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8. 명예 결투
귀족가에서 파티가 열리면 손님은 대략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이웃 영지의 귀족가.
이쪽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빌리를 제외하면 진과 안면이 있는 사람도 아니었고, 사실상 남작을 보기 위해 온 사람들이었다.
문제가 된 건 남은 부류였다.
남작령의 지역 유지들. 이쪽엔 진이 아는 얼굴들이 참 많았다.
“허허. 도련님 축하드립니다.”
“……연금술 상점 주인이시죠?”
저번엔 반말을 했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이곳에 왔다는 것만으로도 남작령에서 힘 좀 쓴다는 소리였으니까.
“이 늙은이 얼굴을 기억하시는군요.”
“예. 정령 때문에 난생처음 가 본 상점이니까요.”
“허허. 다시 찾아오지 않으셔서 키우시는 건 그만두셨나 했는데, 소식을 들었습니다. 잘 키워서 판매하시는 모양이더군요.”
진은 순간 소름이 돋았다.
어떻게 아는 거야?
씨앗을 구매한 건 처음뿐, 그다음부터는 대공자에게 부탁해서 팔아 치웠다.
그때 구경하고 있던 로메른이 입을 열었다.
[오호. 이 영감탱이 물자 이동까지 아는 거 보면, 연금술 길드에서 힘 좀 쓰나 본데?]
로메른의 말이 진의 머리를 맑게 해 주었다. 애초에 남작가 파티에 왔다는 것만으로도 이 영감은 범상치 않은 자란 뜻이다.
“이 녀석 덕분에요.”
진이 별다른 반응 없이 대답하자, 노인의 얼굴에 이채가 떠올랐다.
“허허. 그렇군요.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얼마든지 방문하세요. 전 남작님에게 큰 빚이 있으니 도와 드리겠습니다.”
남작이면 아버지 이야기였다.
‘빚?’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지만, 지금 할 건 그게 아니었다. 저쪽이 선의로 다가왔으면 이쪽도 선의로 보답해야 했다.
“예. 도움이 필요하면 방문할게요. 이렇게 축하하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연금술 상점 주인은 시작일 뿐이었다. 진은 최대한 구석에 처박혀 있었는데, 하나가 사라지면 하나가 튀어나왔다.
“축하드립니다, 막내 도련님.”
“……지부장님께서 여기까지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막내 도련님의 축하 행사인데 제가 안 올 수 있겠습니까?”
어. 안 올 수 있지!
우리가 얼마나 봤다고!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 이 남자는 로메른의 말에 따르면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었다.
‘편집증’.
정신병이 당연한 단체.
정보 길드의 지부장.
한데, 그와의 대화는 생각보다 금방 끝났다.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 더 있지 못할 거 같습니다.”
그는 주위를 조심스럽게 둘러보며 그런 말을 했다. 딱 봐도 편집증이 도진 거 같았다.
‘아, 피곤하네 진짜.’
진은 이 파티가 얼른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 *
“후우.”
한참이나 이어진 인사가 끝나고, 진은 드디어 혼자가 되었다.
‘앞으로 3일간은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 있어야지.’
이 정도 고생했으면 당연히 보상을 해 줘야 하는 법이다. 3일간 따듯한 햇살을 쬐며 쉴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웃음이 나왔다.
진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문제는 그 미소가 얼마 가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진. 언제나처럼 혼자네?”
불청객 ‘빌리’가 나타났다.
녀석의 물음에 진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녀석이 자신의 신경을 긁으려고 애쓰는 게 느껴졌다.
[저 등신은 왜 자꾸 따라다니는 거야? 아까부터 빤히 훔쳐보던데.]
거기다 훔쳐보기까지?
진이 혼자 되기만 기다렸단 소리였다.
“손님 좀 만나다 쉬는 중이야.”
“넌 언제나 친구인 날 걱정시킨다니까.”
“걱정?”
피식 웃음을 흘리며 대답하는 진의 모습에 빌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뭐가 그렇게 웃겨?”
녀석이 마치 으르렁거리듯 말했지만, 눈곱만큼도 겁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녀석의 행동에 웃음만 더 나올 뿐이었다.
“됐다. 그만하자.”
녀석과 진은 특별히 악연이 있거나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빌리 저 녀석은 단순히 어렸을 때의 우위를 되찾고 싶어서 발버둥을 치는 애새끼일 뿐이었다.
“그만? 대화는 나만 끝낼 수 있어.”
진은 그 기적의 논리에 기가 막혔다.
‘대체 뭐가 문제야 이놈은.’
