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4. 현자의 계획
며칠간 진은 누워서 잠만 잤다.
어디가 아픈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계속 잠만 잤는데, 노바나 마리아는 그 모습에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저 평소의 도련님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건 평소처럼 게으름을 부리는 게 아니었다.
진은 맹렬하게 훈련 중이었다.
“후. 주인이 이렇게 치열하게 사는 거를 애들이 알아야 하는데…….”
구슬은 얻은 다음부터 진에겐 잠자는 게 곧 훈련이었다.
“잠자는 시간마저 훈련하다니, 이 얼마나 치열한 삶인가!”
그렇다고 진이 진짜로 훈련하는 건 아니었다. 처음 계획한 대로 자동 훈련을 돌리는 건 완벽하게 성공했다.
쾅! 쾅! 쾅!
진에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 빛이 번쩍이고, 뭔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은 선베드에 누워서 그 모습을 느긋하게 바라봤다.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상상력은 있다니까.”
진은 왼쪽에 있는 동그란 상자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곳엔 이 세상에 있으면 안 되는 게 놓여 있었다.
영화를 볼 때나 먹는 ‘팝콘’.
와작. 와작. 와작.
진은 팝콘을 먹으며 훈련을 구경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오른쪽에는 콜라가 놓여 있었다.
꿀꺽. 꿀꺽. 꿀꺽.
캬아아아-!
“이게 인생이지!”
이런 게 가능한 이유는 간단했다. 사람도 구현할 수 있는데, 음식 정도야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처음엔 맛이 완전 똑같진 않았다. 미묘하게 다르긴 했지만, 이쪽은 훈련하며 ‘성장’ 중이다.
“이 정도야 이제 얼마든지 만들 수 있지.”
이제는 지구에서 먹었던 콜라와 팝콘보다 더 맛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훈련의 성과가 이걸로 끝은 아니었다.
서클에 대한 통제력이 더 올라갔고, 정령 융합을 더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다.
“좋다, 좋아.”
그렇게 진은 팝콘과 콜라를 먹으며 훈련을 구경했다.
“쉬지 말고 제대로 해야지!”
간간이 훈수까지 두면서.
* * *
며칠 만에 진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교구장님이 오셨다고?”
“예.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교구장님이 방문하셨다. 진은 후다닥 일어나서 곧장 교구장을 만나러 갔다.
한데, 교구장은 혼자가 아니었다.
성기사와 이단 심문관.
교단의 칼로 불리는 이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쫄 필요는 없었다.
“교구장님 오셨습니까.”
최대한 담담한 척 인사했다.
“형제님.”
교구장님은 언제나처럼 훈훈한 미소로 진을 맞이했지만, 남은 둘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진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시선이 따갑다는 건, 그저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었다.
정말 따가웠다.
그걸 교구장이 모를 리 없었다.
교구장은 곧장 옆에 있는 이들을 소개해 주었다.
“이쪽은 교황청에서 오신 30번째 검이십니다.”
30번째 검?
[제법 한다 싶었더니 교황청 직속 성기사인가 보네. 벽은 못 넘은 거 같은데?]
로메른의 설명을 전부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강자.’
성기사가 강하단 소리였다.
“안녕하십니까. 철급 부제인 진 플린트입니다.”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부디 좋은 이야기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의 얼굴에는 호감이 가득하다는 점이었다.
“이쪽 분은 이단 심문관이십니다.”
이단 심문관에게 이름이 없다는 건 진도 잘 알고 있었다.
진이 다시 한 번 인사하자 생각지도 못한 반응이 나왔다.
“그대에게 빛이 함께하길.”
이단 심문관은 진에게 덕담을 해 주었다.
‘실화냐.’
이단 심문관이 임무 외에 입을 여는 것도 드문 일인데, 심지어 그게 칭찬이라니?!
성기사와 교구장마저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이단 심문관과의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그렇게 인사가 끝난 뒤,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서신 내용은 잘 봤습니다.”
서신이라고 표현했지만, 사실상 보고서나 마찬가지였다.
“형제님께서 워낙 꼼꼼하게 사건 내용을 작성해 주셔서, 교단도 빠르게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단순한 보고서가 아니었다. 이곳에서 보고 경험한 모든 것과 함께 해결 방안까지 적힌 보고서였다.
“가능하겠습니까?”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적어 둔 이유는 간단했다.
교단 쪽에 짬 때려야 하니까.
