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
54. 결말을 향해 (1)
팔뚝만 잘려나간 것이면 모르겠지만, 어깨까지 통째로 날아갔다면 그야말로 치명상인 부상이다.
레라지에가 인간이었다면 이미 쇼크로 사망에 이르고도 남았을 것이었다.
허나 마왕은 애초에 인간이 아닌 마족이다.
거기에 바알의 사술로 그 능력마저 상승된 상황.
어깻죽지부터 완전히 날아갔는데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출혈이 거의 다 멎어 있다.
단순히 마기의 질과 양뿐만이 아니라, 신체의 능력마저도 비약적으로 상승해 있었다.
키이잉.
레라지에에게서 끝까지 하려는 의지가 느껴졌다.
치켜드는 그의 남은 손에 들린 단검에 강렬한 마기가 운집되었다.
당장이라도 앞으로 쏟아져 나올 기세였다.
콰콰콱!
“……?!”
그러나 레라지에는 세은을 공격하지 못했다.
갑자기 옆에서 훅 끼쳐드는 다른 그림자가 그를 습격했기 때문이다.
화르르륵!
옆에서부터 검붉은 화염을 뿜어내는 자.
바로 아몬이었다.
처음 세은이 지하로 왔을 때에도 적들과 싸우고 있던 아몬이지만, 그의 두 눈은 아직도 형형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신의 개여! 내가 마무리할 테니 아바돈을 도와라!”
“이게 무슨?”
한 번에 전부 이해하기에는 버거운 상황이다.
그러나 아몬이 방금 전까지 지하에서 싸우고 있던 사실이, 혼란을 최소한으로 줄여주었다.
“아모온!”
순식간에 세은을 놓친 레라지에가 분노에 찬 외침을 뱉었다.
자신의 팔을 갈라낸 적에게 다가가지 못하게 하는 행동이 곱게 보일 리가 없다.
키이잉!
쩡- 쩌엉!
한 번, 두 번.
순식간에 서로 열 번을 넘게 공격을 주고받는다.
레라지에가 세은에게 치명상을 입은 만큼, 아몬도 여러 명의 적을 상대하느라 지쳐 있었다.
뿜어내는 기세 역시 줄어들지 않았고, 서로를 향해 맞부딪혀 가는 위력 역시 그대로다.
그러나 어딘가 지쳐 보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특히 주무기를 사용하지 못하는 레라지에에게 그런 점이 도드라져 보였다.
쩌정!
점점 밀리던 레라지에의 공격에 파탄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머리끝까지 차오른 분노를 양분으로 극한의 힘을 꺼내들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지칠 수밖에 없는 탓이었다.
“크아아아!”
레라지에는 결국 여기까지가 한계처럼 보였다.
이제는 아몬의 공격을 막아내고 반격을 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단순히 아몬의 공격을 방어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워 보였다.
‘조금이라도 회복을…….’
체력을 회복하려면 지금이 기회였다.
세은이 재빨리 신성력을 이용해 회복을 시도했다.
아몬이 레라지에를 상대해 주면서 얻은 시간이다.
매우 짧은 시간이지만 그야말로 가뭄의 단비 같은 상황이었다.
콰앙-!
“크앗!”
아바돈의 신음 소리에 세은의 고개가 다시 뒤로 돌아갔다.
“젠장!”
회복을 하면서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었다.
아몬이 달려들면서 아바돈을 도우라고 했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죽어라!”
“죽어!”
옆에서 들려오는 소름끼치는 목소리에 세은의 고개가 다시 움직였다,
“…….”
방금 전까지 아몬이 상대하던 마족들이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아몬 역시 완전히 처리를 못한 것이다.
꾸욱!
세은이 쌍검을 강하게 고쳐 쥐었다.
아무래도 바알의 사술로 인해 개조된 자들은, 신체적인 능력이 상상 그 이상인 것 같았다.
쉽게 죽지 않는 모습을 계속해서 보이고 있었다.
“후우우우우!”
결국 회복은 깊게 숨을 들이 마시며 호흡을 정돈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휙. 휘익.
세은의 시선이 전장을 크게 둘러본다.
어느 쪽을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하는가.
‘결정했다.’
