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작가의 정령 천재-35화 (35/210)

035. 노예 2호.

빨간 가루들이 뭉치더니 이내 형상을 이루기 시작했다.

한데, 뭔가 이상했다.

‘처음엔 불인 줄 알았는데…….’

불이라기엔 너무 짙은 빨간색.

게다가 이건 액체처럼 느껴졌다.

짙은 빨간색의 액체.

그런 액체는 하나뿐이다.

“이거 설마 피야?”

[어. 그때 흑마법사 상대할 때 붉은 거 흡수한 거 있지? 그게 피의 정혈이라는 건데, 그것 때문에 피의 친화력이 확 올라갔어.]

다른 정령을 소환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한 이유가 있었다.

피의 친화력이 높으면 어떤 정령이 소환될까?

고민할 필요도 없다.

[넌 피의 정령을 소환한 거야.]

빛 다음엔 피의 정령이라니.

4대 원소 정령이 아닌, 특수 정령을 2연속으로 뽑은 것이다.

진이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어느새 정령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여자?”

성스럽고 자애로운 얼굴.

그 얼굴만 봐도 그녀가 무슨 직업이었는지는 예상이 됐다.

“설마 성녀?”

한데, 그 생각은 곧 사라졌다.

정령의 등으로 날개가 나타나고, 머리에 앙증맞은 뿔까지 자라났다.

“……악마?”

영락없는 아기 악마의 모습.

천사인 로메른의 모습과는 극과 극인 모습이었다. 영웅 파티에 악마가 있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한 가지뿐이었다.

“동료 중에 흡혈귀가 있던 거야?”

그 말에 로메른은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야. 아까 네가 말한 대로 성녀가 맞아.]

성녀!?

흑마법사는 천사더니, 성녀는 악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일단, 준비부터 해. 저 또라이가 힘 못 쓰게 서클부터 잠가 놔.]

“또라이?”

성녀한테 또라이라니. 그게 뭔 말인가 싶었는데, 이내 그렇게 말한 이유가 뭔지 대충 감이 잡혔다.

흑마법사와 성녀.

흑과 백.

둘은 정반대였다.

‘하긴, 둘이 사이가 좋지 않을 만도 하지.’

아무튼 로메른의 말대로 해서 손해 볼 건 없었다. 그렇게 서클의 통제력을 높이고 있을 때.

[신이시여. 당신의 뜻에 따라 제가 돌아왔나이다.]

성녀가 눈을 떴다.

[뭔 개똥 같은 소리야. 돌아온 건 신의 뜻이 아니라 마법이었는데.]

진의 생각대로 둘은 앙숙인 거 같았다. 로메른은 곧장 성녀의 말에 딴지를 걸었다.

하지만 성녀는 로메른의 말을 신경도 쓰지 않았다.

[로메른. 대체 어울리지 않는 그 모습은 뭔가요? 끔찍하군요.]

그녀의 말에 로메른은 낄낄거리며 대답했다.

[니가 내 꼴을 뭐라고 할 때가 아닐걸?]

그녀 앞에 빛으로 만든 거울이 나타났고, 그제야 그녀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봤다.

한데, 그녀는 당황하지 않았다.

[신이시여, 당신의 뜻을 알았습니다. 전 악을 부수는 악마가 되어 이 세상을 구원하겠습니다.]

오히려 이조차도 신의 원대한 계획이라고 생각하는 거 같았다.

로메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와, 이걸 이렇게 생각하네. 하여간 또라이라니까.]

로메른이 대놓고 또라이라고 말했는데도,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궁금한 걸 물어볼 뿐이었다.

[그대가 처음 소환된 건가요?]

[그래. 내가 첫 번째였어. 니가 두 번째고.]

[……그건 최악의 상황이네요.]

그 반응이 만족스럽다는 듯 로메른이 낄낄거렸다.

성녀는 미간을 좁힌 채 로메른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저으며 진을 바라봤다.

[죄송해요. 이제야 인사드리네요. 과분하게도 성녀라 불렸던 루나예요.]

확실히 성녀가 다르긴 달랐다.

‘이런 애를 보고 또라이라고 한 거야?’

자애로운 목소리와 표정에 로메른 때문에 생겼던 경계심이 빠르게 사라지기 시작했다.

“반가워. 난 진 플린트야.”

진의 반응을 본 로메른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야, 정신 차려. 속지 마. 쟤 또라이라니까.]

다시 한 번 ‘또라이’란 말이 등장했다.

[그대는 아직도 그 천박한 말투를 못 버린 모양이네요.]

