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 재능의 개화
마법사를 만난 뒤, 하녀와 함께 교단으로 이동했다.
남작령에 위치한 교구.
작긴 하지만 정식 교구장까지 와 있는 곳이었다.
기억대로라면 이쪽 사제들은 지구의 ‘가톨릭’ 사제들과 비슷했다.
‘정말 신기하다니까.’
판타지 세상의 사제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뭔가 부패하고 타락한 모습이다. 한데, 이쪽은 귀족은 물론이고 평민들까지 인정할 정도로 신실한 사제의 모습에 가까웠다.
말 그대로 ‘신을 모시는 자’라는 이미지가 박혀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하녀와 함께 간 교단은 생각대로였다. 뭔가 신성해 보이는 새하얀 건물과 경건한 분위기.
게다가 사제들이 입고 있는 옷은 묘하게 낯이 익었다.
‘마치 수단 같네.’
지구의 가톨릭 사제들이 입는 검은색 사제복 수단. 그 옷과 굉장히 비슷했다.
“안내는 저희가 하겠습니다, 자매님.”
“예. 저희 막내 도련님 잘 부탁드립니다, 사제님.”
“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부까지 하녀가 안내하는 게 아닌 모양인 듯 하녀는 잘 부탁한다고 거듭 이야기했다.
“도련님, 전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알겠어. 다녀올게.”
진은 하녀를 내버려 두고, 교단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방문인데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귀족인 진이 취하기에는 필요 이상의 예의였다. 안내를 맡은 사제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그리 과한 예는 보이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도련님.”
정말 괜찮을까?
아니, 괜찮지 않다.
머릿속의 지식은 전혀 괜찮지 않다고 맹렬하게 알려 주고 있었다.
‘밖에서면 몰라도 교단 내부에서는 아니지.’
진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밖이면 모르겠지만, 이곳은 신성한 분의 영토. 그분 앞에서는 모든 존재가 평등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신학을 알고 계시는 형제님이셨군요.”
어느새 도련님에서 형제님으로 호칭이 변했다.
“제가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 그분께 많은 신세를 졌습니다. 전 염치없는 자가 아닙니다.”
“그분의 은혜는 드높으며, 모든 이를 사랑하시니 신세라 생각지 않으셔도 됩니다, 형제님.”
어느새 사제의 얼굴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그 은혜와 감사함을 잊고 싶지는 않습니다. 제 가슴속에 간직하겠습니다.”
이건 단순한 감사 인사가 아니었다. 진의 말은 성서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었다.
“휘안 제14장 3절에 나오는 말씀이군요. 이리 신앙심이 깊으신 형제님인지 제가 몰랐습니다.”
그 덕분인지 호감도가 쭉쭉 올라가는 게 보였다.
‘진짜 이 녀석은 별걸 다 알고 있네.’
원래 육체가 지니고 있던 지식이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고통은 탈출구를 찾기 마련이다.
신이 실존하는 이 세상에서 신앙에 매진하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다.
‘뭐, 중간에 때려치운 거 같긴 하지만.’
사제의 치유로도 차도가 없으니, 점점 성서를 찾아보지 않게 됐다. 하지만 지금은 그 정도만 돼도 충분했다.
“형제님, 좀 더 다양한 곳을 견학시켜 드리고 싶은데, 시간 괜찮으십니까?”
사제의 호감은 중간에 때려치운 지식으로도 충분히 살 수 있었다.
“예, 사제님.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형제님. 오랜만에 신실한 분을 만나 제가 더 즐거운 기분입니다.”
그렇게 교단 견학이 시작됐다.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마치 마법사의 연구소 같은 곳이었다.
“여기는 성서 연구실입니다. 저희는 하루에 최소 6시간을 이곳에서 보냅니다.”
“성서를 해석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이 성서는 참으로 신비로운 것이 100명이 보면 100명의 감상이 나타납니다. 개인의 신앙을 쌓는 겁니다.”
정확히 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략적으로 설명하면 마법사가 연구하듯 매일 정해진 시간에 성서를 해석한다는 거 같았다.
‘와 빡세네.’
