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작가의 정령 천재-13화 (13/210)

013. 원혼의 씨앗

지하실은 깊었다.

그것도 그냥 깊은 게 아니라 엄청나게 깊었다.

“대체 왜 이따위로 만든 거야?”

괜히 짜증 내는 게 아니었다.

깊다는 건 그 긴 길을 진이 직접 걸어 내려가야 한다는 소리였다.

[진정해. 거의 다 왔으니까.]

안 속는다. 로메른이 저 말을 한 게 벌써 세 번째였다.

[봐 봐. 문 보이지?]

한데 이번엔 달랐다. 통로 끝에 문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진은 때려치우자는 말을 억지로 삼키고, 천천히 문 쪽으로 다가갔다.

꽤 튼튼해 보이는 철문이 하나 나왔다.

[숨기기엔 딱 맞은 장소지?]

“그렇긴 한데, 어떻게 이렇게 깊게 판 거야?”

[내려왔던 길 대부분이 원래 있던 거야.]

“원래?”

지하에 이렇게 큰 길이 나 있다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여기가 어딘지를 생각해야지. 여기 공동묘지잖아.]

그제야 무슨 말인지 감이 왔다.

“여기가 원래는 지하 무덤이었단 소리야?”

[어. 이제는 안 쓰는 곳에 길을 터서 이걸 만든 거야.]

“이 정신병자들이…….”

이따위 짓거리를 하니, 영혼들이 화가 난 것이다. 땅 위는 물론이고 지하 깊숙이 파헤쳤으니까.

대체 지하 아래에 뭐가 있을 줄 알고 겁도 없이 팠을까?

영혼. 그것도 오래된 영혼은 굉장히 위험하다.

‘아니, 몰랐으니 이 짓거리를 했겠지.’

여기서 벌어진 일은 말 그대로 인간이 만든 재앙이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옅은 빛이 뿜어지고 있었다. 보일 듯 말 듯 작은 빛.

“빛? 저건 뭐야?”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어. 교구장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봉인을 해 놓은 거니까.]

“빛의 힘으로?”

[아 설명하자면 복잡한데, 아무튼 빛의 힘과는 좀 다른 힘이야. 사제한테는 절대 들키지 않는 종류의 힘.]

저게 정확히 어떤 힘인지는 모르겠지만, 교구장이 눈치채지 못했다는 걸 생각해 보면 틀린 이야기는 아닌 거 같았다.

“좋아. 대충 이해했어. 그래서 이게 뭔데? 원혼의 씨앗이라며.”

[쉽게 설명해 줄게. 원혼의 씨앗은 원혼이 뭉쳐서 만들어진 거야. 왜 원혼이 생겼는지는 알겠지?]

거기까진 이해했다.

지하를 이렇게 파헤쳤는데 안식을 취하고 있는 영혼들이 화나는 건 당연하다.

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원혼의 씨앗은 좀 골 때려. 악령의 힘을 더 강하게 만들어.]

“이게 있으면 악령이 더 강해진다고?”

[어.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났으면, 이 저택에 사령이 태어났을걸?]

“세상에……. 이딴 걸 왜 내버려 둔 거야? 쓸데가 있어?”

[당연히 써먹어야지. 이거 대박이라니까?]

진은 녀석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로메른이 부리는 건 성령이었다. 이건 악령을 강하게 만드니 당연히 쓸모가 없었다.

근데 이걸 써먹을 수 있다니?

“어떻게?”

[간단해. 악령들은 자신의 힘이 강해지니까 이걸 간절히 원하겠지?]

“설마……. 악령들이 이걸 찾아다닌다는 말이야?!”

[찾아다니는 건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이끌려. 난 그 특성을 이용해서 파리지옥처럼, 악령을 잡는 ‘덫’으로 활용할 생각이야.]

이제야 녀석의 계획이 보였다.

“그러니까, 시간만 지나면 자동으로 악령이 수집된다는 거지?”

[그렇지. 거기서 끝이 아니야. 불러 모은 악령을 난 성령으로 만들 수 있어.]

“설마…….”

[그 설마가 정답이야. 이게 있으면 난 악령이 잡힐 때마다 성령을 만들 수 있어.]

