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9. 어딜 무서운 척을 해?!
‘요즘 여행이 너무 잦은 거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며 진은 멍하니 마차 밖을 바라봤다. 로메른을 만난 뒤, 벌써 세 번째 여행이었다.
‘평생 누워 살 건 아니었지만.’
여유롭고 평화롭게 살려면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
귀족 작위는 큰형 차지였고, 평생 진에게 생활비를 지원해 줄 리도 없었다.
‘언젠가는 움직일 수밖에 없었지.’
엄밀히 따지면 로메른 때문에 바빠진 건 아니었다. 어차피 골드도 벌어야 했고, 몸도 썩은 상태였으니 회복을 위해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로메른을 만난 건 진에게 행운이었다.
‘골드 걱정도 없고, 몸뚱이 걱정도 없어.’
오래도록 편히 살기 위해선 풍족한 골드와 건강한 몸. 이렇게 두 가지가 필수였다.
두 필수 조건이 벌써 충족됐다.
‘혼자 했으면 잘됐으려나?’
생각만큼 잘 안 되었을 것이다. 만약 잘됐다고 해도 지금보다 더 바쁘게 살았을 건 확실했다.
‘실패해서 궁핍하게 살든지, 성공해서 바쁘게 살든지. 뭐가 됐든 최악이었겠네.’
역시 로메른과 계약한 건 최고의 선택이었다. 그렇다고 로메른과의 계약이 장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계약에 따른 책무 또한 존재했다.
‘세상을 구하는 것.’
이렇게만 보면 진이 용사라도 된 것 같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난 아무것도 안 해. 그저 로메른을 사건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주기만 하면 돼.’
용사보다는 구경꾼에 가까웠다.
그것도 특등석에 앉아 로메른의 보호를 받으며 안전하게 구경할 수 있는 구경꾼.
‘안전이 보장된 구경꾼이라니, 이것보다 좋은 게 어디 있어.’
그래서일까, 이번 여행은 일하러 간다는 느낌보다 재미난 걸 구경 하러 간다는 감각이었다.
‘얼른 도착했으면 좋겠네.’
재미난 거 구경하게.
진이 타고 있는 마차는 빠른 속도로 나아갔다.
* * *
며칠을 달려서 진은 의뢰를 수행할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플린트 남작령과 경계를 마주하고 있는 ‘밀튼 자작령’.
진의 회복을 축하하는 파티에 기사단장을 보낼 정도로 남작령과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곳이다.
“확실히 남작령이랑은 분위기가 다르네.”
[당연하지. 낮이라 이 정도인 거야. 저녁엔 더 장난 아니야. 추억이 새록새록 하네.]
자작령은 남작령과 완전히 달랐다. 자작령의 크기 자체가 더 큰 것도 있지만, 이 도시가 조금 특별한 장소이기도 했다.
도박과 향락의 도시.
카베마스.
왕국 최외곽에 있는 도시답지 않게 사람들도 많았고, 건물도 빼곡했다.
“바로 조사하러 갈 거야?”
[아니. 그건 천천히 가도 돼. 준비가 필요하기도 하고, 여기까지 왔는데, 한 탕 챙겨 가야지. 아까 말했지? 나 여기에 꽤 자주 왔었어.]
“……뭐?”
[세상에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게 마나랑 골드야. 벌 수 있을 때 잔뜩 벌어야지.]
이러니 로메른을 싫어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나만 믿어.]
와 본 놈이 잘 안다고, 여기선 로메른의 말을 따라야 했다. 로메른이 제일 먼저 온 곳은 카지노였다.
“카지노?”
[아니, 숙소 잡으러 온 거야. 여긴 카지노가 지하에 있고 위에 건물들이 숙소야.]
“꼭 여기여야 하는 거야?”
[어. 여기 재밌는 게 있어.]
마차가 카지노 앞에 멈춰 있으니 지배인으로 보이는 자가 다가왔다.
“손님이십니까?”
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숙소를 잡을 생각인데.”
“마차는 저희가 대놓겠습니다.”
“다들 내려.”
진과 일행이 모두 마차에서 내렸다. 노바와 3인방. 거기에 마리아까지. 총 5명의 인원이었다.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지배인은 극진한 자세로 진의 일행을 안내했다. 그렇게 카운터에 도착하자, 로메른이 입을 열었다.
[특별실을 달라고 해.]
진은 곧장 특별실을 달라고 요구했다.
“특별실은 현재 내부 수리가 진행 중입니다. 특별실 한 단계 아래 방이 있는데 그곳은 어떠십니까?”
수리?
진이 로메른을 바라보자, 녀석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수리는 무슨 봉쇄한 거겠지. 부제라는 거 보여 줘.]
진은 외투 안에 달아 둔 브로치를 보여 주었다. 그러자 표정이 굳은 지배인이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소문을 듣고 오신 겁니까? 교단에서는 더는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이건 로메른의 말을 듣지 않아도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감이 왔다.
“겸사겸사.”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그 방에서 묵으셨던 분들은 모두 며칠 뒤에 급사(急死)하셨습니다.”
