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 성령? 노예!?
성령.
지구 쪽에서 사용하는 의미와는 전혀 다르다. 신의 영혼이란 뜻이 아닌, ‘성스러운 영혼’을 뜻한다.
당연히 성령의 존재는 발견하기 어렵다. 애초에 영혼과 신성력이 만나면 영혼이 소멸해 버린다.
“악령이 성령이 되다니…….”
그러니 교구장의 저런 반응도 이해가 되긴 했다.
물론 이 정보는 진이 알고 있던 정보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저 교구장이 난리라 이거야. 이해했어?]
로메른이 옆에서 전해 준 정보였다.
“대체 어떻게!”
교구장은 마치 기적이라도 본 것처럼 성령에 붙어서 관찰하고 있었다. 그건 진도 좀 궁금했다.
“어떻게 한 거야?”
로메른은 애초에 흑마법사였다.
교구장이 생각하는 그런 신성한 방법은 아니었을 게 확실했다.
[간략 버전으로 설명해 줄게.]
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언데드들은 일종의 핵이 있어. 영혼이고 살아 움직이는 시체고 이게 있어야 움직여. 여까진 이해했어?]
동력원이 존재한다. 이 정도로 이해하면 될 거 같았다. 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녀석은 설명을 이어 갔다.
[그 핵에 신성력을 섞었어. 그냥 신성력은 아니었고, 생명력을 섞은 힘이긴 했는데. 아무튼, 그걸 섞으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그다음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짜잔! 성령이 됐습니다!
이딴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말로는 간단해 보이지만, 전혀 간단한 작업이 아니었을 것이다. 다른 이들이라고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흑마법의 주인.’
손발이 오그라드는 이명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말대로였다.
녀석은 흑마법의 지식을 이용해 흑마력도 아닌, 빛의 힘으로 그걸 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괜찮은 거야?”
[얘들? 괜찮아. 내가 예전에 만들었던 것 중에 지옥불 레이스(Wraith)가 있었거든? 걔들의 열화 버전 정도 되겠네.]
레이스가 뭔지는 진도 잘 알고 있었다. 악령에서 한 발 더 나아가면 사령 레이스가 된다.
[내가 열화판도 못 다룰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새삼스럽게 녀석이 대단해 보였다.
[오. 존경의 눈빛 좋아. 그 눈빛 유지하라고.]
유지는 개뿔. 대단하다고 느꼈던 감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렇게 로메른과 은밀히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교구장이 입을 열었다.
“형제님, 이건 정말 대단합니다. 이 성령은 계속 유지되는 겁니까?”
진이 로메른을 바라보자 로메른이 입을 열었다.
[나한테 걸렸는데 평생 노예로 살아야지. 가긴 어딜 가.]
겉보기만 성령이지, 안에 들어간 기술은 흑마법이었다. 이걸 그대로 전할 수 없으니, 말을 좀 바꿔야 했다.
“그건 영혼들의 선택에 달렸다고 합니다.”
“순리대로 영혼의 결정에 맡기는군요. 좋습니다. 너무 좋아서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를 정도입니다.”
대체 이게 뭐라고 이렇게 좋아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교구장에게 이건 기적이나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이곳을 처리했다면, 단순히 더러움을 정화하는 것으로 끝이었을 것이다.
한데, 진은 정화를 넘어 신의 아름다움이 담긴 성령을 만들어 냈다.
“형제님.”
교구장의 부름이 왠지 부담스러웠다. 조금 전 보였던 광기가 얼핏 다시 보이는 기분이었다.
“다음에도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세요. 형제님 일이라면 우선하여 도와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교구장님.”
다행히도 광기가 보인 것과는 달리 그리 나쁜 이야기가 나오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진은 저 교구장이 꺼림칙했다.
‘뭔가 있는데…….’
그게 뭔지 감이 오지 않았다.
‘눈치’로 무언가를 확인했지만, 이런 종류는 처음 느껴 보는 감각이었다.
진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교구장은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이곳은 완전히 정화되었음을 제가 확인했습니다. 사람이 살아도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교구장님.”
“아닙니다. 오늘 형제님께서 행하신 걸 생각하면 제가 감사할 정도입니다.”
어쨌든 마무리는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이뤄졌다. 교구장은 몇 번이나 덕담하곤, 교단으로 돌아갔다.
“이곳에서 사실 건가요?”
“예. 그럴 생각입니다.”
“시간이 있을 때 한번 놀러 오겠습니다.”
이런 불길한 이야기를 하고 헤어지긴 했지만 말이다.
* * *
내부에 귀신이 사라졌다고 해서, 곧장 이사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형. 이젠 저택에서 귀신이 나오지 않을 거야. 교구장님께서도 확인해 주셨어.”
“그게 정말이냐?”