아바돈과 푸르카스가 제일 먼저다.
아몬이 도우라고 말을 했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거기에 아몬보다는 아바돈과 협공을 하는 것이 더 마음이 편했다.
한 바퀴를 돌아보고 그쪽으로 다시금 고개를 돌렸을 때.
바로 그때였다.
콰광!
폭음에 가까운 음성이 귓전을 울리며 강렬한 마기가 사방을 휩쓸었다.
동시에 세은의 앞으로 줄 끊어진 연처럼 하나의 신형이 떨어져 내려왔다.
턱!
“아바돈!”
레라지에의 화살에 복부가 관통당했지만, 화살이 꽂힌 그대로 복부가 회복되어 있는 푸르카스가 보인다.
상상 이상의 괴사였다.
바알이 계속 자신만만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었다.
아주 잠깐 동안 주변을 돌아보면서 생각을 정리했던 것이 커다란 실수가 되어 돌아왔다.
도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을 때, 그대로 달려 들어가서 아바돈을 도왔어야만 했다.
입으로 피를 쏟으며 땅에 몸을 뉘인 아바돈, 그리고 그런 아바돈을 따라붙으며 마지막 일격을 날리려는 푸르카스의 낫이 보였다.
“젠장!”
파아앙!
달려가서는 막을 수가 없는 거리다.
푸르카스가 먼저 도착할 수밖에 없는 위치.
도저히 거리가 나오지 않는 세은이 빛의 화살을 날렸다.
터엉!
세은의 공격을 낫으로 쳐내는 푸르카스다.
순간적으로 그의 몸이 움찔했지만, 여전히 낫을 내려찍기만 하면 아바돈의 목숨이 날아가는 순간.
“안 돼!”
빛살처럼 날아들며 울리는 한 줄기 맹렬한 파공음이 있었다.
휘리릭!
달려오던 가속력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푸르카스의 낫을 휘감은 하얀 채찍이 보였다.
“이거,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군.”
“발레포르!”
자신의 앞을 막아선 채찍의 주인을 보며 푸르카스가 소리쳤다.
하얀 채찍을 든 건장한 체격의 남자, 그러나 머리에는 수사슴의 아름다운 뿔이 자리 잡고 있었다.
마왕 제6위 발레포르, 그가 아바돈을 구하기 위해 나선 것이었다.
“아바돈 님!”
그리고 한발 늦은 신형이 빠르게 다가와 아바돈의 머리를 받쳐 들었다.
발레포르를 데려와 아바돈을 구한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니었다.
처음 바알이 지하로 내려갈 때 홀로 반대 방향으로 이동한 아바돈의 참모, 릴리트였다.
밖의 전황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해 지원군을 이끌고 돌아온 것이다.
“이거, 아몬까지 있다니? 바알이 뭔가 이상하기는 한가 보군.”
갑작스럽게 난입한 발레포르의 존재로 인해 양쪽 다 조심스러워졌다.
“내가 이상하다니? 이거 섭섭하군.”
오직 바알만이 웃으며 그런 발레포르의 말을 받았다.
“글쎄? 상황이 말을 해주고 있는 것 같은데 말이야.”
여전히 푸르카스의 낫을 휘감은 채 힘을 겨루고 있는 발레포르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놈만 봐도 아주 이상한 것이 분명하게 보이는데 말이야.”
발레포르가 푸르카스의 심장에서 점점 더 강하게 뻗어 나오는 마기의 뿌리를 보며 말을 이었다.
“이거, 바알 네놈 작품인가?”
“후후. 어떤가? 정말로 아름답지 않은가? 마족, 마왕. 그 이상의 새로운 종족이라네. 비교가 되지 않는 회복력! 강인한 신체! 그리고 심장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새로운 구조! 이것이야말로 신세계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내 눈에는 그냥 기생충에 감염된 것처럼 보이는데?”
“하하. 직접 변해보면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것이네.”
“사양하지. 단순히 이렇게 보기만 해도 더러워서 말이야.”
계속해서 이어지는 설전이다.
그때.
“안 됩니다!”
타앗!
릴리트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왔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한다.
릴리트가 고개를 받치고 있던 자, 아바돈이 어느새 몸을 일으키고 땅을 박찼다.
