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5
55. 다시 지구로 (1)
세은이 마계에서 계약을 마치고 돌아가기 위해 게이트로 향하고 있을 무렵, 지구에서는 남은 이들이 바싸고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성급하게 달려들지 마라!”
“헤이런! 마물들의 숫자가 너무 많습니다.”
이지호의 다급한 외침에 헤이런이 단호한 어조로 명령을 내렸다.
“조금만 더 버텨! 지원군이 올 것이다.”
“마물들이 숫자로 밀고 들어와서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습니다!”
“조금만 참아라! 참으면 지원군이 올 것이다!”
헤이런은 마물들을 상대하는 데 압도적인 실력을 보이며, 세은의 일행들을 도와 전투 지휘하고 있었다.
세은이 사라진 전투에서 헤이런의 실력을 본 이지호는, 헤이런에게 도움을 청해서 세은의 빈자리를 최소화하려 노력했다.
아무래도 세은이 없는 이상, 한국의 전력은 다른 국가의 각성자 전력에 비해 밀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
다행히도 헤이런은 세은이 속해 있던 곳이라는 이유로 이지호를 돕고 있었다.
“좌측에서 마물들이 증원되는 모습이 포착됩니다!”
세은이 없는 동안 완전히 자신의 영역을 구축한 바싸고는, 유럽에 마계와 비슷한 환경을 만들어 놓고 쉴 새 없이 마물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애초에 유럽의 고위층에 침투한 덕분에 모두 힘을 합쳐서 대항해야 할 전력이 반으로 나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세은과의 전투에서 바싸고도 상당한 부상을 입은 탓에 전면으로 나서는 일이 없다는 사실 하나였다.
“추기경님! 저희가 왔습니다!”
좌측에서 추가된 마물들이 본대에 합류해서 썰물처럼 밀려오려는 찰나.
우측에서 그토록 기다리던 원군이 도착하는 소리가 들렸다.
“제른!”
다른 곳에서 이동하던 마물들을 처리하고 합류하는 제른과 그의 휘하 부대였다.
“우측에 원군이 보인다!”
“원군이 적들을 돌파할 때까지만 버텨라!”
“우아아아!”
“원군이 왔다!”
“다 죽여 버려! 마물 새끼들!”
“살았어!”
물처럼 밀려오는 마물들의 모습에 사기가 바닥을 치던 각성자들도, 제른의 부대가 마물들을 돌파하기 시작하자 원기 충천하여 더욱 힘을 발휘했다.
그렇게 양쪽에서 공격을 당한 마물들은 어느 쪽을 먼저 공격해야 할지 몰라 당황에 빠졌다.
당황에 빠진 마물들을 잡는 일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끊임없이 밀리던 방금 전과는 달리, 제른이 도착한 다음에 마물들을 처치하는 과정에서는 사상자의 수가 대폭 줄어들었다.
시의적절하게 도착한 원군 덕분에, 이 지역의 마물들을 모두 소탕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전략상의 문제로 인해 처음에 본대로만 마물들을 상대한 시간 동안, 상당한 피해를 입은 상태였다.
“부대별로 피해 상황을 보고하도록.”
헤이런의 명령에 휘하의 중간 관리자들이 빠르게 인원을 점검해 나가기 시작했다.
빠르게 증식하는 마물과는 달리, 각성자들은 쉽게 수급할 수 없는 인력 자원이었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피해가 심해지고 있었다.
“다른 지역에서 연락은 없나?”
효율을 위해 각성자들로 구성된 부대와, 일반 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군인들은 따로 움직였다.
그리고 지금 헤이런이 이지호에게 물어보는 것은 바로 각성자가 아닌 군인들이 담당한 지역이었다.
“지형이 초토화되기는 했지만, 일단 마물들을 물리치는 데는 성공했다고 합니다.”
“그나마 다행이군.”
이지호의 말을 들은 헤이런이 한숨을 돌렸다.
유럽 전체의 국경을 각성자들만으로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거기에 각자의 본국을 수호할 최소한의 병력도 남겨놔야 했다.
이대로 유럽을 놔두면 언젠가는 다른 국가들도 위험에 처할 것이라는 대의에 공감해서 모든 국가들이 병력들을 파병한 상태였다.
그러나 인력으로 만든 거대한 전선이 언제까지 유지될지는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방금 전에 말을 했던 것처럼, 마물들의 증식 속도는 굉장히 빠르고 인력의 수급에는 무리가 있었다.