“응. 이 녀석만 안으로 들여보내고 기다리니까 완벽히 해결됐더라고.”
“넌 정말이지…… 언제나 날 놀라게 하는구나.”
형의 표정은 한없이 진지했다.
“그래. 그 집으로 들어갈 생각이냐?”
“어. 귀신도 정리됐고 들어가려고.”
“알겠다. 준비해 주마.”
뭔가 더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 외로 너무 수월하게 허락해 주었다.
진이 놀라서 대공자를 빤히 쳐다보니, 그가 피식 웃었다.
“왜 너무 쉽게 허락해서 놀랐느냐?”
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넌 네가 한 말을 스스로 증명했다. 그러니 나도 너와 한 약속을 지켜야지. 그 집을 네게 주마.”
어? 형님 공짜로요!?
그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그냥 주마. 어차피 소문이 나서 팔리지도 않을 것이다. 혹시라도 다른 귀신이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고. 전문가가 사는 게 맞겠지.”
합리적인 이유로 포장했지만, 결국 공짜로 준다는 소리였다.
“고마워 형. 최고야!”
“흐으으음.”
“형 말대로 다른 귀신 나와도 내가 전부 처리할게. 물론, 얘가 하겠지만! 최고야, 형. 진짜 최고!”
“흐으음.”
진의 말이 대공자의 의욕을 자극했다.
“저번에 구매한 가구들 연락해서 보내 주마.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 전부 옮겨지면 가거라.”
“알겠어! 형!”
마무리까지 완벽하게 해 주는 형님. 어찌 동생이 존경하지 않을 수 있을까.
열일곱 먹고 할 짓은 아니지만, 여기선 팍팍 서비스해 줘야 했다.
“우리 형 최고!”
“흐으으음. 못 들었구나.”
이 양반이 아주 신 났구만!?
진은 모른 척 형의 장난에 어울려 주었다.
“최고야! 형!”
“흐으으음.”
한동안 우리 형이 최고란 소리가 남작가에 울려 퍼졌다.
다음 날.
진은 설레는 마음으로 일어났다. 짐도 싸서 전부 옮겨 놨으니, 몸만 가면 끝이었다.
그렇게 얼마 걸리지 않아 집에 도착하니, 하녀가 집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슬슬 이름 정도는 알아 둘까.’
그녀는 진에게 일이 있을 때마다 전담으로 붙었지만, 남작가를 놓고 보면 어쨌든 여러 하녀 중 한 명일 뿐이었다.
‘뭐, 하녀장 후보긴 했지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제는 식구나 마찬가지였다.
“막내 도련님 오셨습니까?”
“어. 기다리고 있었어?”
“예, 도련님.”
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름을 물었다.
“이제부터는 내 직속이니 이름으로 부를게. 이름이 뭐야?”
“제 이름은 마리아입니다.”
마리아.
한번 들었던 거 같은 그 이름을 속으로 되뇐 뒤, 다시금 입을 열었다.
“마리아, 앞으로 잘 부탁해.”
“아닙니다. 제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집 정리는 끝났어?”
“마무리 청소 중입니다. 정말 죄송하지만, 잠시 밖에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진이 고개를 끄덕이려고 할 때 로메른이 입을 열었다.
[아 지하실에서 할 일 있는데 귀찮게. 해 준다 그래.]
“뭐?”
진이 로메른을 바라보자, 녀석이 곧장 대답했다.
[청소 빨리 끝내 준다고. 어차피 성령들도 어떻게 쓸지 봐야 하잖아?]
“그건 그렇지.”
진은 고개를 끄덕인 뒤 마리아에게 곧장 지시를 내렸다.
“정령술로 도움을 줄게. 잠깐만 기다려 봐.”
“예, 도련님.”
정령술이란 말에도 그녀는 당황하지 않고 잠자코 대답했다.
“로메른.”
[바로 시작한다.]
로메른은 곧장 움직였다.
녀석의 몸에서 성스러운 빛을 뿜는 귀신들이 쏟아져 나왔다.
“흐읍!”
냉정 침착의 대명사였던 마리아가 귀신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
“걱정하지 마. 저 아이가 하는 일이니까.”
“……예, 도련님.”
평소와 같이 말하려고 한 거 같은데, 마리아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귀신을 무서워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잠시 후, 로메른의 몸에서 귀신들이 전부 튀어나오자 로메른은 지시를 내렸다.
[가라, 노예들아.]
진짜 남들이 못 들으니까 다행이지. 빛의 정령이 성령들을 노예로 부르는 걸 누가 들었다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
그런 진의 감상과는 달리, 성령들은 집 안으로 퍼져 나갔다.
“뭐 하는 거야? 청소하는 거 같진 않고.”
[기다려 봐. 청소도 도구가 있어야지.]
“도구?”
덜그럭. 덜그럭.
