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
52. 마계의 내전 (2)
“끄윽…….”
그대로 부상을 입고 바닥으로 기울어진 릴리트의 시야에 자간의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대계를 이루는 것을 보지 못하고…….’
아쉽거나 허무하다는 감정이 아니다.
지금 릴리트가 느끼는 감정은, 어이없음, 혹은 분노의 감정이었다.
아바돈을 수행하다가 죽게 된다면, 적어도 더욱 중요한 자리에서나 중요한 마족에게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아무리 마왕이라지만, 오직 폭급한 성정밖에 없는 자간에게 죽는 것은 생각지도 않은 일.
“어이가 없네.”
깊게 베인 상처를 부여잡은 릴리트의 입에서 진심이 튀어 나왔다.
갑작스런 릴리트의 말에 자간이 그녀의 얼굴에 검을 들이대며 물음을 던졌다.
“어떤 것이 어이없다는 말이지? 줄을 잘못 선 자신에게 하는 말인가?”
“고작 너 같은 놈에게 죽는 것이 어이없다는 말이야.”
여전한 릴리트의 도발에 자간의 입술이 슬쩍 치켜 올라갔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상황에 드디어 돌아버린 건가? 감히 이몸이 누구인지 알고도 그런 말을 내뱉는 거냐?”
마왕들의 앞에 붙는 서열은 실력순이 아니다.
마왕이 된 순서를 뜻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보통 강한 마족이 먼저 마왕이 되는 것을 보았을 때, 중간에 마왕의 위를 뺏은 자가 아니면 실력순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릴리트는 너무 피를 많이 흘려 점점 흐릿해지는 눈으로 자간을 노려보며 대답했다.
“마왕 중에서도 하위권에 머무는 주제에 거들먹거리기는……. 거기에 제 발로 바알의 아래로 기어 들어간 개가 나불거리니 코웃음도 안 나와.”
서걱.
릴리트의 어깨에서 피가 튀었다.
방금 전에 공중에서 베임을 당했던 어깨의 반대다.
양 어깨에 자상을 입은 릴리트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자간이 그런 릴리트를 노려보며 살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흥. 이번에는 아쉽게도 겨냥이 빗나갔군. 그 잘난 입으로 언제까지 나불거릴 수 있나 보고 싶지만 아쉽게도 시간이 없어서 말이야.”
릴리트의 양 어깨에서 진한 핏물이 철철 쏟아져 내렸다.
상당히 깊은 상처였다.
릴리트의 온몸이 진홍색으로 물들어간다.
자간의 검이 서서히 릴리트의 숨통을 끊기 위해 움직였다.
그때,
“뭐, 딱히 틀린 말은 아니잖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전까지 죽을 위기에 처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자간을 노려보던 릴리트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터벅, 터벅.
내성이 있는 방향.
그곳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여어. 처음 보는 마왕이네?”
호리호리한 몸을 지닌 청년이다.
양손에는 달빛과 별빛을 내뿜으며 은은하게 빛나는 쌍검을 들고 있었다.
“어떻게?”
릴리트가 놀란 눈으로 청년, 세은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세은은 바알을 상대하고 있을 터였다. 그 말인즉슨, 죽거나 혹은 그에 준하는 부상을 입었어야 했다.
바알을 이길 수가 없었을 텐데 저렇게 멀쩡히 살아 나왔다고?
이해할 수 없는 세은의 멀쩡한 모습에 릴리트의 머릿속이 순간 하얗게 변했다.
세은은 그런 릴리트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자간을 향한 말을 이어 나갔다.
“별로 강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성격이 좋아서 휘하에 세력이 많은 것도 아니고, 자세하게 곱씹어볼수록 정말 별거 아닌데?”
꼿꼿하게 펴진 온몸에서 당당함과 여유가 흘러나왔다.
처음 릴리트가 세은을 만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
강자의 여유가 세은에게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세은의 얼굴을 마주한 자간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었다.
“네놈은…… 설마……..?”
“오……? 내가 누군지 알겠어? 우리 초면이잖아.”
딱딱하게 굳은 자간의 얼굴에 세은이 설핏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오른손을 움직여 달의 검을 들었다.
세은의 온전한 힘을 받고 있는 달의 검의 힘 역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달빛이 주변을 서서히 물들이고 있었다.
“계획은 이미 망가진 것 같은데 말이야. 우리 계약은 유효한 거지?”