단순히 덫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일종의 공장이었다.

‘성령 공장.’

저 씨앗이 있으면 이 지하는 성령을 만들어 내는 공장이 되는 것이다.

“골 때리네.”

[그치? 내가 골 때린다고 했잖아.]

이건 좋아도 너무 좋았다.

성령은 로메른의 손발이 되어 줄 테고, 녀석의 활동 범위를 늘려 줄 것이다.

그것은 고스란히 진의 평화로운 일상으로 되돌아온다.

[여기서 끝이라고 생각한 거 아니지? 이것밖에 없는데 내가 얼른 오자고 닦달했겠어?]

“여기서 뭐가 더 있다고?!”

지금까지 말해 준 것만으로도 충분했는데, 뭔가 더 있는 모양이었다.

[흑마법사가 영혼류 언데드를 어떻게 강화하는지 알아?]

“……강화? 귀신이 강화가 돼?”

[당연하지. 저렇게 허약해 빠진 놈들을 수천수만 데리고 다녀 봐야 강한 놈 하나에 쓸릴 텐데?]

“그건 그렇지.”

[그러니까 당연히 강화하는 방법이 있지.]

그 순간 진은 소름 끼치는 생각이 들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 하나가.

“설마 성령끼리 합체라도 하는 거야?”

[역시 눈치 빠르다니까. 비슷해. 조금 다르긴 하지만.]

“진짜 합체가 돼? 합체하면 더 강해지고?”

진의 물음에 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되지. 게다가 내가 최고의 흑마법사인 거 알지? 최적의 합체 레시피가 있다 없다?]

“당연히 있겠지.”

공장에서 성령이 만들어지면 단순히 ‘수’가 늘어나는 게 아니다.

성령의 ‘질’이 상승한다.

[그럼 덫 발동시켜 놓는다? 저녁때쯤엔 합체 볼 수 있을 거야.]

“알겠어. 교구장이나 다른 이들한테 들키지 않게 신경만 써 줘.”

[그건 걱정하지 마.]

지하실 탐방은 정말 만족스러웠다. 다시 올라갈 생각을 하니 아찔하긴 했지만.

* * *

또다시 한참이 걸려 밖으로 나왔다. 진은 비밀 통로를 닫고 곧장 방을 나섰다.

“어?”

나오자마자 진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무를 문지른다고 반짝거리나?’

청소를 얼마나 깨끗하게 했는지 사방이 반짝이는 것만 같았다. 먼지는커녕 머리카락 하나 떨어져 있지 않았다.

‘아니, 이건 좀 심하잖아.’

마치 결벽증 걸린 사람이 청소한 것만 같았다. 아무리 귀신들을 이용해 청소했다고 하지만, 이게 가능한가 싶었다.

그렇게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을 때.

“도련님, 나오셨습니까.”

마리아가 어느새 곁으로 다가와 있었다.

“……깨끗하네?”

“이렇게 청소는 처음 해 보는 거라서 좀 과하게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뭐, 나쁠 건 없지.”

그저, 너무 심하게 깨끗할 뿐이었다.

“고생했어. 처음 해 봤는데 이 정도면 대단한 거지.”

“아닙니다. 시키는 대로 잘 따라 주는데, 별로 어려운 일 아니었습니다.”

진짜 그럴까?

말 잘 듣는 사람들을 데리고 부려도, 생각대로 되지 않기 마련이다.

‘지휘에 재능이 있나?’

진이 그런 의문을 떠올리고 있을 때. 갑자기 로메른이 끼어들었다.

[진. 얘 장난 아닌데?]

“뭐가?”

[귀신 좀 부렸다고 얘 영안이 반쯤 열렸는데?]

“……뭐?”

그게 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 하녀. 재능 있는 아이야.]

“알아듣게 말해.”

진의 목소리가 진지해지자, 로메른 또한 진지해졌다.

[귀신을 다루는 재능이 있어. 영안이 완전히 열리면 빙의도 가능하겠는데?]

“미친.”

살다 살다 귀신을 다루는 재능이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보면 볼수록 굉장한데? 대륙 남부의 정글에서 태어났으면 영매로 이름 좀 날렸겠어.]

