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
52. 마계의 내전 (3)
세은의 냉정한 대답에 릴리트의 눈에 실망이 어렸다.
예상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물에 빠진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것이 당연했다.
세은은 그런 릴리트를 보며 말했다.
“그렇다고 골라가면서 잡지는 않을 테니 알아서 하도록.”
세은으로서는 자기들끼리 제 살을 깎아 먹는 데 방해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기꺼운 일.
지금 서로의 전력을 깎고, 또 깎아야 한동안 다른 곳을 침공할 생각을 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은이 단번에 바알을 잡는 것보다는, 릴리트를 도와 적절한 균형을 맞춰주는 것이 필요했다.
지금 전황은 누가 봐도 바알에게 유리한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릴리트에게 중요한 것은 그런 세은의 계산이 아니었다.
“그 말은?”
릴리트의 두 눈에 희망이 깃든다.
잘하면, 아주 잘하면 이길 수 있다.
방금 전에 본 세은의 무력은 모든 계산을 무력화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렬했다.
마왕인 자간이 채 5분도 버티지 못하고 소멸했다.
이 정도라면 할 수 있다.
릴리트가 재빨리 세은에게 말했다.
“그럼 제가 바알까지 안내하도록 하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그럴까?”
능글맞게 그녀의 말을 받는 세은이다.
서로의 입장상 대놓고 말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었다.
긍정적인 세은의 대답에 릴리트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나저나, 그 몸으로 안내를 할 수 있겠어?”
“문제없습니다.”
꽈악―
릴리트가 자신의 상처를 재빨리 지혈했다.
지혈을 하면서 느껴지는 고통에 두 눈이 질끈 감겼다.
그러나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이 그녀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럼 안내하겠습니다.”
내성의 문이 열리지 않아도 좋다.
상황의 급변이다.
굳이 외성의 병력들과 합류를 하지 않아도 이길 가능성이 생겼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명령을 내리는 것은 잊지 않았다.
“최대한 전력을 보존하고! 외성의 병력이 합류하면 안으로 진입해!”
“예!”
타다닷―
릴리트는 채 대답을 듣지 않고 몸을 날렸다.
세은이 가볍게 그런 릴리트의 뒤를 따라 땅을 박찬다.
주변에 있던 적들은 차마 어떻게 둘을 막아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 정도로 방금 전에 세은이 보여준 무위는 차원이 달랐다.
‘아바돈님! 조금만 기다리세요!’
릴리트는 성치 않은 몸으로 더욱 속도를 올리며, 아바돈이 멀쩡하기를 바랐다.
* * *
콰앙― 콰앙! 콰아앙―!
사자의 이빨처럼 날카롭게 휘어진 기묘한 창, 아볼루온이 끊임없이 굉음을 발했다.
파괴자, 지닌바 그 이름이 무색하지 않게 아볼루온은 강맹한 위력을 뽐내고 있다.
바로 이 전투의 주체 중 한 명인 아바돈의 독문 무기였다.
터엉!
그러나 그런 파괴자의 움직임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상대의 무기는 여유롭게 방어를 전개했다.
아바돈과 대치하고 있는 자는, 검은 학과 수탉, 그리고 까마귀의 머리가 세 개가 달린 마왕.
마왕 제24위 니베리우스였다.
니베리우스의 손에 들린 지팡이도 상당한 위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름대로 대단하군. 이 정도 힘을 지니고 있었으면 다른 마왕의 자리를 노려도 됐을 텐데, 뭐하러 바알님의 자리를 노렸나? 그것도 이런 잡것들을 데리고 말이야.”
“바알의 개가 말이 많군. 차륜전으로 덤비는 주제에 말이다”
여유롭게 니베리우스의 말을 받았지만 아바돈에게 엄청나게 여유가 넘치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넘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살짝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방금 전에 마왕 제69위 데카라비아를 쓰러트리자마자 맞이한 상대다.
아바돈의 무력이 어지간한 마왕들을 아래로 내려다본다고는 하지만, 숨 돌릴 틈 없는 차륜전은 그로서도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흥. 애초에 떨거지들을 이렇게 끌고 온 게 뉘신데 그런 말을 하지?”
니베리우스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텅― 터엉―
그 와중에도 아바돈과 니베리우스는 계속해서 손속을 나누었다.
