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2
58. 마지막 (1)
세은의 눈에 가득한 것은 불신의 빛이었다.
그의 입에서 믿을 수 없다는 한마디가 새어 나왔다.
“재……호 씨?”
머리를 잃은 몸이 서서히 허물어졌다.
바닥에는 방금 전까지 재호의 머리였던 조각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완전히 산산조각이 되어 버린 조각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지구로 돌아와 가깝게 지냈던 사람 중 하나의 죽음이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눈앞에 재호가 죽어나가다니.
하지만 세은은 그대로 굳어 있을 수가 없었다.
후우웅―!
바알의 공격이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죽어랏!”
그런 바알에게 두려움 없이 맞서가는 성기사들의 검이 반원을 그렸다.
텅, 터엉!
그러나 바알의 곤봉질 한 번에 사방에서 몰려들었던 성기사들의 검이 한꺼번에 튕겨져 나갔다.
“피해라!”
헤이런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부나방처럼 달려드는 성기사들에게 하는 말이었다.
신성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면서 바알을 막으려고 하는 모습이 세은의 시야에 화살처럼 박혀들었다.
“대체 왜…… 이런…….”
세은의 눈에 들어오는 장면은 충격 그 자체였다.
우우웅!
은은하게 울고 있던 성물에 세은의 격동이 깃들었다.
세은의 감정에 공조하는 성물의 울음소리가 점점 강하게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세은의 몸이 성물에서 터져 나오는 빛에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바알의 살육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세은의 전면,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곳이 부서진 육신들로 가득 찼다.
콰직― 콰드득!
“어째서 이런…….”
우우우우웅!
이제까지와는 판이하게 다른 성물의 힘이다.
성스럽다고 할 수밖에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순식간에 주변을 잠식하는 신성력에 바알의 공격이 일순간 멈추었다.
“이건 또 무슨 짓이냐!”
몸을 돌리며 말하는 바알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끝까지 몰아넣었다고 생각해도 끝까지 회복하는 세은의 모습에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세은이 분노에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바알…… 네놈의 병신 같은 생각으로 대체 이들이 왜 죽어야 하는 거냐.”
말을 하는 세은의 목소리는 잘게 떨리고 있었다.
자신의 주변에 갈 피해를 막기 위해 부랴부랴 마계에서 다시 넘어왔는데, 그 결과가 이렇게 나오다니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흥. 에일린 그년은 너희를 얼마나 생각할 것 같으냐? 가식적인 모습에 속는 네놈이야말로 병신이 아닌가?”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세은이 씹는 듯한 어조로 되물었다.
“네놈의 병신 짓이 마계에서 끝났으면 내가 이렇게 참견하지도 않았을 거다.”
세은의 목소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헤이런의 얼굴에도 진한 슬픔이 떠올랐다.
세은이 말을 이어나갔다.
“대체…… 성물은 왜…… 이렇게…….”
세은을 제외하고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그러나 그 말에 담긴 슬픔과 억울함은 가슴에 직접 와 닿았다.
세은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지구로 돌아온 이후, 완전히 새로 시작한 삶에 적응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현실이라고 받아들여도, 이미 어딘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점이 항상 있었다.
겉으로 표현은 안 해도, 사람들과의 거리를 두게 되는 일은 당연했다.
수없이 많은 이별을 겪었다.
그리고 다시 그런 이별을 겪는 일은 사양하고 싶었다.
그런 자신을 탓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람이 살아가면서 아무런 관계도 맺고 살아가지 않을 수는 없는 법.
자연스럽게 얽히고설키는 인연에, 조금씩이지만 부족했던 부분을 채워나가고 있던 세은이었다.
그리고 그런 관계의 사람 중에 하나였던 사람이 눈앞에서 머리가 산산조각이 나서 쓰러졌다.
다른 사람도 아닌 바알에게.
애초에 바알이 이리로 넘어온 이유가 자신이 성물과 함께 넘어와서라는 사실이 더 미안했다.
짙은 죄책감이 느껴졌다.
세은이 감았던 눈을 떴다.