사람이 급사하는 특별실.
이런 곳을 교단이 조사하지 않았을 리 없다. 교단의 조사가 있었는데도 봉쇄해 뒀다면, 이유는 하나뿐이다.
‘이유를 못 찾은 거겠지.’
로메른이 이 방을 고집한 이유가 있었다.
“괜찮아. 열쇠나 줘. 겸사겸사 온 거니까 방값은 전부 받고.”
카지노에서 따 갈 돈을 생각하면 방값은 내줘야 하는 법이다. 한데, 지배인은 다르게 받아들였다.
“……과연, 부제님은 다르십니다. 아무쪼록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는 아까보다 더 공손한 자세로 열쇠를 내밀었다.
[좋아. 올라가자고.]
진은 열쇠를 받아 특별실로 올라갔다. 이곳은 괜히 특별실로 불리는 게 아니었다.
여섯이 쓰기엔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방은 충분하니까. 다들 마음에 드는 방 잡아.”
“예, 도련님.”
“알겠다, 주인.”
진은 이제부터 할 일이 있었다.
[저쪽 큰방으로 가.]
진은 로메른이 가리킨 곳으로 이동했다. 어쩐지 음산한 분위기였다.
[전설의 겜블러 ‘카라스’. 들어 봤어?]
“카라스?”
진의 몸뚱이에도 없는 정보인 걸 보니, ‘전설’이 붙은 거치곤 별로 유명한 양반이 아닌 듯했다.
[겜블러 중에 유명한 사람인데, 여기서 죽었어.]
“여기서?”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도박에선 이겼으나, 전투에선 패배한 거지. 심지어 나중엔 도박에서 져서 목숨을 잃었다는 소문까지 났고.]
“설마…….”
이건 너무 뻔한 이야기였다.
원한이 남아 떠나지 못한 겜블러.
“전설까지 붙은 거치곤 너무 뻔한 거 아니야?”
[아. 그런 뻔한 건 아니야. 이 사람한테 ‘전설’의 칭호가 붙는 건 한참 뒤에 일이니까.]
“뭐?”
[원한 때문에 남은 게 아니야. 도박이 너무 좋아서 남은 거지.]
원한이 남아서 유령이 된 건 들어 봤어도, 좋아서 유령이 됐다는 건 또 처음이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이 방에서 잠을 자면 꿈에서 카라스와 도박을 하게 돼.]
“꿈에서?”
[어. 교단이 괜히 못 찾은 게 아니야. 이 방에서 잠들지 않으면 녀석을 만날 수 없어. 녀석은 좀 특별한 공간에 있어.]
“특별한 공간이라니?”
[설명하면 복잡한데…… 간단히 말하면 꿈에서만 볼 수 있다고 생각하면 돼. 그냥은 나조차도 찾을 수 없는 곳에 있거든.]
진은 심플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좋아. 일단 자면 된다는 거지?”
[어.]
한데, 그렇게 생각하니 다른 의문이 떠올랐다.
“잠깐만, 그럼 꿈에서는 뭘 걸고 도박하는 거야?”
[당연히 골드를 거는 건 아니야. 사람은 목숨을 칩으로 사용하고, 카라스는 자신의 운을 칩으로 사용해.]
“운을?”
[어. 카라스 이 양반이 운이 정말 좋거든. 지금 특별한 공간에 있을 수 있는 것도 모두 운 때문이야.]
하긴, 생각해 보면 녀석이 가진 운은 엄청날 수밖에 없다.
사람의 생명과 운.
두 가지의 가치가 비슷해야 칩으로 사용할 수 있는 법. 녀석의 운은 사람의 생명만큼 대단하다는 뜻이었다.
“……지면 어떻게 되는데?”
[당연히 그 생명이 카라스에게 가게 돼. 만약 이기면 카라스의 운을 얻을 수 있고.]
“그렇게 모은 생명이 쓸모가 있는 거야?”
진의 말에 로메른은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은 그렇게 생명을 모아서, 나중에 부활했어. 뭐, 완벽한 부활은 아니었지만.]
“……뭐?”
[괜히 전설의 겜블러라 불리겠어? 도박으로 되살아났으니까 전설로 불린 거지.]
“그런 녀석을 잡는다는 거지?”
[그렇지. 그러니까 일단 자자. 자야 도박이 시작되니까.]
“자면 걔랑 도박해야 하는 거 아니야?”
[괜찮아. 내가 도와줄게.]
말만 들으면 운의 화신이나 마찬가지였는데, 로메른이 도와준다고 승리할 수 있나?
진의 시선이 로메른을 향했다.
‘이쪽이 무조건 이기지.’
녀석이 지는 그림은 도저히 그려지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가뿐했다.
“알겠어. 자자.”
[그럼, 시작해 보자고.]
진이 대답한 순간, 엄청난 수마와 함께 진이 침대 위로 쓰러졌다.
* * *
진이 다시 눈을 떴을 땐, 포커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손님. 칩으로 환전하시겠어요?”
요염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자 딜러가 진에게 물었다.
“예?”
진은 이 상황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도박을 하러 왔다고?’
