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7. 빙의
‘악착같다.’
진이 로메른을 보며 느낀 감정이었다. 던전을 통째로 털었고, 챙길 것도 다 챙겼는데.
[이렇게 복귀는 못하지. 기왕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 거야?]
“……뭐?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아?”
[아니지. 전에 영기 얻을 때 여기 안 왔잖아?]
“그렇지?”
[그럼, 여기서 영기를 챙겨 가는 게 이득 아니겠어?]
회귀자는 다 이런 걸까.
로메른은 정말이지 대단했다.
이건 뽕을 뽑다 못해 골수까지 파먹는 여행이었다. 덕분에, 복귀는 조금 돌아가는 방향으로 진행됐다.
영기가 있는 곳까진 마차로 갈 수 없으니, 시간이 꽤 걸리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건 아니었다.
“최고 속력으로 가자.”
마차 뒤에 실어 온 가마 덕에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빠르게!”
가마꾼으로 이 아이들을 선택한 건 정답이었다. 쉽게 지치지도 않았고, 더 빠르게 가고 싶으면 성령을 부여하면 상상을 초월한 속도로 이동할 수 있었다.
‘이게 부스터지!’
그야말로 바람과 같은 속도였다.
게다가, 비싼 자재들로 제작해서인지 탑승감마저 끝내줬다. 덕분에 얼마 지나지 않아 영기가 있는 곳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야! 빠르게 흡수할게!]
이쪽에 있는 영기를 흡수하면 혹시 서클이 성장하나 싶었는데, 그건 아니었다.
[좋아. 몸을 개조할 기운이 드디어 수급됐구나!]
영기는 진의 몸을 개조하는 데 모조리 투자됐다. 영기를 통해 서클을 상승시키는 건 어림도 없어 보였다.
[후. 영기는 아무리 많아도 부족해. 하지만 타협은 없다! 앞으로 영기는 전부 몸에 투자할 거야.]
대체 목표가 어떤 거길래 저런 소리를 하는 건지, 진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이 녀석 대체 뭘 만들려고…….’
진은 잠깐 고민을 하다가 이내 때려치웠다. 자신이 고민한다고 흑마법사의 생각을 읽을 순 없는 법이다.
아무튼, 영기를 수급하느라 집에는 생각보다 늦게 도착했다.
“다들 고생했어. 푹 쉬어.”
편안한 여행을 한 건 진뿐이었다. 아이들은 호위를 위해 날카로운 감각을 유지했고, 마리아는 여행하는 내내 긴장했다.
하루쯤은 푹 쉬게 해 줘야 했다.
물론 내일 할 일은 있지만.
“마리아. 넌 내일 아침에 내 방으로 와.”
“알겠습니다, 도련님.”
* * *
다음 날 아침.
다른 아이들은 평소처럼 수업을 받으러 갔고, 마리아는 진의 방에 와 있었다.
“마리아. 좋은 아침이야.”
“예, 도련님.”
그녀는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언제 피곤했냐는 듯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일단 앉아. 대화가 좀 길어질 거 같으니까.”
“예, 도련님.”
그녀는 진의 앞에 앉았다.
“성령들을 다루는 건 좀 어때?”
“편리합니다. 잘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 처음엔 무서워하는 것 같더니 이제는 완벽히 적응한 모양이네?”
진의 말대로 그녀가 처음 유령을 봤을 때는 굉장히 무서워했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영매의 재능이 있는 그녀가 그때 유령을 처음 봤을 리 없었다. 살아오면서 계속 봤을 것이다.
“예. 더는 이 아이들이 두렵지 않습니다.”
그녀는 직접 유령을 다루며, 평생 자신을 옭아매던 공포를 극복해 냈다.
“물건에 빙의된 유령을 다루는 거 말고,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는 걸 배워 볼 생각 있어?”
“다른 방식이라고 하시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지 알려 주실 수 있으십니까?”
“빙의. 유령을 몸에 담아서, 유령의 기술을 사용하거나 활용할 수 있는 기술이야.”
진의 말에 그녀의 눈동자가 떨렸다. 하지만 당황은 잠깐이었다.
“잠깐만 생각할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알겠어. 얼마나 주면 돼? 3일?”
진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5분만 주시면 충분합니다.”
“좋아. 생각해 봐.”
진은 그 말을 끝으로 조용히 기다려 주었다. 그사이 그녀는 어떻게 할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지?’
예전이라면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가장 원하던 것은 남작가 복귀였다.
차기 하녀장으로 내정된 상태에서 갑자기 막내 도련님의 전속이 되었다. 심지어, 막내 도련님은 독립해서 남작가를 나왔다.
애초에 막내 도련님 전속이 되는 걸 거부했으면 좋았겠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거부할 수 없었어.’
남작님과 대공자님이 막내 도련님을 얼마나 아끼는지 잘 알고 있었다.
외통수에 몰린 상황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선택은 하나뿐이었다.
막내 도련님을 모시는 것.
‘처음엔 돌아가는 게 목표였는데.’
그녀의 목표는 하녀장이었다.