“당연히 가능합니다. 교황청에서 정식으로 인가받았습니다.”
당연한 일이었다.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게 존재 목적인 교단에서 이런 일을 마다할 리가 없었다.
“부디 잘 해결됐으면 합니다.”
“교단이 온 힘을 다해 이 일을 해결할 생각이니, 그리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교단 차원에서 이 일에 뛰어들었다면, 뒷일도 걱정할 필요 없었다.
‘이걸로 해결이네.’
진짜 중요한 이야기는 이다음부터였다.
‘보상은 뭡니까!? 교구장님!’
부제의 임무가 끝난 걸 확인해 주는 건 다름 아닌 교구장이다.
“그럼 이번 임무는 여기서 끝났다고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아, 그것과 관련해서 이야기해 드릴 게 있습니다.”
믿고 있었습니다, 교구장님!
“교단에서 특별 허가가 떨어졌습니다. 이제부턴 은급 임무도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예?”
은급 임무를 선택할 수 있다는 건 더는 철급이 아니란 뜻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한 방에 은급에 올라갈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신께서 형제님께 안배해 놓으신 게 있는데, 등급이 막아서선 안 될 일입니다.”
“……등급 상승이 쉽지 않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철급에서 은급이 되려면, 최소 30개가 넘는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그렇게 30개의 임무를 달성했다고 해도, 엄격한 심사 이후 될 수 있는 게 바로 ‘은급’이었다.
진은 이 과정을 모조리 건너뛴 것이다.
“맞습니다. 이건 정말 예외적인 일입니다. 그렇기에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역시나, 이게 한 방에 될 리 없었다.
“은급 임무를 하나 해결해야 등급 상승이 될 겁니다. 언제든 수행하고 싶을 때 하시면 됩니다.”
은급 임무를 언제든 선택할 수 있고, 만약 은급 임무에 성공하면 바로 승급.
이게 바로 이번 사건을 해결한 보상인 거 같았다.
아무튼 진에겐 좋은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교구장님.”
“부디 저희가 드린 보상이 마음에 드셨으면 합니다.”
“너무 큰 보상에 얼떨떨할 정도입니다.”
“마음에 드신 거 같으니 다행입니다.”
그 뒤로도 사소한 잡담을 나누다가, 교구장은 돌아갔다.
드디어 길고 긴 임무가 끝났다.
“다들 복귀 준비해!”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 * *
돌아가는 마차 안.
다들 집에 갈 생각에 설레 하고 있었는데, 딱 한 명만 표정이 좋지 않았다.
“뭘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해?”
[아, 뭔가 걸리는 게 있어서 그래.]
그건 다름 아닌 로메른이었다.
“잘 해결됐는데, 인제 와서 뭐가 걸려.”
[그 흑마법사가 한 말 있잖아. ‘지식의 해방’. 이게 뭔가 걸려.]
“지식의 해방?”
하긴, 생각해 보면 좀 이상했다.
녀석은 광신도처럼 그 말을 신봉하는 것만 같았다.
[분명 들어 본 적 있는 거 같은데, 기억이 안 나니까 미쳐 버릴 거 같아.]
진이 아는 로메른이라면, 쓸데없는 문제에 집착할 녀석이 아니었다.
녀석이 저렇게나 신경 쓰고 있다는 건, 진짜 뭔가 있다는 소리였다.
“심각한 문제야?”
[그런 거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으니깐 확답을 해 줄 수가 없어.]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교구장님께 심문 자료 요청할까?”
[아니. 그건 필요 없어. 어차피 별다른 정보를 알아내지 못할 거야.]
“그걸 어떻게 알아?”
[그놈 눈 기억나? 그런 눈을 한 놈이 정보를 흘릴 리가 없어.]
진의 기억으론 그저 광기에 가득 찬 눈이었는데, 로메른은 그 눈에서 다른 걸 본 것 같았다.
“그럼 어떻게 하게?”
[네가 강해지면 이 기억이 돌아올까?]
“돌아오지 않겠어? 네가 성장할수록 해금되는 방식이라며?”
[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요즘 들어서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최근 녀석이 깨달은 게 있는 모양이었다.
[현자 놈이 실수한 게 아니라면?]
“뭐?”
[애초에 모두가 소환돼야 서로의 기억이 보완되게 설계해 놨다면?]
“그걸 노렸다는 거야?”
