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 대공자와 함께 플렉스
집을 사는 건 그리 단순한 게 아니었다. 집을 사려면 최우선으로 할 일이 있었다.
허락을 받아야 했다.
“아버지, 저 독립할게요.”
쿠궁.
남작의 집무실에 폭탄이 떨어지고, 아버지의 표정은 괴상망측하게 변했다.
“뭐, 뭐!?”
평소엔 잘 놀라지도 않는 분이신데, 얼마나 놀라셨는지 말까지 더듬으셨다.
“제가 요즘 하고 있는 일 이야기 들으셨어요?”
진이 넌지시 묻자.
“흐음. 그래, 들었다. 한데 골드 몇 푼 벌었다고 벌써 독립을 생각하는 게냐?”
아니, 아버지 아무리 그래도 골드 몇 푼은 아니죠.
우리 윈윈(win-win) 아닙니까?
이 말들이 목 끝까지 나왔지만, 괜히 남작을 자극할 필요가 없었다.
“개인 공간이 필요해요.”
진의 진지한 말에 아버지의 표정 또한 진지해지셨다.
“필요한 이유는 무엇이냐? 정원을 네 텃밭으로 만들고, 네 방도 따로 있는데.”
남작의 말대로였다. 이곳에 진의 개인 공간은 충분했다.
솔직히 말하면, 진의 말은 명분으로 삼기 부족했다. 하지만 여기에 로메른이 추가된다면 그 부족함이 완벽히 채워진다.
“사람이 너무 많아요. 그 덕에 이 아이와 교감하는 게 좀 힘들어요.”
진은 로메른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에 한 가지 설명을 더 덧붙였다.
“어째서 정령사들이 사람이 없는 곳에서 사는지 알겠어요.”
정령사는 다 그렇다고 핑계까지 대면?
“흐으음. 그런 이유가 있었구나.”
남작도 마지못해 납득하게 된다. 자신의 아들을 살려 준 정령. 그 정령과 소통하는 게 힘들어지면 아들이 위험해진다.
“하긴, 생각해 보면 너도 성인이 되었고, 몸도 성해졌으니 독립하는 게 맞긴 하구나.”
남작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지금이 바로 기회였다.
“대신, 남작령을 벗어날 생각은 없어요. 근처에 자리 잡을 거예요.”
그 말에 남작은 깜짝 놀라 진을 바라봤다.
“……도시를 떠나지 않는 게냐?”
진은 절대로 도시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
문명의 중심에서 편하게 살 테다!
“예. 이곳은 고향이잖아요. 전 여기가 좋아요. 너무 번화하지 않아서 자연의 마나도 많구요.”
“허허. 내가 쓸데없는 걱정을 했구나. 네가 이 근처에서 산다면 내가 반대할 게 무엇이 있겠느냐.”
남작은 얼굴에 화색을 띠며 대답했다.
“그럼 독립 허락해 주시는 거예요?”
“그래. 해 보거라.”
물론 한 방에 허락이 떨어질 리 없었다. 우리 아버지가 아들 독립한다는데 그냥 내보내는 조잔한 남자가 아니시다.
“단! 하녀를 데려가거라.”
아버지가 말하는 하녀가 누군진 진도 잘 알고 있었다.
여태껏 그의 수발을 들어 주었던 하녀. 눈치와 센스가 뛰어난 그녀를 말씀하시는 게 확실했다.
“차기 하녀장으로 키우실 아이 아니셨어요? 저한테 보내 주셔도 돼요?”
왜 그렇게 똘똘한가 했더니, 차기 하녀장으로 내정된 아이였다.
“허허. 그거야 릭 녀석이 알아서 하겠지. 나야 걱정 없단다.”
남작은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그 말대로였다.
그건 대공자인 큰형이 걱정할 일이었다.
“네, 알겠어요. 그럼 데려갈게요.”
“그래. 집은 행정청에 가지 말고 네 형에게 말하거라. 그게 빠를 것이다.”
거기다 편의까지?!
“고마워요, 아버지.”
“허허. 녀석도.”
그렇게 독립이 결정됐다.
* * *
진은 곧장 형을 찾아갔다.
형은 오늘도 각종 서류 더미에 파묻혀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형?”
한창 바쁜 와중에도 대공자는 진을 보자마자 얼굴에 미소를 떠올렸다.
“진이구나.”
“바빠?”
“아니다. 아무리 바빠도 진 네 이야기를 들을 시간은 있다.”
형은 괜찮다는 듯 서류를 옆으로 떠밀었다.
