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 성령 합체!
노란바람은 팔려 가면서 이런 다짐을 했다.
‘사막의 바람은 절대 꺾이지 않는다. 난 노란바람이다!’
비록 노예로 팔려 가지만, 절대로 자신의 ‘혼’만은 꺾이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난 검투장으로 팔려 가겠지.’
자신들의 부족 대부분은 검투장으로 팔려 가 피를 뿌리며 죽었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한데, 그가 팔려 온 곳은 그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산골에 있는 도시.
그중에서도 귀족가의 저택이 아닌, 일반 저택이었다.
‘……공동묘지.’
그것도 공동묘지를 끼고 있는 집.
‘난 실험체로 팔려 온 것인가.’
흑마법사라 불리는 이들에게 실험체로 팔려 온 게 아닌가 싶었다.
‘최근 몸이 안 좋긴 했지만, 바로 이런 곳에 팔릴 줄은 몰랐군.’
쓸모없는 노예가 이런 식으로 폐기된다는 무서운 소문을 들어 본 적 있었다. 혼이 꺾이는 걸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니었다.
목숨을 부지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한데, 막상 주인 될 사람을 만나 보니 그런 게 아닌 것 같았다.
“뭐,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어. 노예라고는 해도 그건 서로의 위치일 뿐, 식구(食口)라고 생각해.”
심지어, 말하는 것을 들어 보면 썩 나쁜 주인도 아니었다. 그가 표현한 식구는 마치 자신들의 ‘부족’과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더 놀라운 건 그다음이었다.
‘주술사!’
자신의 주인은 정령을 사용하는 주술사였다. 그것도 그냥 주술사도 아닌, 신성한 주술사.
그가 이렇게 생각한 이유는 간단했다.
‘회복의 의식을 사용할 수 있는 이들은 신성한 주술사뿐이다.’
물론 그걸 주인이 사용했다곤 생각지 않았다.
‘대체 주인이 가진 정령은 무엇이기에…….’
그의 몸은 회복을 넘어 강화되었다. 통증은 전부 사라졌고, 몸은 더 단단해졌다.
저녁에 급격하게 피곤해지긴 했지만, 그는 그것이 긴장이 풀려서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그의 노예 생활이 시작됐다.
‘주인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군.’
그의 주인은 식구라고 했던 말처럼, 언제나 함께 식사했다. 노예인 자신은 물론이고, 하녀까지 함께.
게다가 그의 이런 생각이 확고해지는 계기도 있었다.
“도련님, 주제넘은 이야기이지만, 호위는 기사에게 맡기심이 어떻겠습니까.”
“어?”
하녀와 그의 주인의 대화.
매일 마당에 나와 있는 주인이기에, 그 대화를 의도치 않게 엿들을 수 있었다.
“호위가 필요하셔서 사람을 구하신거면, 기사를 요청하겠습니다.”
“노바가 있는데 왜?”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는 노예이며 야만족입니다.”
언제나 멍한 표정의 주인이었지만, 이때만큼은 달랐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진지한 주인의 표정.
“마리아, 난 너를 꽤 신뢰해. 아버지가 붙여 준 사람이지만, 내 사람, 내 식구라고 생각하고 있어.”
“감사합니다, 도련님.”
“그건 노바도 마찬가지야. 노예와 주인으로 만나게 됐지만, 내 식구라고 생각해.”
주인이 말하는 게 거짓이나, 꾸며 낸 말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어린 그가 보기에 저 모습은 진심이었다.
“노바가 일을 잘 못하거나, 꾀를 부리는 거야?”
“그건 아닙니다. 도련님께서 정해 주신 대로 착실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오히려 시간이 남을 땐 저도 도와주고 있습니다.”
“그거면 충분하지 않아?”
“……그건 맞습니다.”
그는 얼마나 좋은 주인을 만났는지 실감했다.
“그래도, 마리아 네 말 중에 맞는 것도 있어.”
“어떤 거 말씀이십니까?”
“노바가 호위로서 충분한 능력을 지녔는지 확인은 해 봐야지.”
“교관을 요청하면 되겠습니까?”
“아니. 그건 내 쪽에서 준비하고 있으니까 걱정 말고. 나중에 준비되면 말할게.”
“알겠습니다, 도련님.”
그 말을 들은 노바는 조용히 그 자리를 벗어났다.
