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
53. 마기의 씨앗 (4)
불안해 보이는 알로켄의 거대한 뒷모습.
마계의 높은 자리에서 아래를 굽어보던 기세가 보이지 않았다.
마계를 울리던 거칠고 커다란 목소리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
이글이글 타오르던 눈빛의 불도 서서히 사그라지고 있었다.
“뭐하고 있나?”
그런 알로켄과 한차례 손속을 교환한 아바돈이 그를 도발했다.
“건방지게 굴지 마라…….”
그런 도발에 아직까지는 완전히 기세가 꺾이지 않은 알로켄의 대답이 돌아왔다.
알로켄이 다시 천천히 오른손을 움직여 자신의 무기를 치켜들었다.
그런 알로켄을 바라보며 아바돈이 씨익 웃음을 지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휴식을 취할 시간을 준 것 같은데. 어때, 이제는 끝내도 될까?”
“마음대로 해. 애초에 먼저 끝내고 쉬나 지금 쉬나 어차피 마찬가지 아니었나.”
“이놈을 끝내면 어쩐지 쉬지 않고 바로 달려가야 할 것 같은 느낌이라서 말이야.”
스르르릉.
명백하게 눈앞의 알로켄을 무시하는 세은과 아바돈의 대화다.
한마디로 여태까지 알로켄을 가지고 놀았다는 말.
다음에 상대할 세은을 생각하며 긴장을 놓치지 않고 심혈을 기울여 아바돈을 상대하던 알로켄으로서는 정말 치욕적인 상황이다.
빠직-
그런 둘의 대화에 마지막까지 겨우 부여잡고 있던 알로켄의 이성이 끊어졌다.
“크아아아아!”
전사공, 상대의 실력과 상관없이 순수하게 전투를 밀어붙이는 이명을 지닌 마왕이 거대한 고함을 내질렀다.
“지금 온 힘을 다 써서 시렌 개자식에게 죽더라도, 네놈만큼은 여기서 죽여 버리고야 말겠다.”
목숨을 도외시하겠다고 선언하는 알로켄이다.
그런 알로켄의 말에 아바돈은 피식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어디 할 수 있으면 해보지 그래?”
쿠오오오-
거의 다 허물어져 가던 알로켄의 기세가 다시 한 번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죽어서 마신의 앞에서 그 죗값을 치르게 해주마.”
“그냥 들어도 상관은 없지만, 마신께서는 별로 개의치 않으실 텐데? 오히려 네가 먼저 마신의 앞에 가게 될 거야.”
“개소리!”
“그만 입으로 나불거리고 덤비지 그래?”
아바돈이 아볼루온을 들어 알로켄을 겨누었다.
얼핏 격렬하게 알로켄과 손속을 나눈 것 같았지만, 아바돈은 살레오스와 알로켄의 협공에도 버티고 있던 실력자다.
알로켄을 상대해 주면서 어느 정도 마기를 회복한 상황.
“지금 그 말을 후회하게 해주마!”
“겁 많은 개가, 제일 크고 많이 짖는다더니 네놈이 딱 그 꼴이잖아. 빨리 덤벼.”
다시 한 번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말이었다.
아바돈의 말에 발끈한 알로켄이 이내 흥분한 눈빛을 여과 없이 표출하며 아바돈을 노려봤다.
이성보다 본능이 앞서는 상황이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쉽사리 달려들 수가 없다.
알로켄의 본능이 끊임없이 경종을 울려대고 있었다.
“감히 우리에게 검을 겨눈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타아앗!
알로켄의 급격한 쇄도에 바닥의 돌조각들이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이어 아볼루온이 알로켄의 무기를 마중 나갔다.
수평으로 치고 들어오는 알로켄의 공격에 수직으로 반격을 가하는 아볼루온이다.
알로켄의 무기는 단 세 번의 경합도 버텨내지 못했다.
순식간에 균형이 망가지고 호흡이 흐트러졌다.
끝내기로 마음을 먹은 아바돈이 보여주는 무력은 이처럼 막강했다.
힘이 빠진 알로켄은 상대할 수 없는 위력이 아볼루온에 진하게 녹아 있었다.
텅! 터엉!
연신 뒤로 물러나고 마는 알로켄이다.
결국 알로켄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분명히 이 정도의 차이까지는 아니었다.
‘설마 실력을 숨기고 있었다고?’
무기를 휘두르는 알로켄의 손이 점차 다급하게 변해갔다.