“휴우. 힘들군.”
“헤이런이 도와주셔서 다행입니다.”
“그저 임시방편이라 부끄러울 뿐이다.”
“아닙니다. 세은 씨가 사라진 지금, 헤이런의 도움은 정말로 커다랗습니다.”
“성하께서 어서 돌아 오셔야 할 텐데…….”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며 먼 곳을 바라보는 헤이런에게 이지호가 물었다.
“여태까지는 헤이런의 말을 믿고 기다렸지만, 여태까지 돌아오지 못하는 것을 보니 아마도…….”
이지호는 차마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뒤를 흐렸다.
세은이 마지막 전투에서 사라진 지도 어느새 반년이 넘게 흐른 다음이었다.
여태까지는 헤이런의 말을 믿고 세은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지만, 여태까지 오지 않으면 그가 없다고 가정하고 전략을 세워야 했다.
하지만 헤이런은 그런 이지호의 말에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성하께서는 꼭 돌아오실 것이니 기다리지.”
“그래도…….”
“자, 어쨌든 이곳도 어떻게 방어에 성공했군. 다른 곳을 도우러 빨리 이동하지. 우리가 이렇게 쉬고 있을 시간이 없어.”
뭐라고 더 말을 하려는 이지호의 말을 끊고 헤이런이 명령했다.
“알겠습니다.”
결국 이지호는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하고 부대를 이동시켰다.
지금으로써는 헤이런의 심기를 거슬러봐야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현재 동맹의 사기를 최소한으로 유지하는 장치가, 세은이 돌아온다는 믿음이었기 때문에 섣불리 움직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래도 이 문제는 다른 이들과 상의를 해봐야겠어.’
명실상부하게 다른 국가와의 외교를 전담하는 루트로 인정받은 이지호가, 이제는 익숙해진 다른 이들을 떠올렸다.
미국의 사노와 러시아의 이고르, 그리고 중국의 장위건.
이들은 처음부터 공조를 해왔던 공과 능력을 인정받아 전쟁이 대대적으로 발발한 지금에도 중요한 외교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중이었다.
“준비를 모두 마쳤으면 바로 이동한다!”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이동하겠습니다.”
“이동한다!”
이지호는 물론, 휘하의 부대원들도 익숙하게 정비를 마치고 바로 이동을 시작했다.
* * *
“어떻게 하죠, 언니?”
“숫자는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으니까 지금 처리하자.”
정찰을 나섰던 에린의 질문에 채연이 대답했다.
둘은 세은의 동료였다는 프리미엄을 인정받아 원하는 조를 짜서 정찰을 하는 임무를 맡은 상황이었다.
“알겠어요!”
“그럼 셋을 신호할 테니 맞춰서 들어갈 수 있게 준비해.”
채연의 결정을 들은 영한이 신호를 준비했다.
그러고 그에 맞춰서 이재호가 마법을 발동했다.
“자, 그럼 셉니다. 하나, 둘, 셋!”
탓― 타탓!
“라이트닝 스피어!”
영한의 신호가 끝나는 것과 동시에 에린과 채연이 몬스터들을 향해 달려 나갔다.
그리고 그 위로 어느새 완성이 된 재호의 마법이 몬스터들의 중심을 노리고 날아갔다.
콰앙!
“꾸에엑!”
몸을 감전시키는 라이트닝 스피어가 작렬하자, 마법에 적중당한 몬스터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날아온 마법에 당황한 틈을 타서, 에린과 채연이 몬스터들을 헤집기 시작했다.
파앙― 파앙―
채연의 화살이 날카롭게 사위를 가르며 몬스터들의 급소를 꿰뚫었다.
“꾸억!”
우우웅―
“이야압!”
그리고 에린 역시 신성력을 잔뜩 끌어올리며 몬스터들을 베어 나갔다.
쿵―
“계속 이렇게 소규모로 떨어져 있으면 좋은데 말이야.”
순식간에 작은 몬스터 무리를 전멸 시키고, 채연이 입을 열었다.
“그러게 말이에요. 너무 숫자가 많아서 문제예요. 부상자가 많아서 감당이 안 될 정도니까요.”
“하긴, 치료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에린 너랑 헤이런 할아버지의 부하들밖에 없으니까.”
“그래도 그 정도라도 있는 게 어디야? 안 그랬으면 전선은 벌써 뒤로 밀려도 한참 밀렸을 거야.”
에린과 채연의 대화에 영한이 끼어들었다.