‘정보와는 달라, 바알 밑에 기어 들어간 마왕 놈들이 알려진 것보다 더 강해.’
무슨 수를 썼는지 몰라도, 상정한 범위 밖의 힘을 보여주고 있는 니베리우스다.
그리고 그것은 방금 전에 아바돈의 손에 쓰러진 데카라비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때였다.
“이놈만 잡으면 끝인가?”
“오. 마침 잘 왔네.”
‘젠장…….’
탁!
눈앞에 새롭게 나타난 목소리의 주인공에, 아바돈이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오른손에 들고 있는, 꺼지지 않는 횃불이 눈에 들어온다.
마왕 제23위 아임.
니베리우스와 겨우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
여기에 아임까지 합류하면 결과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이놈 아까 연회장에서 바알님께 꼬리치던 새끼가 아닌가?”
“지금 생각해도 내 얼굴이 화끈거리는군. 고작 기습을 위해 적에게 꼬리를 흔들다니.”
아임과 니베리우스가 대화를 나누는 척 하면서 아바돈을 흔들었다.
둘의 모욕에 아바돈의 가슴이 강렬하게 진탕되었다.
그러나 아바돈은 여전히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하며 입을 열었다.
“흥. 실력으로 되지 않으니 숫자로 밀어붙이는군. 역시 바알의 밑에 기어 들어간 개들답다고 해야 하나?”
“허허. 언제까지 그렇게 허세를 부릴 수 있을까?”
휘익―
아임이 허공에 위협적으로 횃불을 휘두르며 아바돈을 도발했다.
그 모습에 아바돈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좋다! 네놈들을 한 번에 죽이고 바알 놈을 끝장내러 가주지!”
“네놈 걱정이나 하시지!”
각오를 새롭게 다진 아바돈이 먼저 아볼루온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아임과 니베리우스도 아바돈에게 마주 달려든다.
셋의 무기가 한 점에 합쳐지기 전, 가늘고 하얀 선이 셋 사이로 끼어들었다.
치리링!
하늘에서 달의 검이 떨어지며 셋의 공격을 동시에 막아냈다.
당연히 그 공격은 세은이었다.
세은의 무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셋의 무기가 튕겨 나간 것은 순간이었다.
아바돈, 아임, 니베리우스는 갑자기 전투에 끼어든 상대를 동시에 바라보았다.
“네, 네놈은?”
황급히 검을 수습하여 반격을 하려 한 니베리우스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눈에 익은 얼굴이다.
거기에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되는 얼굴이기도 했다.
마계의 대적, 에일린의 사제인 세은이 니베리우스의 눈앞에 버젓이 서 있었다.
“여어. 오랜만이야?”
전장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정도로 너무나 여유로운 세은의 태도였다.
“너는?”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아바돈이 세은을 불렀다.
세은이 지금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된다.
현재 그는 바알의 발을 붙잡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바알과 전투를 치르고 왔다고 하기에는, 세은의 모습이 너무나도 깔끔했다.
“설마 도망친 건가?”
“아, 그건 아니고.”
계약을 어겼다고 생각한 아바돈의 살기 어린 말에 세은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네놈! 설마 시렌과도 손을 잡은 것이냐?”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니베리우스가 경악하며 소리를 질렀다.
“시렌?”
“아아. 일단 주변을 정리하고 얘기를 하자고.”
쉐에엑!
세은이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별의 검이 니베리우스의 목을 노리고 나아갔다.
엄청난 신성력을 뿜어내는 세은의 공격에 경악에 차 있던 니베리우스가 다급히 뒤로 몸을 날렸다.
퍼억!
그러나 마족과 세은이 손을 잡은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반응이 한발 늦고 말았다.
부욱―
니베리우스의 가슴에서 북이 찢어지는 것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빠르고 과감한 손속이다.
애초에 달의 검과 별의 검은, 마계에서 드워프들이 당당하게 살아남기를 바랐던 장인의 작품.
신성력만큼은 아니지만 금속에 깃든 달과 별의 힘 역시 마족을 상대하기에는 최적의 검이었다.
별의 검을 이어 달의 검이 연쇄적으로 뻗어나가며 니베리우스의 최후를 노렸다.
미미하게 굳은 세은의 얼굴에 두 눈빛만이 빛나고 있었다.
