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
52. 마계의 내전 (1)
바알의 성의 한복판.
바알의 성은 일반적으로 개방되어 있는 다른 마왕들의 성과는 달리, 처음부터 다양한 공성 시설을 고려하여 설계되었다.
외성 성문 앞에는 해자가 있고, 그 안에 다시 내성이 있다.
그리고 그 내성 앞에도 해자가 있었다.
릴리트는 바로 그 내성 안에 있었다.
콰쾅―!
내성 안에서 성문을 열어주는 호응을 통해 단숨에 안까지 치고 들어오는 것이 계획이었다.
내성으로만 들어오면 바알을 포위하는 것도 일이 아니다.
거기에 오히려 이 단단한 성에서 밖의 적들을 대상으로 수성을 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성문을 열 수가 없어…….”
릴리트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바알의 군세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했다.
전혀 계산에 넣지 못했던 지원들이 사방에서 쏟아지고 있었다.
“아바돈님은?”
“안에서 다른 마왕들을 상대하고 계십니다.”
릴리트의 질문에 부하가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바돈뿐만이 아니라, 그와 함께하기로 한 다른 마왕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가장 오랜 시간 동안 마계의 1인자로 군림해 온 바알의 영향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거기에 뒤에서 조용히 준비해 온 휘하의 세력들은, 도무지 예상할 수 없었던 면면들도 많았다.
다른 마왕들이 거의 바알의 수족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뒤쪽에서도 몰려오고 있습니다. 포위를 당할 것 같습니다!”
“나도 보인다! 아바돈님이 도우러 오실 때까지 버텨!”
“예!”
릴리트의 명령이 부하 마족을 타고 휘하로 퍼져 나갔다.
제대로 된 전략과 전술을 사용하는 바알의 군대다.
보통 마족들은 전략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본능에 따라 눈앞의 적을 처리하는 데 집중한다.
그러나 바알의 군대는 달랐다.
기실 릴리트와 아바돈이 승리를 장담한 부분도 이 부분이었다.
전력이 비슷하다면, 전략과 전술에 따라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쪽이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과 마족의 싸움이라면 모를까.
마족과 마족의 싸움이라면 더 짜임새 있게 움직이는 쪽이 승리할 거라고 장담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바알의 군대는 그 예상을 완벽하게 뒤집어엎었다.
너무나도 일사불란해서 마족이 아니라 인간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도무지 상황을 타개할 방도가 보이질 않았다.
아바돈이 올 때까지 버티고, 또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면 외성에 있는 동료들이 내성까지 자력으로 뚫고 오는 것을 기대하거나.
“뒤를 막으면서 성문을 방어하는 자들의 뒤를 계속 자극한다. 성문 방어에 온 정신을 집중할 수 있게 놔두지 마!”
릴리트는 미리 내성에 침투시켰던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숫자는 삼십여 남짓.
그러나 그런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 밀려드는 바알의 군사들은 세 배의 숫자를 너끈히 넘어가고 있었다.
“방어에 치중해! 성문을 뚫을 수 없더라도 적들의 시선을 우리가 분산시킨다!”
공격은 도저히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지금은 방어에 치중하면서 적들의 군세가 나눠지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가장 강한 이들로 침투한 내성의 부대가 이러니, 외성에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을 거라는 사실은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밖의 상황을 알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릴리트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러고 싶지만, 자신은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다.
외성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야 다음 방향을 정확하게 잡을 수 있음에도 그럴 수 없으니, 릴리트는 욕설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저놈은……!”
전황을 살피던 릴리트의 시선이 내성 성문을 향해 달려오는 거대한 마족에게 머물렀다.
한 몸에 흑과 적, 그리고 백색의 피부가 함께하고 있는 마족.
마왕 제61위 자간이었다.
릴리트의 눈이 자간을 빠르게 훑었다.
마왕 중에서도 성질이 난폭한 것으로 유명한 자간이다.
자간까지 수하로 길들인 것을 보니, 바알의 손아귀가 대체 어디까지 뻗쳐 있는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마왕 자간이다. 다들 조심해!”
릴리트의 다급한 외침이 주변의 부하들에게 전달되었다.
마왕 자간.
바알이 수하로 거둔 마왕 중에 한 명이다.