정적에 빠진 바알로 인해 소강상태에 빠진 상황과, 이때를 이용해 사람들을 뒤로 물리는 헤이런의 모습이 보인다.
치잉!
날카로운 울음이 검신에서 터져 나왔다.
세은이 달의 검을 새롭게 쥐어들며 앞으로 발을 옮겼다.
우우우웅!
앞으로 한 걸음씩 걸어올 때마다 느껴지는 세은의 기세에 바알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어떻게 이렇게 회복을 하는 거지?”
바알이 의문에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다는 표정이 바알의 얼굴에 그려졌다.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는 세은과 그 걸음에 맞춰 웅혼한 울음을 토해내는 성물이 보인다.
누구도 원망할 사람은 없다.
비록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자신이 연 문은 자신이 닫아야 했다.
물론 세은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일이야 어찌 되었든, 책임을 진다.
이제는 팔만 뻗으면 각자의 무기가 닿을 거리.
극에 달한 긴장이 공기를 타고 고조된다.
“이번에는 그 질긴 목숨, 확실하게 죽여주마.”
“흥. 내가 할 말이다. 지긋지긋한 신의 개여.”
키이이잉―!
성물의 힘을 받아 계속해서 기세를 끌어올리는 세은에 맞서, 바알 역시 손을 뻗어 무언가를 잡아들었다.
휘이익!
“?!”
저 멀리 쓰러져 있던 바싸고의 몸이 바알의 손으로 빨려 들어왔다.
그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모두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러나 바알의 행동은 명확하고, 신속했다.
콰직! 콰드드득!
바알의 손에 잡힌 바싸고의 몸이 급격하게 부셔지며, 모든 힘이 바알의 몸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그 괴기한 광경에 모두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하아아아.”
이내 순식간에 바싸고의 원정을 흡수한 바알이 만족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좋군.”
그 모습에 세은이 역겨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는 짓이 뱀 새끼들과 다를 바가 없군.”
그러나 바알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좋을 대로 지껄이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주고받은 대화가 끊기자, 긴장감이 사방에 자욱하게 깔렸다.
그리고 그 긴장감을 뚫고 바알과 세은이 서로의 거리를 조금씩 좁혀나갔다.
그리고.
쉐에에엑!
세은의 오른손에 들린 달의 검이 먼저 짓쳐들었다.
신성력이 검신에서 뛰쳐나오며 호쾌한 기세로 바람을 갈랐다.
후우웅!
그에 맞서 바알의 곤봉도 묵직한 파공음을 내며 날아왔다.
순식간에 세상에 세은과 바알, 둘만 남았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격전이다.
다른 모든 것은 지워지고, 이제 서로의 존재만이 남았다.
쩌어어엉!
달의 검을 막아내는 곤봉의 마기는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바싸고를 흡수한 바알의 마기는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거기에 바알이 스스로 정제한 마기의 순도가 그 힘을 배가시키고 있음은 당연했다.
쿠우웅―!
몸 전체가 휘청거릴 만한 충돌이었지만, 세은은 쉽게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땅을 힘차게 밟으며 돌진했다.
그리고 조금도 주눅 들지 않은 기세로 다시 한 번 검을 휘둘렀다.
키이이잉!
빈틈을 포착했다는 생각이 순간 들었다.
그러나 바알의 반응은 빨랐다.
어느새 마기를 사용해 마법을 발동하고 있었다.
바싸고가 방금 전까지 세은을 상대할 때 사용하던 마법이었다.
우우우웅! 콰앙!
왼손에 있던 달의 검이 마법을 쳐낸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러나 곧바로 곤봉의 쇄도가 이어졌다.
‘못 막는다.’
순간적으로 판단을 끝낸 세은이었다.
어설프게 막다가는 오히려 내상을 입을 것이 분명했다.
제대로 피하는 것만이 방법이었다.
키이이잉!
거기에 곤봉에서 짙은 마기가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뒤로 피해서는 안 된다.
세은이 간발의 차이로 옆으로 몸을 날렸다.
