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5. 미래의 야만왕
노예 배달 서비스.
이건 유구한 전통이 있는 서비스였다.
생각해 보자. 노예를 구매하는 대부분은 귀족이다. 귀족들의 문화. 이곳은 막대한 골드가 굴러다니는 곳인데, 서비스가 발전하는 건 당연했다.
“골드가 좋긴 좋네.”
진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노예 상단에 연락하자, 그들은 카탈로그를 보내왔다. 로메른의 말대로 남작령에서 벗어날 필요가 없었다.
‘장관이네, 정말.’
카탈로그에 귀신이 들어간 덕분에, 허공에는 카탈로그들이 날아다녔다. 로메른은 방 중앙에서 카탈로그를 둘러보며 그 녀석을 찾고 있었다.
“찾을 수 있겠어?”
녀석은 진을 바라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당연하지. 상단까지 알고 있고, 녀석의 나이대도 알고 있는데 못 찾을 리가 있어? 시간이 좀 걸릴 뿐이야.]
그 말대로였다. 상단도 알고, 구매해야 할 노예의 나이까지 안다. 이건 못 구매하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로메른이 보고 있는 카탈로그를 구경했다.
“확실히 다르긴 다르네.”
이 대륙에는 여러 인종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야만족’이라 불리는 이의 피부는 확실히 달랐다.
굳이 따지자면, 이쪽 왕국인들은 백인에 가까웠다. 한데, 야만족들은 대부분 황인에 가까웠다.
‘여기서도 인종 차별이라니.’
지구에서 판타지로 세상이 달라졌지만, 사람 사는 건 똑같은 모양이었다.
잠시 후, 로메른이 소리쳤다.
[찾았다!]
“어?”
[찾았어! 이거야 이거.]
녀석은 카탈로그를 진이 있는 곳으로 가져왔다.
[이 녀석이야. ‘야만왕’의 얼굴을 내가 까먹을 리가 없지.]
녀석이 보여 준 건 성인 남성 정도로 보이는 야만족이었다. 한데, 자세히 보니 뭔가 달랐다.
“……13세?! 이게 13세라고!?”
솔직히 말하면 20대 중반은 되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한데, 노예의 나이에는 13세라고 적혀 있었다.
[굉장하지? 13세에 이 정도 육체 발달이라니. 이게 바로 재능이지.]
진은 그 이야기에 동의할 수 없었다.
‘재능보다는 저주에 가깝지 않나?’
13세에 20대의 몸을 가진다면, 그게 과연 재능일까? 게다가 카탈로그를 자세히 보니 억지로 몸만 늘려 놓은 거 같았다.
근육 하나 없이 삐쩍 마른 모습은 뭔가 재능을 느끼기에는 조금 힘든 모습이었다.
“아무튼, 이 녀석을 구매한다는 거지?”
[어. 이 녀석은 무조건 사야 돼.]
그렇다면 망설일 필요 없었다.
“마리아!”
진이 하녀 마리아를 부르자, 그녀가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이 녀석 구매한다고 연락해.”
“예, 알겠습니다, 도련님.”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 * *
며칠 뒤.
진이 해먹에 누워 햇빛을 만끽하고 있을 때, 손님이 방문했다.
“도련님. 상단이 찾아왔습니다.”
“벌써?”
다른 곳도 아니고, 이곳 남작령은 시골 중에서도 시골이었다. 이곳까지 찾아오는 데 며칠밖에 걸리지 않는다니.
‘대단하네.’
진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쪽으로 데려와.”
“예, 도련님.”
진이 해먹에서 일어나, 야외 테이블에 앉을 때쯤 하녀와 함께 깔끔한 인상의 청년이 걸어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밀리텍 상단입니다.”
깔끔한 옷차림과 온화한 말투. 미소 짓고 있는 표정을 보자니, 지구의 백화점 직원 같은 느낌이었다.
“바로 구매하겠습니다. 얼마죠?”
진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바로 말씀이십니까?”
“예. 문제가 있나요?”
“아닙니다. 전혀 없습니다.”
빠른 결정에 놀랐을 뿐, 구매하는 데 문제가 있는 것 같진 않았다.
“얼만가요?”
“저희가 산정한 가격은 110골드입니다.”
110골드.
한화로 따지면 1억 1천만 원.
노예 하나 구매하는 데 이게 말이 되나 싶었는데.
[제법 합리적인 가격이네. 그냥 구매해도 될 거 같아.]
로메른이 보기엔 합리적인 가격인 모양이었다. 하긴, 몇 골드 깎자고 실랑이하는 것도 귀찮은 일이었다.
“바로 거래하시죠.”