세은이 박찬 땅의 흙이 하늘로 가득 비산했다.
터엉!
그 와중에도 니베리우스는 세은의 연격을 힘겹게 막아냈다.
놀라운 광경이었다.
괜히 마왕이라고 불리는 것은 아니었다.
순식간에 구석으로 몰린 니베리우스의 모습에 멍하니 있던 아임이 전투에 참전했다.
쉐에엑―
아임의 화려한 횃불이 세은의 허리를 절단 낼 기세로 짓쳐 들어왔다.
그러나 세은은 그런 아임의 공격을 보고도 달려가는 속도를 조금도 죽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대로 별의 검을 휘둘러 아임의 공격을 마중 나간다.
콰아앙!
격한 충돌로 인해 생겨난 굉음이 주변을 가득 채우며 퍼져 나갔다.
텅― 터엉!
순식간에 횃불의 대를 타고 흘러들어오는 신성력에 아임의 신형이 순간 흔들린다.
그 미세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세은이 다시 한 번 검을 휘둘렀다.
파앙―
별의 검을 통해 발출되는 홀리 애로우다.
이 정도의 신성 마법을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전투를 한결 쉽게 이끌어 나갈 수가 있었다.
“크윽!”
순식간에 마왕 둘을 맞이해서 구석으로 몰아넣는 무력이었다.
아임은 재빨리 횃불을 회수해서 홀리 애로우를 쳐 내고 반격을 준비했지만, 세은은 그 자리에 없었다.
그대로 아임을 지나쳐 채 부상을 수습하지 못한 니베리우스에게 달려들었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도 없고, 지체할 이유도 없었다.
세은의 쇄도에 아직 전열을 정비하지 못한 니베리우스가 더욱 당황했다.
니베리우스는 힘겹게 검을 휘둘러 세은의 공격에 반항했다.
터엉―!
“오랜만에 만났는데 아쉽네.”
온전한 힘이 실리지 못한 니베리우스의 검을 쳐 내며 세은이 농담을 건넸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사선으로 그어지는 달의 검다.
서걱!
달의 검이 그대로 니베리우스의 가슴을 다시 한 번 베어냈다.
“……커헉.”
아바돈은 직접 보면서도 믿기 힘들었다.
단 몇 합만으로 마왕 둘을 상대하고 급기야 하나를 제압하고 말았다.
마족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무력을 자랑하고 있는 세은이었다.
“네놈은……?”
전과 전혀 다른 세은의 무력에 아바돈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읊조렸다.
처음에는 자신이 무조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의 모습을 보고서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바돈 자신이 온전한 몸 상태라고 하더라도 승부를 장담할 수가 없는 실력이다.
아니, 오히려 자신이 접고 들어가야 할 정도의 기세가 느껴지고 있었다.
“지금 내가 누군지가 중요한가?”
그런 아바돈의 물음에 세은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남은 계약을 이행해야 하니까 정신 좀 차리지그래?”
세은이 보여준 무력에 동요한 아바돈에게 세은이 일침을 가했다.
“흐아앗!”
아임이 그런 세은의 뒤를 노리며 다시 한 번 공격을 펼쳐왔다.
우우웅―
달의 검이 신성력에 공명하며 울음을 토해냈다.
세은이 재빠르게 몸을 돌려 그런 아임의 공격을 막았다.
콰앙―!
아임의 거대한 횃불에 비하면 세은의 달의 검은 그 절반의 크기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횃불과 힘과 힘으로 부딪히면서도 한 치도 밀리지 않는 세은이었다.
“남은 계약을 이행할 시간이야. 빨리 움직이지그래?”
더 이상 말을 나눌 이유도, 시간도 없었다.
빨리 움직이라는 말과 함께 별의 검을 휘둘러 아임을 찔러 나갔다.
세은의 눈이 번쩍이는 빛을 내뿜었다.
아임의 움직임이 생각보다 빠르다.
텅―
세은은 그대로 아임의 횃불을 밀어내고, 별의 검과 달의 검을 교차해서 한 번에 휘둘렀다.
동시에 번개처럼 쏟아져 나가는 두 줄기의 신성력.
파앙― 파아앙―!
“크하앗!”
아임의 횃불이 두 발의 신성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저 멀리 튕겨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