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4
56. 혼자서 한다 (4)
“후우.”
그레모리가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예지를 봤을 때부터, 그리고 바알의 전령이 왔을 때부터 이상한 점을 느꼈다.
그렇지만 실제로 짐작이 확신이 되는 것은 전혀 다른 기분이었다.
세은이 그런 그레모리에게 쐐기를 박았다.
“어차피 금방 들킬 거, 내가 거짓말 할 필요는 없지.”
세은의 말에 그레모리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니 새끼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게 더 열 받는 거야.”
“그게 왜?
“몰라서 물어?”
“뭐, 나라도 그럴 것 같기는 하네.”
“그럼 잠시라도 닥치고 있어. 병신 새끼야.”
“그러지 뭐.”
날 선 그레모리의 말에 세은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아! 그런데 말이야.”
마침 생각난 것을 말하려던 세은의 눈이, 그레모리의 예민한 눈과 마주쳤다.
“……나중에 얘기하지 뭐.”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을 것 같은 상황.
결국 세은은 다시 한 번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그레모리의 기분이 진정될 때까지 기다렸다.
잠시 후.
어느 정도 기분을 추스른 그레모리가 말했다.
“이곳으로 넘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바알이, 내가 여기 있는 걸 알았다는 건 정보력이 상당하다는 건데. 그럼 바알 혼자가 아닐 가능성이 높아.”
일리 있는 그레모리의 말에 세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네.”
“그리고 지구에 먼저 넘어와 있던 마왕들은 전부 네가 처리했지.”
거기까지 말을 들은 세은은 그레모리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낼 수가 있었다.
“바싸고군.”
“맞아. 먼저 넘어왔지만 네게 죽지 않은 유일한 마왕.”
“바싸고가 바알과 손을 잡았을 확률은 거의 무조건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네.”
“그럴 거야.”
“바싸고와 한번 접촉해 보는 게 어때? 바싸고도 충분히 미친놈이지만, 바알이 하는 짓을 알고 나면 생각이 바뀌지 않을까?”
세은의 말에 그레모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 생각에는 애초에 둘은 손을 잡았을 확률이 높아. 그러니까 나처럼 바알이 미친놈이라는 걸 어필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이지.”
“왜 그렇게 생각하지?”
“적의 적은 친구니까.”
짧은 그레모리의 말은 충분한 대답이 되지 못했다.
세은이 여전히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그레모리가 귀찮아하며 살을 덧붙였다.
“아가레스와 바알은 사이가 좋지 않지. 그리고 아가레스 바로 아래에 있던 바싸고도 아가레스와 사이가 좋지 않아. 그래서 애초에 둘은 사이가 나쁘지 않았어.”
“뭐, 그럴 수도 있겠네.”
“그리고 애초에, 바싸고가 너랑 협력을 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이 되지 않는데 말이야.”
그레모리의 말에 세은이 대답했다.
“적어도 머리가 있고, 바싸고가 적이 아니라면 잠깐은 협력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했던 거지. 방금 네가 말한 대로 적의 적은 친구잖아?”
“그리고 바알을 잡자마자 바싸고의 뒤를 치고?”
“어이쿠. 그건 또 어떻게 알았데?”
비꼬는 그레모리의 말에, 세은이 과장되게 호들갑을 떨었다.
그레모리는 피식 웃고는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하여튼, 바알이랑 바싸고는 한 편이 확실하니까 조심해야 할 거야. 바싸고만큼 음흉한 놈도 없으니까.”
“하긴, 저쪽은 이제 바싸고의 본진이나 다름없지.”
그레모리의 충고에 세은이 동의를 표했다.
그러나 그 다음에 이어진 말은 방금 전의 동의와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뭐, 그러니까 시간을 끌지 않고 바로 쳐내야겠네.”
“어지간히 자신이 있나 본데?”
그레모리의 말에 세은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바알 그거, 정상이 아니거든.”
“바알이 정상이 아니라고?”