“알겠습니다. 빠른 거래를 해 주셨으니, 제약의 룬 강화는 서비스로 해 드리겠습니다.”
제약의 룬. 이건 노예가 주인에게 대들지 못하게 하는 일종의 안전장치였다. 기본적인 제약의 룬을 강화해 준다는 뜻인 거 같았다.
진이 로메른을 바라보자 로메른은 잘됐다는 듯 입을 열었다.
[데려오면 제일 먼저 할 일이 제약의 룬 강화였어. 저쪽에서 해 주면 이쪽은 땡큐지.]
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럼 감사하죠.”
“아닙니다. 이렇게 빠르게 결정을 내려 주시니 저희가 더 감사합니다. 노예는 오늘 오후에 도착할 겁니다.”
“예. 알겠습니다.”
덕분에 둘 다 만족스러운 거래가 되었다.
* * *
상인이 돌아가고, 진도 노예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물론, 진이 직접 준비를 하지는 않았다.
[고기를 준비해야 해. 그것도 아주 많이! 익히지 말고 생으로.]
로메른이 필요하다는 것들은 마리아가 준비했다. 진은 해먹에 누워서 그 모습을 구경할 뿐이었다.
준비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마법진 하나 준비할게.]
로메른은 뭔가 이상한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양피지 위로 펜이 휘날리고, 마법진을 그려 갔다.
‘이야. 신기하네.’
그 모습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오후쯤 되자 상인이 약속한 대로 노예가 도착했다.
진의 집안 식당에서 그 노예를 마주했다.
‘실물로 보니 더 늙었네.’
카탈로그를 그리는 화가가 악의를 담아 그린 게 아니었다. 오히려 미화해 준 것에 가까웠다.
직접 보니 녀석은 20대 후반은 되어 보였다. 게다가 생각보다 더 앙상하게 말라 있었다.
“우리 말 알아?”
진이 녀석에게 질문을 던지자.
“……안다.”
녀석이 어눌한 대륙어로 대답했다. 다행히 의사소통은 되는 거 같았다.
“일단 저쪽에 앉아.”
녀석이 대륙어를 알고 있다는 건 거짓이 아니었다. 녀석은 식탁 의자에 앉았다.
“내가 너의 주인이야.”
“안다. 내 주인. 너다.”
계급 투쟁을 일으켰다기에 ‘나 노예 아니다!’ 이딴 말을 할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다.
정상적인 반응이라면 일단 통성명부터 해야 하는 법.
“난 진 플린트. 남작가의 막내아들이야.”
진이 먼저 자신을 소개하자, 녀석도 입을 열었다.
“난. 바람 부족. 노란바람이다.”
노란바람?
이거 인종 차별 아닌가?
이게 말로만 듣던 황인종만 할 수 있는 조크인가?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그 생각을 치웠다.
“노란바람?”
“그렇다. 사막 모래. 노란바람이다.”
녀석의 말뜻을 해석해 보면, 사막에 바람이 불면 노란색 바람이 인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라는 것 같았다.
이 이름을 줄이면, ‘노란’이나 ‘바람’으로 불러야 하는데, 바람은 이상했고 노란은 인종 차별적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노란바람이라고 부르는 건 좀 어려우니까. 줄이자. 노바로.”
노바 정도로 줄이는 게 가장 괜찮았다.
“노바. 알겠다.”
녀석도 마음에 들었는지 아무런 불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내가 널 왜 샀는지부터 알려 줄게.”
“알겠다.”
“호위와 경호를 부탁하고 싶어.”
“지킨다?”
“그래. 가까이서 날 지켜 주면 돼. 그렇다고 내가 위험한 건 아니야.”
“이해했다. 나 호위다.”
별다른 추가 설명 없이 이 정도에 녀석은 자신이 할 일을 이해했다.
“좋아. 그럼, 앞으로 어떻게 대할지도 알려 줄게.”
“…….”
앞으로 자신의 대우에 관해 나오자, 녀석의 눈빛이 진중해졌다.
‘보통은 아니라 이거지?’
어눌한 대륙 말만 들으면 어수룩해 보이지만, 녀석은 미래에 노예 해방을 위해 전쟁을 일으킨다.
어수룩한데 그게 가능할까?
‘그럴 리 없지.’
강력한 카리스마와 뛰어난 리더십. 거기다 미래에 대한 비전까지 있기에 그는 전쟁을 일으킬 정도로 커다란 세력을 손에 넣은 것이다.
겉모습에 속으면 안 된다.
“뭐,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어. 노예라고는 해도 그건 서로의 위치일 뿐, 식구(食口)라고 생각해.”
“……식구.”
