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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 아아, 판타지여!
초등학교 6년간 전교 1등.
중학교 3년간 전교 1등.
고등학교 3년간 전교 1등.
최고의 명문 한국대 수석 입학.
군대 가기 전 2년 동안 과탑.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1등을 놓치지 않은 인생. 이 인생은 그가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왔는지를 증명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이런 노력을 깔보고 그저 재능으로 치부하거나 머리가 좋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꾸준히 1등을 하는 건, 단순히 머리만 좋다고 가능한 일이 아니다.
지독해야 한다.
지독하게 파고들고, 반복에 반복을 거듭해서 실수를 줄여 나가야 한다. 지식을 습득해서 활용한다기보다는 문제를 풀 때 실수를 줄이는 데 익숙해지는 것이다.
이 과정은 뛰어난 재능과 머리를 가진 사람이 하기엔 너무 지루하고 답답한 작업이다.
그는 이 답답한 시간을 인내하고 버텨서 지금까지 1등으로 살아온 것이다.
그럼, 이렇게 살아온 사람은 행복한 인생을 맞이했을까?
그가 최선을 다해 노력한 하루하루를 생각하면 행복해야 하지만,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왔다.
원룸에 처박혀 공부만 하던 청년은 ‘급성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화려한 이력을 써먹기도 전에.
고생을 보상받기도 전에.
그렇게 어처구니없게 사망했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는 전혀 다른 장소에서 깨어났다. 그것도 상상도 하지 못했던 장소에서.
* * *
작지만 관리가 잘된 정원.
한 청년이 그물 침대 위에 누워 있다.
따듯한 햇살과 기분 좋게 부는 바람. 거기에 정원의 향긋한 꽃 냄새까지.
‘이게 천국이지.’
그의 얼굴엔 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4일 전 처음 깨어났을 때 정말 깜짝 놀랐는데…….’
허무하게 죽은 뒤 어딘지 모를 곳에서 깨어났으니 당황하는 게 당연했다.
‘일종의 빙의라고 생각해야 하나?’
그는 죽은 뒤, 죽다 살아난 17살 청년의 몸으로 깨어났다.
‘그것도 귀족가 도련님으로!’
남작 가문이긴 해도 나름대로 귀족 가문이었다.
중세 시대, 귀족.
이 두 가지는 현대 사회를 살던 그에겐 조금 뜬금없는 요소였지만, 그보다 놀라운 게 있었다.
‘판타지 세상.’
검과 마법.
몬스터들과 이종족.
그야말로 판타지 세상이었다.
‘몸의 기억을 받을 수 있는 게 정말 다행이었어.’
안 그랬으면 적응한다고 고생만 죽어라 했을 것이다.
다행인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여러 가지 지식도 풍부해.’
원래 주인이었던 ‘진 플린트’.
그는 병약한 사람이었다.
남작가 밖으로는 나가지도 못할 정도로 약한 몸인 덕분에, 한평생 책만 보며 유유자적 살아왔다.
‘엄밀히 따지면 강제로 유유자적 산 거긴 하지만.’
아무튼, 그 덕에 책을 보고 배운 여러 가지 정보가 머릿속에 담겨 있었다.
고루한 왕국의 역사부터, 아이들이 볼 법한 동화 속 이야기까지.
폭넓은 지식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특별히 뭘 공부할 필요도 없고.’
그 덕에 그는 뭔가를 배우거나 할 필요가 없었다.
‘병약 미청년인 것도 마음에 들고.’
몸 상태가 안 좋다고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지금 몸 상태는 일반인과 똑같다곤 할 수 없지만, 원래 주인이 있을 때보다 훨씬 좋은 상태였다.
‘아마 원래 주인이 죽을 때 뭔가 있었던 거 같은데.’
원래 이 몸의 주인은 심장에 큰 충격을 받고 죽었다. 그게 머리에 남은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렇게 원래 주인이 죽고 잠시 심장이 멈췄을 때, 지구에서 죽은 그가 이 몸에 들어왔다.
‘깨어났을 때 제일 먼저 느낀 게, 가슴이 뻥 뚫린 기분이었으니까.’
