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6. 역병?
“형, 일단 진정해. 나한텐 빛의 정령이 있잖아. 위험할 일 없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일단 잔뜩 흥분한 상태인 형을 진정시키려고 꺼낸 말이었는데.
“이번 역병은 달라. 신성력으로도 치료되지 않아.”
오히려 형을 자극한 꼴이 되고 말았다.
‘신성력으로 치료가 되지 않는다?’
이쪽 세상에서 신성력은 일종의 만병통치약이다. 연금술이 발달하긴 했지만, 치료보다는 다른 부가적인 효과를 위해 발달했다.
‘기존 의료 체계가 통하지 않는다는 건데…….’
신성력이 통하지 않는 역병.
이건 특수한 상황이었다.
“진. 빨리 짐 챙겨서 도시를 떠나. 이건 진짜 위험한 역병이야.”
다급한 형의 모습과는 달리, 어제까지만 해도 도시는 평화로웠다. 역병이 퍼졌다고는 생각 못할 정도였다.
“형, 조금만 더 자세히 설명해 줘. 이렇게 평화로운데 역병이라니.”
형의 표정만 봐도 이건 장난이 아니란 건 알 수 있었지만, 이상한 점이 너무 많았다.
“후우.”
대공자는 자신이 너무 흥분했다는 걸 깨달았는지 감정을 추스르고 입을 열었다.
“백성들에겐 독감에 가까울 뿐이다. 치사율이 그리 높진 않아서 다들 역병이라곤 생각지 못하고 있지. 다행히 이들은 신성력으로 회복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
그런데도 이런 심각한 분위기를 풍긴다면, 누군가에겐 위험하다는 뜻이었다.
“대신, 마나를 사용하는 이들에겐 치명적이다.”
“어떤데?”
“심각해. 이쪽은 그저 독감 정도의 증상이 아니야. 마나를 많이 가지고 있을수록 증상이 심각하다.”
이건 말이 되지 않았다.
마나를 가진 이는 쉽게 병에 걸리지도 않고, 걸린다고 해도 금방 털고 일어났다.
그게 바로 마나의 힘이었다.
한데, 지금은 정반대의 상황이 펼쳐졌다.
‘진짜 심각한 이유는 따로 있어.’
게다가, 진짜 이 역병이 심각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마나를 다루는 이들은 이 세상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
귀족과 기사, 마법사.
이런 이들이 마나를 다룬다.
만약 이 역병이 대륙으로 퍼져 나간다면?
귀족들 대부분이 사망하고, 기사와 마법사의 씨가 마를 것이다.
‘미쳤네.’
그야말로 미친 일이다.
통치자인 귀족들이 사라져서 생길 혼란은 어떻게 수습된다고 해도 그다음이 문제다.
기사와 마법사.
이들은 단순한 무력 단체가 아니다. 몬스터들의 공격으로부터 대륙을 지키는 이들이다.
‘애초에 고위 몬스터는 마나가 있어야 막을 수 있어.’
마나 사용자가 있기에 이 대륙의 평화가 유지되는 것이다.
“형. 도시는 봉쇄했어?”
“도시뿐만이 아니야. 남작령 전체를 봉쇄하고 있어.”
“남작령 전체를!?”
단순히 도시 하나를 막는 것과 지역 전체를 막는 건 다른 일이었다.
‘손해가 엄청날 텐데.’
남작령은 시골이지만 이곳과 계약된 상단과 여러 단체를 생각해 보면, 도시를 봉쇄하면서 막대한 손해가 발생한다.
남작은 손해보다 역병을 막는 게 맞다고 판단한 거 같았다.
‘아니야. 그게 맞아.’
만약, 이곳에서 퍼진 역병 때문에 고위 귀족이 사망한다?
그때부턴 진짜 지옥이 시작된다.
“지금은 손해를 생각할 때가 아니야.”
그 말대로였다.
진은 침대 밑에 있는 상자를 하나 꺼냈다.
“일단 급한 불은 이걸로 꺼.”
진은 상자를 열어서 내부를 보여 줬다. 그 안에는 금화가 가득 들어 있었다.
“……진?”
“대충 1만 골드쯤 될 거야.”
1만 골드면 지구 돈으로 100억 가까이 하는 돈이다. 형이 놀란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뭐, 한 상자 줘도 아홉 상자 남아 있으니까.’
마리아가 도박장에서 따 온 골드는 10만 골드가 넘는다. 진은 그중 1만 골드를 건넸을 뿐이다.
