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5
58. 마지막 (4)
“강하군. 확실히 그 누구보다도 강해.”
바알의 목소리에는 세은에 대한 순수한 감탄이 어려 있었다.
“하필 네놈이 나와 적이라는 사실이 아쉬울 따름이다. 같은 곳을 봤다면 내 꿈은 이미 이뤄져서 새로운 세상을 열었을 텐데 말이다.”
바알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정말로 아쉬웠다.
세은이 자신과 뜻을 함께했다면, 이미 바알의 목표를 이뤄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 바알의 말을 들은 세은이 피식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 네놈이 개소리만 하지 않고 나와 같은 생각을 가졌다면 마계가 날뛰는 일도 없었을 텐데 말이야.”
세은의 대답이 바알의 고막을 울렸다.
바알의 얼굴에 세은이 보기엔 처음으로 웃음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은 미묘한 표정이 그려졌다.
“아쉬워해봤자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러니까 개소리하지 말고 덤벼!”
탓! 타앗!
두 사람의 돌진과 동시에 바닥의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서로를 향하여 뛰어드는 세은과 바알의 거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또다시 서로를 노리고 일격이 쏟아진다.
먼저 팔을 움직이는 것은 바알이다.
묵직한 두 자루의 곤봉에, 마기가 두텁게 싸고 들었다.
그러나 세은 역시 그대로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에일린, 홀리 노바.”
순식간에 전방위로 쏟아지는 신성력의 원이 바알의 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동시에 두 자루의 검이 바알의 곤봉 두 자루를 마중 나갔다.
부셔지는 신성력과 마기의 파편 뒤에 허공을 나르는 빛의 검이 쏘아져 나갔다.
“흡!”
그에 맞서 마기로 이루어진 어둠의 마법이 펼쳐졌다.
상쇄되어 흩어지는 마법들이 무시무시한 충격을 만들었다.
쉐에에엑!
뒤를 이어서 끊이지 않고 빠르게 쇄도하는 두 자루의 검이 보였다.
그에 맞서는 바알.
바알은 두 발을 땅에 단단히 박아 넣었다.
꽈아아앙!
세은의 검 두 자루와 정면으로 격돌한 바알이다.
마기를 뚫고 넘어오는 엄청난 힘이 바알의 급소를 향해 뻗어나갔다.
승부다.
완전히 피해내기만 해서는 자신의 대적을 잡아낼 수가 없었다.
퍼어억!
바알의 어깨가 터져 나가며 붉은 분수를 이루었다.
그러나 바알의 얼굴에서는 어둠을 찾을 수가 없었다.
회전하는 그의 곤봉이 세은의 뒤를 노릴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바알의 어깨를 찌르기 위해 끝까지 팔을 뻗은 세은의 옆구리는 완전히 비어 있었다.
키이잉!
마기가 일어나며 순식간에 여러 발의 마법을 일으킨다.
싸우면서 익숙해진 바싸고의 마법이었다.
이제는 세은처럼 꽤 자유자재로 마법을 시전할 수가 있었다.
조금은 늦게 숙지한 방법이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의외의 효과를 주었다.
“크흑!”
쾅! 콰앙!
바알이 쓰는 마법에 익숙하지 않은 세은이 결국 빈틈을 보이고 말았다.
세은의 방어는 결코 부족하지 않았지만, 익숙하지 않은 공격을 완전히 막아내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바알이 마법을 한두 번 사용하기는 했지만, 거의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이런 순간에 이렇게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파스스스!
박살 나 흩어지는 신성력의 가루 뒤로 바알의 마지막 마법이 허공을 갈랐다.
아직 마법이 명중하지 않았음에도, 살갗으로 느껴지는 오싹한 기운을 세은은 느꼈다.
‘늦었다!’
그리고 이미 늦었다고 느끼는 순간 결국 바알의 공격에 옆구리를 적중당했다.
“커억!”
마지막 순간.