세은의 물음에 릴리트가 다급하게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아바돈님과 맺은 계약은 둘 중 하나의 소멸이 오기 전까지 유효하니까요.”
“나도 알아. 아바돈 그놈이 죽었나 안 죽었나 물어본 거야.”
“아직 멀쩡하십니다!”
“그래? 그럼 됐네.”
스릉!
세은의 손에 들린 달의 검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쩌지? 네 운이 여기가 끝인 것 같은데 말이야. 조금은 안타까우니까 유언이라도 들어줄까?”
“개소리!”
자신을 염두에 두지 않는 세은의 여유 넘치는 태도에 자간이 분노를 폭발시켰다.
“이 더러운 놈들! 감히 신의 개와 손을 잡아?”
릴리트를 노려보며 소리치는 자간에게, 세은이 노골적인 조소를 띄워주었다.
“강자존, 아닌가?”
“신의 개도 개 나름이다! 시렌…… 이 사냥개와 손을 잡다니! 마신의 천벌이 있을 것이다!”
“아아. 귀 아파.”
고래고래 고함을 치는 자간의 모습에 세은이 한쪽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너희 사정은 나와는 상관이 없는 얘기고…… 빨리 일 보고 끝내자. 나 바빠.”
세은이 자간을 다시 한 번 도발했다.
완벽한 몸 상태다.
현재 이곳에 있는 그 누구보다 전력을 보존한 사람이 세은일 것이 분명했다.
“먼저 공격할 기회를 줄게. 덤벼봐.”
세은이 턱을 까닥거리며 끝까지 자간을 도발했다.
그런 세은의 행동에 자간은 여지없이 발끈했다.
이내, 흥분한 눈빛으로 기광을 폭사하며 자신의 검을 고쳐 잡았다.
“…….”
하지만 폭급하기로 유명한 성질과는 달리 자간은 섣불리 세은에게 뛰어들지 않았다.
상대는 내로라하는 마왕들도 가볍게 눌러 버린 선신의 최고 사제다. 발끈하긴 했으나, 쉽지 않으리라는 판단은 충분히 하고 있었다.
가볍게 운용하던 마기를 최대로 끌어올린 자간의 전신에서 마기가 뭉클뭉클 새어 나왔다.
“오늘 네놈의 목숨을 거두고 마계에 자자한 허명을 회수해 주겠다! 에일린의 개여!”
쏴아아!
자간이 선언과 동시에 급격하게 쇄도했다.
바닥의 크고 작은 돌조각들이 자간의 마기를 이기지 못하고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이어, 자간의 검이 세은의 달의 검과 부딪혔다.
터엉!
속도를 유지한 채 그대로 대각선으로 강하게 내리긋는 자간의 공격을 세은은 가볍게 막아냈다.
그리고는 그대로 달의 검을 쳐올려 자간의 품을 개방시켰다.
“……?”
순식간에 가슴이 개방된 자간이 당황했다.
어떻게든 이어지는 세은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검이 없는 반대손에 마기를 잔뜩 둘러 휘둘렀다.
단 한 수만에 나름 마왕인 자간이 궁지에 몰릴 정도로 세은의 공격은 강력했다.
쾅!
왼팔에 느껴지는 충격에 자간은 뒤로 물러났다.
별의 검에서 흘러나오는 신성력이 자간의 몸 안으로 침투했다.
“크윽!”
자간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설마 했지만 자신과 세은이 정도로 차이가 날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다시 한 번 검을 휘둘러 세은을 막아내며 자간의 표정이 점점 다급하게 변해갔다.
‘이 정도라니?’
세은이 무시하고, 릴리트도 조롱을 하기는 했지만, 어찌 되었건 마왕은 마왕이다.
단순히 호칭만 그럴 뿐이 아니라 실제로 자간이 지니고 있는 무력도 그렇다.
마계의 내로라하는 마족들을 모두 짓밟고 정점에 선 마족이라는 뜻이었다.
세은 역시 교단의 정점에 선 사람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 정도까지 차이가 날 것이라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자간은 종이 한 장 차이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세은과 전투를 시작한 것이었다.
마계에 세은의 그 악명이 자자했지만, 그건 겁 많은 마족들의 엄살이라고 치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짧은 전투의 결과는 자간의 예상과 전혀 다른 결과를 보이고 있었다.
세은은 자간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강했다.
마기는 애초부터 전혀 통하질 않았다.
