.”
사제들은 생각보다 빠르게 준비를 끝냈다.
축성한 물건들이 쭉 놓여 있었고, 그 앞으로 물이 가득 담긴 항아리 수십 개가 놓여 있었다.
“시작하겠습니다.”
진이 엄숙하게 선언하듯 말하자, 로메른은 타이밍을 맞춰 성령을 꺼냈다. 성령들은 축성된 물건에 빙의해 진의 주위로 날아왔다.
[위치 잡았어!]
신성력을 뿜어내며 진 주위에 떠 있는 축성된 물건들은 기괴하다기보다는 신비롭고, 성스러워 보였다.
“신이시여.”
진을 지켜보고 있던 몇몇 사제들은 감동한 얼굴로 무릎을 꿇었다.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그럼 안 되지.’
진은 다음 단계로 나아갔다.
“신이시여!”
진은 그렇게 소리친 후, 무릎을 꿇고 양손을 모았다.
“부디 저희를 굽어 살펴 주시옵소서! 남작령에 가득한 어둠을 물리쳐 주시옵소서!”
그렇게 진이 소리치자, 진의 주위에 떠 있던 성물들에서 신성력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신이 진의 기도에 응답한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당연히 이건 신의 이적이 아니었다.
[다 꺼냈어! 이거 언제까지 유지해야 돼!? 빨리빨리 안 해!?]
이건 로메른이 만든 상황이었다.
이렇게 신성력을 무지막지하게 뿜어낸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부터 성녀의 축복을 부여할게요.]
이건 일종의 ‘쇼’였다.
성녀가 진에게 축복을 부여하는 건 역병과 독을 해결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쇼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건 아니었다.
‘성녀의 축복도 받을 수 있고.’
준비가 필요하단 축복을 축성된 물건을 이용해 한 방에 받을 수 있으니 진에게도 좋은 일이었고.
‘사제들에게 임팩트도 남길 수 있고.’
마치 기적을 보여 주듯 임팩트 있는 장면을 연출할 수도 있었다.
이건 꼭 필요한 ‘쇼’였다.
[당신을 축복합니다.]
성녀가 조그마한 손을 진의 머리 위에 올리고 나지막이 중얼거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주위에 가득하던 신성력이 마치 요동치듯 일렁이더니.
[미친!]
그 모든 신성력이 진에게 빨려 들어왔다.
[……말이 안 되잖아. 이건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는 양이 아닌데.]
마치 법칙을 거부하듯 그 신성력은 진의 몸에 흡수되어 ‘무언가’를 변화시켰다.
[뭐야 도대체, 변화가 있는데 왜 느껴지질 않아?]
한데, 그게 무엇인지 로메른조차 확인하지 못했다.
‘뭐, 그건 천천히 알아보면 되고.’
지금부터가 진짜였다.
[축복은 끝났어요. 이제 다음으로 넘어갈게요.]
그 순간 항아리에 담긴 물에 변화가 생겼다.
“서, 성수!?”
항아리에 담긴 물이 성수로 변한다. 하지만 변화는 아직 끝이 아니었다.
진은 단검을 꺼내 손바닥을 베었다. 알싸한 통증과 함께 손바닥에서 피가 떨어졌다.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진의 말과 함께, 손바닥에서 흘러나온 피가 허공에 떠올랐다. 그러곤 한 방울씩 항아리 안으로 들어갔다.
[피를 매개체로 속성 변환 시작할게요. 로메른, 와서 얼른 도와요!]
[알겠어!]
고작해야 한 방울이었는데, 항아리의 성수들이 마치 피처럼 붉게 물들었다.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어느새 모든 사제가 무릎을 꿇고, 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는 눈물을 흘렸고 누군가는 진이 말했던 성서 구절을 읊었다.
진의 몸은 마치 피가 빠지고 있는 것처럼 실시간으로 수척해졌다.
[힘 빠진 목소리로 말하는 거 기억해. 겉보기만 이런 거지 몸 상태는 똑같아.]
진은 로메른의 조언대로 힘이 잔뜩 빠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항아리에 담긴 것이 치료제입니다. 급한 이들부터 나눠 주시면 됩니다.”
그 어떤 사제도 진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늘 기적을 목도했다.
오히려 감격한 얼굴로 진을 바라봤다.
“많이 먹는다고 효과가 더 좋은 건 아니니 모두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부탁드립니다.”
사제들이 대답하기도 전에, 진은 입을 열었다.
“피곤합니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자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진의 몸이 무너지듯 쓰러졌다.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끝나 있을 거야. 독을 더 쓴다고 해도 해독제가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마치 성혈처럼 보여 주었으니, 관리는 그 무엇보다 철저할 거예요. 걱정하지 말고 푹 쉬세요. 고생하셨어요.]
진은 녀석들의 말을 들으며 잠에 빠져들었다.
‘쉴 때 됐지.’
막 잠들려고 하는 진의 귓가에 로메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고 일어나면 깜짝 놀랄걸? 넌 성자가 되어 있을 거야.]
그것참 마음에 드는 소리네.
교구장의 총애로 부족하다면, 성자가 되어 교단 전체의 비호를 받는다.
이게 바로 두 회귀자가 내어 놓은 해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