바알의 뜻에 공감하지는 못하지만, 자신의 목숨을 소중하게 여기는 자였다.
거기에 바알이 약속한 끊임없는 전투도 자간이 바알의 아래로 들어간 커다란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런 이유로 현재 자간은 매우 즐거운 상태였다.
이렇게 대규모로 수많은 적들과 싸울 수 있다는 사실이 자간의 심장을 뛰게 했다.
수십, 수백.
아니, 수천의 피 냄새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절대 혼자서 상대하지 마! 상대는 마왕이다. 가볍게 생각하지 마!”
당당하게 소리치는 릴리트의 얼굴에 말과는 달리 절망이 깃들었다.
다른 자도 아닌 마왕이다.
여기서 마왕을 상대할 만한 수준의 마족은 없었다.
아바돈과 동맹을 맺은 마왕이 채 다섯 명이 되지 않으니 당연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다섯 명의 마왕도 모두 여기저기에 흩어져서 각자 상대와 싸우고 있었다.
그나마 이곳에서 마왕을 상대할 만한 마족은 릴리트밖에 없었는데, 몽마인 그녀가 자간을 상대로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저벅저벅.
흥분한 자간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퍼석!
“비켜.”
자간의 앞을 막고 있던 같은 편의 머리가 순식간에 날아갔다.
그 잔혹한 손속에 같은 바알의 부하들도 자간의 곁에서 멀어지려는 모습이 확연했다.
‘어쩔 수 없어…….’
결국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문 릴리트가 한발 앞으로 나섰다.
어쩔 수 없다.
어차피 내성의 성문이 열리지 않는 이상 도망갈 길은 없었다.
최대한 자간을 상대하면서 상황이 반전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릴리트가 자신의 무기인 세검을 꼭 쥐었다.
“이런 상황은 계획에 없었는데…….”
일단 앞으로 나서기는 했지만, 저절로 한숨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한번 어긋나기 시작한 계획은 계속해서 어긋난다.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변수를 막아내는 일이었다.
그래야 상수를 유지할 수가 있었다.
“호오. 내가 누군지 알고 앞으로 나서는 건가?”
자간이 흥미롭다는 듯이 릴리트를 훑어보며 말했다.
“마왕 제61위 자간이지.”
“내가 누군지 알면서도 앞으로 나섰다고? 거기에 말투까지 건방져. 고작 몽마 따위에게 이런 취급을 받다니. 내가 너무 쉰 건가? 아니면 네년이 정신이 나간 건가?”
자간의 협박이 섞인 말에도 릴리트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냥 네가 그 정도 주제가 안 된다는 말이지.”
자신의 말을 날카롭게 받아칠 만큼 나름 여유까지 보이는 릴리트의 태도에, 자간의 입가에 살기 어린 미소가 그려졌다.
“크크크. 좋아. 아주 좋아. 크크크크큭!”
요란한 웃음소리가 자간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뚝.
이윽고 웃음을 멈춘 자간의 몸에서 강력한 마기와 함께 살기가 피어올랐다.
마왕 중에서도 흉포한 것으로 유명한 자간의 눈이 완벽하게 맛이 가기 시작했다.
온몸으로 느껴지는 자간의 힘에 릴리트의 눈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자신을 제외하고는 자간의 일합도 받아내기 힘들어 앞으로 나서기는 했지만, 릴리트 역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면 최악의 경우까지 미리 상정해서 움직여야만 했다.
설마하면서 계획을 짜면서도, 절대로 사용하지 않기를 바랐던 계획들이다.
‘바알의 준비가 이 정도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잘못이야.’
바알에게 붙은 여러 가지 칭호들.
그중에서도 ‘마계 최초의 군주’라는 칭호를 너무 가볍게 생각했다.
최초의 군주라는 것은, 그 누구보다는 많은 것을 경험해 봤다는 말과 다름이 없다.
다른 이들보다 적어도 한 발은 더 먼저 미지를 밟는다는 말이다.
바알의 저력이 더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지 못한 것이 작금의 가장 큰 패인 중 하나.
‘이렇게 된 이상 나중이라도 기약을 해야만 해.’
아바돈이 올 때까지 최대한 전력을 보존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릴리트의 머리를 스쳤다.
