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작가의 정령 천재-8화 (8/210)

008. 골드가 답이다

로메른이 했던 말은 사실이었다.

그저 일반인의 몸이 되었을 뿐인데, 녀석이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 달라졌다.

[어때, 빠르지?]

이건 단순히 빠르다는 말로 끝날 이야기가 아니었다. 마차는 미칠 듯한 속도로 질주하고 있었다.

너무 빨라서 무서울 정도였다.

“이거 괜찮은 거야?”

[괜찮아. 말들한테 폭주 비슷한 기술을 걸었을 뿐이야. 남작가 돌아가서 며칠 쉬면 괜찮아져.]

폭주. 딱 듣기만 해도 안 괜찮아 보였는데, 녀석은 여유로운 얼굴로 대답했다.

이런 진의 반응과는 달리, 기사들의 표정은 정말 밝았다.

“시간에 맞춰서 들어갈 수 있겠어. 절대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들은 제한 시간이 정해져 있었는지, 말이 미쳐 날뛰는 걸 반겼다.

“빛의 정령이 확실히 대단하긴 해. 이런 엄청난 축복을 내리다니.”

축복이 아니었다. 오히려 흑마법 쪽 저주에 가까웠다.

빛의 정령. 그것도 아기 천사의 모습인 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진이 로메른을 빤히 바라보니, 녀석이 입을 열었다.

[이제 다음에 뭐 할지가 궁금한 거야?]

그런 의미에서 쳐다본 건 아니었는데, 궁금하긴 했다.

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라면 돌아가서도 네 몸을 회복시켰겠지만 그건 끝났으니,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지.]

“다음 단계?”

[골드 좀 벌자.]

“골드?”

이건 좀 뜬금없지 않나?

진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녀석이 설명을 덧붙였다.

[골드 벌면, 내 부탁 하나 들어줘.]

몸을 고쳐 줬고, 골드까지 벌어 줬으니 이제 이쪽에서 일해 달라는 거 같았다.

“……벌써 부탁을 할 줄은 몰랐는데?”

[아, 그런 부탁 아니야. 애초에 나도 기억이 별로 없는데, 벌써부터 뭔가 할 리가 없잖아.]

“그럼?”

[골드 벌면 순수익의 30퍼센트만 나한테 투자해 줘.]

“뭐, 그 정도야 상관없는데, 그걸로 뭐 하려고?”

[정보 좀 사자. 요번에 네 몸이 회복되면서 힘이 약간 증가해서 기억들이 몇 가지 떠올랐어.]

“기억이?”

[뭐, 그래 봐야 파편 같은 기억이라. 정보가 필요해. 제일 약할 때 떠오른 기억이니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거야. 골드로 처바르면 해결되지 않겠어?]

그런 식의 처리라면 오히려 이쪽에서 환영이었다.

진은 귀찮지 않아도 되고, 로메른은 회귀한 목적을 이룰 수 있다.

“좋아. 그럼 30퍼센트는 무조건 빼 둘게.”

[좋은 선택이야.]

* * *

며칠 뒤.

남작가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움직이고 싶었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아버지, 성공했어요. 몸이 정말 많이 좋아졌어요.”

“잘됐구나. 잘됐어. 얼굴만 봐도 얼마나 좋아졌는지 보이는구나.”

“이제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건 아니지.”

“예?”

남작과의 대화가 끝나나 싶었는데, 남자도 남작 나름대로 무언가를 준비해 놨다.

“몸이 좋아진 게 보이지만, 그래도 확실히 확인 한번 해 보자꾸나.”

“확인요?”

그 방법은 정말 간단했다.

잠시 기다리자, 사제 한 분이 남작가에 방문하셨다.

“오랜만입니다, 형제님.”

“사제님 잘 지내셨습니까?”

진에게 축복을 주었던 그 사제가 남작가를 방문했다.

“교구장님께서 직접 와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아닙니다, 남작님. 우리 형제님 일인데 제가 오는 게 맞습니다.”

“하하.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교구장?

진은 깜짝 놀라 사제를 바라봤다. 사제의 얼굴은 정말 젊었다. 많이 쳐줘도 서른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역시, 제 생각대로 제가 교구장인 줄 모르고 계셨군요.”

“예, 몰랐습니다. 교구장님께서 절 안내해 주실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저도 제가 안내를 할 줄은 몰랐습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다 신께서 안배하신 일이 아닐까 싶네요.”

그러고 보니, 축복을 줄지 말지는 신께서 정한다는 말이 있었다.

그때 로메른이 끼어들었다.

[이 동네는 진짜 신기하네. 저번에 기사단장도 괜찮더니. 이 친구도 꽤 쓸 만한데?]

또다. 저번에 기사단장을 만났을 때와 비슷한 반응이다. 그때 진은 밖으로 나와 로메른에게 물었다.