그 뒤부터 몸은 전과 확연히 달라졌다.
원래 있던 통증이 사라지고, 몸을 조금만 움직이면 숨 쉬기 힘들던 증상도 사라졌다.
‘병약한 이미지는 그대로지만.’
물론, 이 사실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숨긴 뒤 꿀을 쪽쪽 빨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누워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진.”
이제는 진이 된 그가 눈을 뜨고,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봤다.
“형?”
“그래, 형이다.”
남작가의 대공자이며, 그의 형.
‘릭 플린트’.
그의 눈에는 동생을 향한 걱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후계자 수업으로 바쁠 텐데, 나 보러 온 거야?”
“잠깐 시간이 남아서 겸사겸사 나왔을 뿐이다.”
그 말을 들은 진은 웃음이 나올 거 같았다.
‘거짓말 진짜 못해.’
티가 나도 너무 났다. 딱 봐도 걱정이 돼서 나온 게 그대로 보였다. 불과 2주 전에 한 번 쓰러졌던 동생이니 걱정하고 있는 게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진은 웃음을 참으며 대답했다.
“날씨가 좋아서 나왔어.”
“밖에까지 나온 걸 보니 몸은 많이 좋아진 모양이군. 다행이다.”
진의 말에 그는 얼굴에 미소를 띤 채 대답했다.
“응. 많이 좋아졌어.”
“그래. 네가 노력하는 모습을 보니 좋구나. 힘들겠지만 앞으로도 조금씩 움직여 봐라.”
병약한 이미지를 계속 유지하는 건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전생과는 달리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 않아도 됐다. 이 이미지만 있다면 치열하게 살 필요도 없었다.
‘밖에 나와서 햇볕만 쫴도 칭찬받는 인생이라니.’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진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보기로 했다.
“형. 나 부탁이 하나 있는데.”
“부탁?”
대공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의 동생이 뭔가를 부탁하는 건 정말 오랜만에 있는 일이었다.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다 들어주마.”
“이곳저곳 다녀 보고 싶은데, 사람을 한 명만 붙여 줄 수 있을까?”
“붙여 주마. 어디든 보내 주마.”
왕국 수도를 구경하고 싶다고 해도 보내 줄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물론, 그런 곳을 갈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먼 곳을 갈 생각은 아니야 형. 근처를 둘러보고 싶어서.”
기왕 판타지 세계에 왔다면, 판타지의 꽃. 기사, 마법사, 사제는 봐야 하지 않을까?
벌써 가슴이 두근거렸다.
* * *
다음 날.
대공자는 모든 준비를 끝내고, 진에게 사람을 보내 주었다.
‘우리 형’ 소리가 절로 나왔다.
“오늘 안내를 맡게 된 하녀 마리아라고 합니다.”
“잘 부탁해.”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대충 인사를 한 뒤, 진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어디부터 갈 거야?”
“제일 가까운 곳에 있는 기사들 먼저 보시겠습니까?”
“그래, 가자.”
은빛 갑옷! 근육질의 기사!
뭔가 판타지의 로망이 무럭무럭 샘솟는 주제였다.
하나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하녀와 함께 연무장을 찾아갔을 땐, 냉혹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흙먼지로 뒤덮인 은빛 갑옷.
땀에 전 머리와 얼굴.
물론 그런 냉혹한 현실만 있는 건 아니었다.
‘멋진데?’
지구식 웨이트로는 만들 수 없을 것만 같은 멋진 근육과 남자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분위기는 멋졌다.
단, 직접 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검 끝이 흔들린다! 그따위로 할 거야!?”
“똑바로 하겠습니다!”
“호흡을 맞춰라! 전력을 담아라!”
“예! 알겠습니다!”
이곳은 PTSD를 유발하는 장소였다. 지구에 있을 때 군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하긴, 엄밀히 따지면 기사도 군인이지.’
일사불란하게 검을 휘두르는 기사들은 보기엔 멋졌지만, 저 수련을 죽을 때까지 해야 한다면?
‘수련도 끔찍하고.’
단체 생활, 그것도 군인 생활을 평생 해야 한다면?
‘그건 더 끔찍하네.’