12살 먹은 애새끼도 아니고, 17살. 이곳의 문화로 따지면 성인이었다.
짜증이 쌓이자 진의 표정이 굳었다.
“이제야 옛날 표정을 짓네. 몸 좀 나았다고 옛 친구를 이렇게 대접하면 돼?”
녀석은 진이 겁을 먹었다고 생각한 거 같았다.
“후우.”
진은 한숨을 쉬고, 그 녀석 뒤에 있는 기사에게 말했다.
“경. 이 친구 술 취한 거 같은데, 데려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빌리가 머저리라고 그와 함께 온 호위 기사도 머저리일 리 없었다. 기사는 진의 말을 이해했다.
남작가의 자제들이 싸우면, 그건 귀족가의 충돌을 의미한다. 게다가, 누구의 잘못인지 상황 또한 명백하다.
“도련님, 술이 과하신 거 같습니다.”
“뭔 소리야? 난 술 한 방울도 안 마셨…….”
하지만 녀석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기사가 심각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도련님, 취하셨습니다.”
“난!”
“취하셨습니다. 여기서 끝내시면 남작님껜 보고하지 않겠습니다.”
“좋아. 알겠어. 대화만 할게.”
녀석은 결국 타협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돌아가는 꼴을 보니 집안에서 어떤 대우를 받는지 눈에 훤하네.’
그렇게 생각하자, 상황이 대충 이해됐다.
어쩌면 녀석에겐 진이 유일하게 우위에 있을 수 있는 상대였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내가 그걸 받아 줘야 하는 건 아니지만.’
괜히 여기 있어 봐야 짜증만 날 뿐이었다. 진이 몸을 돌려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할 때.
“하. 대화 아직 안 끝났다니까!”
녀석은 진이 자신을 또다시 무시했다고 생각했는지, 진의 어깨를 잡아당기려고 했다.
그 순간, 뒤에 서 있던 노바가 움직였다.
탁.
빌리 녀석의 손목을 노바가 붙잡았다.
“주인 지킨다.”
노바는 예전에 알려 준 대로 움직였을 뿐이다.
‘악의를 가지고 내 몸에 손대려는 이를 막아라.’
노바가 보기엔 지금이 바로 그 상황이었다.
“어딜 야만인 새끼가 귀족 몸에 손을 대!? 안 놔?”
녀석은 기어코 사고를 쳤다.
“나 주인 지킨다.”
“힘 안 풀어, 이 짐승 새끼야!?”
노바가 손을 놔주지 않자, 빌리 뒤에 있던 기사도 검 쪽으로 손을 가져다 댔다.
일촉즉발의 상황.
진은 한숨을 쉬며 그 모습을 바라봤다. 어느새 모두의 시선이 이곳에 모여 있었다.
“노바, 손 놔줘.”
그제야 노바는 녀석의 팔을 놔주었다.
“저 야만인 새끼. 노예가 감히 귀족의 몸에 상처를 내!? 넌 죽었어. 감히 귀족의 몸에!”
어지간히 꽉 잡았는지, 녀석의 팔에는 빨간색으로 손자국이 나 있었다.
녀석이 난동을 부릴수록 진의 눈은 차갑게 식어 갔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빌리가 입을 열었다.
“내 팔 어쩔 거야? 노예 관리도 똑바로 못하면서 왜 데리고 다녀?”
팔에 난 상처는 명확했고, 빌리의 말도 틀린 건 아니었다.
기사들도 이건 막지 못했다.
“그 노예는 처벌이 필요하겠네.”
녀석은 승기를 잡았다는 듯 기세등등하게 나오기 시작했다.
그때, 로메른이 입을 열었다.
[차라리 잘됐다. 한판 뜨자고 해.]
그게 지금 상황에서 할 말인가 싶었는데, 로메른은 괜한 말을 할 녀석이 아니었다.
[노바, 성능 확인해 봐야지. 이런 상황일 때 귀족들이 잘하는 거 있잖아. 명예 결투. 결투로 잘잘못을 가리자고.]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금 상황에서 잘잘못도 가리고, 노바의 역량도 확인할 기회였다. 문제는, 승리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걱정 마. 저쪽 대장은 안 나올 테고, 일반 기사가 나올 텐데 그 녀석들은 노바에게 상대가 되지 않으니까.]
로메른은 진의 걱정을 읽은 듯 말했다. 그렇다면, 일은 간단해진다.
“내 호위가 자기가 할 일을 했는데, 처벌한다고? 난 싫은데?”
진이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는지 빌리가 당황했다.
“뭐?”