[너도 내숭 떠는 건 여전하네?]

로메른은 그렇게 말한 뒤, 곧장 진에게 말했다.

[이 내숭에 속았다가 머리통 날아간 애들이 하나둘이 아니야, 진. 다시 말하지만 속지 마.]

내려가던 경계심이 다시금 차올랐다.

[그리 경계하지 않으셔도 돼요. 전 오직 ‘악’을 증오할 뿐이에요. 혹시 ‘악인’이신가요?]

“아니. 그런 건 아니야.”

[그럼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그녀는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에게서 얼핏 ‘광기’를 느낀 건 기분 탓일까?

왠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로메른이 괜한 말 할 리가 없으니까.’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이상하게도 경계심만 계속 올라갔다.

그런 진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성녀는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희는 세상을 구하기 위해…….]

로메른에게 들을 설명이 다시 한 번 그녀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거 내가 이미 설명했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이제부터 내 이야기나 들어.]

그걸 로메른이 지켜만 보고 있을 리 없었다.

[진. 우리가 계약한 내용 얘한테 설명해 준다.]

“좋아. 이야기해 줘.”

로메른은 곧장 그녀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꽤 다채로운 반응을 보였다.

[당신, 세상을 구하는 걸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처음엔 화를 내기도 했지만.

[일종의 거래네요?]

점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더니.

[하긴, 저도 동감이에요. 악은 숨을 뿐, 교화되지 않아요. 악인을 풀어 주는 그들의 행위를 전 이해하지 못했어요.]

어느새 로메른과 진이 준비한 계약에 관해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치? 솔직히 교화하느니 죽이고 넘어가는 게 빠르고 효과적이잖아?]

[그런 저급한 이유 때문이 아니에요. 전 신의 뜻대로 악을 멸할 뿐이에요. 악은 세상에서 사라져야 하니까요.]

다만, 성녀면 자애롭고 성스러운 그런 이미지라고 생각했는데, 광신도나 할 법한 말이 튀어나왔다.

‘또라이라고 한 이유가…….’

이제야 이해되기 시작했다.

성녀는 선한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그 발상부터가 잘 못됐다.

‘성녀로 뽑힐 만큼 신앙이 큰 사람.’

신앙이 너무 크면 어떻게 될까?

‘광신도가 되겠지.’

여기까지 생각하자 진의 머릿속에 새로운 공식이 생겼다.

성녀 = 광신도.

사실상 성녀는 광신도가 아닐까?

이러면 로메른이 또라이라고 한 이유도 설명된다.

[어쨌든 나쁘지 않네요. 세상을 구하는 데 거래란 개념을 사용하는 게 못마땅하긴 하지만, 우릴 도와주는 진에게도 보상이 필요하단 말은 동의해요.]

[오. 네가 웬일이야? 신을 찾으면서 무조건 도와야 한다고 할 줄 알았더니.]

[그는 교구장의 축복을 받았으니까요. 신께서 거대한 안배를 해 놓으신 ‘선인’이란 증거예요.]

여기서 교구장의 축복이 나온다고!?

이건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교구장의 축복이 이렇게 도움이 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일단 제가 먼저 보상을 드릴게요. 대신 나중에 제 부탁을 들어주세요.]

“좋아. 부탁이 뭔데?”

[그건…….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생각보다 훨씬 기억이 뒤죽박죽이에요. 로메른의 도움도 필요해요.]

[오호. 성녀님께서 미천한 흑마법사에게 도움을 요청한다고?]

로메른은 건수를 잡았다는 듯 이죽거렸지만.

[미천한 줄은 알고 있었군요?]

성녀는 강했다.

이게 바로 어둠을 이기는 빛인가?

그렇게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둘은 싸움을 멈추고 다시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왔다.

[제가 드릴 건 간단해요. 성녀의 축복. 받아 보시겠어요?]

[뭐!? 그걸 해 준다고? 영감탱이한테도 안 해 줬던 걸!?]

성녀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진을 바라봤다.

[어떠세요. 대가로는 충분하지 않을까요?]

[진, 이건 무조건이야. 회귀 전에도 성녀의 축복을 받은 사람은 없었어.]

[자격이 되는 사람이 없었을 뿐이에요.]

성녀는 담담한 표정이었는데, 오히려 로메른이 난리였다.

“그 정도야?”

[어. 게다가 이건 내가 해 줄 수 없는 영역이야.]

교구장의 축복으로 진은 정령을 소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성녀의 축복이면 어떻게 될까?

