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3
56. 혼자서 한다 (3)
“우리가 전념해야 할 일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미 선발에는 도라는 전력이 있는 상황. 굳이 앞으로 전력을 몰아넣지 말고 뒤도 생각을 해야 합니다.”
“제 생각도 사노의 생각과 일치합니다.”
가만히 있던 이지호도, 사노의 편을 들며 설전에 참전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미 충분한 선봉에 다른 전력을 몰아넣는 것은 필요가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지호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만일 세은 씨에게 문제가 생겨서 우리가 도우러 가는 것이, 우리에게 문제가 생겨서 세은 씨가 도우러 오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
이지호의 말이 끝나고, 모두가 다시 생각에 잠겼다.
특히 반대 의견을 제시했던 이고르와 장위건은 진중한 표정으로 장고에 들어갔다.
아무리 협력 관계라지만, 이 안에서도 어느 정도의 주도권 싸움은 항상 있는 법.
그러나 옳지 않은 의견을 계속해서 밀고 나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어찌되었건, 지금은 서로 함께 위로 올라가기 위해 손을 잡은 상황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하루 정도는 각자 더 고민해 보시죠.”
장위건이 제안했다.
상대 진영은 이제 막 일반 군대를 이용해서 작전을 시행하려는 상태.
아무리 은밀하고 빠르게 작전을 시행한다고 하더라도, 최소 나흘을 걸릴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말은, 적어도 사흘 정도의 시간은 아직 남아 있다는 말과 같았다.
“그럼 그렇게 하죠. 일단 전체적인 방향만 오늘 정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상대 진영에서 예상치 못하게 모이는 것도 앞으로는 힘들 테니까요.”
“오늘 최대한 의견을 맞춰놓고, 오히려 내일부터 만남을 자제하면 상당한 혼선을 줄 수도 있을 겁니다.”
“이미 이렇게 우리가 만난 것을 알지 않겠습니까?”
“헤이런이 오는 것은 기밀이었고, 그래서 주변이 정리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아직은 괜찮을 겁니다.”
사노의 말에 장내의 다른 이들이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사노만큼 확실하게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같이 손을 잡기를 잘했다고 생각이 들게 하는 능력이다.
“어떻게 할지 알아서 정해서 시간만 알려줘.”
굳이 자신이 필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세은이 말했다.
방금 말을 하는 것을 보아하니, 굳이 자신이 없어도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 달리 생각해두신 바는 없으십니까?”
“응. 최대한 빨리 출발하는 게 좋기는 하겠네.”
“최대한 빨리라…… 알겠습니다. 어차피 저희도 상대 진영보다 먼저 움직여야 하는 입장입니다. 사흘 안에 움직일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사흘 괜찮네.”
“그럼 사흘 뒤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주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그때로 시행하겠습니다.”
사노의 말에 세은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좋아, 그럼 그렇게 알고 있을 테니 알아서 진행해서 알려줘.”
“예!”
“헤이런, 일어나지.”
“알겠습니다.”
“이거 괜히 부른 거 같아. 오늘 밤에 얘기를 좀 하려고 했는데, 굳이 없어도 될 것 같네.”
“아! 헤이런은 남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세은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헤이런을 사노가 붙잡았다.
“제 도움이 필요합니까?”
“예. 아무래도 헤이런의 경험과 지식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사노의 말에 헤이런의 시선이 세은을 향했다.
헤이런의 시선을 받은 세은은 피식 웃고는 입을 열었다.
“왜 내 눈치를 봐? 알아서 해.”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여기 남아서 전략을 더 연구하다가 돌아가겠습니다.”
“그래그래, 내일 봐 그럼.”
“예! 성하!”
세은은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문밖으로 나섰다.
* * *
다음 날 아침.
세은이 자신의 방에서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들어간다.”
“응?”
뜻밖의 인물이 세은의 방으로 불쑥 찾아왔다.
“여유가 넘치네, 아주.”
마왕 제 56위 그레모리.
아직까지 이곳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인물이었다.
세은으로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문.
“뭘 그렇게 당황해?”
그레모리가 미처 당황한 티를 숨기지 못한 세은을 보며 톡 쏘듯이 말을 던졌다.