“한집에서 같이 밥을 먹는 사이.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가족과도 같은 사이. 뭐 이런 거지. 게다가 내 호위를 부탁했는데, 노예처럼 마구 다룰 생각은 없어.”
“이해했다. 나 주인 지킨다. 반드시.”
지금은 이 정도면 충분했다. 앞으로 천천히 회유해 나가면 될 일이다.
“식구라고 했으니, 밥부터 먹자.”
“밥?”
녀석이 물어보자마자 하녀는 카트를 끌고 왔다. 각종 고기가 조리되지 않은 채, 카트에 가득 실려 있었다.
마리아는 무표정하게 그걸 노예 앞에 올렸다.
“잠깐 기다려. 아직은 먹으면 안 돼.”
한데, 노예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날아왔다.
“이거 생이다. 익혀 먹어야 한다. 우리 생고기 잘 안 먹는다.”
“나도 알아. 너희가 야만족이라고 불린다고 진짜 야만적이라고 생각하진 않으니까.”
진의 말에 녀석의 얼굴에 이채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노예의 의문이 더 깊어졌다.
알면서 이걸 준비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무언가 희끄무레한 것이 이곳으로 날아왔다.
“저, 정령!?”
노예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어. 정령이야. 기다려 봐. 소개해 줄 테니까.”
진은 녀석의 반응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야만족 쪽에선 정령사를 신성한 이들이라 생각해.]
로메른이 전부 설명해 주고 있었으니까.
“아까 만들던 건 끝났어?”
[어. 이거야.]
로메른이 진에게 양피지 하나를 건넸다. 일반적인 마법진과는 좀 다른 모습이었다.
“마법진보다는 문신 같아 보이는데?”
[오. 제법 눈썰미가 있는데? 주술 계열이라 그래. 마법진이랑 비슷한 역할을 해.]
“어떤 역할을 하는데?”
로메른은 씩 웃더니, 양피지를 가지고 노예에게 다가갔다. 그러더니, 그 양피지를 녀석 무릎 위에 올려 두었다.
노예가 거부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회복의 의식! 주인 대단하다! 주술사다!”
녀석은 이게 뭔지 알고 있는 눈치였다. 한데, 로메른은 조금 다른 말을 했다.
[회복의 의식이 아니야. 오히려 상대의 생명력을 일순 폭주시키는 저주에 가까워.]
저주? 진이 깜짝 놀라 로메른을 바라보니, 녀석이 설명을 덧붙였다.
[물론 그걸 누구한테 쓰느냐에 따라선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오지. 생명력이 부족한 이라면 죽겠지만, 야만왕이라면 달라. 기다려 봐, 정말 신기한 일이 일어날 테니까.]
노바에게 사용해야 의미가 있다는 소리였다. 진은 고개를 끄덕인 뒤 입을 열었다.
“먹어.”
진의 허락이 떨어지자, 녀석은 맨손으로 고기를 잡고 짐승처럼 뜯어먹기 시작했다.
고기의 잔해가 사방에 떨어지고, 고기의 피가 그의 팔뚝에 흘렀다.
“이런다고 회복이 되는 거야?”
[다른 이들은 안 돼도 야만족은 가능해. 생명력을 힘으로 사용할 정도로 엄청난 생명력을 지니고 있거든. 특히나 이 녀석은 그중에 ‘최고’라고 할 수 있고.]
그렇게 한 덩이 한 덩이 먹을수록, 식탁 밑 마법진에서 붉은빛이 뿜어지기 시작하더니.
[오. 슬슬 발동된다.]
우적. 우적.
으드드득. 으드득.
녀석이 고기를 씹어 삼킬 때마다, 녀석의 몸이 부풀었다가 쪼그라들기를 반복했다.
[보이지? 생명력이 움직이니까 육체 전체가 움직이는 거야. 역시 야만왕이야.]
우적. 우적.
콰드득. 콰드득.
다시 고기를 집어삼키자, 녀석의 몸에 근육이 붙기 시작했다. 그건 경이로웠다. 마치 마법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갑작스런 성장에 따라가지 못했던 근육도 회복됐고, 회복을 넘어 근 성장까지 했는데?]
우적. 우적.
뿌드득. 뿌드득.
접시에 있는 고기가 조금씩 사라질수록, 녀석의 몸은 점점 커졌다.
앙상하던 녀석의 팔에 근육이 꿈틀거렸고, 홀쭉하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어때? 내가 신기할 거라고 했지? 이 녀석이니까 가능한 일이야.]
진은 그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달그락. 달그락.
접시에 모든 고기가 비워졌을 때, 식탁엔 전혀 다른 사람이 앉아 있었다.
“주인. 나, 회복했다!”
말라비틀어진 노예가 아닌.
미래의 야만왕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