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9. 노바 쟁탈전
플린트 남작가의 기사단장 ‘쉔’.
그의 눈이 찢어질 듯 커져 있었다.
‘저런 육체 능력이라니.’
남작가에 오기 전, 그는 왕실 기사단에 속해 있었다. 왕국에서 내로라하는 기재들의 육체를 본 경험이 있었다.
한데, 저런 육체는 처음 봤다.
‘육체를 마치 자신의 통제 아래 두고 있는 것만 같구나.’
육체를 완전히 통제하는 건 드높은 경지다. 한데 저 아이는 단지 육체의 성능만으로 그 경지를 구현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육체의 균형이 저렇게 이뤄질 수 있다니.’
힘이 넘치면 민첩이 떨어진다.
그 당연한 진리를 저 야만인의 육체는 부정하고 있었다. 그저 덩치만 큰 것이 아니었다. 필요한 근육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도련님께선 어찌 저런 자를…….’
호위를 구하기 위해 노예를 구매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작가의 기사를 데려갈 줄 알았다.
한데, 그 예상이 모두 깨졌다.
‘저 정령을 만나신 다음부터인가.’
그의 시선이 정령을 향했다.
그가 정령을 바라보자, 정령을 그 시선을 알고 있다는 듯 자신을 바라봤다.
‘허허. 또 내 시선을 읽었구나.’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저 정령은 이상한 구석이 많았다.
자신을 보며 친근하게 구는 것부터 시작해서 이렇게 시선을 읽는 것까지.
‘아니. 그런 걸 떠나서 생각해도 특별한 정령이지.’
조금 전만 해도 그랬다. 야만인에게 수호천사를 붙여 주다니, 다른 정령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이럴 때가 아니지.’
저 야만인의 특별함을 읽은 건 자신만이 아니었다. 다른 이도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특히나, 감동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신임 교구장이 그랬다.
‘가 봐야겠군.’
그는 서둘러 진에게 향했다.
* * *
기사단장의 생각처럼 노바에게 눈독 들이는 건 기사단장만이 아니었다.
특별한 형제님 ‘진’을 만나러 온 교구장 그 또한 그랬다. 만약 혼자 있었다면 그는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는 단순히 재능에 놀란 것이 아니었다. 감동했다.
‘어찌 저런 아름다움이!’
불과 얼마 전 악령을 성령으로 바꾸는 기적을 목도했다.
기적은 놀라웠지만, 그때 보았던 성령들은 어딘가 불완전했다. 한데, 불과 며칠 사이 그 불완전함은 완전히 채워져 있었다.
마치 신이 만든 것만 같은 성스러움. 그런 성령의 모습은 그의 신앙심을 더욱 튼튼하게 만들어 주었다.
‘신께서 만물을 사랑하시고,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으신다.’
신 앞에선 왕도 귀족도 노예도 없다. 그분 앞에선 모두가 신께서 만든 자식일 뿐이었다.
그런 그의 생각처럼 노예의 몸에 성령이 임하셨다.
‘저 정도로 신성한 힘을 풍긴다면 성법을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진짜 사제들처럼 다양한 성법을 사용할 수 없겠지만, 간단한 성법이라면 가능할 것 같았다.
이건 신앙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일이었다.
‘대체 신께선 얼마나 큰 계획을 세우고 계신 것인가. 나를 형제님이 계신 곳으로 보내신 이유를 계속해서 확인시켜 주시는구나.’
그렇게 생각하자 교구장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신이 만들어 두신 큰 뜻을 행할 수 있다는 건, 사제로서 크나큰 영광이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다른 이들이 눈독을 들이기 전에 먼저 움직여야 했다.
그가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누군가 자신을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저자는 남작가의 기사단장? 저자가 어째서…….’
교구장은 그 이유를 이내 깨달았다. 생각해 보면 저 힘이 탐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는 서둘러 형제님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 * *
“흠!”
남작이 헛기침하자, 멍하니 노바를 바라보고 있던 입회인이 정신을 차렸다.
“명예 결투의 승자는 진 플린트입니다.”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누가 봐도 저 야만인의 승리였다.
곧이어 사람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빌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승자와 패자가 극명하게 나뉘었다.
‘사과 한번 받아 볼까?’
진이 사과를 받기 위해 이동하려고 할 때 먼저 다가온 사람들이 있었다.
“도련님, 저 친구 물건입니다. 제대로 키워 보실 생각 없으십니까? 기사단에서 훈련을 시켜 보고 싶습니다.”
“형제님, 이리 좋은 일이 있는데 어찌 말해 주지 않으셨습니까. 성령이 임할 수 있는 자를 찾으시다니요.”
