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
53. 마기의 씨앗 (6)
쩌정!
거대한 격돌음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슈우우웅.
엄청난 기파가 주위를 휩쓴다.
그러나 각자가 눈앞의 상대에게 집중을 하고 있는 지금, 주변에 신경을 쓸 여유는 보이지 않았다.
쾅!
세은의 공격을 정면에서 계속 받아내면서도 레라지에는 뒤로 밀려 나가지 않았다.
아무리 바알이 무엇인가 수작을 부렸다고 해도 쉽게 믿어지지가 않는 광경이었다.
그런 레라지에를 상대하는 세은의 표정이 점점 굳어져갔다.
당장 도움을 받을 구석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아바돈도 푸르카스를 상대하느라 여념이 없는 것이다.
그 와중에 바알은 뒤에서 여유롭게 관람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만든 예술 작품을 바라보는 장인의 눈빛.
한눈에 봐도 매우 뿌듯한 표정이었다.
‘지금 바알이 참전하면 필패다.’
상황을 보아하니, 아바돈뿐만 아니라 아몬도 바알과 적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최대한 빨리 끝내고 합류해야 돼.’
마음을 굳힌 세은이다.
바알이 언제 움직일지 모르니 힘을 아낄 수가 없었다.
쩡- 쩌정!
세은의 오른손이 달의 검을 힘차게 뻗어 나갔다.
우우웅-
지금까지와는 수준이 다르다.
일격에 상대를 참살하겠다는 의지가 깃든 공격이었다.
상대로서는 같이 무기를 맞대기에 버거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레라지에는 주저하지 않고 마주 땅을 박찼다.
새롭게 생긴 힘을 믿는 것일까.
그도 아니라면 단순히 바알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어찌 되었건 결국은 결판을 낼 수밖에 없는 상황.
어차피 싸워야 할 것이라면 망설임을 가질 필요가 전혀 없었다.
쿠웅!
아무래도 레라지에의 활보다는, 세은의 검들이 근접전에 더 유리하다.
그러나 시위가 무엇으로 제작되었는지 레라지에의 활은 세은의 달의 검을 정면으로 받고도 끊어지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오히려 반달 보양의 방패를 휘두르는 것 같은 모양.
쩌엉!
또다시 별의 검이 묵직하게 공기를 가르며 재차 공격을 시도했다.
세은이 공격을 받아낸 레라지에의 몸이 반 바퀴 회전했다.
솨아아악.
세은의 강력한 공격을 받아낸 회전력을 살려서 그대로 짓쳐들어오는 공격이다.
텅!
세은이 달의 검을 휘둘러 상대의 공격을 막아냈다.
순식간에 어긋나는 궤도.
그러나 그걸로 끝이 아니다.
방금 전에 레라지에가 단검을 사용했었다는 사실이 그제야 떠올랐다.
우우웅. 캉!
“큿!”
다급하게 신성력을 둘러 단검을 막아냈다.
생각보다 더 강한 마기가 신성의 피부를 뚫고 침입을 시도했다.
세은의 신성력을 파고들 정도로 순도 깊은 마기가 느껴졌다.
천적이 천적을 잡아먹듯이, 맹렬하게 파고드는 기세가 자못 사나웠다.
키이잉- 파아앙!
거기에 더해, 바로 옆에서 격렬하게 펼쳐지고 있는 아바돈과 푸르카스의 전투도 만만치 않다.
상대의 공격뿐만이 아니라 주변 전투의 여파도 신경 써야 하는 것이다.
누가 봐도 어려운 상황인 것은 분명했다.
탓!
“하앗!”
세은의 달의 검이 호수처럼 넓은 호선을 그려냈다.
레라지에의 화살을 피하기 위해 공중으로 몸을 떠올린 채, 공중에서 휘두르는 공격이다.
터엉!
이에 레라지에는 활로 세은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곧이어 쳐내오는 세은의 별의 검에 레라지에가 이번에는 단검을 뻗어냈다.
활을 쏘기 위해서는 양손 모두가 필요한 것이 당연지사.
두 손을 모두 휘두르게 되자 활을 사용할 수 없게 된 레라지에다.
그리고 세은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더욱 몰아붙였다.
쩡! 꽈앙!
빠르게 연환되는 공격에 레라지에의 몸이 땅을 박차고, 뒤로 물러나는 속도를 올린다.
그리고 그를 바로 뒤따르는 세은의 쇄도.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결국은 레라지에의 가장 큰 무기를 봉쇄한 모양새다.