“쓸 만한 게 어느 정도로 강한 거야?”

[나에 비하면 벌레 같은 재능이지만, 인간치고는 괜찮은? 적어도 후작가에서 한 자리 할 만한 인재란 소리야.]

기사단장이야 이유가 있다지만, 저 교구장은 왜 이 남작가에 있는 걸까?

진의 머릿속에 의문이 떠오를 때, 교구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번에 얻으셨다는 정령이 이 아이인가 보군요.”

정령이 아니라 마귀에 가까운 녀석이었지만, 진은 내색하지 않고 대답했다.

“예, 맞습니다. 아마 축복을 해 주셔서 제가 빛의 정령을 소환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건 아닐 겁니다. 축복은 그저 가능성을 열어 드릴 뿐, 개입하지 않습니다. 신께서 모든 것을 사랑하고 아끼시는데, 개입하실 리 있겠습니까.”

그는 그렇게 말한 뒤.

“그럼, 몸을 잠시 확인해 봐도 되겠습니까?”

“예. 잘 부탁드립니다.”

곧이어 신성력이 진의 몸을 휘감았다. 잠시 후, 사제의 눈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허어. 대단하군요.”

“예?”

“기력이 떨어진 것만 보충한다면 이제는 일반인의 몸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 말에 남작이 깜짝 놀라 입을 열었다.

“정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남작님. 앞으로 관리만 잘하시면 될 것 같군요.”

그는 그렇게 말한 뒤, 로메른을 바라봤다.

“그 관리도 저 아이가 붙어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거 같습니다.”

“허허. 이리 쉽게 치료가 되다니…….”

이런 반응은 당연한 일이었다. 남작은 한평생 막내의 병을 고쳐 주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축하할 일이긴 했지만, 한편으론 허무할 정도로 쉽게 치료가 된 것이다.

“아버지께서 절 믿어 주신 덕분이에요.”

“그리 생각해 주니 내가 고맙구나.”

부자간에 훈훈한 이야기가 이어지자.

“전 그럼 가 보겠습니다.”

교구장은 타이밍 맞게 자리를 비켜 주었다.

그 덕에 부자간의 훈훈한 대화가 한동안 이어졌다. 남작은 자신의 가슴속에 있던 큰 돌덩이가 사라진 기분이었다.

* * *

다음 날.

진은 아침부터 부산하게 움직였다. 침대 밑에 있는 작은 상자에서 골드 주머니를 하나 꺼냈다.

“이게 내 전 재산이야.”

[얼마나 되는데?]

진은 확인하기 위해 주머니를 거꾸로 들었다. 주머니에서 금색 동전이 쏟아졌다.

“……나 부자였나 본데?”

이쪽 세계의 화폐는 쿠퍼, 실버, 골드. 세 가지로 나뉘어 있다.

지구식으로 따지면 대략적으로 1쿠퍼가 백 원. 1실버(100쿠퍼)가 만 원. 1골드(100실버)가 백만 원 정도 한다.

[15개나 되는데?]

주머니에 들어 있던 골드가 15개. 1,500만 원이 들어 있었다.

“이 정도면 어때?”

[내 생각보다 더 많은데? 기껏해야 2~3골드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귀족가는 귀족가였다.

“그럼 바로 가자.”

[좋지!]

진은 정령과 함께 방을 나섰다.

방 밖에는 하녀가 대기하고 있었다.

“일어나셨습니까, 도련님.”

“무슨 일이야?”

“남작님께서 도련님을 보필하라고 하셨습니다.”

“밖에 나가고 싶은데, 가능해?”

“예. 남작령을 벗어나는 것만 아니면 전부 도와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혜안인가?

막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하녀를 보내 주셨다.

“좋아. 같이 가자. 시장으로 나갈 거야.”

“예, 도련님. 모시겠습니다.”

진은 하녀와 함께 시장으로 이동했다. 아침부터 시장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어디로 가십니까?”

어딜 갈지는 이미 정해 둔 상태였다.

“연금술 상점으로 갈 거야.”

“예. 모시겠습니다.”

연금술 상점은 시장 안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골목골목을 누빈 끝에, 허름한 연금술 간판이 보였다.

로메른이 간판 쪽으로 날아가, 뭔가를 읽고 왔다.

[여기 괜찮네. 길드의 공식 인정을 받은 가게야.]

“여기가?”

[어. 하여간 이런 변태 같은 놈들이 있어. 돈도 많이 벌면서 허름한 가게에서 영업하는 놈들이.]

로메른의 투덜거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진은 하녀와 함께 가게 안쪽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백발이 성성하고, 수염마저 하얀 노인이 카운터에 앉아 진을 맞이했다.

로메른은 주위를 날아다니며, 구경하며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오. 여기 꽤 쓸 만한 거 같은데?]

진이 보기엔 낡아 빠진 가게였는데, 로메른의 눈에는 뭐가 다른 모양이었다.