오히려 세은의 신성력에 자간의 행동이 제약을 받을 정도였다.
마왕인 자간이 이런 경험을 하는 일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거기에 힘에 있어서도 세은이 몇 단계 위에 있었다.
자간의 공격은 가볍게 막아내고, 내지른 반격은 일견 가벼워 보이지만 거대한 충격을 동반했다.
자간 정도의 마왕은 두 명은 있어야 제대로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나마 상대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은 마왕 두 명으로도 승부를 장담하기 힘들다는 뜻이었다.
쉐에엑!
세은은 자간이 생각을 정리할 틈을 주지 않고 공격을 이어나갔다.
달려오며 옆에서 횡으로 베어오는 세은의 일격은 당장에라도 자간을 두 동강 낼 것 같은 힘을 지니고 있었다.
쩌어어엉!
그 검을 막아낸 자간이 일순간 정신이 흔들릴 정도의 일격이었다.
그래도 마왕이라고, 자간은 그런 커다란 충격에도 불구하고 반격을 시도했다.
그 와중에 빈틈을 찾아서 들어오는 자간의 공격에 세은의 눈이 일순간 빛났다.
터엉!
하지만 필사적인 자간의 반격은 그대로 허무하게 막히고 말았다.
그리고.
서걱!
처음과 달리 완전히 자간의 검을 날려 보낸 세은이, 사선으로 별의 검을 그어 자간의 몸을 갈랐다.
순식간에 승부를 결정짓는 마지막 공격이었다.
“커헉……!”
완전히 대각선으로 몸이 베어진 자간이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렸다.
거의 소멸 직전까지 간 깊은 부상에 상처 부위에서 마기가 꾸물꾸물 올라오고 있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타격을 받으면 회생이 불가능하다.
자간의 존재가 완전히 소멸되는 것이다.
“크으으……!”
자간은 빠져나가려는 마기를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마지막 자존심으로 상체는 꼿꼿하게 세우고 있지만, 지금 당장에라도 쓰러질 듯 위태위태하다.
자간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세은을 올려다보았다.
“어째서 네놈이 마족과…….”
서서히 흐려지는 독사검마의 눈에는 강한 의구심이 깃들어 있었다.
어차피 세은이 보기에는 마족은 다 같은 마족일 것이 분명했다.
마왕인 그가 신의 개들을 구분하면서 보지 않는 것처럼.
그런 세은이 아바돈의 편에 선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세은이 서서히 꺼져가는 자간을 내려다보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말이야. 사람이 어떻게 매번 원하는 대로만 갈 수가 있겠어.”
“젠……장…….”
세은의 마지막 말을 들으며 자간의 상체가 그대로 쓰러졌다.
자간의 얼굴에는 세은의 공격에 당한 상처로 느껴지는 고통이 그대로 그려져 있었다.
제대로 된 공격 한 번 하지 못하고 소멸되는 자신에 대한 어이없음도 함께한 표정이다.
스르르륵.
너무 큰 충격으로 인해 완전히 소멸되어 가는 자간을 뒤로하고, 세은이 릴리트에게 시선을 주었다.
세은에게서 엄청난 신성력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마기로 가득한 전장에서, 세은만이 독보적으로 눈에 띄는 것은 단순히 신성력 때문만은 아닐 것이 분명했다.
그런 세은과 시선을 마주한 릴리트가 황당한 감정을 섞어서 물었다.
“처음과 전혀 다른 모습이군요. 설마 실력을 숨기고 의도적으로 접근한 겁니까?”
“그럴 리가.”
릴리트의 물음에 세은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고 하면 믿으려나?”
세은의 대답에 릴리트가 불신에 찬 눈으로 말했다.
“솔직히 믿을 수는 없습니다.”
“그럼 어쩔 수 없고.”
“하지만 나쁘지는 않은 상황이군요.”
릴리트가 재빨리 눈에 서린 불신을 지우며 세은에게 부탁했다.
“지금 상황이 매우 좋지 않습니다. 바알의 세력이 생각보다 훨씬 크고 강합니다.”
“그래, 바알 이 새끼, 뭔가 숨기고 있더라.”
성채 꼭대기에서 바알이 하고 있던 의문의 행동을 상기하며 세은이 대답했다.
“아바돈님과 맺은 계약에 따라 저희를 도와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글쎄? 내가 맺은 계약은 바알을 상대하는 것뿐이라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