남작가는 그녀가 아는 세상 전부였고, 그 세상에서 가장 높게 올라갈 수 있는 곳이 ‘하녀장’이었으니까. 그런 그녀의 생각은 진과 생활하며 달라졌다. 진과 함께하며 남작가가 전부가 아님을 깨달았다.
상상도 못할 골드.
엄두도 나지 않는 인맥.
새로운 곳으로의 여행.
‘이곳에서 난 더 많은 걸 보고, 경험하고 싶어.’
여기 오지 않았다면, 그녀는 유령을 보는 능력을 ‘저주’라 생각하며 평생 겁에 질려 살았을 것이다.
‘유령을 이겨 냈던 것처럼, 난 달라지고 싶어.’
그녀의 작은 세계는 진을 통해 더 커지고 넓어졌다.
‘하녀장 말고도 다른 게 될 수도 있을까?’
막내 도련님 곁에 있으면 가능하지 않을까?
‘빙의라면…….’
그녀는 하녀가 아닌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었다.
그녀는 이내 결정을 내렸다.
“배우고 싶습니다.”
“오. 그래?”
물론 그녀의 결정은 단순히 배우고 싶다에서 끝이 아니었다.
그녀는 욕심을 부렸다.
“대신 자비를 베푸셔서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하녀가 주인에게 부탁한다는 건, 경을 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지켜본 진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그녀의 도박은 성공했다.
“좋아. 고생하는데 당연히 들어줘야지.”
그녀의 예상대로 진은 흔쾌히 허락했다.
“전 도련님이 알려 주시는 것을 최선을 다해 배우겠습니다. 다만, 제가 도련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이곳에 남고 싶습니다.”
그녀는 남작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말에 진이 씩 웃었다.
그러곤,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말은 이제부터 아버지 사람이 아니라, 내 사람이란 뜻이지?”
“예, 도련님.”
그녀는 조심스럽게 진의 손을 맞잡았다.
“예전에 했던 말 기억나? 식구(食口).”
“예. 기억하고 있습니다, 도련님.”
“이젠 진짜 식구야.”
식구.
저번에도 들었던 말인데, 그때와는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그렇게 그녀는 진짜 식구가 되었다.
마리아의 얼굴에 짙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바로 일해야지?
우리 식구잖아.
진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 * *
로메른은 유령을 불러냈다.
[어때? 처음 봤을 때랑은 좀 다르지?]
좀 다른 정도가 아니었다.
전혀 다른 유령이 되어 있었다.
원혼에 가깝던 유령은 성령으로 변해 있었다.
‘신성력 때문에 그런가?’
고집스러운 표정과 꼬장꼬장한 느낌이 드는 유령이었는데, 지금은 인자한 할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이 양반의 성능은 걱정할 거 없어. 회귀 전에 제작용 언데드로 만들어서 충분히 써먹어 봤어.]
괜히 이게 진짜 보상이라고 한 게 아니었다.
“준비됐어?”
“예.”
마리아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의지는 충만해 보였다.
“그럼 시작한다.”
“예, 도련님.”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로메른이 곧장 움직이기 시작했다.
[빙의가 어렵지는 않을 거야. 성령을 계속 다룬 덕분에 예전보다 영안(靈眼)이 더 많이 열렸어. 그냥 받아들이면 돼.]
진은 그 말을 그대로 그녀에게 전해 주었다.
곧이어 성령이 움직였다. 반투명한 성령이 그녀의 몸과 겹쳐진다. 그 순간, 마리아가 미친 사람처럼 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진은 깜짝 놀라 로메른을 바라봤다.
[놀랄 거 없어. 제대로 되고 있다는 거니까.]
그런 로메른의 말처럼,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떨림이 멈췄다.
“마리아?”
진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부르자, 그녀는 눈을 떴다.
“예, 도련님.”
평소와 다름없는 대답이지만, 그녀가 달라진 게 느껴졌다. 그녀에게서 풍기던 분위기가 변했다.
“괜찮아?”
“예. 괜찮습니다.”
평소의 마리아가 냉정, 침착이라면, 지금의 마리아는 깊은 생각을 하는 현자 같은 느낌이었다.
“어때?”
“머릿속이 조금 뒤죽박죽인 느낌입니다. 뭐랄까, 설명하기 조금 어렵습니다.”
그녀의 말에 로메른이 대답했다.
[걱정할 거 없어. 이럴 땐 관심가질 만한 걸 보여 주면 돼.]
녀석은 진의 침대 밑으로 쏙 들어가더니, 상자 하나를 꺼냈다.
[여태까지 모았으니까 이제 써먹어야지.]
상자 안에 담긴 건 다른 게 아니었다. 여태까지 연금술 재료를 키우면서, 하나씩 따로 빼 둔 것들이었다.
‘하나씩 왜 빼놓나 했더니…….’
이렇게 사용하려고 빼 둔 것 같았다.
“넌 계획이 다 있구나?”
[당연하지. 이것만 있으면 네 서클을 상승시킬 수 있어.]