* * *
[갔다. 갔어.]
로메른의 말에 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듣고 있을 줄은 몰랐네.”
[표정이 좋은 거 보니까 감동한 거 같은데? 확실히 어려서 그런가, 이거에 감동하네.]
진은 노바가 숨어서 마리아와의 대화를 듣고 있는 걸 알고 있었다.
“진심이 통한 거지.”
[진심은 무슨, 기사가 오면 너 체력 단련시킬까 봐 그런 건 아니고?]
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묵비권 행사였다.
물론 그건 오래가지 못했다.
“근데, 아까 말했던 준비는 뭐야?”
[별거 아니야. 저번에 말했던 거 기억해? 영혼 언데드 강화.]
당연히 기억한다.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영혼끼리 합치면 더 강해진다고 한 그거?”
[그래. 그걸 활용하면 야만족들을 더 강하게 만들 수 있어.]
이건 좀 신기했다.
여기서 이게 나올 줄은 몰랐다.
“야만족은 생명력을 사용한다고 하지 않았어? 생명력을 사용하는 야만족이랑 성령이 무슨 연관이 있는 거야?”
[영혼들이 제일 좋아하는 게 생명력이야. 그 생명력을 이용해서 영혼을 다루는 거지.]
영혼들이 생명력을 좋아한다?
“잠깐만, 그렇게 생명력을 계속 사용하면 죽는 거 아니야?”
진의 물음에 로메른은 웃음을 터트렸다.
[너 설마, 내가 말하는 생명력을 수명으로 생각한 거야?]
“그게 아니야?”
[당연히 아니지! 내가 당장 쓸 만한 놈 만들자고, 수명을 깎아 만들겠어? 위급한 상황도 아닌데?]
그 말이 맞았다.
[내가 말한 생명력은 체력에 가까워. 수명처럼 유한한 게 아니라 휴식을 통해 회복할 수 있어. 물론, 한계 이상까지 끌어다 쓰면 수명이 깎이긴 하지만.]
이제야 감이 오기 시작했다.
“야만족은 애초에 그 생명력이 많다는 거지? 회복도 빠르고?”
[그렇지. 웬만해선 수명이 깎이는 영역까지 내려갈 리 없어. 만약 소모된다고 해도 야만족은 음식을 먹어서 빠르게 회복할 수 있고.]
이제야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야만족은 마나처럼 생명력을 사용한다는 뜻이었다.
[애초에 야만족을 제일 먼저 선택한 것도 그것 때문이야. 저번에 말했던 거 기억하지? 흑마법은 생명력도 다룬다고.]
“확실히 이해했어.”
흑마법사와 야만족은 공통분모가 있었다.
‘생명력.’
둘 다 생명력을 이용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둘의 조합은 정말 좋았다. 어째서 성령을 이용하겠다고 했는지도 감이 잡혔다.
‘야만인과 성령…… 이거 좀 비슷한 거 같은데?’
정령사가 정령에게 자연의 마나를 공급하듯, 야만인은 성령에게 생명력을 공급하는 것이다.
“성령과 야만인 이거 뭔가 정령과 정령사 느낌인데?”
그 말에 로메른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도 볼 수 있겠네.]
정령사가 정령을 소환하듯 야만족이 성령을 다룬다.
물론 둘이 다루는 방식은 전혀 달랐다.
[물론, 자세히 보면 전혀 달라. 정령사는 정령을 다룬다면, 야만족은 성령한테 힘만 빌려 오거든. 그것도 육체 능력 향상이란 한정된 힘을.]
일종의 수호령 같은 느낌이었다.
날 지키는 수호령이 힘을 부여해 주는 그런 느낌.
“이건 야만족이 원래 사용하던 기술이야?”
[맞아. 원래 사용하던 거야. 내가 하려는 것과는 달리 부족 조상들의 영령을 사용하지만.]
그런 기술이라면 노바도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성령 합체는 언제 할 거야?”
[지금 해도 돼. 갈래?]
그거 좋지.
진은 해먹에서 몸을 일으켰다.
* * *
성령 공장.
그 말대로였다.
“남작령 안에 악령이 이렇게 많았어?”
진은 지하 비밀 공간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안에는 성령이 되어 버린 영혼들이 바글바글했다. 이건 공장이 아니라 닭장이라고 표현해도 될 정도였다.