‘이렇게 강하다니……!’
마왕이다.
그렇다면 같은 마왕 이외에는 어지간해서 비할 데가 없는 지고한 존재들이란 뜻이다.
실제로도 그랬다.
치열한 마계에서 수없이 많은 생명을 밟고 자신의 영역을 구축한 마족이란 말이었다.
아바돈 역시 마왕이 아닌 마족 중에서는 고유의 영역이 있는 상급 마족이기는 했다.
그러나 단순히 비교를 하자면 마왕과 비교를 할 수는 없었다.
알로켄도 은연중 그런 점에서 자신감을 가지고 전투에 임한 것이다.
아무리 바알에게 도전을 하고, 앞서 마왕 둘의 맹공을 힘겹게 버텨냈지만, 그건 상황의 우위 때문에 자신들이 최선을 다하지 않은 덕분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강했다.
그러나 지금 눈에 보이는 전투의 결과는 알로켄의 생각과 전혀 다르게 전개되고 있었다.
아바돈은 강했다.
알로켄의 권능인 불타는 눈을 봐도 아바돈은 움츠러듦이 없었다.
거기에 마기에 있어서도 한 단계 위라고 봐도 무방했다.
마왕의 실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니, 이 정도라면 단숨에 10위 안에 드는 마왕 중 누구에게나 도전해도 상대할 만한 무력이다.
알로켄 정도의 마왕이라면 두 명으로도 승부를 장담하기 힘들다는 뜻이었다.
콰아앙!
“크읏!”
위에서 내려치는 아볼루온의 공격은 당장이라도 알로켄을 반으로 조각내버릴 것만 같았다.
정신이 아찔해지는 공격이었다.
그래도 마왕은 마왕인지라, 알로켄은 정신을 잃을 뻔한 충격에도 본능적으로 매섭게 반격을 시도하고 있었다.
날카롭게 반격해 오는 알로켄의 공격에 아바돈의 눈이 빛을 발했다.
쾅!
“끝이다.”
서걱-!
그리고 이것으로 끝이었다.
알로켄의 무기를 사선으로 걷어낸 아볼루온이 상대의 가슴을 길게 갈라냈다.
갈비뼈를 부수며 그대로 치골까지 잘라낸 치명적인 공격이었다.
그대로 승부를 가르는 마지막 공격이었다.
“커헉……!”
억눌린 신음성을 내뱉는 알로켄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으면서 소멸을 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이렇게 되면 누군가 옆에서 바로 마기를 불어넣어 주지 않는 이상은 회생이 불가능했다.
전투를 재개하기 전, 아바돈의 선언대로 마신의 앞으로 알로켄이 먼저 가게 된 것이다.
“쿨럭!”
결국 재치기와 함께 핏덩이를 토해낸 알로켄의 무릎이 그대로 바닥과 부딪쳤다.
턱.
두 무릎이 모두 바닥에 닿았지만, 마지막 자존심으로 상체는 꼿꼿하게 서있었다.
알로켄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아바돈을 올려보았다.
“고작 마족이 어떻게……!”
서서히 생기가 사라지는 알로켄의 눈에는 의혹이 깃들었다.
강해도 너무 강하다.
마왕이 아닌 마족이 이렇게 강하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아바돈이 그런 알로켄을 내려다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바알의 개로 만족한 네놈들과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지 않나? 내 목표는 마계의 1인자다.”
“……후우…….”
아바돈의 말에 고개가 아래로 떨어지는 알로켄이다.
그의 얼굴에 호기심 대신 비웃음이 자리 잡았다.
“……헛된…… 꿈…….”
스스슥-
알로켄은 미처 하고자 했던 말을 모두 마치지 못하고 소멸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어떤 말을 하고자 했는지는 충분히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휘익.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아바돈이 그대로 몸을 돌려 세은을 바라보았다.
당당한 태도, 흘러나오는 여유.
진심을 다하는 아바돈에게서는 마계의 정상에 도전할 만한 그릇이 느껴졌다.
그런 아바돈을 마주하는 세은이 입 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것보다 더 강하군. 바알을 목표로 덤벼들 만해.”
“지금 누가 할 소리를 하는 거지?”
세은의 말에 아바돈이 헛웃음을 지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놈은 아주 다른 존재 같은데 말이야.”
”나름 사정이 있어서.”
아바돈의 어이가 없다는 표정에 세은이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굳이 자세하게 아바돈에게 설명해줄 필요는 없다.