아무튼, 마음에 든다고 하니 다행이었다.

[진. 플로나 씨앗 달라고 해.]

진은 고개를 끄덕인 뒤 입을 열었다.

“플로나 씨앗을 구매하고 싶은데.”

“용도가 어떻게 되십니까?”

[키울 거니까 종자로 달라고 해. 연금용으로 작업해 놓은 건 아무리 나라고 해도 못 키워.]

“종자로 부탁할게.”

노인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졌다.

“키울 생각이시군요. 이 녀석에 관해 들어 보신 모양입니다?”

“대충.”

“그럼 얼마나 키우기 힘든지도 아시겠죠? 괜히 인내의 꽃이라 불리는 게 아닙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로메른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걸 키우는 게 골드가 된다는 거지. 키우면 매입해 줄 거냐고 물어봐.]

“씨앗이 개화하면 이쪽에서 매입해 주나?”

“허허. 자신 있으신가 보군요.”

자신? 당연히 있다.

있다 못해 넘친다.

진은 정령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키울 건 아니야. 정령이 키울 거야.”

“호오. 그렇습니까? 그럼 또 이야기가 달라지긴 하는데…….”

노인이 잠시 고민에 빠지자, 로메른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가격 올려 준다고 하면 꽤 실력이 있는 놈일 테고, 헛소리해 대면 다른 상점으로 가자.]

그게 무슨 소린가 싶었는데.

“원래라면 6골드 정도 쳐 드렸겠지만, 정령이 꽃을 개화하면 가격이 좀 달라집니다. 개당 10골드까지 쳐 드리겠습니다.”

6골드가 10골드가 되는 마법.

정령이 키운다는 게 이렇게 대단한 일인가?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로메른을 보니, 나름대로 적정가인 모양이었다.

“길드 인증을 받은 곳으로 오길 잘했네.”

“허허. 그걸 알아보셨습니까?”

진의 말에 노인의 얼굴에 이채가 떠올랐다. 진은 별다른 설명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플로나 씨앗은 얼마나 필요하십니까?”

진은 주머니를 하나 올려 두었다.

“15골드.”

“일단 소량 구매하시는 겁니까?”

소량? 아닌데?

1,500만 원인데?!

여기서 놀란 모습을 보여 줄 순 없었다. 진은 애써 의연하게 대답했다.

“일단 거래 좀 해 보고.”

“허허, 나이도 어리신데 신중하시군요. 혹시, 소문의 막내 도련님이십니까?”

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몸이 좋아지신 모양이군요. 그게 치료가 될 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노인은 치료하기 전 몸이 어땠는지 안다는 듯 말했다.

놀랄 일은 아니다.

남작은 진을 치료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교단과 마탑도 다녔는데, 연금술이라고 예외일 리 없었다.

“이 녀석 덕분에.”

진이 로메른을 가리키자, 그는 로메른을 빤히 바라봤다.

[이 영감탱이 쓸 만한데? 아, 진짜 흑마법 마렵다. 이 영감탱이 리치로 만들어서 제작용 언데드로 처박아 두면 딱인데. 너네 남작가에 대체 뭐가 있길래 쓸 만한 애들이 이렇게 많아?]

오히려 진이 묻고 싶었다.

기사단장, 교구장, 연금술사.

로메른이 쓸 만하다고 부를 만한 강자가 벌써 셋이나 됐다.

진의 기억상으로 이곳은 평범한 남작가였다. 뭔가 대단한 비밀이 숨겨진 곳이 아니었다.

‘골드를 번 다음에 정보 길드를 간다고 했지? 한번 알아봐야겠어.’

고민해 봐야 답도 안 나오는 문제였다. 차라리 전문가를 고용하는 게 현명했다.

진은 다시금 거래에 집중했다.

“키운 다음엔 내가 직접 안 올 거야. 이 아일 보낼게.”

“알겠습니다, 도련님.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여기 씨앗입니다. 원래라면 7개를 드려야 하지만, 첫 거래이시니 1개 더 드렸습니다. 총 8개입니다.”

대충 따져 보면 씨앗 하나당 200만 원이 넘는 가격이었다.

“플로나 씨앗 전용 흙이나 비료는 구매하지 않으십니까? 요번에 꽤 괜찮은 것들이 나왔는데…….”

“됐어. 애초에 내가 키우고 싶어서 산 것도 아니야. 이 아이 때문에 산 거지.”

진이 설명을 끊고 그렇게 말하자 옆에 있던 하녀가 타이밍 좋게 끼어들었다.

“도련님. 다 챙겼습니다.”

“그래. 가자.”

진은 하녀와 함께 연금술 상점을 나왔다.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 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집에 가서 이걸 심어 볼 생각이야. 도와줄 수 있어?”

“물론입니다, 도련님.”

당연한 말이지만, 씨앗을 직접 심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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