여태까지 수많은 약초와 연금술 재료를 키운 게 전부 계획에 포함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하여간 대단하다니까.’
진과 로메른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마리아는 재료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 동안 재료들을 바라본 그녀가 입을 열었다.
“도련님. 이 재료들을 사용하면 무언가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음 가는 대로 만들어 봐. 던전에서 가져온 도구들 전부 이곳에 있으니까.”
“예, 도련님.”
그녀는 능숙하게 연금술 도구를 꺼내기 시작했다. 이럴 땐 자리를 비켜 줘야 하는 법.
진은 조용히 방을 나섰다.
[난 확인해야 하니까 안에 있을게!]
방 안에서 로메른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 확인할 사람도 있으니 이제 진이 할 일은 하나뿐이다.
‘아따, 햇살 좋네.’
진의 지정석.
해먹에 누울 차례다.
* * *
금세 끝날 줄 알았던 영약 제조는 꽤 오래 걸렸다. 처음엔 진의 방에서 만들었지만, 실험 도구들이 그녀의 방으로 옮겨졌다.
그사이 진은 주인으로서 위엄을 세웠다.
“다들 영약 받아 가.”
던전에서 구한 영약을 아이들에게 하나씩 건네주었다.
진이 보기엔 그게 그거였는데, 로메른은 아이들마다 영약을 따로 지정해 주었다. 그렇게 모두에게 영약을 나눠 준 덕분에, 아이들에게 존경의 눈빛을 받을 수 있었다.
“주인, 고맙다.”
“별거 아니야. 팍팍 먹어.”
영약을 먹은 아이들은 더욱 강해졌다. 물론, 진은 부럽거나 아깝지 않았다.
‘진짜 좋은 건 지금 만들어지고 있으니까.’
던전을 만들 정도의 연금술사가 만드는 영약이었다. 녀석들 것과는 비교가 안 될 것이다.
이런 진의 생각은 적중했다.
정말 비교가 되지 않았다.
여러 가지 의미로.
“이게 뭐냐고! 내가 식물이냐!”
진은 땅에 심어져 있었다.
사람이 심어진다는 표현이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사실이었다.
목 아래론 땅에 묻힌 상태였다.
[아, 이래야 흡수가 잘돼.]
“영약이라며!”
[너한텐 이게 영약이야. 정령사가 일반 영약 먹어 봐야 뭐 할 거야. 어차피 자연의 마나 아니면 다루지도 못하는데.]
마리아가 만들어 온 건 영약이면서 영약이 아닌 물건이었다.
“그렇다고 거름을 만들어 와?!”
[아, 그냥 거름이 아니라니까. 세계수를 회복시킬 때 쓰는 영약 같은 거야. 말이 거름이지 자연의 마나 덩어리라니까? 이거 만든다고 들어간 재료가 얼만데…….]
녀석은 진짜 좋은 거라며 설명하기 시작했는데, 진이 든 생각은 딱 하나였다.
진짜 말이나 못 하면 밉지나 않지!
“그렇다고 꼭 땅에 묻어야 돼?”
[사용법이 그래. 이건 어쩔 수 없어. 자연의 기운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방법이야. 아니면 이거 먹을래?]
하여간 이놈이 만드는 건 왜 다 이따윈지를 모르겠다.
진이 제일 열 받는 건, 이게 효과가 있다는 것이었다.
“아, 자연의 마나가 흡수되니까 화를 낼 수도 없고!”
실제로 엄청난 자연의 마나가 진에게 흡수되고 있는 상태였다.
[거봐. 내가 말했지? 효과 하나는 확실하다니까.]
“에라 이.”
[워워, 진정해. 기껏해야 내일까지만 이러고 있으면 돼.]
기껏해야 하루라고 했지만.
정말로 긴 하루였다.
“도련님. 식사 준비됐습니다.”
“……부탁 좀 할게.”
목 아래로는 땅에 묻혀 있으니 밥을 먹는 것부터 문제였다. 덕분에 매 끼니 마리아가 밥을 먹여 주었다.
‘내 위엄이!’
주인으로서의 위엄이 박살 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길고 긴 하루가 지나.
[2층 완성이다!]
심장에 있는 서클에 두 번째 층이 완성됐다. 이건 큰 변화를 가져왔다.
[하급 정령!]
찬란하고 아름다운 빛을 내뿜으며, 로메른이 하급 정령으로 변화했다. 여전히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이제 아기 천사라곤 부를 수 없을 만큼 성장했다.
그렇게 눈부신 빛이 사라졌을 때.
“……형제님.”
어느새 교구장이 방문해 있었다.
“교구장님?!”
“이게 대체…….”
땅에 목만 내밀고 파묻혀 있는 진과 아름다운 빛을 내뿜고 있는 로메른.
이곳은 그야말로 개판이었다.
‘이럴 때는 이 방법뿐이지!’
진은 빠르게 결심을 한 뒤, 곧장 입을 열었다.
“교구장님, 어떤 일로 방문하셨습니까?”
최대한 평온한 표정으로 담담히 물었다. 교구장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 음. 제의를 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