탁. 덜그럭.
집 안쪽에서 뭔가 소리가 들리더니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세상에.”
진은 감탄성을 터트렸고, 하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각종 청소 도구가 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점은 그 녀석들이 마당으로 나오더니 이내 오와 열을 맞춰 서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눈떠 봐.”
진은 마리아에게 말했다.
“……예, 도련님.”
그녀는 힘겹게 눈을 뜨고 도구들을 바라봤다.
“저들은 그냥 귀신이 아니야. 성령이라 부르는 신성한 영혼들이야. 색을 보면 보일 거야. 사제들이 쓰는 신성력과 비슷하지?”
“예, 도련님.”
진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그녀의 두려움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귀신이 한 기괴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냥 눈앞의 모습을 봐 봐. 신비롭지 않아?”
아기 천사가 청소 도구를 조종해 움직이는 모습은 신비롭고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신비롭습니다.”
“그치? 나도 그렇게 생각해.”
물론 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신비롭기는커녕, 저긴 지옥이었다.
[빨리빨리 안 움직여!? 오와 열 몰라? 딱딱 맞추라고!]
아기 천사는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소리치고 있었고, 그때마다 청소 도구들이 부르르 떨렸다.
[왜? 소멸이라도 할래? 아주 한 번 죽어 보니까 죽는 게 안 무섭지? 똑바로 해!]
덕분에 진도 로메른에게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빨리 마리아에게 붙여 줘야겠어.’
절대 무서워서는 아니었다.
“자, 생각해 봐. 저 친구들이 앞으로 집안일을 도와주겠지?”
“예. 그렇습니다.”
“지금부터 손발을 맞춰 보는 게 어때? 너라면 잘할 거 같은데.”
“해 보겠습니다.”
역시, 붙여 주실 때 냉큼 데려오길 잘했다. 두려움을 완벽히 떨치지 못했는데도 마리아는 자신의 의지로 움직였다.
“로메른. 마리아가 얘들 지휘할 수 있어?”
[당연히 되지, 그러려고 부른 건데. 노예들아. 새로운 감독관이 왔다!]
순식간에 청소 도구들이 하녀 앞에 정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하녀는 뭔가를 다짐한 얼굴로 힘차게 소리쳤다.
“저, 잘 부탁드립니다!”
인사라니.
와 여기서 인사를 하다니.
생각지도 못한 전개였다. 한데, 그런 순한 모습은 잠깐이었다. 그녀의 ‘전문 영역’으로 들어오자, 마리아가 변했다.
“청소는 막무가내로 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의 노고가 헛수고가 되지 않도록 순서대로 해야 합니다.”
로메른이 폭군이었다면, 하녀는 조곤조곤 바른말만 하는 관리관 느낌이었다.
“위에서 아래로. 가장 위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이 정도면 괜찮을 거 같았다.
로메른도 그걸 느꼈는지, 입을 열었다.
[방으로 가 있겠다고 말해.]
지하실 가자더니?
의문이 좀 떠올랐지만, 먼지투성이 지하실을 지금 당장 구경하고 싶진 않았다.
“내 방 청소는 끝났지?”
“예, 도련님.”
“난 거기 있을게. 청소 끝나도 오지 마. 내가 나갈 테니까.”
“예, 도련님. 알겠습니다.”
진은 모든 청소를 하녀에게 짬 때려 둔 뒤, 집 안쪽으로 이동했다.
“지하실을 가자고 하더니?”
[아, 그걸 말 안 해 줬네. 방에서 갈 수 있어. 내가 말한 건 일반 지하실이 아니야.]
일반 지하실이 아니면, 남은 건 하나뿐이었다.
비밀 지하실?
이건 가슴이 설레는 단어였다.
“일반 말고도 다른 게 있어?”
[이쪽엔 비밀 지하실이 있어. 아마 재산을 숨기려고 만든 거 같은데. 여기가 골 때리더라고. 빨리 가자.]
진은 로메른의 안내를 받아 진이 사용하게 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마리아의 말대로 청소가 끝난 깔끔한 방. 형이 사 준 가구가 멋들어지게 배치되어 있었다.
“여기서 갈 수 있다는 거지?”
[어. 잠깐만 기다려 봐.]
로메른은 책장 뒤로 쑥 넘어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기계음이 울렸다.
철컥.
무언가 풀리는 소리가 들리고.
쿠구구궁.
책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곳엔 로망이 있었다.
‘비밀 통로라니!’
로메른은 당당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악령이 생긴 게 이상해서, 저번에 조사해 봤거든? 여기 원혼의 씨앗이 있더라고.]
“원혼의 씨앗?”
[악령을 만드는 씨앗이야. 하여간 따라와 봐. 재밌는 걸 보여 줄 테니까.]
진은 로메른을 따라 비밀 통로 안쪽으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