그러나 세은으로서는 당연히 당황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레모리가 아직까지 여기에 머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다.
거기에 다른 이들도 아니고 헤이런도 같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아무 문제없이 그레모리가 머물고 있다니, 당연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여기 아직도 있는 거야?”
“왜? 여기 있으면 안 돼?”
“아니 그런 뜻은 아닌데.”
“네 부하들은 전부 전장에 나가 있으니까. 여기에 머물면 마주칠 일도 없어.”
그러고 보니 그레모리에게서 마기가 잘 느껴지지 않았다.
세은으로서도 집중을 하고서야 느껴지는 마기.
그레모리는 가득 불만을 가진 얼굴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어제는 좀 피곤했어. 왜 갑자기 네 부하가 돌아왔나 했더니, 네 놈이 돌아와서였네.”
그레모리의 말에 세은이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
“왜? 멀쩡하게 돌아와서 아쉬운가 보지?”
“뭐, 평소 같았으면 그렇다고 말을 하겠는데 말이야.”
어딘가 다른 그레모리의 말에 세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 같으면?”
“그래, 평소 같으면.”
세은의 말에 그레모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순순한 그레모리의 태도에 세은이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내가 멀쩡해야 하는 일이라, 내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인데. 무슨 일인데 그래?”
“바알.”
갑작스럽게 나타난 바알의 이름에 세은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이어서 그레모리의 설명이 더해졌다.
“어떻게 알았는지 바알이 내게 전령을 보냈어.”
“거 참. 움직임 한번 빠르네.”
세은의 말에 그레모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역시 바알과 만난 적이 있네.”
“그래. 얼마 전에 마계에 다녀왔으니까 말이야.”
그레모리에게는 숨길 것도 없었기 때문에, 세은은 자신이 마계에 다녀온 것을 솔직하게 얘기했다.
세은의 말을 들은 그레모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후우. 내가 너를 믿는지는 모르겠지만, 너한테도 얘기를 들어봐야 할 것 같아서 온 거야.”
예상치 못한 그레모리의 말에, 이번에는 세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거 고마운 일이네. 안 그래도 바알 그 새끼,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것 같거든.”
“흥. 내가 봐도 그래 보여서 온 거야. 미친놈인 너보다 바알이 더 미쳐 보이거든 지금.”
콧방귀를 낀 그레모리는, 바알의 부하가 전해준 얘기와 제안을 꺼내기 시작했다.
“바알이 내게 새로운 세상을 만들 거라고 하던데, 온전히 마족들만의 세상을 말이야.”
“고상하게 포장했네.”
세은이 본 바알은, 자신이 새로운 세계의 신이 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레모리에게 그걸 그대로 전달하면 당연히 거절당할 테니, 포장을 하는 것은 당연했다.
“솔직히 말해서, 바알이 얘기한 것 중에 마족들만의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말은 나도 어느 정도 동의하는 바야. 지금의 마계는 너무 혼란하거든. 그만큼 이성을 잃은 마물들이 너무 많으니까 말이야.”
그레모리의 말이 이어졌다.
“그러나 바알의 제안 중에서 이상한 점은, 마계가 아니라 이곳에 마족들의 세상을 세운다는 거야. 어째서? 마물들만 적당히 격리하면 되는 쉬운 길을 놔두고 새로운 곳을 정복하려고 하는 거지?”
그레모리의 눈이 세은에게로 향했다.
“물론, 네가 마계를 다녀왔다고 하니 너를 피해서 온 것일 수도 있지만. 이건 정말로 말이 되지 않는 거니까 이리로 찾아온 거야.”
“내가 마계에 갔을 거라는 건 어떻게 알았어?”
“내 힘이 더 줄어든 걸 보면 모르겠어?”
“아, 그렇네.”
그레모리의 말에 세은은, 왜 그녀의 힘이 더 약해졌는지 알 수가 있었다.
그녀는 세은과 맺은 맹약의 표시가 사라지지 않자 미래를 보기 위해 다시 예지를 사용했던 것이었다.
알았다는 표정을 짓는 세은의 표정이 얄미웠는지, 그레모리가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예지는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여주지 않거든.”
그레모리의 말에 세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다행이네. 그나마 제정신 박힌 마족들이 있어서 말이야.”