사제야말로 꿀 빨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더 최악은 그다음이었다.
“이곳은 정화실입니다.”
“정화실요?”
“저희는 신을 모시는 자이지만, 인간입니다. 나쁜 생각이 때때로 떠오르면 이곳에서 그 나쁜 생각을 씻어 냅니다.”
“사념을 제거한다는 말씀입니까?”
“바로 그렇습니다. 저희는 그걸 마(魔)가 깃들었다고 합니다.”
욕망을 제거하는 신비로운 공간.
방법을 물어보고 싶었지만, 물어보지 않아도 대충 알 것 같았다.
정화실 내부에서 묘한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철썩. 철썩.
뭔가를 때리는 소리와 함께.
“신이시여. 악한 생각을 하는 저를 벌하소서!”
처절한 사제의 목소리가 조용히 흘러나왔다.
‘이거 자해(自害)실이잖아!’
이쯤 되면 사제들이 무서울 정도였다. 사제들이 괜히 검은 옷을 입는 게 아니었다.
흰색 옷을 입었다면 정화실을 다녀오며 새빨갛게 물들 것이다. 검은색이니 그게 티가 나지 않는 것이다.
‘왠지 이 양반 등 쪽에도 얼룩이 있는 거 같기도 하고.’
저 온화한 미소를 짓기 위해선 사념을 씻어 내고 씻어 냈을 것이다.
‘세상에……. 꿀은 무슨.’
이들은 기사들이 수련하듯 고행 그 자체를 하며 심신을 단련하고 있었다.
‘사제는 최악 중의 최악이야.’
마법사와 기사의 끔찍한 점을 하나로 합쳐 놓았다. 게다가 사제는 부패하는 것을 막기 위해 결혼도 금지되어 있다.
‘이러니 모두의 존경을 받지!’
그렇게 사제와 함께 교단 구석구석을 다 돌아본 뒤,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오늘 너무 값진 시간이었습니다. 그분을 모시는 분들이 이토록 순수할 수 있는 이유를 알았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다행입니다. 오늘 함께해 주신 공자님께 작은 축복을 해 드리고 싶은데, 괜찮으십니까?”
축복!? 진짜로?!
진은 표정을 숨기지 못할 정도로 깜짝 놀랐다.
사제의 축복은 정말 특별하다.
“저에게 축복을 내려 주셔도 괜찮겠습니까?”
“이리도 신실하신 형제님께 축복을 해 드리지 않는다면, 누구에게 축복을 해 주겠습니까. 게다가 그분께서 선택하신 거니 부담 갖지 말고 받으시면 됩니다.”
그분? 신?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지만, 일단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무려 축복이었다.
일단 이것부터 받아야 했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사제는 진의 앞에 무릎을 꿇은 뒤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는 마치 마법사처럼 주문을 외는 것 같기도 했고, 신께 기도를 바치는 사제 같기도 했다.
“보다 더 나은 미래를 허락해 주시길. 블래스(Bless).”
그가 입고 있는 검은 수단(사제복)과는 정반대의 새하얀 빛이 진의 몸을 감쌌다.
그 기분은 정말이지 신기했다.
‘햇빛에 안긴 것만 같아.’
마치 따듯한 햇살이 자신을 포근히 안은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속지 않는다. 사제는 그 무엇보다 힘든 직업이야.’
축복을 얻은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 * *
깊은 저녁.
진을 안내했던 하녀는 남작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보고드립니다.”
“오늘 있었던 일을 소상히 말해라.”
진을 부탁한 건 대공자지만, 이 모든 일은 남작이 지원해 준 것이다.
기사나 마법사는 몰라도 교단까지 방문할 수 있는데, 이게 대공자의 힘으로 될 리가 없었다.
그건 진도 잘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막내 도련님께서 기분 전환을 위해 그런 요청을 하신 줄 알았습니다.”
“아니란 말인가?”
“그분께선 마치 무언가를 더듬어 가며 생각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흐음.”
남작은 잠시 고민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제 형들을 생각한 모양이군.”
남작은 묘한 오해를 하기 시작했다.
“첫째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다 자기 꿈을 찾아 떠났으니. 그게 부러웠던 게야.”