[아마도 그런 거 같아.]
현자는 ‘모두’를 소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있어.]
“다행인 거?”
[서클. 이게 이젠 완숙해졌어. 다른 놈들이 튀어나와도 진 넌 충분히 통제할 수 있을 거야.]
“너도 포함되는 거 알지?”
진은 분위기를 좀 풀고자 농담을 던졌는데.
[어. 알고 있어. 그래도 상관없어. 네가 내 부탁을 들어줄 만큼 값진 걸 안겨 주면 되니까.]
녀석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농담이야, 농담. 여기까지 왔는데 내가 널 못 믿으면 누굴 믿냐.”
[……뭐, 그건 그렇지.]
녀석은 좀 쑥스러운지 퉁명스레 대답했다. 여기까지만 말했으면 완전 훈훈했겠지만.
로메른이 그럴 리 없지.
[솔직히 까고 말해서 내가 네 몸 빼앗으려면 열두 번은 더 빼앗았어.]
꼭 붙이지 말아야 할 사족을 덧붙였다. 한데, 그냥 듣고 넘기기엔 너무 그럴싸한 말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러네?’
진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로메른을 바라보자, 그제야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고 허둥지둥 대답했다.
[아, 그거 아니야! 까놓고 말해서 그럴 필요가 없어! 우리가 원래대로 돌아갈 방법도 안 마련했겠어!?]
이렇게 당황한 모습은 또 처음이었다. 뭐, 생각해 보면 그렇다는 거지, 진지하게 의심한 건 아니었다.
그보다 방금 한 이야기가 궁금했다.
“돌아갈 방법이 있어?”
[뭐, 조건이 더럽게 많이 필요하긴 하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야.]
역시, 그게 쉬울 리는 없었다.
그래도 있다는 게 중요했다.
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그 정도면 충분해. 그럼,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저건 먼 미래의 일이다.
지금 중요한 건 당장 할 일이다.
“결국, 정령을 하나 더 소환해야 한다는 거지?”
[그렇지. 하나 더 소환해야 돼.]
통제할 수단도 있으니, 하나 더 소환한다고 나쁠 건 없었다.
다만,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다.
“내가 정령을 하나 더 소환할 수 있어? 친화력이 필요한 거 아니야?”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충분한 친화력을 지닌 속성이 있으니까.]
“그래?”
로메른이 저렇게 확언할 정도라면 확신하고 있다는 소리다.
“돌아가자마자 소환하는 거야?”
[어. 하루 쉬고 있으면 내가 완벽하게 준비해 둘게.]
“그럼 가는 동안엔 푹 쉰다.”
[마음대로 해. 나도 준비가 필요하니까.]
정령 소환이라.
솔직히 말하면 조금 기대됐다.
마차는 빠른 속도로 남작령을 향해 나아갔다.
* * *
그 후, 별다른 사건 없이 남작령에 도착했다.
“다들 쉬고, 내일부터 원래 하던 일에 복귀하면 돼.”
“알겠다, 주인.”
“예, 도련님.”
모든 게 일상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부터 아이들은 교육을 받으러 갔고, 마리아는 다시 하녀로 돌아갔다.
[진. 준비됐어!]
물론 진은 거기에 해당하지 않았다. 아침부터 녀석은 준비가 됐다며 진을 찾아왔다.
“그래. 기왕 할 일인데 파박 해치워 버리자.”
[좋지!]
로메른은 한껏 들떠 있었다.
[최하급 정령으로 소환될 테니, 힘의 차이를 보여 주마.]
뭔가 복수를 다짐하는 눈치였는데, 그건 정령들끼리 알아서 할 일이었다.
“어디로 가면 돼?”
[가긴 어딜 가. 여기서 하면 돼.]
녀석은 양피지 한 장을 가져왔다.
“여기서 바로?”
[어. 뭐 대단한 일이라고.]
하긴 생각해 보면 그랬다.
처음 로메른을 소환할 때도 아버지의 집무실이었다.
[양피지 위에 손 올려. 그다음은 알지?]
“어. 알고 있어.”
강렬하게 정령을 부르면 된다.
[좋아. 마나 집어넣을 테니까 바로 소환해.]
녀석의 말과 함께 양피지에서 빛이 났다.
진은 정령을 불렀다.
그것도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사용해서!
‘와라! 노예 2호기!’
붉은색 가루들이 뭉치며 무언가 형태를 이루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