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8
55. 다시 지구로 (4)
“끄으으…….”
주변은 처참했다.
방금 전까지 여기서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났는지 증명을 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바닥은 온통 빨간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스윽―
세은이 달의 검을 다시 검집에 넣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독한 새끼.”
아무래도 전의 일본인 각성자와는 그 정신력부터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지가 절단되는 고통을 수십 번이나 견뎌낸 마르키시오의 의지는 칭찬해줄 수밖에 없었다.
“이제…… 죽……여라…….”
이내 신음을 멈추고 입을 연 마르키시오가 꺼낸 말이었다.
어차피 이대로 목숨을 건지고 돌아가도 죽는다.
본능적으로 알 수가 있는 사실이었다.
그럴 바에는 여기서 생을 마감하는 것이 더 나을 수 있었다.
지금 바싸고에게 돌아가면 절대로 곱게 죽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세은이 살려주면 어딘가로 몸을 숨긴다?
바싸고가 질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마르키시오로서는 두 번째 방법이 더 고통을 자초하는 길이었다.
그러하면 차라리 깔끔하게 지금 죽는 것이 나을 수도 있었다.
“왜 이렇게 죽고 싶어 하지?”
세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통 살고자 하는 욕심이 많아서 마왕과 계약을 하지 않던가.
그런데 정반대인 마르키시오의 행동은 의문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너는…… 모른다…… 그분들이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
마르키시오는 킥킥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하늘에서 내려온…… 공포의 대왕들이다…… 인간들은 그동안의 오만을 뼈가 저리……게 후회하게 될 거야.”
“그분들?”
세은은 마르키시오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지금 지구에 바싸고 말고 다른 마왕이 있다는 말인가?
마르키시오를 무시하고 이동하려던 세은은, 다시 그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그분들은 누구를 말하는 거지? 바싸고를 제외하고 다른 마왕이 남았나?”
“흐흐흐…… 공포에 떨다 죽어라. 그분께서는 주인의 주인이시니.”
“주인의 주인?”
잠시 고민하던 세은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뭐, 어차피 알게 되겠지. 그놈이 그놈이지 뭐.”
“크크크크크큭!”
그러나 세은의 말을 들은 마르키시오는 고통과 광기가 뒤섞인 웃음만을 흘렸다.
서걱―
세은이 휘두른 검에 마르키시오의 목이 몸과 분리되며, 어느 순간 웃음이 딱 그쳤다.
세은은 서서히 허물어지는 마르키시오의 몸을 뒤로하고, 방금 전에 얻은 정보대로 몸을 날렸다.
“그러니까 여기가 네덜란드라고 했으니까…….”
세은은 남서쪽으로 몸을 날렸다.
영국은 이번에도 섬나라라는 이점을 살려서 유럽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국가라는 정보를 들었다.
타닥―
“휴우.”
세은은 주위를 둘러보며 숲을 달려 나가다가 한숨을 쉬었다.
“이거 거의 마계라고 해도 믿겠는데?”
드넓은 침엽수림은 거의 마계의 나무들처럼 변해 있었다.
마기에 적응하다 보니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되기는 하지만, 지구로 돌아온 느낌이 들지 않아 상당히 불쾌했다.
그리고 마기에 적응하지 못한 많은 나무들은 서서히 메말라 죽어가고 있었다.
파사삭―
검게 죽어가는 나무에 세은의 손이 닿자 잘게 으스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겨우 지탱하고 있던 몸이 외부의 충격으로 인해 부셔지기 시작하자, 나무는 균형을 잃고 완전히 가루가 되어 바람에 흩날렸다.
“끄응…….”
그 모습에 세은은 신음을 흘렸다.
완전히 자연 생태계가 망가지고 있었다.
최대한 빨리 복구를 하지 않으면 다시 되돌리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 몰랐다.
타다닷―
세은은 다시 속도를 올려서 영국을 향해 몸을 날렸다.
* * *
세계 각성자 전력 연합.
