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
50. 바알의 성 (4)
콰앙―!
“제대로 하고 있는 것 같네.”
세은의 뒤로 오세와 키메리에스가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꽤 거리가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소리는 선명하게 복도를 타고 들려왔다.
이 정도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다른 놈들이 여기로 상황을 확인하러 오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하지만 오히려 오지 않는 것이 세은에게는 더 도움이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세은은 조금 더 속도를 올렸다.
괜한 방해꾼들을 더 마주치기 전에 바로 바알에게로 가야만 했다.
쾅― 콰아앙―
오세와 키메리에스의 전투 소리는 그치기는커녕 점점 격렬하게 변해갔다.
오히려 세은과 싸울 때보다 더 격렬한 것 같았다.
비슷한 수준의 마왕끼리의 전투이니 더욱 그러했다.
“휴우…….”
세은은 점점 격렬해지는 소리를 뒤로하고 계속 앞을 향해 달렸다.
복도는 꽤 길었다.
길은 평탄하지 않고 경사가 져서 천천히 위로 올라가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기다란 복도는 끝날 듯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졌다.
“언제까지 가야 하는 거야?”
세은은 짐짓 입 밖으로 불만을 내뱉었다.
마왕 둘을 상대하는 일이 쉬웠을 리가 없다.
제대로 된 정타를 넣은 것도 몇 번 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전투가 힘과 힘의 충돌.
그 충돌에서 세은이 이득을 봤다지만, 아무런 충격을 입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회복이 필요했다.
그리고 긴 복도는 세은이 숨을 고를 시간을 충분히 만들어주고 있었다.
“확실히 길을 잘못 든 건 아닌 것 같네.”
점점 짙어지는 마기, 사방이 마기로 가득 찬 수조 같았다.
마치 교단의 중심으로 다가갈수록 신성력이 짙어지는 것과 비슷한 상황.
이곳이 바알의 본성.
이렇게 깊숙이 들어올 일이 없으니 모든 상황이 처음이다.
진하다 못해 농후하다고 표현할 수 있는 마기는 오히려 순수하게 느껴졌다.
불순물이 없이 진득하게 걸러진 마기는 다른 기운이 전혀 침습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여태까지 세은이 느꼈던 다른 마기들과는 달랐다.
사용자나 환경에 따라 영향을 받은 마기들은 아무리 마왕들의 마기라고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좋은 상황은 아닌데…….”
복도를 따라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사방을 채운 마기는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꾸욱.
세은의 두 손이 달의 검과 별의 검을 굳게 잡았다.
전투 소리가 점점 멀어질수록, 이질적인 느낌이 세은의 감각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복도는 계속해서 커다란 원을 그리고 위로 향하고 있었다.
분명히 릴리트가 짚어준 접객실은 위에 있지 않았다.
하지만 세은의 감각은 이 방향이 맞다고 알려주고 있었다.
“여긴가?”
세은은 완만하게 휘어지는 복도에서 계속 발을 옮겼다.
뚜벅― 뚜벅―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없을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어떤 것도 없었다.
오세와 키메리에스의 전투 소리가 사라진 다음부터는 오직 적막만이 세은과 함께하고 있었다.
“뭐지……?”
세은이 도착한 곳은 성 꼭대기에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굳게 닫힌 문 안에서는 끈적한 마기가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치 더 이상 담아두지 못해 절로 흘러나오는 것 같은 느낌.
세은은 저도 모르게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문을 열었다.
끼익―
“…….”
대체 무슨 짓을 하던 장소였을까.
문의 안쪽에는 생각보다 널찍한 공간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은 예상대로 순수한 마기가 가득 차 있었다.
솨아아아―
문이 열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마기들이 밖으로 쏟아져 나가기 시작했다.
지금 보니 문도 일반적인 철문이 아니다.
특수한 금속으로 이루어진 문이었다.
‘아이무르가?’
그리고 세은의 눈에 익숙한 하나의 곤봉이 들어왔다.
방의 중앙에 우뚝 서 있는 곤봉.