방금 전까지 정신을 잃을 정도로 거대한 충격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체하지 않고 푸르카스를 향하여 몸을 날리고 있는 아바돈의 모습이 비쳐 들었다.
“어림없다!”
터엉!
그 모습에 결국 바알이 땅을 박찼다.
발레포르의 채찍에 무기가 묶인 푸르카스.
이대로라면 푸르카스가 당하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바알이 아바돈을 향해 돌진하는 것을 본 세은 역시 몸을 날렸다.
뒤에서는 여전히 아몬이 레라지에와 손속을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오직 푸르카스만 보는 아바돈과, 그런 아바돈을 노리는 바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모두의 눈이 한곳에 집중된 이때.
바알이 품에서 짙은 어둠을 품고 있는 구체를 꺼내들었다.
쉬이익!
그리고 그것을 그대로 아바돈을 향해 던지는 바알이다.
“……!”
느껴지는 기운만 봐도, 레라지에와 푸르카스의 심장에서 자라난 것과 같은 것이 분명했다.
마치 이번에는 아바돈을 잡아먹겠다는 듯, 날아오는 기세가 그야말로 강렬했다.
서걱!
아바돈의 아볼루온이 한발 먼저 푸루카스를 완전히 횡으로 베어냈다.
그리고 바로 지척으로 다가온 바알의 마기의 씨앗.
아바돈이 애써 팔을 비틀어 씨앗을 막아내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금방이라도 아바돈에게 씨앗이 붙을 것 같은 상황.
세은이 아바돈을 돕기 위해 달려들고 있었다.
터어억!
“비켜!”
손으로 마기의 씨앗을 잡아낸 세은이다.
치이이이잉!
순식간에 세은의 손을 타고 오르며 휘감은 씨앗.
우우웅-
세은의 목에 걸려있는 성물이 짙은 울음을 토해낸다.
꾸욱!
그대로 세은의 오른팔을 감싸버리는 어둠이 보였다.
“크읏!”
팔을 통해서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짙은 어둠이 파고들어 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 마기라니……!’
마치 모든 것을 빨아들일 것 같은 진득한 느낌이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세은의 정신까지 빨아들일 것만 같다.
우우우우우웅!
그리고 그에 맞서는 성물의 힘이 전해진다.
바알이 가지고 있는 마신의 성물에 의해 탄생한 마기가, 세은이 지닌 선신의 성물에 반발하며 더 강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그대로 움직임을 멈춰선 세은.
옆에서는 반으로 갈린 푸르카스의 몸이 서서히 기울고 있었다.
“하하하! 에일린의 제1사제를 새롭게 창조하게 되는구나.”
바알이 들뜬 목소리로 소리쳤다.
목표로 삼았던 아바돈은 아니었지만, 이미 다른 종족에게도 실험을 끝낸 상황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세은이라면 더 큰 힘을 낼 수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어때? 힘이 느껴지지 않나? 그것도 아주 순수한 힘이!”
아니다 다를까.
바알의 말처럼 세은의 팔을 타고 올라오는 씨앗이 유혹하듯 자신의 힘을 과시한다.
순수하고 또 순수한 힘.
너무나 순수해서 신성력까지도 흡수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누구나 한 번은 느끼는 밤의 묘한 마력이, 세은의 팔을 휘감은 씨앗에서 느껴졌다.
“새로운 탄생으로 나아가는 씨앗을 얻은 기분이 어때? 그 순수하고 진한 힘을 느끼고 싶을 테지. 힘에는 옳고 그른 것이 없다. 강한 힘! 그 자체가 옳은 것이지. 그 힘과 함께라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
“…….”
계속해서 말이 없는 세은이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아바돈과 릴리트, 발레포르가 긴장을 숨기지 못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세은 정도의 강자가 레라지에나 푸르카스처럼 변한다면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대로 필패.
“어서, 어서! 내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라! 새로운 창조자인 나를 경배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이제는 거의 미친 것처럼 목소리를 높이는 바알의 모습이 보인다.
완전히 맛이 나간 것 같은 모습.
우우우우웅.
“후우우우…….”
긴장된 순간, 세은은 숨소리가 주변을 잠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