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 정령 일한다!
첫 계약이 있고 벌써 3일이란 시간이 지났다. 계약했다고 진의 일과가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그렇다고 진이 게을러서 변한 게 없는 건 아니었다.
[일단 나한테 시간을 좀 줘.]
“도와줄 건?”
[확인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하지 마.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야.]
로메른의 요청이 있었다.
“아, 날씨 좋다.”
해먹(그물 침대)에 누워 따듯한 햇볕을 쬐는 환상적인 생활.
물론 멍하니 쉬면서 넋 놓고 있던 건 아니었다.
‘어떤 타입인지 봐 둬야지.’
진은 누워서 정령을 관찰했다.
아기 천사의 모습은 굉장히 귀여워서 나름대로 보는 맛도 있었다.
그렇게 3일 동안 녀석을 관찰한 결과, 녀석이 어떤 스타일인지 슬슬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진짜 열심히 사네.’
녀석은 진과는 정반대였다.
로메른의 하루는 정말 치열했다.
녀석은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바쁘게 일하는 걸 즐거워하는 것만 같았다.
이건 단순히 짐작이 아니었다.
실제로 진이 로메른에게 물어봤다.
“안 지쳐? 이렇게 쉬지도 않고 일할 줄은 몰랐는데.”
[어? 왜 지쳐? 나 정령인데?]
“어. 그것도 그러네?”
[정신적으로 지치는 걸 말하는 거면, 흑마도의 끝을 봤던 나한테 그건 실례인 거 알지?]
“그것도 그러네. 미안.”
진이 곧장 사과를 하니 녀석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됐어. 모르고 한 말인 거 알아. 아무튼 걱정할 거 없어. 나름 재미도 있고.]
“재미가 있어?”
진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흑마법을 빛의 정령의 힘으로 구현하는 건데, 이게 재미없을 리가 없잖아?]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진은 무엇을 간과했는지 깨달았다.
‘마법사.’
연구에 미친 자들.
흑마법의 끝에 도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연구를 했을까?
‘애초에 그게 재밌지 않으면 못 견디겠지.’
어중간한 마법사도 아니고, 나름대로 끝을 봤다고 말할 정도의 마법사였다.
“겉모습 때문에 내가 자꾸 헷갈리는 거 같네. 오케이. 이해했어.”
[확실히 이해가 빠르다니까. 아무튼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니까 최선을 다해서 가만히 있어.]
그거야 자신 있지!
최선을 다해 쉬면 될 일이다.
한 명은 아무것도 안 하며.
한 명은 치열하게 살며.
그렇게 행복한 3일을 보냈다.
* * *
다음 날.
로메른은 해먹에 누워 반쯤 잠들어 있던 진을 깨웠다.
[진, 일어나 봐.]
“……어?”
[허락이 필요한 일이 있어.]
“허락?”
진은 몽롱한 정신을 일깨우며 물었다.
[네 몸을 고치려면 일단 상태부터 파악해야 하는 거 알지?]
“그렇지?”
문제는 그 방법이 이곳에는 없다는 것이었다.
지구처럼 CT가 있나 X-ray가 있나. 그저 신성력과 마나뿐이었다.
[외부에서 파악할 방법을 생각해 봤는데, 내가 너무 어렵게 생각했더라고. 더 쉬운 방법이 있어.]
“쉬운 방법?”
녀석은 정말 놀라운 방법을 생각해 냈다.
[정령의 육체는 속성 마나로 이뤄진 거 알지?]
“……대충은.”
[그래. 그 정도만 알면 충분해. 마나는 물질을 통과할 수 있는 것도 알아?]
“아, 그건 알아.”
[그거야, 내가 네 몸에 직접 들어가서 확인해 볼게.]
잠깐만.
그러니까 정령이 몸속으로 들어온다? 몸의 문제를 확인하기 위해?
‘개쩔잖아.’
이러면 CT가 필요 없었다.
게다가 저쪽은 전문가다.
시체를 해부하고 연구하는 건 흑마법사뿐이다. 이들만큼 육체에 관해 잘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오, 기발한데?”
[……이해한 거야?]
“뭐, 어려운 것도 아니잖아. 몸의 문제를 안에 들어와서 눈으로 확인하겠다는 거 아니야?”
[그건 그런데……. 너 진짜 이해가 빠르구나? 게다가 바로 믿고 맡겨 줄지도 몰랐는데?]
지구식 관점이 아닌, 이곳 대륙적 관점으로 접근하면 녀석의 말이 이해된다.
흑마법사였던 정령이 몸속에 들어온다? 쉽게 허락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처럼 인체 전문가란 생각도 못하겠지.’