기사단장과 교구장이 다가와 동시에 말을 걸었다. 서로 말이 겹치고 있음에도 둘은 물러서지 않았다.
‘……뭐지?’
진이 의문을 떠올렸을 때, 로메른이 입을 열었다.
[아까 보니까 둘이서 눈싸움하던데? 하여간 보는 눈들은 있어가지고.]
녀석은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이건 별것 아닌 일이 아니었다.
‘아니, 왜 여기서 이러세요.’
어느새 기사단장과 교구장이 기싸움을 하고 있었다.
“성령을 사용하는 이에게 기사 교육이라니요.”
“허허. 결국 그는 호위 아니겠습니까? 그럼 제대로 배우는 게 좋지요.”
뭐야 이거, 무서워.
진은 자신을 구해 달라고 남작을 바라봤지만, 남작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이곳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아버지! 왜 엄지를 치켜드세요!
구해 달라고요!
그런 눈빛을 쏘아 보냈지만, 남작의 미소만 더욱 짙어졌다.
‘인생…….’
일단, 여길 정리하긴 해야 할 것 같았다.
“두 분께서 하신 이야기 잘 알겠습니다. 한 번씩 저 아이를 데리고 방문하겠습니다.”
진의 말에 기사단장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혹시나 했는데, 호위의 나이가 어립니까?”
“예. 이제 13살 된 아이입니다.”
“허어. 고작 13살에 저런 육체라니!”
“과연 성령이 임하는 자입니다.”
둘은 어느새 한편이라도 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있을 순 없었다.
“지금은 우선 명예 결투를 마무리해야 합니다. 대화는 차후에 나눠도 되겠습니까?”
“허허. 당연합니다. 나중에 꼭 기사단에 방문해 주시길 기다리겠습니다.”
“교단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형제님.”
드디어 둘에게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둘은 다른 곳으로 가지 않았다.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 본데? 여기 뒤에서 또 눈싸움한다. 분위기 장난 아니야.]
로메른은 낄낄거렸지만, 진의 등으로는 식은땀이 흘렀다.
로메른이 강자라고 할 만한 두 인물이 왜 자신의 등 뒤에서 저러는 것인가!
진은 이내 관심을 끄기로 했다.
기사단이니 교단이니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금은 승자의 권리를 행사할 중요한 때였다.
진은 천천히 빌리에게 다가갔다.
“빌리?”
“…….”
녀석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빌리. 명예 결투의 규칙은 알지?”
녀석이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어떤 표정일지 보이진 않지만 대충 예상이 됐다.
‘당연히 반성이나 후회는 하지 않을 테고.’
그렇다고 분노할 정도로 승부욕이 있는 녀석도 아니었다.
‘덩치만 커다란 애.’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현실이나 부정하는 애. 딱 그 정도의 녀석이다.
‘차라리 깔끔하게 사과하면 다시 봤을 텐데.’
녀석은 망부석처럼 땅에 머리를 처박고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물론 이 상황이 계속될 리는 없었다. 귀족들과 다른 이들이 이곳을 주목하고 있었다.
애처럼 떼쓴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결국, 빌리 뒤에 있던 기사들이 움직였다.
“도련님.”
“…….”
“도련님.”
찌질하다 찌질해.
녀석은 이내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달았는지 얼굴이 수치심으로 물들었다.
빌리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입을 열었다.
“미, 미안해.”
녀석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겠는지 머리를 푹 숙이고 있었다.
‘생각 같아선 한국의 군대 문화를 맛보여 주고 싶은데.’
무슨 말을 해도 죄인이 되는 한국식 군대의 화법을 보여 주고 싶었지만, 귀족들의 시선이 모여 있었다.
‘그래도 이만큼 귀찮게 했으면 엿은 한 방 먹여 보내야지.’
빌리를 엿 먹이면서 다른 이들에게 평판을 올리는 방법. 두 가지를 만족시킬 만한 방법이 있었다.
“괜찮아. 친구끼리 그럴 수도 있지. 사과를 받았으니 오늘 일은 전부 잊을게. 내 오래된 친구야.”
진은 녀석의 어깨위에 팔을 올리며 ‘용서해 주었다’.
녀석의 몸이 잘게 떨렸다.
녀석은 느끼고 있을 것이다.
유일하게 자신이 우위라고 생각했던 상대에게 아래로 인식된 것을.
‘그건 빌리의 입장이고.’
다른 사람들에겐 전혀 다르게 보였다. 친구끼리 다투긴 했지만, 서로를 용서해 주는 훈훈한 모습.
진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갔다.