“그래, 방금 전에 말했지만 말이야. 마계에서 쫓겨난 놈이 몸이 멀쩡하면 더 이상하지 않겠어?”
“그럼 시간을 끌면 끌수록 회복할 시간을 주게 되는 거겠네.”
“당연하지. 그래서 지금 계획은 사흘 뒤에 잡으러 가는 거야.”
“사흘이라……”
그레모리가 한 손으로 자신의 턱을 받치고 고민에 빠졌다.
작은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그런 자세를 하고 있으니, 어울리지 않아 세은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갑자기 세은이 웃음을 터트리자, 그레모리가 고개를 들어 물었다.
“왜?”
“아무것도 아니야.”
사살대로 말했다가는, 여기서 그레모리와 한바탕 드잡이질을 해야 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세은은 시치미를 뗐다.
세은의 시치미에, 그레모리가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내 다시 생각에 잠겼다.
지금은 바알을 어떻게 해야 할지가 가장 중요한 상황이었다.
“사흘이면 시간이 조금 촉박한데? 조금 더 준비를 하고 가지 그래.”
생각을 마친 그레모리가 세은에게 제안했다.
그러나 세은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이쪽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어서 말이야. 아무래도 사흘이 지나면 제대로 된 지원을 받기가 힘들 것 같거든.”
“왜?”
세은의 말에 그레모리의 미간이 잔뜩 구겨졌다.
“뭐, 인간들의 권력 다툼이랄까? 나흘 뒤에 나를 돕는 사람들의 반대 세력의 발언권이 강해지면, 내가 지원을 받기 힘들어질 수가 있거든.”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권력 다툼을 한다고?”
그레모리의 얼굴에 의심이 떠올랐다.
세은은 태연하게 그런 그레모리의 말을 받았다.
“응. 당연하지.”
세은은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전선이 밀리지 않고 있어서, 나름대로 다른 곳에 눈을 돌릴 여유가 있는 것 같아.”
“어마어마한 병신들이군.”
그레모리가 혀를 차며 말했다.
그녀가 보기에는 당장 위기를 보지 못하는 모습이 정말로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뭐, 그러니까 사흘 뒤에는 움직여야해.”
“그것 참 병신 같네.”
“동감.”
오늘 처음으로, 세은과 그레모리 사이에 공감대가 형성이 되었다.
* * *
이틀 뒤. 세은은 자신의 방에서 제른과 헤이런, 그리고 이지호를 마주하고 있었다.
“그래서, 총 병력이 몇이라고?”
“부상자를 다시 파악해 봐야 하겠지만, 서른 정도입니다.”
헤이런의 말에 제른이 대답했다.
제른의 말대로, 현재 제른 휘하의 총 병력은 삼십을 겨우 헤아리고 있었다.
본래 오십을 조금 넘기는 수준이었는데 계속된 전투로 인해 사상자가 발생한 탓이었다.
드넓은 전선을 끊임없이 지원하는 임무.
당연한 일이었지만, 휴식이 충분하지 않은 작전은 크고 작은 부상자를 계속해서 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부상을 입은 병력은 전투에서 사망에 이를 확률이 더 높았기 때문에, 애초에 후방으로 빼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부상자들까지 모두 소집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최후의 전투를 눈앞에 두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세은이 앞장서는 성전이다.
성기사들로서는 참전하는 것 자체가 영광일 수밖에 없었다.
부상자를 파악해 봐야 한다는 제른의 말에 세은이 말했다.
“부상자들은 데려올 필요 없어.”
“정말로 중상을 입은 이들은 애초에 걸렀습니다.”
단호한 표정의 제른이 대답했다.
명령으로 참가를 막을 수도 있었지만, 어느 정도의 경상자는 전부 받아들였다.
최후의 전투라고 함은, 그만큼 어떤 변수와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쉽게 예측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는, 아주 작은 힘이라도 도움이 되기 마련이었다.
“세은씨. 다른 동료들도 모두 도착했습니다.”
“오빠!”
이지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세은을 향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채연과 에린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 영한과 재호가 보였다.