구경이면 몰라도 직접 하러 왔다는 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상황이 마치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뭔가 혼란스러운 기분이었다.
진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고 있자, 그녀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손님?”
“아, 미안합니다.”
진의 말에 그녀가 미소 지었다.
“괜찮아요. 환전해 드릴까요?”
뭐, 한 번쯤 도박도 경험해 보는 건 나쁘지 않을 거 같았다. 진이 환전해 달라고 막 대답하려고 할 때.
[도박하게? 너 쟤 절대 못 이겨.]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은 황급히 그쪽을 바라봤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신기한 건 딜러도 그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손님.”
조금 전까지 요염한 분위기를 풍기던 그녀의 목소리가 180도 변했다.
위압감과 함께 날카롭고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는 목소리.
[제법이네? 진. 잠깐만 기다려, 금방 끝내고 꿈에서 깨워 줄 테니까.]
꿈?
그 단어를 들은 순간 마지막 기억이 떠올랐다.
‘잠들었어.’
그제야 여기가 꿈속이란 걸 깨달았다.
‘어떻게 꼬드겨서 도박하나 했더니.’
모든 게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느껴지는데 도박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로메른 빨리 끝내.”
진의 말에 그녀의 고개가 기괴하게 돌아가더니, 그녀가 진을 바라봤다.
“손님이 아니었구나?”
마치 공포 영화의 한 장면 같은 그 모습에 진이 깜짝 놀랐다. 기괴하고 혐오스러운 모습에 솜털이 바싹 서는 기분이었다.
“로메른!”
진의 말과 함께, 그녀의 머리 위로 신성력으로 만든 벼락이 떨어졌다.
콰과광!
무조건 맞을 수밖에 없는 상황.
한데, 벼락이 묘하게 꺾이며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저게 운의 힘인가?’
그제야 운이란 힘을 실감했다.
공격이 알아서 피해 갈 정도였다.
‘저걸 잡을 수 있나?’
어째서 잡히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 이 정도는 피해야지.]
하지만 로메른이 등장한다면?!
[이것도 피해 봐.]
로메른이 가져온 해결책은 간단했다. 벼락이 알아서 피해 간다면, 방법을 바꾸면 된다.
공간 전체에 신성력이 퍼지더니.
콰과---광----!
그 신성력이 동시에 폭발했다.
공간 그 자체에 가하는 공격.
이건 운 좋게 피할 수 있는 공격이 아니었다.
[100퍼센트 뒤지는 공격을 어떻게 피할 건데?]
녀석이 빠져나갈 모든 확률을 제거한 공격. 로메른의 말대로 녀석은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
“……!”
마치 영혼을 울리는 것 같은 비명과 함께, 공간이 산산이 부서졌다.
진은 그렇게 잠에서 깨어났다.
* * *
진이 눈을 뜨고 제일 먼저 본 건, 만족스러워 보이는 로메른의 얼굴이었다.
[진, 이거 봐.]
녀석은 자신에 손에 들린 유령을 보여 주었다. 아까 보았던 ‘딜러’가 바로 전설의 겜블러 카라스였다.
“여자일 줄은 몰랐네.”
[뭐, 남자인지 여자인지 중요해?]
“하긴,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어떻게 써먹을지가 중요한 법.
진과 로메른의 얼굴에 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바로 작업한다.]
그 말과 함께 유령의 몸에 신성력이 쏟아졌다.
[빛으로 물들어라!]
“……!”
다시 한 번 비명을 지르며 유령이 몸을 비틀었다.
‘……이거 다른 사람이 보면 무조건 우리가 나쁜 놈인데.’
성령을 만드는 숭고한 행위였지만, 신성력만 빼면 악령을 만드는 흑마법사와 그 동료였다.
그렇다고 진이 당황한 건 아니었다. 이러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었다.
“이제 설명해 줄 때 되지 않았어? 오자마자 걔는 왜 잡은 거야?”
[아까 말했듯이 한탕 할 생각이기도 하고, 이 ‘운’은 도박보다 더 좋은 곳에 사용할 수 있어.]
“운을?”
[실패 확률이 높은 물약을 제작할 때, 이 녀석의 힘을 빌리면 어떻게 될까?]
그 말을 들으니 진은 이 녀석의 진짜 쓰임새가 뭔지 깨달았다.
“미친……. 운 좋게 성공하는 거야?”
[어. 성공해.]
이건 사기적인 능력이었다.
[그리고 교단 의뢰를 제대로 조사하려면 일단 관심을 좀 끌어야 해.]
이 유령을 얻는 게, 의뢰와도 연관이 있을 줄은 몰랐다. 이곳에 오자마자 이 유령을 챙긴 이유가 있었다.
“관심?”
[마리아가 엄청 따서, 이 카지노를 관리하는 놈이 끄집어내야 돼. 녀석은 부제가 만남을 요청해도 절대 나오지 않거든.]
“대체 누구길래 이렇게 복잡한 방법을 쓰는 거야?”
로메른의 입에선 생각지도 못한 존재가 튀어나왔다.
[늑대인간이라고 들어 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