녀석은 알 수 없는 말을 계속 중얼거렸다.

“……일단 조용해 봐.”

일단, 진은 로메른을 조용히시키고 마리아를 바라봤다.

“마리아.”

“예, 도련님.”

“청소 끝났으니까 지금 여유 있지?”

“그렇습니다, 도련님.”

일단, 이 친구랑 대화부터 해야 할 것 같았다.

“차 한잔하고 싶은데, 준비 좀 해 줄 수 있을까? 천천히 해도 돼.”

마리아는 센스가 있는 하녀다.

“예, 도련님. 천천히 준비하겠습니다.”

역시나 진의 의도를 파악하고, 차를 준비하러 갔다.

“일단 하나씩 하자. 영안이 뭐야?”

[영안(靈眼). 귀신을 보는 눈이야. 보통 영매의 자질이 있다, 없다를 나눌 때 이 영안을 떴는지 확인해.]

“마리아가 반쯤 그 영안을 열었고?”

[그렇지. 아무리 귀신을 다뤘다고 해도, 그 잠깐 사이에 반쯤이나 열릴 정도면 굉장한 재능이야.]

귀신을 다루는 데 재능이 있는 아이라니 이건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 영매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뭔데?”

[그들은 많은 걸 할 수 있어. 귀신들을 움직일 수 있고, 귀신과 하나가 될 수도 있지.]

“그게 아까 말했던 빙의지?”

[어. 귀신과 빙의해서 생전 그들이 지닌 능력을 사용할 수 있어. 뭐, 제한이 많긴 하지만 꽤 괜찮은 재능이지.]

빙의. 이건 좀 신기했다.

“마법사 영혼이 빙의하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거야?”

[그럴 리 없지. 서클이 없잖아. 대신 지식은 활용할 수 있겠지.]

생전 그들이 가지고 있던 힘보다는 지식과 기술을 이용하는 데 최적화된 힘인 것 같았다.

내용이 정리되자 사용처가 바로 떠올랐다.

“연금술사에 빙의하면 약 제조가 가능해지는 거야?”

[그렇지. 빙의하게 되면 연금술사의 정밀한 계량이나 감각에 가까운 배합을 할 수 있게 되는 거야.]

이건 정말이지 탐나는 재능이었다. 영혼만 구할 수 있다면 다용도로 얼마든지 써먹을 수 있었다.

“그런 영혼을 구하는 게 가능해?”

[진. 내가 어디서 왔다고 했지?]

“미래.”

맞다. 녀석은 회귀자였다.

그것도 흑마법사의 끝을 본 자.

얼마나 많은 영혼을 소유하고 있었을지 상상도 가지 않는 인물!

[나만 믿어. 든든한 영혼들 내가 쏙쏙 뽑아 줄 테니까.]

물론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뭘 폼 잡고 있어. 어쨌든 성장해야 가능한 거 아니야?”

[하. 내가 말했지? 넌 정말 빠르게 성장할 거라고. 얼마 남지 않았어.]

뭐, 그렇다면야.

그렇게 진이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똑똑.

“도련님. 들어가겠습니다.”

마리아가 방으로 들어왔다.

“앉아 봐.”

“예, 도련님.”

그녀가 자리에 앉자마자, 진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오늘 성령들 다루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이야기해 봐. 앞으로도 계속 다뤄야 하는데, 싫다고 하면 빼 줄게.”

진의 말에 그녀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괜찮았습니다.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좋았습니다.”

“좋았어?”

“예. 마치 손발이 늘어난 기분이었습니다. 허공에 떠다니는 청소 도구들이 제 뜻대로 움직였습니다. 그건 정말 신비로운 기분이었습니다.”

로메른의 말대로 그녀는 확실히 재능이 있었다. 하지만 진에겐 몇 가지 의문이 남아 있었다.

“처음 봤을 때는 무서워하지 않았어?”

“이상한 감각이 들어서 그랬습니다. 그 성령들의 형태와 모습이 너무 생생히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무서워했다?”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다루면서 나쁘거나 무서운 게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로메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어때? 점점 더 확실해지지?]