애초에 아바돈이 바알을 쓰러트릴 수 있다는 확신이 없으면 시작할 수도 없는 전쟁이다.
그러나 숫자에는 장사가 없는 법.
아바돈이 바알과 자웅을 겨룰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는, 여기서 병력을 많이 잃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다들 절대로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무조건 방어에 치중해! 아바돈님이 오실 때까지 버틴다!”
“예!”
“옛! 알겠습니다!”
릴리트의 명령을 들은 부하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서로의 등을 보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간은 다른 이들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고 오직 당돌하게 자신을 도발한 릴리트에게 다가갔다.
릴리트는 자간이 더욱 가까이 오기 전에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자간과 손속을 섞기 시작하면 명령을 내릴 여유가 없을 것은 자명한 상황이다.
“그리고 혹시나! 아주 혹시나 여유가 되면 내성 문을 연다!”
릴리트의 명령이 모두 끝났다.
그사이에 자간은 손을 뻗으면 무기가 닿을 만한 거리까지 접근해 있었다.
“아바돈이라……. 믿고 있는 놈이 그놈인가 보군. 감히 바알님에게 도전장을 던진 멍청한 놈이 얼마나 멍청한 놈인지 얼굴이나 보고 싶은데 말이야. 네년을 죽이지 않고 가지고 놀고 있으면 구하러 오려나?”
“글쎄? 아바돈님이 오시면 죽을 텐데, 괜찮겠어?”
자간은 릴리트의 말에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릴리트의 당돌한 도발을 진심으로 재미있어 하는 것 같았다.
자간이 릴리트와 시선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안 될 게 있나. 혼자서는 마왕이 될 자신이 없어서 이렇게 오합지졸을 잔뜩 끌고 온 놈을.”
“흥. 그런 이유가 아니라는 것을 아바돈님이 오시면 알게 될 것이다. 이 멍청한 놈아.”
릴리트는 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한발도 물러나지 않으며, 자간을 도발했다.
계속해서 말을 걸어 조금의 시간이라도 더 벌어야 했다.
아바돈이 도착할 시간이나, 외성에서 내성으로 치고 들어올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벌어줘야만 하니까 말이다.
‘온다!’
자간이 바닥을 박차고 거리를 좁혀 왔다.
주인의 성정만큼이나 난폭한 마기가 흉흉한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쐐애액!
자간의 검이 릴리트의 급소를 노리고 바로 들어왔다.
가지고 놀겠다던 말과는 다른 살검.
릴리트는 다급하게 자신의 세검을 치켜들었다.
쾅―!
‘역시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아.’
정면으로 정직하게 들어오는 공격을 막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다른 기교 없이 힘으로만 밀고 들어오는 자간의 공격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릴리트도 반격을 해보려 했지만, 자간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흉포한 마기가 움직임을 방해하고 있었다.
반격은 고사하고, 제대로 공격을 막아내는 것도 힘들게 느껴졌다.
텅― 터엉!
한 번, 두 번.
도합 총 세 번의 충돌로 릴리트는 깨달았다.
자간이 스스로 내뱉은 말처럼 전력을 다하지 않고 자신을 가지고 놀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공격에 위력이 있지만, 단지 그뿐이다.
자간의 검에는 무조건 릴리트를 죽이겠다는 필사의 각오가 느껴지지 않았다.
어디 얼마나 막아낼 수 있는지 확인해 보겠다는 가벼운 태도.
릴리트보다 몇 수나 위에 있는 무력이기에 부릴 수 있는 자만이었다.
쉐엑!
“하앗!”
릴리트는 힘들게 뛰어올라 자간의 공격을 피해냈다.
쉴 새 없이 내쳐오는 공격에 점차 호흡은 가빠지고, 피할 공간은 줄어들고 있었다.
‘아, 실수다…….’
공중으로 떠오른 것이 실수였다.
공중에 떠오른 이상 릴리트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말은.
땅에 발을 딛기 전까지는 자간의 공격을 피할 수 없다는 말과 동일했다.
촤악―!
그런 생각을 대변하는 것처럼, 자간의 공격을 피하고 또 피하던 릴리트의 어깨가 갈라지며 결국 피가 솟구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