진은 이내 결정을 내렸다.

“그럼 부탁할게. 대신 너무 무리한 부탁이면 나도 도와줄 수 없어.”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더 많은 악을 잡기 위해 참아야 하는 건 잘 알고 있어요.]

그녀의 말을 듣고, 진은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또라이라 부른 이유가 있네.’

역시, 로메른은 괜한 말을 하는 녀석이 아니다. 성녀 때문에 괜히 로메른의 신뢰도만 올라갔다.

“이쪽에서 도와줄 건 없어?”

[시간이 필요해요.]

“시간?”

[예. 정령의 몸이 어떤 건지 확인해야 축복해 드리는 게 가능하니까요.]

그러고 보니 그녀는 정령의 몸으로 소환된 지 1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

“알겠어. 시간은 얼마든지 줄게.”

그동안 진은 푹 쉬면 될 일이다.

* * *

대륙의 어딘가.

로브를 깊게 눌러쓴 이들이 원탁에 모여 있었다.

“지식의 해방을 위해.”

가장 상석에 있는 이가 입을 열자.

“지식의 해방을 위해.”

나머지 이들이 똑같이 대답했다.

마치 하나의 의식과도 같은 행동처럼 보였다.

잠시 후, 상석에 있는 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카베마스에서 제법 재밌는 일이 벌어졌다지.”

“예. 흡혈귀의 정혈을 연구하던 아이 하나가 붙잡혔습니다.”

“세상에는 바보들만 있는 줄 알았더니. 재미있군.”

상석에 앉은 이는 이 상황이 즐겁다는 듯 대답했다.

“저희의 사상에 완벽하게 물든 아이입니다. 그 아이가 입을 열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상석에 앉은 이는 마치 자신의 흥을 깨지 말라는 듯 손짓했다.

곧장 그가 입을 다물었다.

“그보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누구지? 우리의 꼬리를 잡은 건?”

“부제입니다.”

“교단의 사냥개가 우리의 꼬리를 잡았다?”

“예. 철급 부제로 이번에 임명된 자입니다.”

그 말에 그는 웃음을 터트렸다.

“대륙에 아직 쓸 만한 이가 남아 있었구나.”

그는 진심으로 즐거워했다.

“누구지?”

“플린트 남작가의 막내 진 플린트입니다.”

원래라면 부제의 정보는 극비로 다뤄진다. 부제가 방문했을 경우, 이름을 부르지 않고 ‘부제님’이라 부르는 건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한데, 이들은 진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더 자세히 말해 보아라.”

그가 관심을 보이자, 한 남자가 서류 하나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그를 조사한 자료입니다.”

상석에 앉은 이는 그 자료를 받아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이거 재밌는 녀석이군.”

자료 속엔 그가 관심 가질 만한 이야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우리 쪽에서 눈여겨보고 있던 말릭과도 연결점이 있군.”

“그가 카이얀 대요새로 가게 된 이유가 바로 진 플린트 때문입니다.”

“그렇군.”

진 플린트.

이 흥미로운 녀석은 이미 자신들과 얽힌 적이 있었다.

“갖고 싶군.”

그 말에 주위에 있던 이들이 깜짝 놀랐다. 그가 누군가를 원한 건 굉장히 오랜만에 있는 일이었다.

“저희 쪽 인원이 플린트 남작령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그를 움직이겠습니다.”

“지식을 원하게 만들어라.”

“예. 지식의 해방을 원하게 만들겠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중하(中下)급 계획까지 허가한다. 움직여 보도록.”

그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지식의 해방을 위하여!”

“지식의 해방을 위하여!”

* *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신께서 절 왜 피의 정령으로 만드셨는지 알겠습니다.]

[신 같은 소리 하네. 내가 정혈 흡수시켜서 친화력 올린 거라니까!?]

[신의 뜻을 모르는 당신이 불쌍하군요.]

[이 또라이가!]

둘은 여전히 투덕거리며 싸웠지만, 나름의 성과가 있었다.

[몸을 완전히 파악했습니다. 게다가 제가 사용할 신성력도 여기 있으니 아무런 걱정 하실 거 없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완전히 파악했고, 로메른이 신성력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것마저 파악했다.

뭐, 이런 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그럼 슬슬 축복도 가능한 거야?”

진짜 중요한 건 이거였다.

[예. 몇 가지만 준비하면 충분히 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성녀의 축복을 맛보려고 한 순간.

“진! 당장 남작령을 떠나!”

“형?”

“역병이 발생했어!”

역병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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