원래는 유엔에 소속된 국가들 중에서, 현재 적들에게 점령된 유럽의 국가를 제외한 국가들을 모아서 다시 만들어졌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각성자 전력을 보탤 수 있는 국가들만이 가입할 수가 있었다.
아무래도 유럽과 인근에 접한 국가들보다는, 거리가 멀거나 바다가 가로막고 있는 국가들의 입김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이 연합이 새롭게 만들어질 때의 반응은 그리 좋지 않았다.
결국 각성자 전력이 없는 국가들의 보호는 나 몰라라 하겠다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거셌다.
“결국 있는 놈들끼리만 협력을 하겠다는 거 아냐?”
“그래! 비록 나라를 뺏겼지만 국민은 아직 남아 있다고.”
특히 유럽에서 넘어온 난민들의 불만이 가장 거셌다.
이런 상황에서의 불만을 타개하기 위해, 유럽 망명 정부들의 대표를 고위직에 넣으면서 불만을 무마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런 불만들을 무시하더라도 오직 각성자 전력을 움직이는 일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장점이 부각되었다.
그러다 보니 효율적으로 전력을 운용할 수 있어 불만 여론도 어느 정도 물러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더 이상 밀리는 것은 막아낸 것 같습니다.”
눈앞에 있는 서류를 모두 확인한 사노가, 옆에 있는 장위건과 이고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다행이군요.”
장위건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곳에 있는 각성자 전력이 지구 전력의 9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린다면, 일반 병력들의 희생이 더 요구될 수밖에 없다.
일반 병력들의 투입은 필연적으로 무기에 위한 과한 파괴를 가져왔다.
민가에 너무 많은 피해가 가고, 전력 보존 차원에서도 각성자들로만 상대할 수 있어야 하는 게 가장 이상적이었다.
물론 과학적으로도 계속 성과를 얻기 위해 모든 국가가 머리를 맞대고 노력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고 해도,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버틸 수 있어야 했다.
그렇기에 세계 각성자 전력 연합은 최선을 다해 전선을 유지하려고 하고 있었다.
“허허. 모든 국가가 이렇게 한마음으로 뭉치는 것도 처음인 것 같습니다.”
사노가 실없이 웃으며 농을 건넸다.
그의 말대로 국가 간의 전쟁이 아닌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거대한 공공의 적이 만들어낸 기적이다.
“그래도 언제까지 이렇게 유지만 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그렇기는 합니다.”
이고르의 말에 사노가 대답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세은이 참전했던 마지막 전투를 목격한 이들이었다.
그때 보여준 세은과 바싸고의 무력은 이들로 하여금 섣불리 행동을 할 수 없게 제약하고 있었다.
“이 정도 시간까지 적이 움직이지 않는 걸 봐서는, 그쪽도 움직일 수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겠습니까?”
“흐음…….”
이고르의 말에 이번에는 장위건이 신음을 흘렸다.
확실히, 그때 보여준 무력이라면 이렇게 소모적인 전선을 유지할 필요도 없다.
직접 움직이면 이쪽의 수준으로는 막아내지 못할 것 같았다.
아니, 헤이런과 그 일행들.
그리고 가장 강한 각성자들을 모으면 상대를 할 수는 있을 터였다.
다만 그렇게 강자들이 빠지면 다른 전선에서 문제가 생긴다는 함정이 있었다.
“하긴, 충분히 신중했지요.”
결국 생각을 마친 사노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이 정도까지 기다려서 함정을 파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첩보를 봐도, 우리가 대승을 한 경우에도 아무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이고르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아무리 적들의 수가 많다고 해도, 이토록 피해가 누적되면 문제가 생긴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이 정도면 움직일 수 없는 이유가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럼 적의 심장을 직접 타격해 보는 것을 한번 논의해 보도록 하지요.”
“저도 찬성입니다.”
사노와 장위건, 이고르의 의견이 하나로 일치되었다.
그렇다면 다음 회의에 이 의견을 안건으로 올리면 끝이었다.