상대의 주무기를 봉쇄한 세은의 공격이 더욱 광폭하게 몰아치기 시작했다.
우우웅. 쉐에엑!
레라지에의 무력이 막강하다지만, 그를 상대하는 세은의 위용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아무리 바알의 사술로 능력이 크게 상승한 상태라지만, 전력을 다하는 세은을 이기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거기에 바알의 사술도 완벽하지는 않은지 중간중간 레라지에의 움직임에 머뭇거림이 생긴다.
방금 전에 보여준 바알에 대한 온전한 정신의 복종이 아직은 완벽하지 않은 것 같은 모습.
‘몰아붙였을 때 끝낸다.’
빠르게 돌아가는 싸움 속에, 두 검에 더욱 집중하며 공격을 이어나가는 세은이다.
쉼 없이 이어지는 전투 속에 감각이 최고조의 상태에 다다른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팡! 파앙!
물러나며 어떻게든 화살을 뿌려대는 레라지에를 보며, 세은은 일순간 한 가지 묘수를 떠올렸다.
힐끗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바로 뒤에 푸르카스와 아바돈이 위치하고 있다.
상당히 좁은 공간, 잘만 조절하면 손 안 대고 코를 풀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순간적으로 푸르카스를 상대하던 아바돈과 눈이 마주친 세은이다.
가벼운 눈짓으로 레라지에를 한 번, 그리고 푸르카스를 한 번 가리켰다.
끄덕.
세은의 눈빛을 받은 아바돈이 매우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를 못하면 어쩔 수 없지.’
아바돈이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온전히 이해를 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말로 하는 순간 지금의 시도는 전혀 의미가 없는 일이 되니까.
휙-
다시 한 번 고개를 돌려 적의 위치를 확인한 세은이 공세를 조금 늦췄다.
조금이라도 시위를 당기려 하면 더 격하게 몰아치던 것을 멈췄다.
‘의도를 읽히기 전에 성공시킨다.’
키이잉-
일부러 느슨하게 놓아준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레라지에가 재빨리 시위를 당겼다.
시위에 걸린 화살에 마기가 모여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죽어라!”
파앙!
레라지에의 화살이 세은의 가슴을 정확히 노리고 날아들었다.
휘익-
그러나 미리 단단히 대비하고 있던 세은은 그대로 몸을 숙여 화살을 피해냈다.
쉐에에엑!
목표를 잃은 화살이 그대로 세은을 지나 허공을 가르면서 날아갔다.
그리고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다.
화살이 뒤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던 푸르카스와 아바돈을 향해 날아가고 있다는 말이다.
“하압!”
다행히도 세은의 눈빛을 읽고 푸르카스의 행동을 제약하는 데 주력하던 아바돈은, 강한 일격을 내치며 푸르카스의 발을 묶어냈다.
콰앙!
푸욱.
아바돈의 아볼루온과 푸르카스의 낫이 강렬한 충격을 발하는 소리가 먼저 들렸다.
그리고 바로 이어 폭음에 묻힌 작은 관통음이 들렸다.
“……?”
아직 미처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푸르카스가 자신의 복부를 뚫고 나온 화살촉을 내려다보았다.
“후우!”
그 모습을 확인한 세은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바로 레라지에에게 몸을 날렸다.
이 다음의 일은 아바돈에게 맡겨야 할 부분이다.
세은은 레라지에가 의외의 상황에 당황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공격이 나아가는 지금 이 순간.
상대의 방어가 옅어졌다.
아니, 방어가 옅어지는 것이 아니라, 방어를 펼쳐낸 타이밍이 조금 늦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했다.
같은 팀을 관통했다는 사실에 흠칫 굳어버린 사고다.
여기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세은의 강맹한 공격이 썰물처럼 밀려들어오니 이미 승기는 넘어간 뒤였다.
우우웅!
쾅- 콰앙!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레라지에는 다급하게 활대를 휘둘러 세은의 공격을 막아냈다.
“하아압!”
그리고 충돌의 결과는 곧바로 드러났다.
레라지에의 활을 옆으로 걷어내고 앞으로 돌진하는 세은.
방어를 위해 단검을 휘두르는 레라지에의 전면에 짓쳐들더니, 별의 검을 종으로 크게 휘둘러왔다.
콰앙!
“크헉!”
믿을 수 없는 반응 속도로 막아냈지만, 충격에 뒤로 날아가고 마는 레라지에다.
퍽!