[이게 바로 원혼의 씨앗이 가진 힘이야. 이 녀석들이 전부 악령인 건 아니었어.]
로메른은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 갔다.
[원령이 악령이 되고, 그 악령이 오래되면 사령이 되는 거까진 알지?]
이건 저번에 들어서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다.
1단계 원령. 원한을 가진 혼으로 흐릿하게 살짝 보이는 정도다. 특별히 무언가를 할 순 없는 존재.
2단계 악령. 원혼이 힘을 얻어 변하는 녀석. 영혼의 형태가 확실히 보이고, 물리적 간섭도 일부 가능하다.
3단계 사령. 악령의 최종 형태. 저주를 뿌리고, 물리적 간섭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여기 있는 대부분은 원혼이었어. 시간이 더 지나면 악령이 될 녀석들. 그런 녀석들을 끌어 모은 거야.]
“여기 있는 건 전부 악령급 성령인데?”
이곳에 있는 성령은 그 영혼의 형태가 전부 보였다. 그 말인즉슨 악령급 성령이란 뜻이었다.
[원혼의 씨앗으로 원령들을 악령으로 키웠거든.]
“미친……. 위험하진 않고?”
[전혀. 사령급까진 성장 못하게 철저하게 막아 놨어. 사령급을 다루기엔 내 힘이 아직 부족해.]
안전만 확보됐다면 상관없었다. 어차피 진이 아니었다면 세상에 해를 입힐 원혼들이 성령이 됐으니, 진은 물론이고 세상에도 좋은 일이었다.
“알겠어. 그런데 합체는 언제 보여 줄 거야?”
[그거야 당장에라도 보여 줄 수 있지.]
진은 기대가 됐다.
합체!
가슴을 울리는 멋진 단어였다.
[그럼, 시작한다. 귀 막아!]
“귀? 귀는 왜…….”
왜 막으라고 했는지 금세 이해가 됐다.
키에에에엑-!
끼에에엑!
키이이이이익-!
합체되는 성령들은 비명을 질렀다.
‘이게 합체냐.’
이건 합체가 아니었다. 합체보다는 강제 융합에 가까워 보였다.
성령 위로 성령을 겹친다. 그리고 그 녀석들은 강제로 하나가 된다. 비명을 지르며.
‘누가 흑마법사 아니랄까 봐.’
저 영혼들이 신성한 빛을 뿜지 않고 칙칙하게 어두운 빛만 뿜었으면 딱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흑마법사의 비밀 실험이다.
문제는 이게 확실히 효과가 있다는 점이었다.
‘이게 되네…….’
성령의 몸이 더 커지고, 신성한 빛이 더 선명해졌다. 합체 모습만 보면 흑마법사의 실험인데, 결과는 성스러운 영혼이라니.
게다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어쭙잖은 흑마법사였으면, 여기서 끝이겠지만 난 아니야.]
녀석은 마치 강아지를 미용시켜 주듯 성령을 다듬기 시작했다.
키웨웩!
물론 성령은 털이 없으니 살이 뭉텅이로 깎여 나갔지만.
[가만있어!]
조그만 아기 천사에게 붙잡혀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했다. 그렇게 한참을 이리저리 다듬으니 처음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다.
‘와. 이건 또 무슨…….’
성령. 그야말로 성령이라 부를 만한 모습이었다.
등에는 천사의 날개가 달려 있었고, 얼굴조차 없던 머리통엔 아름다운 얼굴이 생겼다.
“이거 사기 아니야?”
[원래 난 이런 거 안 좋아하는데, 네가 저번에 말했잖아. 일부러 겁주려고 그렇게 만드냐고.]
언데드들이 왜 기괴하게 생겼냔 질문에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녀석이 말을 이어 갔다.
[그래서 생각했지. 반대도 되지 않을까? 효율은 좀 떨어져도 호감을 사는 성령은 어떨까?]
아, 선생님. 전 그냥 한 말인데, 이렇게 응용해 버리시면.
“나이스인데?”
[그치? 번거롭고 효율이 떨어지는 짓이라 생각했는데. 나름 괜찮은 거 같네.]
천사라곤 할 수 없다. 하지만 저건 성령이라고 하기에 충분했다.
‘저 성령과 하나 된 야만인을 야만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어림도 없지.
사제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좋네.”
이보다 더 나은 말을 찾을 순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