아무래도 현재 가장 힘이 강한 나라는 이 셋이었으니까.
똑똑―
“들어와!”
셋이 적의 심장을 치는 일에 대해 활발하게 의견을 나누고 있을 때였다.
문을 노크하는 소리에 사노가 입장을 허가했다.
사노의 허락을 받고 안으로 들어온 부하는, 살짝 상기된 표정으로 사노에게 보고를 올렸다.
“보고입니다! 실종되었던 세은 도가 현재 영국에 도착. 이리로 이동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뭐?”
“뭐라고?”
예상치 못한 낭보에 셋의 표정이 의심 반, 환영 반으로 바뀌었다.
* * *
텅!
철과 철이 부딪히는 소리가 수련장에 울려 퍼졌다.
“큭!”
그러나 오히려 공격한 사람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소리에 뒤에서 그 수련을 지켜보던 선임자가 한마디를 보탰다.
“그게 아니야! 그 마물은 정확히 머리나 심장을 노려야 해.”
“아! 저도 아는데 반항이 너무 심한 걸 어떻게 합니까?”
“그러다가 죽고 싶어? 실전에서 어이 없이 죽지 말고 연습하라고 억지로 생포해 온 거 아냐!”
“쳇!”
선임자의 말에 남자는 입을 삐죽거리며 무기를 고쳐 잡았다.
눈앞의 마물이 침을 뚝뚝 흘리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이 마치, 고작 연습용 허수아비로 잡혀온 자신의 처지를 모르는 것 같아 더욱 짜증이 났다.
이렇게 멍청한 놈 하나 제대로 잡지 못하다니, 그것도 이렇게 펼쳐진 판에서 말이다.
남자는 더욱 손에 힘을 주며 집중력을 끌어 올리고 달려 나갔다.
이번에는 꼭 단칼에 참살하고 말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좋아! 그 기세로 한 번에 갈라버려!”
“하압!”
터벅, 터벅.
그렇게 남자와 선임자가 마물을 상대로 훈련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수련장 안으로 들어왔다.
지부장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선임자는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의 옆에 있는 사람을 보고는 황급히 모든 수련을 중지했다.
이 각성자 지부의 총책임자가, 마치 아랫사람처럼 공손하게 한 남자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부장이 연신 고개를 숙이며 남자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러나 남자는 당연한 것을 했다는 표정으로 마주 인사를 할 뿐이었다.
“아닙니다. 마물을 잡으려면 응당 이 정도는 해야지요.”
“말씀만으로 감사합니다. 정말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하하. 정말로 그랬으면 좋겠네요.”
남자, 세은은 지부장의 인사를 가볍게 받아냈다.
“호오. 이 마물은 처음 보는데?”
그리고 지부장과 대화를 마친 세은은, 수련장 안에 단단하게 잡혀 있는 마물을 바라보았다.
세은도 처음 보는 형태의 마물.
한번 특성을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세은은 뒤로 가서 방금 전까지 그 마물과 싸우던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하이.”
“하……이?”
세은이 말을 걸자, 상대도 마찬가지로 답례를 했다.
“방금 전에 이 마물과 전투하는 것을 봤는데, 이 마물의 약점이 무엇이 있습니까?”
“저…… 그게…….”
현역이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자, 함께하고 있던 선임자가 대신 설명을 시작했다.
“이 마물은 피부가 매우 두껍습니다. 그러므로 머리를 한 번에 날리거나, 심장을 파괴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격을 당하기 십상입니다.”
“그렇군요.”
남자, 세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물을 확인했다.
스릉―
그리고는 별의 검을 꺼내들었다.
그 어떤 검보다도 번쩍이는 예기가 수련장의 실내조명에 비쳤다.
“다른 약점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흐음.”
잠시 위아래로 마물을 훑어보던 세은은 그대로 마물에게 달려들었다.
“지금부터 다른 약점이 있는지 찾아볼 테니. 잘 보시기 바랍니다.”
“예?”
그러나 세은은 이미 마물에게 몸을 날린 다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