아슬아슬하게 몸을 돌렸지만 옆구리에 한주먹 얻어맞고야 말았다.
허공을 유영하던 빛의 검들이 버티지 못하고 사라진다.
세은의 집중력이, 순간 느껴진 고통에 완전히 흩어진 탓이었다.
그러나 달의 검과 별의 검에는, 아직 신성력이 남아 있었다.
남은 집중력을 모두 끌어 모아 발휘해 신성력을 더욱 검으로 밀어 넣었다.
마지막 힘을 한꺼번에 모아, 단숨에 내뿜는 일격이다.
싸움의 균형을 다시 되돌리기 위한 마지막 방법이었다.
우우우우우웅!
콰아아앙!
앞으로 나아가던 달의 검이 바알의 곤봉에 부딪치며 커다란 뒤틀림을 겪었다.
그러나 곤봉을 옆으로 밀어내는 데 성공한 공격이다.
달의 검이 만들어 놓은 길을, 별의 검이 따라 들어간다.
“죽어라!”
콰득!
“큽!”
그러나 바알 역시 마지막에 세은의 공격을 피한다.
그러나 완전히 피할 수는 없어 바알의 어깨를 관통하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다.
어깨와 옆구리.
어느 쪽이 더 싸우기 힘든지는 누구라도 알 수가 있었다.
거기에 세은은 살이 완전히 날아간 것이고, 바알은 관통이었다.
“성하!”
파아아아앙!
헤이런이 다시 세은을 구하기 위해 전투에 뛰어드는 소리가 들렸다.
지축을 울리는 소리뿐 아니라, 자신을 부르는 헤이런의 목소리까지 너무나 선명하게 들렸다.
어느새 바닥에 고인 피의 웅덩이가 보이고 동시에, 숨 막히는 적막이 찾아 들었다.
“이대로 쓰러지면 안 돼!”
언젠가 들어봤던 목소리였다.
이내 세은은 그 목소리의 주인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다름 아닌 에일린의 목소리다.
지금 다시 에일린이 부른 것인지, 예전에 들었던 목소리의 기억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에일린이 말했다.
“거의 다 끝났어. 조금만 힘내.”
여전한 말투였다.
세은을 편하게 생각하는 그 목소리.
물론 그런 에일린을 대하는 세은은 편할 리가 없었다.
“어쩌다 보니까 일이 이렇게 됐지만, 지구까지 바알을 보낼 생각은 없었어. 그저 성물의 힘을 빌려 돌려 보내줄 생각이었어. 성물이 다시 돌아오려고 하는 것이 문제였지만. 성물의 진정한 힘을 알게 된다면 문제가 없을 거야. 성물의 진정한 목소리를 들어봐.”
성물의 목소리를 들어라.
그리고 에일린의 목소리가 서서히 사그라졌다.
“자신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무엇을 알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떻게 다른 것을 알겠는가. 삶은 끝없는 욕망과의 동행이다. 욕망과 이성을 동시에 모두 충족시키는 자야말로 성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심연으로 이르러서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찾아야만 한다.”
낯선 목소리가 세은의 가슴을 뚫고 들어왔다,
문득 세은을 일깨우는 말이다.
‘성물…….’
자신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어느 것이 필요한지 알려준다.
사람의 뿌리다.
모든 사람은 지니고 있는 많은 욕망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욕망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많다.
다른 사람에게 주는 피해를 최소화하고,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사람이야말로 성인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모두가 그런 길을 걷게 되면 세상에 가득 찬 고통은 서서히 줄어들 것이 분명했다.
‘나는…… 나는 그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표현을 아끼지 않고, 언제나 행복하고 싶을 뿐이다.’
우우우웅!
성물이 강하게 울음을 터트리며 성광을 내뿜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필요도 없다.
그저 그동안 하지 못한 표현을 하고, 더 많은 시간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하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했다.
신성력이 자신을 휘감는 느낌이 들며, 세은의 의식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뭐지?”