“진. 이게 대체…….”
“저번에 나 여행 갔을 때 카베마스에서 들렀어. 그때 운 좋게 땄어.”
“도박으로 이 골드를 땄다고?”
형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했지만, 아직 놀랄 일이 남아 있었다.
“내가 아니라 마리아. 걔 완전 잘하던데? 이거 봐 봐. 카베마스에서 칩 환전할 때 준 서류야.”
진은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카지노 인장이 찍혀 있는 공식 서류.
웃긴 이야기지만, 카지노 서류는 왕국의 공식 문서만큼 위조하기 어렵기로 알려져 있다.
이 칩 환전 서류는 겜블러들에겐 명예였고, 트로피나 마찬가지였으니.
“……진짜구나.”
대공자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진은 곧장 마리아를 불렀다.
“마리아!”
진이 밖을 향해 마리아를 부르자, 그녀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예, 도련님.”
서류까지 보여 줬는데도 형은 마리아가 오자마자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진이 이걸 네가 땄다고 하던데, 사실이냐?”
“그렇습니다, 대공자님. 도련님께서 10골드로 한 판만 해 보라고 하신 게, 계속 이기다 보니 다소 많이 따게 되었습니다.”
이쯤 되니 형도 믿을 수밖에 없었다.
“허어. 10골드가 1만 골드가 됐다?”
형은 상자와 마리아를 번갈아 바라봤다. 그사이 진은 마리아에게 지시를 내렸다.
“마리아, 외출 준비해. 본가로 갈 거야.”
“예, 도련님.”
그제야 형은 정신을 차리고 진을 바라봤다.
“진!”
안 된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는데, 그럴 수는 없었다.
“환자들을 정령들한테만 보여 주고 해결책이 있는지만 물어볼게. 형, 너무 걱정하지 마. 난 환자들 근처에도 안 갈게.”
대공자는 갈등했다.
동생을 생각하면 곧장 도망치라고 하는 게 맞지만.
‘정령들이라면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진의 정령이 환자를 한 번 보는 것만으로 수많은 이들을 구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난 너무나 무력하구나.’
그런 대공자의 생각을 읽은 듯 진이 입을 열었다.
“형, 괜찮아.”
“……미안하다.”
대공자는 그저 미안하단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역병에 걸린 수많은 백성과 기사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먼저 가서 준비 좀 해 줘, 형. 난 몇 가지 준비 좀 하고 바로 남작가로 갈게.”
“알겠다. 마차까지 준비해 오거라. 만약 해결책이 없다면 바로 남작가를 벗어날 수 있게.”
“알겠어, 형.”
* * *
준비가 필요하다고 말했지만, 진짜 준비가 필요한 건 진이 아니었다.
‘얘들은 하루 종일 어딜 가 있는 거야.’
진은 서클을 통제해 기운을 끊었다 풀기를 반복했다. 급한 일이 있을 때를 대비해 정해 놓은 방법이었다. 정령은 떨어져 있다고 해도 서클은 느낄 수 있다.
잠시 후, 로메른과 루나가 나타났다.
[왜? 뭔 일이야?]
“역병이야.”
[역병? 그게 뭔 소리야? 여기서 역병이 왜 일어나?]
진은 곧장 대공자에게 들었던 것들을 녀석들에게 설명했다.
한참을 듣고 있던 로메른과 루나의 표정이 점점 기묘하게 변했다.
[이런 역병이 있다고? 이건 말이 안 되는데.]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상상도 못한 반응이 튀어나왔다.
“그게 뭔 소리야?”
로메른은 답답하단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너 역병 총론도 안 봤어?]
[로메른. 그 책은 아직 나오기 전이에요.]
[아, 그래서 그런가?]
[역병에 관한 연구가 이뤄지려면 앞으로 10년은 더 있어야 해요.]
둘은 저들만 아는 이야기로 쑥덕거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쉽게 말하면 증상이 너무 중구난방이야. 백성에겐 독감인데 마나를 가진 이들에겐 치명적이다? 이건 애초에 말이 안 된다니까? 내가 보기엔 백성들이 걸린 병이랑 마나를 가진 사람들이 걸린 병이랑 같은 병이 아니야.]
이런 상황에 로메른이 허튼소리 할 리 없었다.
“형은 역병으로 확신하고 있던데?”
[그래? 음. 경솔하게 움직일 사람은 아닌 거 같던데.]
녀석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확실히 역병은 아니란 거지?”
[적어도 마나를 가진 이들에게만 치명적인 역병은 없어.]