“도대체 어디에 있던 거예요!”
에린이 와락 품에 안기며 소리쳤다.
“잘 지냈어?”
“진짜 어디에 있다고 연락이라도 해주지 너무했어요.”
채연도 에린과 마찬가지로 세은에게 반가움과 섭섭함을 반씩 담아 세은에게 말했다.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말이야.”
“그래도요!”
“세은 씨, 다시 뵈어서 반갑습니다.”
“…….”
그리고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재호와, 가만히 침묵을 지키는 영한이다.
“많이 발전했네요.”
“하하. 부끄럽습니다.”
세은의 칭찬에 재호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너도.”
“……흥.”
그리고 영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여전히 영한은 어딘가 개운하지 않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원래 영한이 자신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있는 세은은, 신경 쓰지 않고 넘어갔다.
“여기 있는 인원들도 함께 출발할 겁니다.”
“글쎄요……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이지호의 말에 세은이 대답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다른 이들의 반응은 격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이번에도 혼자 가겠다고요?”
“맞아요. 그랬다가 실종된 거잖아요. 이번에는 같이 가요.”
“끄응…….”
난감해하는 세은을 대신해, 이지호가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아. 다들 진정들 해. 여기에 오면서 설명한 것처럼. 우리는 만약을 대비해서 뒤에서 대기하고 있는 거야.”
“알아요.”
“하지만 지금 오빠의 말은 완전히 따라오지 말라는 거잖아요.”
“그게 더 안전하니까.”
세은의 말에 채연이 발끈해서 대답했다.
“우리도 지금까지 잘 싸워 왔는걸요.”
“헤이런이랑 제른이면 충분한데…….”
“혹시 몰라서 그렇습니다. 최대한 할 수 있는 준비를 모두 해야죠.”
세은의 말에 채연이 다시 뭐라고 하려는 것을, 이지호가 막아서며 말했다.
이지호의 말에 세은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뭐, 어차피 혼자서 들어가기로 결정을 했으니 문제는 없겠죠.”
“그렇습니다.”
“치…….”
냉정한 세은의 말에, 에린의 입이 삐죽 튀어 나왔다.
이성적으로는 세은의 말이 맞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내심 섭섭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열심히 노력해도 도움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여전히 재수는 없네요.”
영한이 나지막이 재호에게 말했다.
“푸훗!”
진심이 가득한 영한의 말에, 재호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덕분에 경직되려던 분위기가 조금은 자연스럽게 풀렸다.
짝!
그리고 이지호는 그 틈을 놓지 않고, 박수를 치며 주위를 환기시켰다.
“자자. 하여튼 자세한 사항은 각자 전달받았으리라 생각합니다. 혹시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 전달을 받지 못한 사람이 있으면 지금 말해주세요.”
“…….”
그러나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그 모습에 이지호가 빙긋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럼 모두가 잘 전달을 받았다고 생각을 하고 말을 이어 나가겠습니다.”
“실장님.”
그 순간, 재호가 손을 들고 이지호를 불렀다.
“응?”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재호의 말에 이지호가 질문하라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럼 여기 있는 사람들이 작전에 참여하는 전부입니까?”
이지호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여기에 없는 사람이 더 많아.”
제른 휘하의 기사들도 그렇고, 다른 사제들도 아직은 전장에서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일 작전이 시작되면, 바로 이동을 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은밀하게 작전을 돕기 위한 사노와 장위건과 이고르, 이지호의 세력들도 대기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걸 전부 알 필요는 없지.”
더 이상은 알려주지 않겠다는 이지호의 말에 재호는 궁금증을 접었다.
이지호의 말대로 굳이 전부 알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재호의 궁금증을 해결해 준 이지호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내일 새벽 5시, 우리는 출발합니다. 늦지 않도록 준비들을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짜악!
이지호가 다시 한 번 박수를 쳐서 시선을 집중시키고 말을 마쳤다.
“그럼, 오늘 남은 시간 동안 컨디션 조절을 잘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