헤이런을 처리하려던 바알이, 순식간에 얼굴에서 고통이 사라진 세은의 눈을 보며 입을 열었다.
분명히 거의 의식을 잃어가고 있던 세은이다.
이제는 마지막 일격만이 남은 상황이 아니었던가.
“……이건?”
그리고 세은 역시 반대로 의문을 품었다.
분명히 옆구리가 터져나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일으키는 몸이 무척이나 가벼웠다.
거기에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힐끗 시선을 내려다보니, 여전히 상처가 아물지 않고 있었다.
“어떻게 의식이 돌아왔지?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바알의 눈이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일에 당황했다.
그런 바알의 눈에 세은의 전신에서 하얀빛이 터져 나오는 것이 보였다.
마치 일출과 같은 느낌.
성물이 주변의 모든 것을 가리지 않고 신성력으로 변환하고 있었다.
“후우…… 진짜로 마지막이다. 바알.”
이미 육체는 상처를 입었고, 치료를 할 시간도 없다.
치료를 시도하는 순간 바알의 곤봉이 머리를 노리고 날아올 것은 당연했다.
거기에 고통은 느껴지지 않지만, 상처의 피는 쉽게 그치지 않았다.
아무리 성물이 신성력을 공급해 줘도, 육체는 피가 없으면 오래 버틸 수가 없다.
하지만 문제는 없었다.
세은의 머릿속에 있던 최후의 걱정도 이제는 완전히 사라졌다.
정말 이번 격돌로 끝이다.
세은의 눈이 성광을 머금고 반짝거렸다.
불길함을 느낀 바알이 땅을 박찼다.
그에 맞서는 세은의 입이 최후, 최강의 신성 마법을 발동했다.
세은은 어떠한 검도 들지 않았다.
달의 검과 별의 검 모두 세은의 손에 들리지 않았다.
“에일린, 신의 심판.”
우우우웅!
태양에서 한 줄기 빛이 내려오더니 세은의 손에서 형태를 이루기 시작했다.
그 빛이 형태를 이루는 것을 막기 위해 바알의 곤봉이 휘둘러졌다.
순간 모든 시간이 서서히 느려진다.
소리가 없어지고 색이 없어졌다.
주변의 바람도, 사람들도 모두가 사라졌다.
마지막에 남은 것은 뜨거운 열기다.
세은의 몸을 감싼 성광이 진해졌다.
바알의 곤봉이 세은의 머리가 닿기 직전이었다.
이윽고, 아슬아슬한 차이로 세은의 손에 붉은빛으로 이루어진 검이 쥐어졌다.
태양과 빛의 검.
최후의 신성 마법으로 만들어진 검의 열기가 바알과 그의 곤봉을 한꺼번에 끌어안았다.
쉬익.
세은이 검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었다.
아무런 힘이 실려 있지 않은 간단한 행위였지만, 그에 담긴 힘은 전혀 간단하지 않았다.
화르르르륵!
난무하는 빛의 축제 끝에 명멸하는 생명과 죽음이 피어올랐다.
신성력과 마기가 부딪혀 피어올라 산산이 흩어진다.
세은과 바알의 힘이 장엄한 빛무리를 뿜어내며 하늘 높이 사라지고 있었다.
치이이익!
단 한 번.
오직 단 한 번의 칼질로 모든 힘을 소진하고 소멸하는 신의 심판이다.
그리고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이제 세은에게는 손가락 하나 들 힘도 남지 않았다.
피투성이가 된 옆구리.
거기서 흘러나온 피가 세은의 하체를 빨갛게 물들였다.
“나는…… 신의 간섭이 없는 세상을 꿈꿨을 뿐이다.”
사그라지는 바알의 목소리는 아련했다.