“아까 둘은 다른 병이라고 했지? 그럼 백성 쪽은?”
[독감 쪽이 오히려 현실적이지. 100년 전만 해도 독감도 역병으로 분류됐었어. 차라리 그쪽이 역병이라고 했으면 그럴 수도 있다고 했을 거야.]
“독감도 역병이라고?”
[그래. 미래에도 독감 때문에 난리가 나긴 했어. 증상이나 전염 속도는 그쪽이 훨씬 빠르긴 했지만.]
역병에 관한 설명은 이 정도면 충분했다. 더 자세히 설명 듣는다고 진이 이해할 것도 아니었다.
“이쪽 남작가 쪽에서 역병이 발생한 적 있어?”
진은 더 확실한 질문을 던졌다.
[이건 내가 확언할 수 있어. 없어. 단 한 번도 없었어.]
원래라면 퍼지지 않았을 역병이 갑자기 퍼졌다면 그 이유는 뭘까?
‘먼 곳에서 찾을 필요 없어.’
역사가 변했다면, 우리가 바꾼 역사가 문제일 것이다.
“설마, 우리가 흑마법사를 잡아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거야?”
[확실하진 않지만, 그럴 확률이 높아.]
솔직히 이런 일이 벌어질 줄 몰랐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세상을 구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곤 대충 예상했다.
‘올 게 왔구나.’
오히려 드디어 올 게 왔다는 느낌이 들었을 뿐이다.
생각이 정리되자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보였다.
“좋아. 해결책은?”
일단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게 급선무였다.
[역병이든 뭐가 됐든, 환자만 확인하면 원인을 밝힐 수 있어.]
[저는 원인만 안다면 치료 방법에 관해 도움을 드릴 수 있어요.]
그렇다면 망설일 필요 없었다.
“바로 갈게.”
진은 곧장 집을 나섰다.
* * *
진은 빠르게 움직였다.
본가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환자를 찾아갔다.
“부제님 오셨습니까.”
그곳엔 사제들도 와 있었고.
“허허. 막내 도련님이 오셨군요.”
범상치 않던 연금술사와 그의 제자로 보이는 이들도 와 있었다.
“바쁜 상황이니 한 번에 인사드리겠습니다.”
진은 그렇게 간단하게 인사를 한 뒤, 곧장 정령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들어가서 확인해. 마나를 가진 사람과 없는 사람, 둘 다 안에 있을 거야.”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금방 다녀올게!]
두 녀석은 안으로 날아갔다.
역병에 관한 조사는 두 녀석에게 맡기면 될 일이었다.
아이들이 역병을 해결할 방법을 찾으러 안으로 들어간 사이, 사제들이 다가왔다.
“부제님.”
“예, 사제님.”
사제는 진에게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한 가지 알려 드릴 게 있습니다. 교구장님의 명으로 이번 역병 사건은 ‘은급’ 부제 임무로 등록되었습니다.”
“……어떤 뜻인지 이해했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전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교구장이 이런 조치를 한 이유가 뭔지는 감이 잡혔다.
“부제님이 계셔서 다행이라고 하셨습니다. 다만, 함께하지 못하는 건 미안하다고 하셨습니다.”
그야말로 엄청난 신뢰였다. 교구장은 진이라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니 이걸 ‘은급’ 임무로 등록해 준 것이다.
교구장님 나이스샷!
‘해결만 하면 은급으로 자동 승급이라 이거지?’
교구장이 세팅해 놓은 상황은 진에게 너무나도 좋았다.
‘역병 해결’이란 조건이 달렸지만, 루나와 로메른이 있으니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아닙니다. 이토록 절 믿어 주시니, 그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교단에서는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테니, 도움이 필요하시면 그저 요청하시면 됩니다. 지금은 저희만 도움을 드리지만, 열흘 뒤면 교황청 쪽에서 역병 전문 사제들이 부제님을 도와 드릴 겁니다.”
교황청에서 출발한 역병 전문 사제의 도움.
교단도 지금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단 뜻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사제들과의 대화가 끝났을 때, 로메른과 루나가 돌아왔다.
[진. 역시 생각대로야. 마나를 가진 기사 쪽은 역병이 아니야. 오히려 백성들 쪽이 역병에 걸린 거야.]
진은 조용히 녀석에게 속삭였다.
“역병이 아니면?”
[독이야.]
그 말에 진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연금술사 쪽을 향했다.
해독제와 독.
이 두 가지는 연금술의 영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