진이 상념에 젖어 있을 때, 같이 온 하녀가 입을 열었다.
“제가 들은 게 있는데 설명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형이 보내 준 하녀는 준비성이 철저했다.
“부탁할게.”
“오늘은 쉬어 가는 날이라 해서 수련을 간략하게 시행한다고 했습니다. 평소에는 저것보다 훨씬 강도 높은 수련을 한다고 합니다.”
저게 간략한 거라고?
땀에 절어 있는데?
군대도 그냥 군대가 아니었다.
이건 뭐 특수 부대에 가까웠다.
진은 다시 한 번 다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건 무리지.’
직접 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고행에 가까운 저 수련을 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남자의 로망, 기사.
‘보기만 하자.’
진은 그 로망을 가슴속에 넣어 둔 뒤, 구경만 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로망은 로망일 때 아름다운 법이다.
‘평온하게 꿀 빨면서 여유롭게 사는 거야.’
아무리 멋져도 저건 아니지.
기사는 아니다. 절대!
* * *
기사의 수련을 본 다음 찾아간 곳도 남작가 내부에 있었다.
마법사.
기사와 투톱을 이루는 판타지의 꽃.
기사처럼 땀을 흘리며 고된 훈련도 필요 없는 존재였다.
‘이번에야말로.’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도착한 마법사의 연구소는 기사의 연무장처럼 냉혹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잔뜩 쌓인 책과 양피지.
피로에 찌든 얼굴과 광대까지 내려올 거 같은 다크서클.
며칠간 씻지 못한 건지 삐죽거리는 머리와 꼬질꼬질한 로브는 마치 지구의 ‘그것’을 떠오르게 했다.
‘이거 완전 대학원생이잖아.’
연구에 파묻혀 인간답게 살지 못하는 생물.
교수의 만능 도구이자 노예.
‘뭐 선입견이긴 하지만…….’
저 마법사를 보고 있으니 마법의 노예라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물론 그렇다고 신기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막내 도련님이시군요.”
마법사는 사전에 들은 이야기가 있는지 곧장 진을 알아봤다.
“잠시 견학을 하려고 왔습니다.”
“대공자님께서 간단한 마법을 보여 주라고 하셨는데 바로 보여 드리면 되겠습니까?”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하하, 아닙니다. 이 정돈 괜찮습니다.”
그는 그렇게 대답을 한 뒤.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저게 주문인가?’
머릿속 정보로는 ‘룬’이란 언어였는데, 마치 외계어를 중얼거리는 것만 같았다.
기대와는 달리 마법은 그냥 뚝딱 나오는 게 아니었다. 그는 그렇게 한참을 중얼거린 끝에.
화르륵.
손에 작은 불꽃을 피워 냈다.
“와. 멋지네요.”
“마법사가 되신다면 이런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마법사는 연구를 거듭하면 강해지는 이들입니다.”
그의 말대로였다.
진의 머릿속에 남은 기억에도 ‘마법사의 힘은 연구에서 나온다.’라는 말이 있었으니까.
‘반대로 이야기하면 연구에 절어 산다는 거지.’
진은 산더미처럼 쌓인 양피지 더미를 바라보며 말했다.
“과연 마법사의 힘은 연구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던 데 그 말대로군요. 대단하십니다.”
진의 말에 그의 시선도 산처럼 쌓여 있는 양피지 더미를 향했다.
“그렇습니다. 연구가 바로 마법사의 힘이지요. 제가 하는 연구는 아직 한참 남았지만요…… 후-.”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눈가가 촉촉해진 것만 같았다.
진은 확실히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기사의 수련처럼 마법사는 연구를 해야 하는 거 같은데…… 이건 더 싫어.’
지구의 지식을 이용하거나, 뭔가 연구를 하며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됐어. 그냥 편안히 살자.’
기사와 마법사.
둘 다 별로였다.
그런 진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옆에 있는 하녀가 입을 열었다.
“도련님, 교단에 방문하실 시간입니다.”
“그래?”
기사나 마법사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아직 사제가 남았다!’
신이 힘을 준다는 사제.
그나마 이쪽이 꿀 냄새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