생기를 잃어가고 있음에도 그 안에 서려 있는 확신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째서 신들의 손 안에서 놀아나야 하는가. 이미 수없이 많은 신들이 자신들만의 세상으로 떠나갔다. 이젠…… 기회가 없을 것이다. 네놈은 스스로 노예를 자초한 것이야.”
바알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다가 마지막에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쿵!
그리고 이내 바알이 완전히 쓰러졌다.
“미친……놈…… 마지막까지 개소리는…….”
바알에게도 나름 사연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이해해 주기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바알의 여정도 오늘로 끝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욕설을 내뱉은 세은의 몸도 쓰러졌다.
“오빠!”
“성하!”
대지에 몸을 눕힌 세은을 향해, 사람들의 걱정 어린 고함소리가 내려앉았다.
거대한 신성력이 움직인다.
세은이 자신의 목에 걸린 성물을 움직였다.
눈앞에서 거대한 신성력이 움직여 새로운 게이트를 만들어 냈다.
바로 교단이 있는 차원으로 이어지는 문이다.
“정말로 같이 안 가십니까?”
“그래, 내 고향은 여기니까.”
“정말로…… 뵙고 싶을 겁니다.”
“나도 마찬가지야.”
세은과 헤이런이 마지막 대화를 나눴다.
“자, 가져가.”
성물을 이용해 게이트를 연 세은이 헤이런에게 성물을 넘겼다.
헤이런이 조심스럽게 성물을 받아들었다.
이제는 정말 마지막이다.
성물이 없으면, 제아무리 세은이라도 넘어올 수가 없었다.
그리고 세은처럼 성물을 이용해서 게이트를 열 수 있는 자도 교단에는 없었다.
“자, 빨리 가. 게이트는 이제 금방 닫힐 거야. 차원을 비트는 거니까.”
“……예.”
마지못해 대답하는 헤이런이다.
그의 손짓에 성기사들이 먼저 게이트 안으로 입장했다.
“그럼…… 몸 건강하십시오. 성하.”
“헤이런, 너도.”
인사를 마지막으로 완전히 사라지는 교단의 인원들이다.
동시에 게이트 역시 그 자취를 감췄다.
“…….”
“오빠.”
그리고 감상 어린 눈으로 게이트가 사라진 허공을 바라보고 있던 세은의 뒤로, 두 명의 여자가 다가왔다.
채연과 에린이다.
“아, 왔어?”
“괜찮아요?”
“응. 괜찮아.”
에린의 걱정 어린 물음에 싱긋 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 세은이다.
“각자가 있어야 하는 곳은 다르니까.”
물고기가 땅 위에서 살 수 없듯이.
누구나 행복할 수 있는 위치는 다르다.
그것은 지금의 세은과 헤이런처럼 차원일 수도 있고, 가족이나 친구 같은, 다른 이들의 품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어디에 머물지 스스로가 결정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 어떤 일도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일은 없으니까.
“일단 마무리부터 해볼까? 사노랑 실장님이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겠네.”
완전히 사라진 이후, 서로의 이익을 위한 기 싸움이 지구에는 한창이었다.
“맞아요. 안 그래도 언제 오나 오빠가 움직이자마자 전전긍긍하더라고요.”
채연이 그런 세은의 말에 웃으며 답했다.
“그렇지? 그럼 얼른 끝내볼까? 그리고 쉬어야지.”
“그럼 같이 여행가요!”
에린이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그럴까?”
“정말요?”
“그치. 정리가 다 되면 할 일도 없고 말이야.”
“좋아요! 얼른 일하러 가요!”
세은의 말이 전부 끝나기도 전에, 채연과 에린이 먼저 몸을 돌려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시라도 빨리 일을 끝내고 싶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둘의 모습을 보는 세은의 얼굴에도 밝은 웃음이 떠올랐다.
한번 겪었던 일이라도, 잃었던 것이라도.
그것이 새로운 일상을 유지하지 않을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밝게 빛나는 태양이, 어제와 같으면서도 다른 오늘을 비추고 있었다.
『나는 교황이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