바로 바알의 애병 중 하나인 아이무르였다.
“누구지?”
아이무르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동시에 느릿느릿하게 일어나는 하나의 그림자.
세은의 시선이 그림자로 향했다.
“오……. 매우 익숙한 얼굴인데?”
“그러게, 오랜만이네.”
머리 위에 올라가 있는 화려한 금관.
그리고 한 손에는 또 다른 마법의 곤봉인 야그루시가 들려 있다.
바알.
자타가 공인하는 마계의 일인자가 이곳에 있었다.
“여기서 뭘 하고 있었지?”
세은이 물었다.
바알의 얼굴에 가벼운 미소가 차올랐다.
“씨앗을 발아시킬 물을 모으고 있었지.”
바알은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말해줘도 모를 것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감 때문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내가 질문할 차례인가?”
바알이 가볍게 목을 뒤틀었다.
너무나도 단순한 동작이다.
그러나 그 작은 동작이 당장에라도 물어뜯으러 달려들 것 같은 맹수를 대하는 듯한 팽팽한 긴장감을 주었다.
여유롭지만 빈틈이 없는 얼굴.
바알은 목을 여러 번 뒤틀고는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 성에는 대체 어떻게 들어온 거지?”
바알의 질문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분명히 죽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말이야.”
세은이 지구로 돌아오기 전의 일이다.
바알의 정보원이 빈틈없이 퍼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줄 수 있는 말이었다.
의외의 소득에 세은의 눈이 반짝였다.
“어디서 그런 소리를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정보력이 형편이 없는데그래?”
“하하하하. 그럴 수도 있지. 내 눈앞에 네가 있는 것을 보니까 말이야.”
세은의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바알이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한참을 그렇게 웃던 바알이 순간 웃음을 뚝 멈췄다.
“……그런데 말이야.”
바알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낮아졌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 듣지 못한 것 같은데?”
“뭐?”
“내 성에 어떻게 들어왔는지 말이야.”
“그냥 들어오니까 들여보내 주던데?”
여전히 세은의 태도는 천연덕스러웠다.
피식―
그런 세은의 대답에 바알이 다시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지랄은 그만하고 제대로 얘기를 해보지.”
바알의 말과 동시에 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무겁게 가라앉는다.
“아무래도 상황을 봐서는 밖의 소란과 네놈이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말이야.”
“뭐,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지.”
세은은 여전히 얼굴의 여유를 지우지 않으며 대답했다.
그러나 여유만만한 웃음과는 달리 실내를 감싸는 긴장은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마치 끝까지 당겨서 언제든지 놓을 수 있는 활시위와 같은 상황.
“흐음…… 아무리 그래도 마족 놈들이 여신의 개를 따랐을 리는 없고, 아마도 네놈이 여기에 참가를 한 것이라고 보면 되겠군.”
“글쎄?”
바알의 추리는 거의 진실에 근접했다.
그렇다고 세은이 그 사실을 확인시켜 줄 필요는 없는 일.
애매모호한 세은의 대답에 바알이 싱긋 웃음을 머금었다.
“뭐, 어차피 상관없어. 잡아놓고 물어보며 될 테니까.”
“내가 할 말을 대신 해주니까 수고를 더네.”
세은이 그대로 바알의 말을 받아쳤다.
“안 그래도 방금 네가 한 말 중에 궁금한 게 있거든.”
씨앗을 발아시킨다.
아무래도 체한을 순식간에 마족으로 만들었던 그 일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거기에 세은이 죽었던 것을 아는, 차원을 넘나드는 정보력까지.
바알을 잡아서 물어볼 것이 갑자기 산더미처럼 생겼다.
“어차피 피차 궁금한 점이 있다고 해도 알려줄 생각은 없으니까 말이야.”
세은의 허리춤에서 두 자루의 검이 뽑혀 나왔다.
어차피 말로는 해결을 볼 수 없는 상대다.
그리고 바알 역시 세은과 마찬가지인 듯했다.
“알려준다고 해도 서로 사양하지 않겠어?”