“파티 중에 이런 일이 생겨 정말 죄송합니다. 모두 잘 끝났으니 남은 파티 재밌게 즐겨 주셨으면 합니다.”
그렇게 빌리와의 대환장 파티는 깔끔하게 마무리됐다.
진의 평판만 상승한 채.
* * *
파티가 끝난 다음 날.
진은 푹 쉬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귀찮다 진짜.”
기사단장과 교구장.
두 사람을 기다리게 할 수 없었다. 아니, 기다리게 할 순 있지만, 괜히 버텼다가 더 귀찮아질 수가 있었다.
‘어딜 먼저 갈까?’
그렇게 생각하다 문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꼭 내가 가야 할까?’
귀찮음이 만들어 낸 사고의 전환!
“마리아!”
진은 곧장 마리아를 불러, 교구장과 기사단장 둘을 초대했다.
1시간 정도 뒤를 약속 시간으로 잡았는데, 이 양반들은 30분씩이나 일찍 왔다.
“허허. 교구장님도 오셨군요.”
“이거 기사단장님이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교구장과 기사단장은 만나자마자 기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진은 이 기싸움이 더 커지기 전에 그 흐름을 끊었다.
“이렇게 두 분을 초대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노바 때문입니다.”
진이 입을 열자 언제 기싸움을 했냐는 듯 두 사람은 진에게 집중했다.
“기사단으로 보내야 하는지, 아니면 교단으로 보내야 하는지. 계속 고민이었습니다.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이 선택한 방법은 간단하다.
“결국, 두 분께선 노바의 재능이 아까우셔서 그런 제안을 해 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럼,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게 아니라 둘 다 선택하면 어떨까 싶었습니다.”
진의 대답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는지 둘의 표정이 묘해졌다.
“제가 생각한 훈련은 체력 소모가 심합니다. 하나만으로도 벅찰 텐데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제 생각도 같습니다. 제가 알려 주려고 하는 것도 큰 정신력을 요합니다. 정신력이 얼마나 많은 체력을 소모하는지는 형제님도 잘 아실 겁니다.”
둘은 같은 우려를 표했다. 심지어 둘이 걱정하는 것도 동일했다.
하나도 힘든데 두 가지를 버틸 수 있겠느냐?
그건, 야만인의 특성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노바, 두 분은 네 체력과 정신력이 부족할까 봐 걱정하시는데?”
“나 나약하지 않다. 정 힘들면, 먹어서 회복한다. 난 이겨 낼 수 있다.”
먹으면 회복한다는 건, 다른 이들도 아는 야만인의 특성이다. 하지만 노바는 그 정도가 다르다.
괜히 ‘야만왕’이라 불린 게 아니다. 진은 그것을 설명했다.
“체력을 곧장 회복할 만큼 회복력이 뛰어나다는 겁니까?!”
“허어. 그렇다면 식량만 충분하다면 훨씬 힘든 훈련도 가능하다는 겁니까?”
둘은 경악에 차 질문했는데.
‘어쩌겠어. 사실인걸.’
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두 분 생각대로입니다. 그럼 체력은 충분할 거 같은데 두 가지 다 가르쳐 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못 버틴다면 그다음은 제가 다른 방법을 내놓겠습니다.”
그보다 지금부터 더 중요한 걸 정해야 한다.
“오전과 오후로 시간을 나눌 생각인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허허. 자고로 운동은 아침에 해야…….”
“대자연이 깨어나는 아침이야말로, 신의 힘을 가장 많이 받을 수 있는 시간…….”
다시 한차례 기싸움이 발발했고, 한참을 싸운 끝에.
“양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사단장님.”
“끄응. 절대 늦게 보내시면 안 됩니다.”
교구장의 승리로 끝났다.
오전은 교단.
오후는 연무장.
노바의 향후 일정이 정해졌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체력을 걱정하던 교구장과 기사단장의 말과는 달리, 노바는 그리 힘들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뭔가를 배우면 배울수록 힘을 얻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노바만 바쁜 하루하루가 이어지고 있을 때. 녀석은 진지한 표정으로 진을 찾아왔다.
“주인 부탁이 있다.”
“부탁?”
녀석이 뭔가를 먼저 부탁하는 건 처음이었다.
“뭔데?”
“내 친우들을 사 줘라.”
“어?”
“내 친우들 노예다. 친우들과 주인을 모시고 싶다.”
친우? 여태까지 말하지 않다가 이렇게 갑자기 부탁을 한다고?
진이 의문을 떠올리고 있을 때.
[진! 그 친우가 누구냐고 물어봐. 야만왕의 친위대를 말하는 거 같은데!?]
로메른이 흥분한 얼굴로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