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작가의 정령 천재-28화 (28/210)

028. 부제(副祭)

대화는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일단, 땅속에서 나와야 했다.

다행히 얼마 걸리진 않았다.

“마리아!”

마리아를 부르자마자, 수십 자루의 삽이 날아와 진이 묻혀 있는 주위를 파기 시작했다.

“도련님, 다 됐습니다.”

마리아가 애쓴 덕에 진은 순식간에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교구장은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봤다.

“죄송합니다. 수련하느라 땅속에 있었습니다.”

“정말 훌륭한 훈련을 하시는군요. 고생이 많으십니다.”

예? 이게 훌륭하다고요?

이 질문을 하기도 전에 그의 시선이 마리아를 향했다.

하긴, 안 보고는 못 배길 것이다.

마리아는 진이 나온 곳을 메우기 위해 다시 한 번 삽을 지휘하고 있었다.

“저 자매님은 대체…….”

“그냥 절 도와주는 아이입니다.”

그 말에 교구장의 시선이 진을 향했다. 그는 진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곤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군요.”

교구장님? 방금 그건 뭡니까?

대체 뭘 납득하신 겁니까?

차마 물어볼 수 없는 질문을 삼키고, 진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제의해 주실 게 있다고 하셨는데, 어떤 건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 죄송합니다. 여러모로 당황스럽다 보니, 제가 온 이유를 까먹고 있었습니다.”

“아닙니다. 충분히 당황하실 만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게 말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교구장은 곧장 자신이 온 이유를 말해 주었다.

“교단에는 부제(副祭)라는 직책이 있는데, 혹시 알고 계십니까?”

부제?

다행히 진의 머릿속에 있는 지식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외부에서 교단을 돕는 이들을 부제라 부른다.

사제를 돕는 일반인.

‘명예 사제’라 불리는 이들이다.

“알고 계시니 이야기가 빠르겠군요. 부제의 직책을 드릴까 하는데, 받아 주시겠습니까?”

아니, 갑자기요?

진은 깜짝 놀랐다.

한데, 로메른은 아닌 모양이었다.

[진! 받아. 무조건 받아!]

녀석을 당장 받으라는 듯 옆에서 소리치고 있었다. 진은 알겠다는 듯 로메른을 바라본 뒤 교구장에게 물었다.

“어째서 제게 이런 제안을 해 주시는 겁니까?”

“형제님께서는 갑작스럽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오래전부터 형제님께 이 직책을 드리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대체 무엇을 기다렸단 뜻이지?

진의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다.

한데, 교구장의 입에선 생각지도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오늘 전 신께 ‘계시’를 받았습니다.”

“예?”

“다른 이들은 보지 못했겠지만, 신께서 보내신 신호가 오늘 이 저택을 가득 채웠습니다.”

어. 설마 이거?!

“이 도시를 정화하듯 피어오른 새하얀 빛. 그 빛이야말로 신께서 제게 보내 주신 ‘계시’입니다.”

그거 계시 아니에요.

로메른이 등급 상승한 거예요.

목 끝까지 치민 이 말을 진은 간신히 삼켰다. 감격에 젖은 교구장의 표정을 보니, 절대 말할 수 없었다.

물론 그는 로메른의 등급 상승을 모를 정도로 바보가 아니었다.

“저의 기다림과 저 아이의 성장. 이게 우연일 리 없습니다, 형제님.”

그는 계시가 맞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는데, 진이 보기엔 아니올시다였다.

선생님. 우연입니다.

제가 땅에 심어져서 세계수가 쓰는 거름을 먹어서 로메른을 성장시킨…….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할 수 있는 말은 별로 없었다.

거절하거나 교구장에게 딴지를 걸기에는 ‘부제’란 직책이 주는 장점이 너무 매력적이었다.

[야, 너 부제가 뭔지 아는데 고민하는 거야? 웬만한 귀족 작위보다 낫다니까? 남작보다야 명예 사제가 훨씬 낫지.]

녀석의 말대로 ‘부제’란 직책은 굉장한 장점이 있었다.

어느 도시에 가도, 부제란 걸 보여 주기만 하면 프리패스였다. 게다가, 그 도시에 교단이 있다면 ‘부제’는 교단 시설을 전부 이용할 수 있다. 명예와 실리 둘 다 가지고 있는 직책이었다.

‘문제는 장점만 있는 건 아니라는 거지.’

엄청난 장점만큼 단점 또한 명확했다.