그래, 이놈아.

진은 로메른을 흘겨보고, 마리아에게 집중했다.

“그럼 앞으로도 성령을 다뤄 줄 수 있겠어?”

“오히려 제가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이곳은 넓은데 저 혼자서는 일손이 부족합니다.”

그녀는 어지간히 성령이 마음에 들었는지 오히려 성령을 지원해 달라고 부탁하고 있었다.

‘앞으로 잘해 줘야겠어.’

더는 하녀가 아니었다.

우리 영매님이었다.

* * *

그럼 이제 열심히 일해 준 로메른에게 보답을 해 줄 시간이었다.

“정보 길드가 어디 있는지 알아?”

“예. 알고 있습니다, 도련님.”

“거기로 갈게.”

“예. 모시겠습니다.”

이제 정보 길드로 갈 차례다.

정보 길드는 그리 먼 곳에 있지 않았다. 중앙광장. 그것도 가장 목이 좋은 자리에 있었다.

‘돈을 잘 버나?’

뭔가 낡은 술집에서 암호를 말하는 걸 생각했는데, 저건 아무리 봐도 다른 상점들과 다를 게 없었다.

‘아니. 다른 점이 있긴 하네.’

다른 상점들은 낡았는데, 정보 길드 건물은 윤이 날 정도였다. 심지어 건물 내부는 더 좋았다.

각종 장식품들과 예술품들이 곳곳에 걸려 있었고, 안에는 손님들로 가득했다.

“도련님, 앉아 계시면 번호표를 뽑아 오겠습니다.”

그야말로 지구의 은행 같은 느낌이었다.

“알겠어. 앉아 있을 테니까 뽑아 와.”

“예, 도련님.”

하녀가 번호표를 뽑으러 간 사이, 진은 적당한 자리에 앉아 로메른과 대화를 나눴다.

“일단 300골드야.”

[알겠어. 내가 원하는 건 고급 정보가 아니야. 300골드면 충분해.]

“서로 도움 되는 정보가 떠오르면 더 써도 되고.”

[아, 그런 게 떠오르면 바로 이야기해 줄게. 나 잠깐 생각 좀 정리할게.]

로메른마저 어떤 질문을 할지 고민에 들어가니, 진은 할 일이 없었다.

‘하여간 이놈의 판타지는 묘한 곳에서 낭만이 없다니까.’

진이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할 때, 안쪽이 분주해졌다. 마치 높은 사람이 나온 것처럼 직원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뭐지?’

분주한 안쪽을 슬쩍 구경하고 있을 때 로메른이 입을 열었다.

[이건 또 뭐야. 정보 팔이 녀석 중에 이만큼 강한 녀석이 있네.]

“얼마나 강하길래?”

[기사단장보다 반수 아래 정도? 하, 지부장이라고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데…….]

“누구 이야기하는 거야?”

그 말과 동시에 진의 앞에 한 사람이 다가왔다.

“이거, 남작가의 도련님을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저희 직원들이 아직 미숙해서 못 알아본 모양입니다. 저쪽 특별실에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진이 그를 바라보자, 로메른이 입을 열었다.

[이놈이야.]

기사단장보다 반수 아래의 강자.

그런 강자가 정보 길드에 있다?

이건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이들에게 힘은 본신의 실력이 아니었다. 정보가 이들의 힘이다. 그런 정보 길드에 ‘강자’는 굉장히 드물고 희귀한 존재다.

“누구시죠?”

“아, 인사를 안 드렸군요. 이곳 플린트 남작령의 정보 길드 지부장. 얀드레입니다.”

이런 강자가 남작령 지부장이다?

이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저 찾아온 거 맞으십니까?”

“예, 맞습니다. 진 도련님. 부디 특별실로 모실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진이 잠시 고민하니, 옆에 있던 로메른이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너한테 흥미를 느끼고 있는 거 같은데? 가자. 대화를 나눠서 나쁠 건 없어 보이네.]

산전수전을 겪은 로메른의 판단이라면 신뢰할 만했다.

진은 이내 결정을 내렸다.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대답이 늦었습니다. 이런 귀한 대접을 해 주시니, 제가 거부할 순 없지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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