핍박받지 않은 거지, 그들이 사람들에게 친근한 이미지는 아니었다.
“난 오히려 정반대로 생각하는데? 이 대륙에 흑마법사만큼 육체 전문가가 있어? 게다가 넌 그 끝을 본 최고의 흑마법사잖아.”
[이해만 빠른 게 아니네. 등신들처럼 선입견도 없잖아? 역시! 너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들었다니까.]
녀석은 기분이 좋은지 웃음을 터트렸다.
[좋아. 그럼 허락한 거지?]
괜찮다고 말한 거 같은데도, 녀석은 허락했다는 말이 필요하다는 것처럼 말했다.
“근데, 이게 허락이 필요한 일이야?”
[정령은 정령사의 몸에 함부로 개입할 수 없어. 허락이 있어야 비로소 개입할 수 있어.]
이건 또 몰랐던 정보다.
‘정령은 절대 정령사를 공격할 수 없다더니, 이런 게 있었네.’
녀석이 괜히 허락을 받으려고 했던 게 아니었다.
‘하긴, 굳이 물어보는 게 이상하긴 했지.’
진이 지금까지 지켜본 로메른은 간단한 길을 내버려 두고 굳이 돌아갈 타입이 아니었다.
“그래. 허락할게.”
[오케이! 진짜 제대로 봐 줄게.]
녀석은 그 말을 하곤, 쏜살같이 진의 몸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최대한 움직이지 마. 긴장하지 말고 지금처럼 편안히 누워 있기만 해.]
몸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좀 신기했다. 게다가 신기한 건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마치 핫팩을 댄 것처럼 몸 한쪽에서 뜨끈한 감각이 느껴졌다.
‘오, 이건 좀 신기한데?’
마나를 느끼면 이런 기분인가?
지금까지 느껴 보지 못한 낯선 감각이었다.
그렇게 그 감각에 집중하고 있을 때, 조금씩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곧이어 녀석은 뭔가를 확인했는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와. 몸이 아주 썩었네, 썩었어.]
“그렇게 안 좋아?”
[어. 좀비로도 안 써먹을 몸뚱이야. 정말 최악이야.]
녀석의 독설은 이제 시작이었다.
[뼈의 균형도 안 맞고, 근육은 거의 발달을 안 했고, 얼씨구, 장기들 상태는 더 심각하네?]
[혈관은 또 왜 이래? 완전 개판이네? 도대체 이 찌꺼기들은 뭐야. 더러운 건 아닌데…….]
[야. 이딴 심장 가지고 용케 살아 있다? 뭐 마법 폭격 맞았어?]
그렇게 한참을 독설을 듣고 있다가, 진이 입을 열었다.
“회생 불능 이런 건 아니지?”
[회생은 무슨. 이딴 건 회생할 가치도 없어. 단순히 회복시켜 봐야 아무런 의미도 없어.]
녀석의 말을 요약하면, 버리고 새로 사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진도 그러고 싶었지만, 아무리 판타지라고 해도 몸을 파는 상점은 없다.
“방법은 있어?”
[완전히 뜯어고쳐야 돼. 난 몇 가지만 손보면 되는 줄 알았더니, 이건 대공사잖아?]
치료도 아니었다.
녀석은 공사라고 표현했다.
물론 진은 그런 표현보다는 다른 것에 집중했다.
“치료가 된다는 거야?”
[당연하지. 내가 흑마법의 끝을 본 사람이야. 치료는 물론이고, 육체도 최상급으로 만들어 줄 수 있어.]
뭔가 메드 사이언티스트 같은 말이었지만, 진에겐 더없이 든든했다.
[좋아. 확인 끝났어.]
녀석은 그 말을 한 뒤 진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치료는 어떻게 할 거야?”
[일단 몇 가지가 필요해.]
당연한 일이었다. 신성력을 퍼붓고 온갖 약을 먹어도 회복하지 못한 몸이다.
선천적으로 문제 있는 몸을 고치는 건데 아무것도 없이 가능할 거라 생각지 않았다.
“말만 해. 그래도 여기 귀족가야. 지원해 줄 수 있는 건 다 해 줄게.”
[일단 지도가 필요해.]
지도? 갑자기?
진이 의아한 얼굴로 로메른을 바라보자 녀석이 입을 열었다.
[네 몸을 회복시키려면 재료가 필요해.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재료는 하나뿐이야. ‘자연의 마나’ 알지?]
“정령사가 사용하는 마나잖아. 알고 있어.”
[자연의 마나는 일반적인 마나와는 달리, 마석 같은 것도 없어. 그러니까 직접 가서 얻어야 한다는 거야.]