‘책무.’

교단에서 부제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일을 처리해 줘야 했다.

진이 고민하고 있으니, 로메른이 조급한 마음이 들었는지 주절주절 떠들기 시작했다.

[진. 교단에서 주는 의뢰가 부담스러워서 그런 거면 괜찮아. 어차피 우리가 해야 할 일이랑 겹치는 거 있지 않겠어? 그런 것만 골라서 하면 돼.]

[이건 받아 놓으면 진짜 두고두고 도움 된다니까? 거기다 내 기억도 불완전한데, 의뢰 목록 딱 보면 기억이 떠오르지 않겠어?]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저 녀석은 틀린 말을 하지 않는다. 로메른의 말대로 이건 고민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제가 이런 직책을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진은 슬쩍 동의를 표하며 겸손을 부렸다. 그러자 교구장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형제님이 아니라면 이 세상 그 누구도 이 직책을 받지 못할 겁니다.”

진은 부끄럽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거린 후 입을 열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진의 말에 교구장은 품속에서 브로치 하나를 꺼냈다.

작게 반짝이는 브로치.

그걸 보자마자 로메른이 소리쳤다.

[시작하자마자 철급? 이걸 바로 준다고? 이 고지식한 양반들이?]

철급이 좋은 건가?

진이 빤히 브로치를 바라보니, 교구장이 입을 열었다.

“이건 부제임을 증명하는 일종의 신분패입니다.”

교구장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브로치를 진에게 건넸지만, 로메른은 진실을 알고 있었다.

[진. 저걸 받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아? 내가 악마랑 계약한 적이 있다고 절대 안 된다고 하던 놈들이라니까? 흑마법사가 그럼 누구랑 계약을 해!?]

교단의 조건이 그만큼 까다롭다는 뜻이었다.

[부제가 괜히 드문 게 아니야. 어떻게 부제 후보로 뽑혔다고 해도, 정식 부제인 철급이 되려면 여러 과정을 거쳐야 돼. 여기서 대부분 떨어져 나가. 부제가 괜히 대접받는 게 아니야. 뽑는 과정이 지독해.]

로메른의 말을 요약하면 간단했다. 지독한 부제 후보 과정을 건너뛰고, 곧장 부제가 된 것이다.

‘개꿀?!’

[철급은 시작일 뿐이지만, 이 시작점까지 오는 게 정말 힘들어. 짜증 나는 과정은 전부 지나갔다고 생각하면 돼.]

이거지. 이게 인맥이지!

교구장이 힘을 써 줬으니 단번에 철급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부제가 되는 건 굉장히 어렵다고 들었는데, 제가 곧장 부제가 되어도 괜찮겠습니까?”

“형제님께선 자신을 충분히 증명하셨습니다. 저는 물론이고, 교황청에서 내린 판단입니다.”

증명한 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지만, 이럴 땐 ‘감사합니다’ 하고 받는 게 최고다.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의 말에 교구장은 빙그레 웃었다.

진은 서클을 2층으로 완성한 날.

부제가 되었다.

* * *

교구장이 돌아가고 난 뒤.

[하여간, 현자 놈 수준하고는.]

하급 정령이 된 로메른이 계속해서 불평을 터트렸다.

“뭐 문제라도 있어?”

[있어. 그것도 심각한 문제가.]

녀석은 짜증이 잔뜩 난 모양인지 표정이 찌푸려져 있었다.

“어떤 건데?”

[하급이 되면서 기억이 꽤 많이 회복됐어.]

“오. 좋은 거 아니야?”

미래의 지식이 떠올랐다는 건, 로메른은 물론 진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좋은 일이긴 한데, 기억이 엉망이야. 뒤죽박죽 섞여 있다고 해야 하나……. 이걸 현자 놈한테 맡기는 게 아니었는데.]

“현자?”

[기억을 봉인한 게 현자야. 똑똑하면 뭐 하냐고 실력이 개판인데.]

녀석이 짜증이 난 이유가 뭔지 알 거 같았다.

“그러니까 풀린 기억 중에 쓸 만한 게 없다는 뜻이야?”

[없는 건 아니야. 대신 기억이 조각나 있어서 완전하지 않다는 게 문제야.]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번에 부제가 된 건 나쁘지 않았다.

“교단 한번 가 볼래? 부제들이 볼 수 있는 의뢰 목록 같은 게 있다며?”

[음. 그럴까? 그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긴 한데.]