“제정신 안 박힌 놈들이 더 많은 건 사실이지.”
그레모리의 세은의 말에 동의했다.
“그리고 애초에 그런 분위기 조성에 일조한 게 바알이잖아. 자신의 영지 말고는 관리도 하지 않고 말이야. 그런데 이제 와서 앞으로 나서겠다고?”
그레모리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처음 마왕이 되었을 때부터 그랬다면 믿음이 갔겠지만, 지금은 아니야. 하지만 일단은 마계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들어야겠어. 단순히 의심이 간다고 바알과 적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단순한 의심은 아니지 않아? 예지를 봤다며.”
“흥. 어떻게 말하든 내 마음이니까 닥쳐.”
세은이 가볍게 웃으며 그레모리를 놀리자, 그레모리가 다시 짜증을 냈다.
아무래도 지금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같은 마왕을 믿지 못하고, 선신의 사제인 세은의 말을 들으러 와야 하는 상황.
반대의 상황이었어도 세은의 기분이 좋지 않았을 것은 분명했다.
세은은 놀리는 것을 그만하고, 싱긋 웃으면서 마계에서 있었던 일을 요약해서 전달했다.
물론, 아바돈과 있었던 일은 말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바알과 있었던 일만 얘기했다.
“바알이 모든 마왕들과 상급 이상의 마족들을 초대해서 파티를 열었지, 그리고 거기서 바알 자신에게 적대하는 마족들을 모두 청소하려고 했어.”
“그 새끼 정말 미친 거 맞네.”
거기까지 들은 그레모리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또다시 욕설을 내뱉었다.
물론 자신과 적대하는 마족들을 처치할 수는 있었다.
그런데 파티를 빙자해서 모아서 처리한다는 사실이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그 미친놈이 어떻게 했는데?”
그레모리가 세은을 재촉했다.
세은은 그레모리의 재촉에 다시 입을 열어 얘기를 이어나갔다.
“하여튼 마침 바알의 자리를 노리던 마족 하나가 다른 마왕들과 결탁을 한 상태였더군, 물론 바알은 그것도 알고 있는 것 같았지만 말이야.”
“그리고 네가 그 편에 섰군.”
마치 그 상황을 본 것처럼 상황을 파악하는 그레모리의 말이었다.
세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그레모리의 말을 인정하며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상당히 많은 마왕들이 바알의 아래에 있더군, 나중에는 조금 위험할 뻔 했어. 그나마 아몬이 바알을 의심해서 혼자서 바알을 상대하고 있어서 다행이었지.”
“아몬까지 나왔다고?”
그레모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다른 마왕도 아니고 아몬이 움직였다니.
아몬 역시 바알과 마찬가지로, 그레모리가 마왕이 되기 전부터 마왕이었다.
그리고 예지의 능력이 있는 그레모리는, 아몬의 정체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래, 아몬도 거의 반 죽어가고 있기는 했지만 다행히 적당한 때에 만나서 바알을 이길 수 있었어.”
“그런데 왜 안 죽였어? 아몬이 나설 정도였으면 바알은 정말로 중죄를 저질렀다는 말인데. 바알이 무슨 죄를 저질렀지?”
아몬까지 나섰다는 말에, 그레모리가 속사포처럼 질문을 쏟아냈다.
그러나 세은은 천천히, 하나씩 그레모리의 의문을 풀어주었다.
“바알을 소멸시키지 못한 것은 실수야. 생각보다 준비한 게 많더군. 그리고 아몬이 나선 이유는, 바알이 신의 영역을 넘봤기 때문이고.”
“신의 영역을 넘봤다?”
잠시 세은의 말을 곱씹던 그레모리는, 이내 경악하며 말했다.
“그럼 바알이 감히 창조에 손을 댔다는 말이야?”
“그래. 맞아. 바로 그 말이야.”
그레모리는 세은을 바라보았다.
세은의 말이 진실인지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그레모리의 커다란 눈이, 단 한 번도 깜빡이지도 않고 세은의 눈을 직시했다.
“휴우……. 정말로 사실인가 보네. 바알 이 미친 병신 새끼 같으니라고.”
그러나 세은의 눈에서 흔들림을 읽지 못한 그레모리는, 결국 세은의 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