바알의 발이 천천히 앞으로 이동했다.
꽈악.
그리고는 중앙에 꼿꼿하게 서 있던 아이무르를 집어 들었다.
타앗―
동시에 세은의 발이 땅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쩌엉―!
달의 검과 아이무르가 부딪힌 것은 순간이었다.
바알이 어느새 아이무르를 휘두르며 세은의 공격을 받아냈다.
탓.
곧바로 세은의 몸이 바알의 옆을 휘돌았다.
단숨에 옆으로 이동한 세은의 몸이 바알의 측면을 노리고 파고들었다.
채애앵!
바알은 연속되는 세은의 공격에 쉽게 움직임을 가져가지 못했다.
그러나 방어에 집중하면서도 전혀 밀리는 기색이 아니었다.
전혀 공격을 허용하지 않으니 밀릴 이유가 없다.
오히려 세은의 공격이 절묘하게 막히는 일이 계속 발생했다.
“하압!”
그러나 방어가 계속되면 빈틈이 보이지 않을 리가 없다.
세은은 빈틈이 보일 때마다 계속 공격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것도 그 순간뿐.
잠깐 보이는 빈틈은 순식간에 메워지기 일쑤였다.
공격을 시도해도 소용이 없다.
“이게 대체 뭐지?”
터엉!
공격을 막아내는 와중에도 바알이 입을 열어 세은을 조롱했다.
“예전보다 더욱 약해진 것 같은데 말이야.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하하하.”
세은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사실과 하나 다른 것 없는 말에 울컥해서 무리할 필요가 없었다.
세은은 계속해서 차분히 바알을 몰아붙여 갔다.
키이잉―!
이번에도 역시 세은의 공격이 막혔다.
그러나 한 번 더.
별의 검이 그대로 연환을 이어나갔다.
바알의 방어는 놀라울 정도로, 단 한 번의 유효한 공격도 허용하지 않았다.
검과 곤봉의 충돌도 최소한으로 만드는 신기다.
서로에게 충격이 쌓일 틈도 주지 않고 가볍게 공격을 흘리는 기술을 발휘했다.
“이 정도라면 실망이군. 복수할 날만을 기다려 온 보람을 느끼지 못할 것 같아.”
또 다시 쏟아지는 바알의 조롱.
세은의 생각과 집중이 전투로 점점 좁혀진다.
모든 정신을 바알과의 싸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상하리만큼 이 자리에서 움직이지를 않는데?’
세은의 눈이 번쩍였다.
바알은 여유 있게 방어를 하는 듯 보이지만, 그 발은 사방 일 미터를 벗어나지 않았다.
정말로 이 정도로 여유가 있다면 벌써 앞으로 치고 나와 공세로 전환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기에는 바닥에 뿌리라도 박은 것처럼 서 있는 바알이었다.
지금 서 있는 자리.
꼭 거기에 서 있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는 뜻이었다.
‘한번 확인해 봐야겠군.’
세은은 공세를 더욱 강화했다.
바알이 여기서 나오지 않는 것이 사실이라면, 밖으로 나오게 만들면 된다.
빈틈을 노리던 방금과는 달리 앞에서 힘으로 밀어붙이는 공격으로 전환했다.
채앵, 챙―
빈틈을 노려서 한 번에 끝내려던 방금 전과는 다르게 엄청난 기세가 느껴졌다.
점점 더 빨라지고 강해지는 검격의 흐름에 바알의 방어도 점점 다급해지고 있었다.
같은 곳을 때리고 또 때린다.
제아무리 바알이라도 발을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상황에서 모든 공격을 해소하는 것은 무리였다.
세은의 공격에 맞서는 바알의 몸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난무하는 검격 뒤로 바알의 입가가 조금씩 일그러졌다.
그 모습을 본 세은의 공격이 더욱 매서워진다.
텅― 터엉―
가볍게 흘러 넘기는 소리가 나던 처음과는 달리, 점점 검과 곤봉의 충돌음이 강해지고 있었다.