“내 몸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으니 주의가 필요해. 네 행동을 제지하는 게 정말 잘못된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진의 말에 녀석의 말문이 막혔다. 그 말대로 진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진은 곧장 미끼를 던졌다.
“정 그렇게 잘잘못을 가리고 싶으면 명예 결투라도 하든지. 난 내 호위인 노바를 내보낼 테니까.”
이대로라면 처벌도 어려운 상황. 녀석은 이 미끼를 물 수밖에 없었다.
빌리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명예 결투에 나오는 건 야만인일 뿐이다. 기사에게 상대가 될 리 없었다.
“하자! 명예 결투. 나도 호위 기사를 내보낼 테니까. 잘잘못을 따져 보자고!”
그렇게 파티 도중에 패자가 승자에게 사과할 수밖에 없는 ‘명예 결투’가 열렸다.
* * *
파티를 즐기던 사람들은 연무장으로 이동하고 있음에도 표정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이걸 하나의 이벤트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남작이 진에게 다가왔다.
“대체 명예 결투라니 어찌 된 일인 게냐.”
아버지는 갑작스러운 명예 결투에 우려를 내비치고 있었다.
진은 상황을 차분히 설명했다.
그러자 남작의 표정이 변했다.
“내 그런 줄도 모르고, 빌리를 보내 달라고 했구나.”
“아니에요. 어렸을 때 친구라곤 저 녀석밖에 없었으니까요. 나름대로 의지가 되는 녀석이었어요.”
“허어. 그런 아이가 어찌 저리 됐는지.”
솔직히 말할 수 없던 진은 그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한데, 명예 결투에 노예를 내보낸다고 들었다. 질 생각인 게냐?”
그럴 리가 있나.
“아니요. 노예긴 하지만 굉장한 아이예요. 정령이 골라 준 아이니까요.”
남작은 진과 정령을 한 번씩 바라봤다. 진이 정령과 함께 무언가를 할 때마다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다.
“흐음. 그럼, 기사를 지원해 줄 필요는 없는 게냐?”
“예, 없어요. 파티 중에 괜히 소란을 일으켜서 죄송해요.”
“아니다. 봐라. 다들 명예 결투에 신 난 모양이니.”
아버지의 말대로 사람들은 웃고 떠들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파티를 할 때보다 분위기가 더 달아오른 거 같았다.
“이번에도 믿으마.”
“예, 아버지.”
잠깐 남작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어느새 연무장에 도착했다.
“이 명예 결투는 밀튼 자작가의 기사단장인 나 발롱의 입회하에 이루어질 겁니다.”
상대 기사는 목검을, 노바는 목창을 들고 대기하고 있었다.
[그럼, 성능 실험해 보자고.]
로메른이 야만인을 향해 날아갔다. 녀석은 성령을 꺼냈다.
아름다운 천사의 모습.
“천사!?”
“아름다워.”
“어떻게…….”
그 모습을 사람들이 멍하니 바라봤다. 잠시 후, 성령과 노바가 연결되고 드라마틱한 변화가 생겼다.
성령의 몸이 근육질로 변하고, 야만인이 성스러워 보이는 어처구니없는 변화.
“대체 저게…….”
“천사님과 하나가 된 거야?”
“세상에나…….”
사람들은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봤다. 물론, 다른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신이시여. 모두 계획이 있으셨군요.”
교구장은 조용히 중얼거리며 기도했다.
상대 기사는 질 수 없다는 듯, 옅은 오러를 꺼냈다. 목검 위로 오러가 씌울 정도로 나름 실력이 있는 것 같았지만,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
성스러운 야만인.
천사와 하나가 된 야만인.
모두가 더는 야만인으로 부를 수 없게 된 신비한 존재만을 바라봤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입회인이었다.
“흠! 흠!”
그는 헛기침을 해 사람들의 주목을 모은 뒤.
“결투 시작!”
결투의 시작을 알렸다.
투-.
시작과 동시에 엄청난 굉음과 함께 땅에 진동이 느껴졌다. 곧이어, 상대 기사가 있는 곳에서 또다시 굉음이 들려왔다.
쾅!
사람들이 본 건, 뒤로 날아가는 기사의 흐릿한 모습과 오연히 서 있는 야만인의 모습이었다.
쿵!
뒤로 한참을 날아가던 기사는 연무장의 벽에 부딪치고 나서야 멈췄다. 그는 기절했는지 움직이지 못했다.
연무장에 침묵이 맴돌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신성해 보이는 야만인에게 향했다.
“나 주인 지킨다.”
어눌한 대륙어지만, 노바의 말은 신기하게도 온화하고 신성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