기왕에 부제가 됐으면, 이 직책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확인해 봐야 하는 법이다.

물론 오늘은 아니었다.

“내일 가 보자.”

[그래. 난 이 기억을 최대한 정리해 봐야겠어.]

솔직히 땅속에 하루 종일 있었는데 오늘은 쉬어 줘야지.

다음 날 아침.

진은 로메른과 함께 교단을 방문했다. 물론 저번에 방문했을 때와 똑같진 않았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진은 슬쩍 어제 받은 브로치를 보여 주었다. 그러자 사제의 태도가 달라졌다.

“확인했습니다. 안쪽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진은 이곳에 처음 왔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는 아버지가 교단에 연락해 주셔서 견학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저 브로치만 보여 주니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여기서 멋있게 입장하는 면 딱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그러진 못했다.

“의뢰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이 있다던데 어디입니까?”

진은 길을 몰랐다.

“본관 건물이 아닌, 본관 좌측에 건물이 따로 있습니다. 그곳에서 의뢰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진은 사제에게 감사를 표한 뒤, 안쪽으로 들어왔다. 그의 말대로 좌측에는 건물이 하나 떨어져 있었다.

진은 그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실례합니다.”

누가 있나 불러 봤지만, 인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렇게 작은 교구에 사제가 따로 있을 리 없잖아. 신경 쓰지 말고 의뢰나 확인하자. 이거 같은데?]

중앙 테이블에는 양피지 묶음이 놓여 있었다. 사제가 상주하진 못해도 관리가 되고 있는지 테이블 위에는 먼지 하나 없었다.

[진. 이것 봐 봐. 재밌는 게 많은데?]

저건 로메른의 기준에서 재밌는 것이다. 진이 보기엔 저 양피지는 끔찍한 것들의 집합체다.

하지만 끔찍한 것일수록 눈길이 가는 법. 진은 슬그머니 양피지를 봤다.

-악마에 빙의된 소녀. 현재 봉인 중.

-구마(驅魔) 능력을 지닌 철급 이상의 부제.

“악마 빙의?”

[세부 사항 보니까, 이건 빙의가 아니라 계약한 거 같은데?]

“계약했다고? 위험한 거 아니야?”

[괜찮아. 의외로 악마들이 합리적이야. 천사 놈들이 진짜 깡패라니까? 악마는 적어도 합리적인 거래를 하자고 하거든.]

이건 또 신박한 관점이었다.

“진짜 괜찮은 거지?”

[어 괜찮아. 꼬라지 보니까 이 여자애가 자초한 일이야. 주위 피해보다는 저 여자애만 파멸할 거니까 문제없어.]

그게 어떻게 문제가 없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로메른의 말대로 여기엔 흥미진진한 사건이 잔뜩 적혀 있었다.

[와. 이건 우리가 등급만 됐으면 바로 했을 텐데. 아깝다.]

“어떤 건데?”

진은 로메른이 가리킨 의뢰를 확인했다.

-교황의 참회실 정화.

-7인의 교구장과 함께 정화 예정.

-정화 능력을 보유한 금급 이상의 부제.

진은 그걸 보고 깜짝 놀랐다.

‘스스로 채찍질하던 그거!? 그걸 교황도 해!?’

설마 교황도 이걸 할 줄은 몰랐다.

“교황님이 쓴 참회실은 뭐가 달라?”

[달라. 뛰어난 사제일수록 참회실에 강한 사념을 남겨. 일반 사제나 교구장들이 남긴 사념은 치울 수 있는데, 교황이 쏟아 낸 사념은 지우기 힘들어.]

하긴 교구장 7명을 지원해 준다고 하니, 남아 있는 사념이 대단하긴 한 거 같았다.

[교황이 쏟아 낸 사념이면 사령도 만들 수 있을 텐데……. 이건 진짜 아깝다. 이건 기억해 놨다가 다음에 꼭 하자.]

그렇게 양피지를 뒤적이며 잡답을 이어 가다가, 어느 순간 로메른은 대화를 멈추고 한 의뢰를 빤히 바라봤다.

“왜 그래?”

[이거야.]

“어? 이거?”

지금까지 봤던 흥미진진한 의뢰와는 좀 다른 유형이었다.

-대량의 혈흔과 전투 흔적 발견.

-마기가 소량 발견됨.

-추가 조사 필요.

-철급 이상의 부제.

“진짜 이거 확실해?”

[확실해. 이건 무조건 해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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