남작이 이런 오해를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검을 수련하러 간 둘째.
마법을 수련하러 간 셋째.
신을 모시러 간 넷째.
모두 제각기 꿈을 찾아 떠나고, 남아 있는 건 남작령을 책임질 든든한 첫째와 아픈 손가락인 막내였다.
“그래. 그 아이는 좋아하던가?”
“처음엔 호기심을 보이셨는데, 이내 고개를 저으셨습니다. 마치 하나씩 포기하시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렇겠지. 몸이 약하니 전부 힘들었을 게야.”
기사는 물론이고 마법사와 사제 또한 체력이 필요했다.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지금 몸으론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만약에 체력이 된다고 해도 전부 ‘재능’이 필요했다.
“후. 녀석이 상처받지 않았나 걱정이군.”
“그렇지는 않은 거 같았습니다. 막내 도련님의 눈은 포기하고 절망한 빛이 아니었습니다.”
남작은 하녀의 말을 위로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위로하고자 한 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오늘 놀라운 것을 목격했다.
“그냥 드리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교단에서 좀 다른 일이 있었습니다.”
“교단에서?”
“예. 오늘 안내를 맡아 주신 분은 이번에 새로 오신 교구장님이셨습니다.”
“그분이 직접 안내를 해 줬나?”
“예. 그렇습니다.”
귀족가 막내를 위해 교구장이 직접 움직인다?
그건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물론 이건 오해였다.
교구에 사람이 부족하다 보니 우연히 교구장이 안내를 맡은 것일 뿐이지만, 둘은 그걸 몰랐다.
오해가 점점 깊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원래 예정 시간보다 30분이나 늦게 나오셨습니다. 뭔가 교구장님과 대화를 하신 것 같습니다.”
“30분이나 늦게 나오다니.”
한 번 오해가 시작되자 오해는 점점 깊어지기 시작했다.
“정말 놀라운 건 막내 도련님께서 축복을 받으셨습니다.”
“축복을? 누구에게?”
“교구장님께서 직접 해 주셨다고 했습니다.”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사제의 축복은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의 막내가 아플 때 축복을 해 줄 수 없겠냐고 교단에 몇 번이나 요청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돌아온 대답은 한결같았다.
축복 여부는 신께서 결정하신다.
남작의 작위가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이건 왕이라 해도 달라질 게 없었다.
‘축복’은 그런 것이다.
귀하디귀하며 어떤 조건을 만족해야 받는지 그 누구도 모른다.
그저 신이 선택한다는 말만 떠돌 뿐이었다. 그러니 진이 그리 놀란 것이었다.
“천운이 따랐구나. 어쩌면 신께서 내 아이를 살려 주시려는 생각일지도 모르겠구나.”
축복의 효과는 심플했다.
재능의 개화(開花).
“어떤 재능을 개화했을진 모르겠지만, 만약 마나를 다루는 재능을 개화했다면…….”
마나의 힘으로 기사는 더없이 강한 육체를 얻고, 마법사는 이적을 발휘한다.
그 외에도 이 대륙엔 수많은 활용법이 존재한다. 저 아이의 몸을 치료할 방법이나 하다못해 몸을 개선할 방법이라도 찾을지 모를 일이었다.
“내일 진이 일어나면 날 보러 오라고 전하거라.”
“예, 남작님.”
남작의 얼굴에 희망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 * *
다음 날 아침.
진은 일어나자마자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막내 도련님. 일어나셨습니까?”
“어. 일어났어.”
저 하녀가 왜 왔는지 잘 알고 있었다.
‘축복에 관한 이야기를 아버지한테 전달했나 보네.’
어제 교단을 나와 진은 하녀에게 축복을 받았다는 걸 넌지시 흘렸다.
‘축복을 받았으면 당연히 무슨 재능을 개화했는지 확인해야지.’
남작한테 알린다고 어떻게 재능을 확인할 수 있을까 싶지만, 머릿속 정보가 가능하다는 걸 알려 줬다.
“남작님께서 부르십니다.”
“알겠어. 준비하고 갈게.”
재능을 확인하러 갈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