자연의 마나. 이건 말 그대로 자연에 있는 마나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들자, 진은 녀석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남작가를 벗어나자는 거야?”
[당연하지. 여기에 처박혀 있으면 치료 속도보다 악화 속도가 더 빠를걸?]
그건 문제였다.
진이 세상만사 다 귀찮아 하지만, 귀찮다고 죽을 순 없는 일이다.
유유자적 살고 싶은 거지, 말라 죽고 싶은 건 절대 아니었다.
“지도라 그랬지? 남작가 지도면 돼?”
[충분해.]
진은 지나가는 하녀에게 지도를 하나 부탁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지도를 가져왔다.
“이 정도면 돼?”
[충분해.]
녀석은 지도를 빠르게 살펴봤다.
[자연의 마나가 어디에 많은진 알지?]
“자연에?”
[뭐, 틀린 대답은 아니야. 그중에 확실한 곳은 산이야.]
“산?”
[그래. 자연의 마나가 쌓이고, 쌓이다 보면 영기(靈氣)가 돼. 대부분의 정령사들이 왜 산에 처박히는지 알아?]
“설마, 그 영기 때문이야?”
[맞아. 정령사들은 영기가 모인 곳에서 살면서 몇 년에 걸쳐 천천히 흡수해.]
몇 년이란 시간은 너무나 길었다. 그건 로메른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가 누구야?]
“어둠의 지배자!”
[그렇지! 흑마법의 묘리를 섞으면 강제로 집어삼키는 건 가능할 거야.]
“오. 대박인데?”
[물론 산이 작아서 영기가 얼마 되지 않을 거라 만족할 만큼 흡수할 순 없겠지만.]
녀석은 그렇게 말한 뒤.
[그래도 웬만한 정령사가 10년은 수련한 만큼은 흡수할 수 있을걸?]
남들이 10년을 수련해야 얻을 걸 진은 빠르게 얻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자 진도 욕심이 들었다.
“영기가 많이 모이는 산 같은 곳은 없어?”
[있어. 생각 같아선 그런 곳을 가고 싶은데, 그런 곳은 몬스터도 있고 험준해서 체력도 필요해. 가고 싶어도 지금은 못 가. 괜히 갔다가 너 죽으면 다 끝장나는 거야.]
물론 그 욕심은 빠르게 사그라졌다. 로메른의 말처럼, 죽으면 모든 게 끝이었다.
진의 욕심은 목숨을 걸 만큼 크지 않았다.
[남작가에 산이 7개는 되네. 여기만 한 바퀴 돌아도 일단 일반인만큼은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
“오오!”
일반인만큼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전혀 아니었다.
무려 흑마법의 끝을 본 사람이 쓰레기 같은 몸뚱이라고 했다. 그게 보통까지 올라가는 것이다.
그 성장 폭을 그래프로 볼 수 있다면 수직 상승일 것이다.
[나머진 네가 해야 돼.]
“허락받아 오라 이거지?”
[역시 빠르다니까. 뭐가 필요한지 딱딱 알아.]
아이고, 선생님만 하려고요.
이 정도야 몸이 회복되는 것에 비하면 귀찮은 것도 아니다.
누워 있던 진이 몸을 일으켰다.
* * *
빙의하기 전, 진은 지구에서 지옥 같은 삶을 살았다.
정말 괴롭고 괴로운 인생이었지만, 얻은 게 하나도 없는 건 아니었다.
눈치와 상황 파악.
이 두 가지가 살아남기 위해 굉장히 발달했다. 로메른이 이해가 빠르다고 하는 건 이 때문이었다.
그 눈치와 상황 파악이 지금도 여지없이 발동되고 있었다.
‘아픈 아들이 갑자기 산을 가고 싶다고 하면 허락할 부모가 없지.’
그러니 접근 방법을 달리해야 했다.
“아버지, 치료 방법을 찾았어요.”
산을 가는 것보다 다른 것을 먼저 보여 드리는 것이다.
“오! 정말인 게냐?!”
남작이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그가 얼마나 기뻐하는지 그대로 느껴질 정도였다.
“어떻게, 어떻게 그 방법을 찾은 게냐.”
지금부터가 중요했다.
“아버지께서 능력 검사를 받아 보라고 해 주셔서 이런 기회를 얻을 수 있었어요. 이 아이가 알고 있더라구요.”
진은 로메른을 가리키며 말했다.
속은 어떨지 몰라도 겉보기엔 아기 천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정말인 게냐?”
“예. 그래서 아버지께 부탁이 있어요. 치료를 위해서 절 조금만 도와주셨으면 해요.”
“말하거라, 내 무엇이든 도와주마!”
협상은 벌써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