영한은 언제 다쳤는지 뺨에 날카롭게 베인 흉터가 새겨져 있었다.
“그렇기는 하지…….”
채연이 영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확실히 사상자에 비해 사제가 부족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각성자와 마찬가지로.
아니, 더 희귀한 것이 사제들이었다.
그나마 에린이 아니었다면 헤이런의 수하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을 테니까.
“자, 그만 쉬고 이제 이동하자. 정찰해야 할 곳이 많아.”
잠깐 나무에 등을 기대고 서 있던 재호가 일행을 재촉했다.
세은의 부탁에 더해, 그레모리가 구해달라는 물건을 열심히 구해준 재호는 상당한 마법적 발전을 이룬 상태였다.
조금의 깨달음만 있으면 6서클로 올라갈 수 있는 상태.
덕분에 이 일행에 함께 할 수가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짐만 되는 관계로 알아서 여기에 합류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 전에 회복부터 하죠.”
“회복 좋지.”
우우우웅―
에린의 몸에서 피어난 빛이 일행을 감쌌다.
“휘유우. 언제 받아도 기분이 좋다니까.”
에린의 신성력에 위해 피로를 회복한 영한이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럼 가자.”
채연이 말과 동시에 몸을 날렸다.
정해진 구역을 모두 정찰하고 혹시 모를 대규모 마물을 조기에 발견하는 것이 이들의 임무였다.
지금처럼 소규모 마물들을 발견했을 경우 재량에 따라 전투에 임할 수 있는 자율 작전권도 부여받았다.
덕분에 더 자유롭게 임무를 수행 할 수 있었고, 팀워크 역시 점점 견고해지고 있었다.
“앞의 수풀에서 수상한 움직임 발견!”
일행 중에 가장 시야가 좋은 채연이 가장 먼저 수상한 움직임을 포착했다.
아무래도 활을 사용하다 보니 집중력과 시야가 다른 이들보다 더 넓을 수밖에 없었다.
“멈춰!”
그리고 수상한 움직임을 발견하는 것과 동시에 모두의 걸음이 멈췄다.
아무리 은밀하게 움직인다고 해도 미세한 소리까지 감출 수는 없는 법이다.
거기에 채연이 움직임을 발견할 정도면, 경우에 따라 저쪽에서도 일행을 발견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채연의 명령에 따라 이동을 멈춘 일행은, 더 자세한 결과가 나올 때까지 대기했다.
“이번에도 역시 소규모 오크 무리 발견. 9마리씩 5부대가 산개해 있어.”
“다른 놈들은 없고?”
“응. 그냥 오크만 총 45마리.”
“45마리라…….”
“그 정도면 처리할 수 있지 않을까요?”
“처리는 당연히 하지만, 시간이 문제야. 우리가 지금 맡고 있는 임무는 어디까지나 정찰이 주니까.”
“정면으로 들어가지 말고 유인을 하면 빠르게 처리하는 게 가능할 것 같긴 한데.”
“그럼 가장 움직임이 빠른 나랑 영한이가 움직이고, 에린 너는 혹시나 하는 상황에 지원해줘.”
“네!”
“그럼 나는 마법을 준비하고 있으면 되겠군.”
“맞아요.”
이제는 척척 자신의 할 일을 찾는 재호의 말에 채연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저 앞에 보이는 공터로 유인할게요.”
“내가 왼쪽을 맡을게.”
타앗―
영한이 먼저 왼쪽의 오크 무리들을 유인하기 위해 몸을 날렸다.
그리고 채연은 그런 영한과 반대로 우측을 향해 달려갔다.
“꾸오옥!”
단신으로 달려오는 두 명의 인간을 발견한 오크들이 흥분했다.
그리고는 채연과 영한을 잡기 위해 악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차왁―!
“꾸에에엑!”
영한의 검에 맞은 놈이 쓰러진 후에도, 오크들은 순식간에 몰려 들어왔다.
“영한아!”
“알았어!”
그리고 채연의 외침과 동시에 영한은 몸을 돌려 방금 전에 정한 장소로 오크들을 유인했다.
“피해요!”
그리고 에린의 외침과 함께 채연과 영한은 재빨리 옆으로 몸을 날렸다.
파지지직!
재호의 마법이 한 장소로 모인 오크들을 타격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꿰에에엑!”
“마무리하자!”
그리고 마법에 타격되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몬스터를 참살하는 일은, 마치 식은 죽 먹기와 다름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