그렇다면 사양하지 말고 빠르게 본론으로 들어가는 게 형을 도와주는 일이다.
“형. 아버지께 독립을 허락받았어.”
그 순간 형의 표정이 굳었다.
“……전부.”
“응?”
“전부 설명해 봐라.”
형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다 못해 냉기가 뿜어져 나올 것만 같았다.
진은 그 모습에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진짜 이분들.’
막내라고 싸고도는 게 정말이지 대단했다. 물론 그 수혜를 보는 진이 할 말은 아니었지만.
진은 천천히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했다. 냉기가 뿜어져 나오던 형의 표정의 점점 풀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근처에 있는 집을 구하러 온 게로구나.”
“응. 행정청 가도 되는데, 형한테도 말해 주고 싶었어. 형이 집을 골라 주면 걱정도 덜할 테고. 바쁜데 미안해.”
진이 꾸벅 사과하자, 형이 아니라는 듯 손사래 쳤다.
“아니다. 잘 왔다.”
형은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아하는 눈치였다.
“아우가 힘든 일 있을 때 형을 찾는 건 당연한 일이지.”
그 말을 한 대공자는 자연스럽게 일어나서 외투를 입기 시작했다.
“형?”
진이 놀라서 대공자를 부르자, 대공자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가자. 내가 도와주마.”
아아. 이게 형님의 아우라인가.
정말이지 형님 만세였다.
* * *
대공자와 함께하면서 진은 자신이 얼마나 부족했는지 깨달았다.
‘플렉스도 해 본 놈이 해 보는 거지.’
한 명은 돈을 써 보기는커녕 취업도 못해 보고 죽었고, 한 명은 골방에서 책만 읽다가 죽었다.
둘 다 돈을 써 본 적이 없었다.
‘난 집 하나 사면 플렉스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집을 사는 건 당연한 거고, 그다음이 있었다.
“아이고, 대공자님. 역시 안목이 있으십니다. 이건 명문 귀족가분들이 정말 많이 찾으시는 침대입니다.”
집에 들어갈 가구가 그 시작이었다.
“흐음. 이 정도는 돼야 내 동생이 잘 만하겠지.”
아니. 형님 그게 무슨 소리예요!
본인은 싸구려 침대에서 자면서!
“형이 쓰는 침대보다 좋은 거 아니야?”
침대 하나에 50골드(5,000만 원).
소시민인 진에겐 이해가 되지 않는 금액이었다.
“진. 난 그 침대가 편해서 쓰는 것이다.”
“……어?”
“편하다.”
한없이 진지한 얼굴로 그런 말을 하면, 사람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넌 이게 편할 것이다. 누워 봐라.”
“난 괜찮은데. 이거 좀 너무 비싸.”
“어허. 누워 봐라.”
그런 형의 말은 정답이었다.
확실히 비싼 침대는 뭐가 달라도 달랐다. 마치 몸이 파묻히는 것 같은 감각이 느껴졌다.
“펴, 편한데?”
아아. 이게 플렉스였군요.
그야말로 신세계를 눈뜬 기분이었다. 이렇게 편한 게 있는데 그런 침대에서 잤다니!
억울함마저 들 정도였으니까.
“이걸로 하지.”
“예, 대공자님. 탁월하신 선택이십니다!”
덕분에 가게 주인은 싱글벙글하다 못해 입이 찢어지려고 하고 있었다.
“진. 이걸 아깝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네가 말했듯 난 침대는 싼 걸 쓰지만 의자는 비싼 걸 쓴단다.”
“어? 집무실 의자 비싼 거야?”
“그래.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비싼 의자다. 자신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아는 게 가장 중요하다.”
형의 뜻이 뭔지 알았다.
지금 형은 갑작스럽게 돈을 번 동생에게 골드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려 주고 있었다.
이건 쇼핑이면서, 수업이었다.
배웠으면 바로 써먹어야 하는 법.
“형. 해먹(그물 침대) 하나 사고 싶은데, 이것도 비싼 게 있을까?”
“그렇지. 그것도 반드시 사야지.”
“있습니다요! 명문 귀족가 자제분들이 사냥 나가셔서 쓰시는 해먹이 있습니다.”
“그걸로 줘.”
침대와 해먹은 시작일 뿐이었다.
아직 집에 들어갈 가구는 한참이나 남아 있었다.
“그럼 다른 가구로 넘어가자.”
침대가 제일 비싼 녀석을 구매했다면, 그다음은 조금 달랐다.
“다른 가구는 그다지 비쌀 필요가 없다. 사용하기 편하고 튼튼하면 그만이다.”