미처 완벽하게 피하지 못해 폭발에 휩쓸린 옆의 옷자락이 가루가 되어 부서져 나갔다.
바싸고를 흡수하고 마치 도핑이라도 한 것처럼 그 힘이 달라진 바알의 공격이다.
물론 세은도 성물의 도움을 받아 몸을 회복한 것은 마찬가지지만, 그렇다고 생명이 두 개가 된 것은 아니다.
단 한 번의 실수로 생사가 갈리는 상황이다.
휘익―
바알의 공격을 회피한 세은의 손끝에서 신성 마법이 발동되었다.
날카롭게 공간을 찢는 빛의 화살이 바알을 노리고 날아갔다.
꽈아아앙!
전방을 차단한 곤봉이 마기의 벽을 만들었다.
빛의 화살이 마기의 벽을 뚫지 못하고 그대로 소멸했다.
키이잉!
바알의 행동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바싸고를 흡수한 지금, 완전히 승부를 낼 심산이다.
바알이 다시 한 번 가볍게 곤봉을 움직인다.
그러자 곤봉에 깃들어 있던 농후한 마기가 사방을 잠식해 나간다.
순식간에 신성력이 영역을 넓힌 공간을 막아버리는 마기다.
자신에게 더 유리한 환경을 만들겠다는 바알의 생각이었다.
그런 바알의 생각을 알아챈 세은이 다급하게 신성력을 가득 뽑아내며 사방을 잠식하려는 바알의 마기에 대항했다.
우우우우웅!
그러나 우위를 점하기에는 늦었다.
달의 검을 휘둘러 퍼져 나오는 마기를 반으로 갈라냈다.
꽈아앙!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을 바알이 아니다.
마주 뻗어 나오는 곤봉에 거대한 충격파가 허공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힘겨루기를 하던 신성력과 마기가 동시에 밀려나며, 힘의 공백이 생겨났다.
“정말 끈질기게 버티는구나.”
어딘가 감탄이 섞여 있는 바알의 말이다.
바싸고의 원정까지 흡수하고, 회복을 하면서 순수한 마기로 온몸을 재구성한 자신이다.
그런 자신을 상대로 이렇게 대등하게 싸우는 인간이 신기할 법도 했다.
두 사람 모두 한 번, 한 번의 공격이 필살의 위력을 지니고 있다.
어느 한쪽이 우위를 점하고 있더라도 기회만 잡는다면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될 가능성이 다분한 전투라는 의미였다.
“그건 내가 할 말이야 이 새끼야.”
그런 바알에 맞서 투지를 끌어올리는 세은이다.
태연해 보이는 바알의 말투가 그의 심기를 자극했다.
우우우우웅!
세은이 신성력을 극성으로 끌어올려 두 개의 검에 담았다.
달과 별의 검이 아름다운 울음을 울렸다.
꽈아앙!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바알과 세은이 다시 동시에 짓쳐들었다.
검과 곤봉의 부딪힘으로 인해 일어나는 충격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모두 이리로 오게나!”
헤이런이 살아남은 자들을 모두 모아 방어막을 펼쳤다.
정말로 강력한 일격들이다.
충격파만으로도 약한 자들은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세은과 바알의 전투는 이 정도에서 끝나지 않았다.
쾅― 쾅― 콰앙!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강해지는 충돌이다.
“이런 게…… 가능해?”
누군가의 입에서 나온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상의 한계를 훨씬 더 넘어서는 능력이다.
도저히 이런 것이 가능할까 싶을 정도의 힘들이었다.
키잉! 키이잉!
빠르게 마법이 두 번 날아온다.
바싸고의 능력을 흡수한 바알은, 마법 캐스팅 속도가 가히 바싸고에 비견될 정도였다.
텅, 터엉!
두 번의 마법을 모두 막아낸 세은의 몸이 휘청 뒤로 흔들렸다.
달의 검과 별의 검을 쥔 양손의 손아귀가 격하게 흔들렸다.
단순히 신성력으로 이루어진 검이었다면, 마기와 상쇄되어 검이 흩어졌을지도 모를 위력의 공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