“우리 사이에 굳이 자세한 설명이 필요가 있을까?”
“아니, 아니지.”
목표는 다르지만 아직까지는 같은 손을 잡고 있는 사이다.
“그럼 이쯤하고 다음 일에 대해서 얘기를 해볼까?”
“재미있군. 하긴, 나중에 적으로 만나게 되면 그때 알아보면 되겠지.”
“글쎄? 네가 헛짓만 안 하면 적으로 만날 일은 없을 것 같은데.”
“그 말은, 내가 네놈의 눈에 거슬리면 언제든지 싸우겠다는 말처럼 들리는군.”
세은의 말에 아바돈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상대가 선신의 개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 세은이 말하는 헛짓?
그건 역시 다른 차원에 대한 정복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바돈 역시 단순히 마계뿐만이 아닌 다른 모든 곳의 유일한 지배자가 되는 것이 목표인 마족 중에 하나였다.
“뭐, 여전히 말투, 마음에 들지 않지만 지금은 이런 사소한 것에 대해 얘기할 때가 아니지. 다음 일은 다음에 처리하도록 하지.”
그랬다.
아바돈의 말처럼 여유롭게 대화를 나눌 때가 아니었다.
아바돈의 시선이 전투의 여파를 피해 뒤에 머물러 있던 릴리트에게로 향했다.
이제는 정말로 적의 심부로 들어가야 할 때.
아바돈의 시선을 받은 릴리트가 재빨리 아바돈의 곁으로 다가왔다.
“자, 그럼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최선의 선택은?”
아바돈의 말을 듣고 릴리트가 입을 열었다.
“지체할 시간은 없습니다. 그러나 회복을 마치지 않으셨다면 최대한 힘을 비축하면서 들어가야 합니다. 그 미묘한 시간 조절이 중요한 상황이라고 판단됩니다.”
“그래, 내가 먼저 솔직하게 말하지. 나는 지금 7할의 힘이 회복된 상태다.”
먼저 자신의 상태를 밝힌 아바돈이 세은에게 시선을 주었다.
아바돈의 시선을 받은 세은이 가볍게 코웃음을 치고 릴리트에게 자신의 상태에 대해 전달했다.
“나도 그 정도.”
“그렇다면…….”
지금까지 자신이 목격한 전투를 기반으로 아바돈과 세은의 전력을 파악한 릴리트가 순식간에 계산을 끝냈다.
“적어도 두 분 다 8할까지는 힘을 회복하셔야 합니다.”
“알겠다.”
아바돈의 다른 말없이 릴리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전폭적으로 그녀의 말을 신뢰하는 듯한 태도.
상관이 휘하의 참모에게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태도였다.
그리고 그건 세은도 마찬가지였다.
어찌됐건 현재 상황에서 참모 역할을 맡고 있는 이의 판단을 신뢰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그럼 가자고, 슬슬 이동하면 8할까지는 회복할 수 있으니까. 아, 혹시 멈춰서 회복해야 하면 말해. 그렇다면 여기서 회복하고 가지.”
“웃기고 있군.”
그런 세은의 말을 듣고 아바돈이 몸을 돌렸다.
은근한 도발이 섞인 세은의 말이다.
세은의 말을 들은 아바돈의 두 눈에는 턱도 없다는 감정이 일렁이고 있었다.
“지금 당장 이동하지. 네놈이 할 수 있는 걸 내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나는 또, 혹시 몰라서 물어봤지.”
“헛소리.”
아바돈이 아볼루온을 품에 갈무리하고 릴리트에게 명령을 내렸다.
“릴리트, 방향을 안내해라.”
“예! 알겠습니다!”
먼저 몸을 움직이는 세은과 아바돈의 뒤로 릴리트가 따라붙었다.
8할까지 힘을 회복하기 위해 속도를 조절한 탓에 그녀가 둘을 따라붙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혹시 모르니 긴장을 푸시면 안 됩니다. 지금부터가 정말로 적의 진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
“그러지.”
릴리트의 말에 세은과 아바돈이 가볍게 대답했다.
그러나 그런 둘의 표정은 전혀 가볍지 않았다.
세은과 아바돈으로서도 이제부터가 진짜라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거기에 안으로 다가갈수록 더욱 강하게 느껴지는 전투의 흔적이 둘의 기감을 계속 자극하고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이번에 가는 장소가 마지막 결전지가 될 확률이 높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했다.
단 한 번, 마지막 전투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