형의 수업은 실용적이면서도 효율적이었다.
“내부 인테리어를 어떻게 할지는 전문가에게 맡기거라. 가구 배치는 그들이 해 줄 것이다.”
가구 구매부터 인테리어까지 전부 점검한 다음에야 형과의 쇼핑이 끝났다.
“지금까지 구매한 건 모두 선물이다. 네 독립을 축하한다, 진.”
마지막에 감동까지 준비된 알차디알찬 수업.
애초에 선물해 주려고 집보다 가구 먼저 보러 온 것 같았다.
“형, 정말 고마워. 최고야.”
우리 형 최고 소리가 절로 나오는 쇼핑이었다. 진의 진심 어린 말에, 대공자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흐음, 그래. 그럼 이제 집을 보러가자꾸나.”
저 ‘흐음’ 소리만 들어도 형이 얼마나 좋아하고 있는지 그대로 느껴졌다.
* * *
형과 함께 집을 보러 돌아다니다가, 전혀 의외의 장소에서 괜찮은 집을 발견했다.
[진! 여기야, 여기! 이 집으로 하자!]
다만, 괜찮은 집을 발견한 건 진이 아닌 로메른이었다. 로메른은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드는지 집 주위를 날아다녔다.
“형. 저 집은 뭐야? 저 아이가 너무 좋아하는데.”
“……또 묘한 곳을 선택하는구나.”
그런 형의 말대로 집의 위치는 조금 골 때렸다.
공동묘지에 바짝 붙어 세워진 작은 저택. 마치 공동묘지를 관리하는 사람의 저택 같아 보였다.
“어떻게 공동묘지 바로 옆에 집이 지어진 거야?”
“엄밀히 따지면 공동묘지 옆에 세워진 게 아니다.”
“아니라고?”
아무리 봐도 공동묘지 바로 옆에 세워져 있었다.
진의 의문은 금세 해결됐다.
“공동묘지 일부를 밀어 버리고 집을 지은 것이다.”
“……어? 그럼, 공동묘지 위에 세워졌단 소리야?”
대체 이딴 정신 나간 생각은 누가 하는 것일까.
지구에서도 불길하다고 하는데, 여긴 영혼과 귀신이 몬스터로 실존하는 세계다.
“집엔 누가 살고 있어?”
“없다.”
“집 주인은?”
저택을 보니 꽤 고급스럽게 지어졌다. 불길해서 살지 않는다고 해도 주인이 있을 것이다.
“지금은 남작가의 물건이다.”
“어?”
“헐값에 팔고 떠났다. 이곳에선 못 살겠다고 하더군. 하긴, 저런 짓을 했으니 살 수 있을 리 없지.”
“무슨 일이 있었어?”
“그냥 생각대로의 일이 일어났을 뿐이다.”
생각대로의 일.
판타지에선 그게 굉장히 폭넓다.
“귀신이라도 나타났어?”
진은 웃자고 한 말이었는데.
형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그래.”
이건 뭔가 이상했다.
귀신이 나타난다고 겁에 질려 도망간다?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었다.
“교단은 뭐 하고?”
“집이 지어진 장소가 문제였다. 공동묘지와 너무 가깝게 세워져. 이곳을 정화하면 다른 영혼들의 안식을 방해할 수 있다고 판단해서 교단은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집주인들을 혼냈지.”
교단이 움직이지 않으니, 저쪽에서 취할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이 땅의 주인인 남작가에 집을 팔아 버리고 도망치는 것.
“그럼 교단 측에선 저곳을 그냥 내버려 두기로 한 거야?”
“그렇진 않다. 집 밖으로 귀신들이 나오지 못하게 봉인한 뒤, 매년 제사를 지내 주고 있다.”
한 방에 쓸어버리는 게 아닌, 봉인하고 그 화를 풀어 주는 방법을 채택한 것 같았다.
‘잠깐만! 여기가 봉인되어 있다면? 난 집 밖에 있고, 로메른만 안에 들여보내면 되지 않나?’
로메른이 정리를 하고 난 뒤 들어가면 될 일이었다.
“형. 저 집 내가 해결하면 나한테 팔아 줄 수 있어?”
“네가?”
“응. 내 정령이 저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거 같은데, 난 밖에 있고 혼자 들여보내면 될 거 같아서.”
진은 그 말을 한 뒤 로메른을 바라봤다.
[좋지! 귀신 부대를 만들어 줄게. 무조건 저 집으로 하자!]
진도 저 집이 슬슬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