튕겨나가서 벽에 등이 부딪힌 레라지에.
땅으로 추락하기 전에 손으로 땅을 짚어 동물적으로 몸을 되돌렸지만, 곧바로 중심을 회복하지는 못했다.
상당한 고통이 레라지에를 엄습했다.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칠 세은이 아니었다.
탓! 쉐에엑!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파아앙-!
달의 검을 뻗어내며, 홀리 애로우를 먼저 날린 세은이 그대로 몸을 깊게 숙이며 레라지에의 측면 아래쪽으로 파고들었다.
땅에 닿을 듯, 지면의 돌조각을 두 눈으로 스쳐 보내면서, 그대로 다리를 베어나갔다.
타앗!
그 와중에도 어떻게든 홀리 애로우를 막아내고, 공중으로 다급하게 떠오르는 레라지에.
단순히 피하는 것으로 그칠 리가 없다.
공중으로 뛰어 오르며 아래를 향해 시위를 당겨온다.
그대로 세은을 바닥에 꿰어버릴 기세.
그러나 세은은 피하지 않고, 그대로 단단하게 땅을 밟고서 화살을 쳐냈다.
터어엉!
화살을 막아낸 세은이 땅을 차 올려 뒤로 한 바퀴 돌고, 위쪽에 떠 있는 레라지에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바닥을 박차 오른다.
땅을 박차는 세은의 발이 수많은 돌조각을 비산시켰다.
공중으로 치솟는 세은이 몸이 마치 화살처럼 빠르게 쏘아진다.
탁! 슈우우욱!
아래에서 강하게 종으로 베어오는 달의 검이다.
레라지에에 얼굴에 그려졌던 당혹감이 더 이상 숨길 수 없을 정도로 진해졌다.
타아앙!
순간에 활을 휘둘러 세은의 공격을 막아내지만, 그 활에서 느껴지는 요란한 떨림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하아앗!”
그리고 단순히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달의 검이 레라지에의 활에 막힌, 바로 그 순간.
아직 반대 손에 남아있는 별의 검이 그대로 작은 호선을 그리며 휘둘러졌다.
레라지에가 막을 것이라는 것을 이미 예상하고 있던 세은이다.
한 번에 공격이 성공하면 좋고, 그렇지 않더라도 바로 연격을 이어갈 생각이었다.
“감히!”
레라지에가 노호성을 지르며 다시 단검으로 방어를 하려는 그때.
휘익!
손목의 작은 회전을 통해, 그대로 마주해오는 단검을 우회해서 전진하는 별의 검.
이미 몇 번이나 같은 패턴에 막힌 공격이다.
또다시 막힐 수야 없는 일이었다.
서걱!
그리고 결국, 어깨부터 잘린 레라지에의 팔이 그대로 허공을 수놓는다.
한 손으로 시위를 당길 수는 없는 노릇.
그러나 겨우 이것으로 끝일 리가 없다.
얼마 전에 세은은 이것과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었다.
몸의 회복을 위해 찾아간 곳에서 발아했던 마기의 씨앗.
그 능력치의 상승은 상상 이상이었다.
하물며 마왕급의 존재가 이렇게 되었는데 겨우 이 정도로 끝일 리가.
번뜩!
세은의 눈과 마주치는 레라지에의 눈이 살기를 발했다.
콰아아아아!
하나를 잃었으니 하나를 거두어야 하는 법이었다.
레라지에는 남은 손에 마기를 최대한 집중해 일격을 펼쳐냈다.
이것까지 예상한 세은이지만, 분노에 가득 찬 레라지에의 일격은 생각보다 더 강력했다.
콰콰콰콰콰콱!
달의 검이 그 기파를 이기지 못하고 엄청나게 흔들렸다.
사방을 향해 비산하는 마기로 인하여 몸 전체가 밀려 나갔다.
검신을 타고 들어오는 마기가 세은의 몸을 타고 오려고 발악했다
“합!”
세은의 입에서 강한 기합성이 터져 나왔다.
버틴다.
이것만 버티면 레라지에의 숨통을 마무리할 수가 있었다.
키이잉!
결국 목적을 이루지 못한 마기가 사방으로 날아간다.
탁!
공격을 막아내고 먼저 땅으로 내려선 세은, 다음으로 레라지에가 땅으로 착지했다.
투욱!
마지막으로 땅으로 떨어지는 레라지에의 잘린 팔.
그 모습을 보며, 세은이 선언했다.
“이제 끝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